무협의 오락코드 – 『서울협객전』[기획회의 250호]

!@#… 지면으로 인한 저평가는 슬프다. 특히 한때 오히려 고평가를 나을만한 지면이었다면.

 

무협의 오락코드 – 『서울협객전』

김낙호(만화연구가)

대중문화의 특정 인기 장르에 대한 편견은 결코 드문 것이 아니다. 아니 일각에서는 아예 장르라는 말이 접두어로 붙으면 격을 여러 단계 낮춰 인식하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장르소설’ 이라든지). 이런 자세가 장르의 뻔한 규칙을 따르기 때문에 새로운 예술적 성취가 없으니 얕잡아 봐도 된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 훨씬 논리가 덜 갖춰진 어렴풋한 우월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생활의 다양한 층위 만큼이나 문화 역시 여러 층위를 총체적으로 볼 것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심히 한탄스럽다. 장르물이라는 것은 하나의 틀일 뿐, 그 안에 담기는 것은 사실 예술적 성취를 이룰 수도 있고(히치콕을 재발견한 카이에뒤시네마를 기억하자), 사회적 문제의식을 던져넣을 수도 있다. 다만 장르물은 특성상 대중적 오락기능에 더 우선적인 초점을 두고 있을 따름이다. 아니 애초부터, 대중적 오락기능 자체에만 집중하면 또 어떤가. 중요한 것은 애초에 목표한 바가 명확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완성도다.

그런 의미에서 늘상 하위문화로 취급받기 십상인 ‘무협물’은 무척 억울하다. 오죽하면 김용의 걸작 『사조영웅전』이 『영웅문 제1부』이라는 제목으로 국내 출간되었을 때, 대하역사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뭇 세간의 인식을 속여야 했을까. 하지만 무협물의 허황된 액션을 폄하하는 이들은 서유기나 봉신연의 같은 기서의 고전들에 학을 떼어야 마땅할 것이며, 고작 줄거리가 맨날 쌈박질하는 것 밖에 없다고 하는 이들은 맨날 정치음모와 전쟁질하는 것 밖에 없는 삼국지가 필독서로 꼽히는 세태를 한탄해야 할 것이다. 무협물은 단순한 ‘무예’ 자랑이 아니라, ‘협’이라는 가치를 장르코드로서 같이 다루고 있기에 성립된다. 고수들이 무술을 겨룬다는 장르적 특성 속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철학적 가치관을 지닌 일파들이 서로 우열을 가르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과응보와 협의 가치를 제대로 따를 때 주인공이 시련을 거치며 강자로 성장하는지 빼곡이 담아낸다. 물론 완성도가 높은 무협물과 낮은 무협물의 차이는 당연히 있어서, 얼마나 설득력 있는 세계관을 구축하고 주인공의 성장과정에 이입시키는지에 따라서 고전급 걸작과 나무 낭비가 갈라진다.

『서울협객전』(신영우 / 서울문화사 / 12권 발매중)은 현대적 코미디와 격투물을 통한 무협의 재해석이자, 동시에 핵심 부분은 지극히 전통적인 무협물인 작품이다. 사실 현대사회 속에 사실은 은둔해서 무협의 길을 계속 이어온 이들이 결투를 벌인다는 설정은 은근히 이미 여러 장르에서 선보인 바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현대 속 은둔 무협세계와 사극판타지 속의 무협을 같이 엮어버린다. 줄거리는 과거 중국 무협 세계의 절정고수이자 악인인 당무용이 정파 고수들의 일제공격으로 무공을 빼앗긴 상태에서 우연의 조화로 현대 서울로 시간이동하면서 시작한다. 주인공 장공은 어설픈 실력으로 무술도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재능 없는 그 제자와 함께 살고 있는데, 약간 덜떨어졌다 느껴질 정도로 지나치게 착하고 남을 도와주는 성격이다. 장공은 약골이 되어 현대에 떨어진 당무용을 중국 불법입국 노숙자로 착각하고 돕겠다며 집으로 데리고 온다. 아무것도 모르는 장공을 공격하려다가 오히려 자신의 내공을 흡수당한 당무용은 그가 사실 무예를 익히면 절세고수가 될 자질을 지닌 체질임을 알게 되는데, 자기 무공을 회복하기 위해 기혈을 뚫어줄 자로서 장공을 환상의 비급 비화귀전으로 억지로 수련시키기 시작한다. 동시에 바로 그 환상의 비급을 찾아다니는 현대의 지하 무림조직과 그것을 막으려는 은둔고수들이 대결을 벌이고, 이야기는 점점 더 큰 소동으로 빠져든다. 한눈에 봐도 조폭물, 소년격투물, 정통무협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버무리는 개그코드가 한꺼번에 섞이면서 독특한 재미를 주고 있음을 눈치채시리라.

『서울협객전』이 이어받고 있는 무협물 코드는 그렇듯 김용 스타일의 무협소설이다. 만화쪽에서 계보를 찾자면 80년대 한국에서 이재학의 만화에서 집중적으로 발달한 원한과 복수, 허무주의를 계승하지 않고, 90년대 중반부터 『열혈강호』등으로 히트친 캐릭터 중심 코믹무협과도 맥락이 달라 보인다. 오히려 만화 쪽에서 얻어온 것은 작가의 원래 장기이자 이전 히트작 『키드갱』에서 충분히 선보인 바 있는 조폭코미디 코드다. 하지만 작품의 근간에 흐르는 핵심 코드는 정통무협의 그것이다. 바보 같고 성품이 착한 ‘협’의 기본을 이미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 사실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설정이 있다. 그리고 좀 더 현실적이고 영악하며 마찬가지로 큰 잠재력을 지닌 라이벌이 성장해 필연적 충돌을 예고하는 구도도 있다. 비급을 둘러싼 복잡하고 거대한 세력들의 암투가 있다. 여러 소중한 만남과 헤어짐의 인간사가 있고, 적대세력들에게 좌절당했을 때 결정적 순간에 나타나 성장을 시켜주는 기연이 있다. 그리고 모든 대결과 결투는 뚜렷한 개성을 지닌 여러 문파 사이에서 뚜렷한 모습을 지니며 이루어진다. 김용 작가의 대표작들을 통해서 구축된 정통무협물의 주요 요소들이 핏속에 흐르는 셈이다.

덕분에 경박한 코미디 속에도 종종 굵직한 무게감이 있고, 여러 생명이 무고하게 살상당하는 잔혹한 상황 속에서도 결국은 순리대로 권선징악이 이루어질 듯한 낙천성이 느껴진다. 또한 힘의 의미에 대한 캐릭터들의 고민들도 무협물의 매력을 듬뿍 살려낸다. 순한 비폭력주의자로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련을 하다 보니 점점 무공이 강해지는 주인공의 갈등, 이미 무예가 특출난 기능을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아직도 은둔해가면서 무공을 전수하는 처지의 은둔고수들의 고민, 오로지 더 큰 힘만을 추구하다가 제정신을 잃는 인물들의 운명이 촘촘히 교차한다. 이야기의 완급을 조절하는 능력도 좋은 편이어서, 진지한 결투에서 김빠지는 코미디로 전환되는 페이스가 절묘하다. 나아가 각종 무게를 잡는 무협의 중후함과 곧바로 대비되는 빈곤 생활의 현실감이 주는 유머도 상당하다. 이 정도 미덕을 계속 보여줄 수 있다면, 악의 세력이 아직 매력이 부족하다든지 장공과 당무용의 관계에서 다소 반복적 패턴의 슬랩스틱 개그가 남용된다든지 하는 약점들도 가볍게 상쇄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서울협객전』은 운이 좋은 작품은 아니다. 시기를 좀 더 일찍 타고 났더라면 『용비불패』등의 ‘신무협’만화 히트작들과 함께 큰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 법 하고, 하다못해 현재의 연재지면이 무협물 코드를 즐기는 2-30대 남자 일반을 포괄하는 좀 더 폭넓은 대중적 파급력을 지녔더라면(소년만화지 격주간 ‘점프’에서 연재중)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재 한 회 한 회를 필살기 대결 한 합으로 적당히 떼우고 미적거리는 식으로 망가지지 않고 착실하게 줄거리를 쌓아가는 뚝심이 그저 반갑다. 단행본이 원래 이 작품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무협물 애호층에게 발굴되고, 연재 지면 역시 더 합리적인 쪽으로 조정되어 보다 작품의 매력이 제대로 퍼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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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서울 협객전 12
신영우 지음/서울문화사(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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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thoughts on “무협의 오락코드 – 『서울협객전』[기획회의 250호]

Comments


  1. 시기와 장소를 잘못 만나서 잘 알려지지 않은 현재의 수작이죠. 아니, 신영우 씨 작품 대부분이 그런 듯합니다. 키드 갱도 드라마화가 될 만큼 스토리가 좋은 작품이지만 연재지가 연속 폐간되는 (쎈, 코믹스투데이, 현재는 삼양에서 단행본으로만 발매 중인데…2년 째 신간 없음) 수난을 겪었고, 더블 캐스팅도 연재지가 폐간되고 흐지부지하게 마무리가 나버렸죠.

    좋은 작가가 난세를 만나서 피를 보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2. !@#… Skyjet님/ 그런데 이 리뷰조차 시기(지금!)와 장소(캡콜닷넷!)를 잘못 만나서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비극이…;;;

  3. 어제 서점에서 처음으로 기획회의 를 들어봤는데, 책이 읽기 좋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