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추억이라는 디지털의 기억 [웹진 두루누리 / 201111]

!@#… 아날로그를 추억해보자는 컨셉의 특집코너에 들어간 꼭지. 살짝 민감할 이야기도 넣을락말락하다가 안 넣은 것이 묘미. 요는, 단절보다 (이리저리 달라진) 연속으로 파악하자는 것.

 

아날로그 추억이라는 디지털의 기억

김낙호(미디어 연구가)

원래의 기술적인 의미와는 종종 무관하게, 디지털이라는 말은 어떤 기계적이고 효율적인 무언가를 상기하기 위해, 아날로그라는 말은 인간적이고 따뜻한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 동원되곤 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원래 우리의 현대 생활은 꽤 오래전부터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함께 했다.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어떻게 우리의 일상적 아날로그 생활 속에 흡수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지가 관건일 따름이다.

그런 측면을 가장 단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90년대 중후반, 디지털 매체 기술이 급속하게 일상에 보급되던 시절의 기억들이다. PC통신 나우누리의 등장으로 하이텔-천리안 또한 경쟁적으로 대중 서비스를 확장하였으며, 웹이라는 광활한 새로운 세계까지 더해지며 각 가정에는 전화요금 걱정이 늘었다. 의사 등 일부 전문직의 전유물이었던 무선호출기 ‘삐삐’가 일상용품으로 자리를 잡았고, 좀 더 첨단을 표방하는 이들은 허망하게 무너진 발신전용 휴대폰인 시티폰을 거쳐 “PCS” 휴대폰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그 와중에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는 것에 특화된 013 서비스도 등장했다가 망했는데, 정작 오늘날 스마트폰의 시대에 와서는 다시금 음성통화보다 문자메시지가 더 많이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이렇게 밀려들어온 디지털 기술은 세상을 하루아침에 뒤엎기보다는, 원래의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생활의 자연스러운 확장에 가까웠다. PC통신의 온라인 동호회들은 이전부터 취미/관심사 기반 동아리들이 결성될 때 두곤 했던 동아리방의 온라인 버전이었다. 채팅실의 네티켓 개념은 모르는 이들이 처음 카페에서 소개팅하듯 엄격하게 짜여졌다. 좋은 거래도 사기 사례도 있는 온라인 장터는 신문지면의 중고 거래 광고의 진화형이었다.

온라인 상에서 불특정 다수가 뜻을 모아 광장에서 항의 시위를 하는 방식 또한 PC통신 시절에 이미 확립된 것인데, 그것도 대학가에 대자보를 붙여 사람을 모으는 것과 비슷했다. 삐삐와 휴대폰은 특정 공간에 묶이지 않고 좀 더 언제 어디서나 서로를 호출해낼 수 있다는 변화가 있었지만 결국은 전화 통화의 진화였다.

기술의 이런 실제 사용과 달리, 이미지로서 만큼은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는 생활을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로 간주하려는 모습 또한 낯설지 않다. [접속], [후아유] 같은 영화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의 정체성 분리를 참신한 소재로 포장하고, 그룹 015B는 ‘네티즌’을 세기말의 꽃 컴퓨터 안에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비꼬며 노래했다. 그런 영화들의 상상과 달리 원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회적 장면에서 여러 가지 “무대 인격”(사회학자 고프만의 개념)을 내보이며, 그런 노래에서 묘사하는 세상과 달리 유저는 단말기 너머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것이었다. 하기야 산업 부처들과 각종 민간 기업들이야말로 디지털로 열릴 신세계를 홍보한 일등공신들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날로그 생활에 새로운 디지털을 수용하던 가장 즐거운 추억은, 역시 기존의 활동을 좀 더 잘 할 수 있던 일화들이다. 전국에 사용자가 있는 하이텔 나우누리의 만화동호회이기에, 좀 더 특수한 취향의 작품들에 대해서도 같이 대화를 나누고 즐길 사람을 더 쉽게 만났다. 큰 온라인 모임은 당연하다는 듯 오프모임, 즉 물리적 공간에서 서로 실제 얼굴을 보는 행사를 개최했다. 상영회든 야유회든 락밴드 결성이든 말이다.

토론방에는 동네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들보다 더 논리와 설득력이 뛰어난 이들, 한심한 이들이 더욱 활발하게 모여들었다. ‘참세상’ 같은 독립 PC통신서비스를 통해 정치적 진보성향 강한 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함께 꿈꾸며 논의했다. 비록 언제 어디서나 일터의 독촉이라든지 귀찮은 통신이 들어와서 고생이기도 하지만, 삐삐와 휴대폰은 연인들 사이의 염장을 매일 24시간으로 확대시켰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생활에 받아들인 만큼씩, 사람들이 소통하고 사회에서 움직임이 만들어지는 방식이 꽤 많이 바뀌어 나갔다.

디지털 기술을 아날로그적 사용으로 받아들인 이런 추억들은, 신기술에 빨리 적응해서 선진국으로 거듭나자는 식의 발전논리나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 있다는 위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연속선에서 수용될 때 제대로 정착할 수 있었다. 기존의 것을 ‘아날로그스럽게’ 보이게 만든 그 다음 기술들도 그랬다. 전용선과 웹이 온라인통신의 기본이 되고 휴대폰에 이런저런 기능들이 자꾸 추가되어갔다.

하지만 웹 동호회와 인터넷매체들은 다시금 PC통신에서 성립된 온라인 문화의 연장선에 있었다. 나우누리 유머란의 모습은 디씨갤러리와 웃긴대학으로 진화했다. 이글루스 블로거들이 각자 1인매체와 덧글로 대화하는 내용들은 하이텔 토론방처럼 때로는 치열하고 때로는 저열하게 펼쳐졌다.여전히 일각에서는 정보통신기술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사회진보를 위해 사용하고자 고민한다 – 다만 이제는 PC통신 CUG가 아니라, 위키와 뉴스 포털로 초점이 바뀌었다.

오늘날 한창 부각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 개념이든 그 뒤에 올 무엇인가든, 기존 생활의 자연스러운 확장으로 끌어들일 때 온전히 새로운 기술의 경이와 가능성이 흡수되며 문화가 되고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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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통신위원회 웹진 월간 ‘두루누리’ 게재.)

PS. 이런 류의 글을 쓸 때, 한국인터넷 사이버역사박물관 콘텐츠 제작에 참여하면서 모은 내용들이 두고두고 도움이 되고 있다. 인력과 재원이 있던 그때 이런저런 자료들을 더 많이 모아둘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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