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한 현대 도술 활극 – 도사랜드 [기획회의 311호]

!@#… 승리의 귀장군.

 

태평한 현대 도술 활극 – [도사랜드]

김낙호(만화연구가)

좋은 이야기는 늘 공감과 파격의 저울질이다. 현실성을 통해서 독자들이 이입 가능하도록 해야 몰입하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현실의 비루함 이상의 파격을 주어야 굳이 현실 말고 그 이야기를 즐겨야할만한 이유가 생긴다. 저울질을 하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며, 그 중 소수는 성공하고 다수는 실패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런데 그 중 한 가지 특히 만화 중심의 대중서사문화에서 널리 발달한 장르규칙 가운데 하나는, 신화적으로 엄청난 존재들이 사실은 일상적으로 우리 현대 사회에 섞여 살고 있다는 것이다. 초월적 능력, 신화적 스케일의 세계관 등이 파격적 상상력을 부여하고, 그런 이들이 우리들과 다를 바 없는 사회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일상성이 공감의 요소를 공략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알바 뛰면서 살아가다가 여차하면 날아오르는 슈퍼히어로들, 지구를 침략하러 내려왔다가 가정집에 눌러 살게 된 외계인들, 일상적 학교의 일상적 여학생이 사실은 우주의 구현화 구심점이라든지 상상력을 발휘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런데 정말 성공적인 조합을 마련하려면 단순한 세밀함과는 다른, 집요한 구석이 필요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해온 이것도 사실은 그런 엄청난 것의 일부였고 저것도 사실은 연관된 것이었다는 식의 뻔뻔한 음모론, 그리고 그런 해석이 너무 진지하기보다는 작품 내적인 현실성과 작품 외적인 허풍 둘 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해낸다면, 세계관 설명하느라 바쁜 설명체 작품이 아니라 그 위에 쾌활한 모험활극을 얹어서 훌륭한 장르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도사랜드](이원식, 두엽 / 발해북스 / 1권 발간중)는 도사와 신선들이 사는 현대사회의 활극이다. 길거리에서 “기나 도를 아십니까” 부르는 이들이 친숙한 한국사회에서 그런 상상력을 최초로 발휘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고 집요하게 그런 세계관을 그려내는 솜씨에 있어서 독보적 수준을 자랑한다. 이야기는 ‘사’자 들어가는 직업을 꿈꾸는 편의점 알바생 용운이 우연한 계기로 수백년 살아온 도사의 제자로 들어가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신선들과 요괴, 도깨비들의 싸움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 모험이다. 도인들은 도사와 지선, 천선으로 등급이 나뉘고 조직화 서열화 되어 있으며, 도깨비들은 인간사회에 함께 살며 큰 사업들을 하고 있는 세상이다. 그리고 그간 초월적 존재들도 박제되기보다는 시대와 함께 적당히 적응해왔기에, 도사의 부적은 닌텐도 게임패드를 연상시키고 동해 용왕은 반바지 티셔츠 슬리퍼를 신고 등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 있다. 여기에 머털도사부터 배추도사 무도사 같은 각종 추억의 작품 캐릭터들이 사실은 존재하고 있더라는 식으로 합쳐지며 갑갑하게 설정으로 압박하지 않으면서도 놀랍도록 철저한 세계가 만들어진다. 줄거리상에서 전개되는 각종 상황들도 오늘날 한국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을 확실하게 활용해준다. 세종대왕 동상과 충무공 동상이 도술의 힘으로 살아 움직이며 서로 무력 맞대결을 하는 즐거운 현장감을 따라올 수 있는 다른 작품들이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촘촘한 찬조출연과 유머러스한 현대화로 가득한 세계설정 위에 놓이는 것은 장르서사문화에서 바랄 법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의 종합선물세트다. 주인공 용운의 출생의 비범한 비밀과 신기한 수련을 통한 성장과정은 해리포터류의 모험성장을 연상시키며, 신선들의 서열과 세력간 다툼은 조직폭력물이나 기업물의 암투와 닿아있고, 각종 초월적 기술로 싸우는 내용들은 직선적인 격투물의 재미가 있다. 이 모든 것을 비빔밥처럼 섞어 넣는 것은 매력적인 주연 캐릭터들이다. 우선 가장 돋보이는 김도사는 겉으로는 젊은 청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 백년동안 살아오며 수련과 요괴 퇴치를 해온 진짜 도사다. 각종 도술에 능하며, 도술 수련에 포터블 게임기를 활용한다든지 현대적 요소들을 늘 가득 채워 넣는다. 하지만 선하고 열성적인 정의의 용사라기보다는, 적당히 태평하고 무책임한 성격이다. 점차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으며 성장하는 용운은 착하고 순박한 성격인데, 그 또한 보기보다 훨씬 적당히 태평하다. 갑자기 도인의 세계라는 엄청나게 이질적인 비현실적 상황에 처하며 초반에 잠시 당황하지만, 놀랍도록 문제없이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가면 갈수록, 이젠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다는 식으로 상황을 맞이하여 오히려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도사의 조수격인 (꼬리 하나를 빼앗긴) 구미호 빼길이도 귀여운 여우와 매력적 아가씨의 모습을 왔다갔다 하는 캐릭터인데, 김도사와 수백년 함께하며 산전수전 다 겪어서인지 그녀 또한 적잖게 태평하다. 용운을 지켜주는 역할인 귀장군(거북이 장군)은 다른 이들보다는 임무의식이 좀 더 투철하지만, 뭍에 올라와서 처음 먹어본 피자라는 음식에 사족을 못 쓴다. 주인공 팀이 하나같이 태평하다 보니, 현대사회 속 도인과 도깨비들 세계의 엄청난 사실들이 밝혀지고 각종 비밀들이 드러나는 순간에도 과장된 감정이 폭발하기보다는 “이왕 이렇게 된 것, 뭔가 해야겠군”식의 분위기가 조성된다. 세련된 깍쟁이 같은 쿨함이 아니라, 이런 식의 태평함에서 오는 쿨함이 이야기의 익숙한 요소들에 새로운 매력을 준다. 무엇보다 필요 이상으로 감정 잡느라 이야기 진행속도가 불필요하게 더디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 큰 장점이다.

태평함이라는 정서와 만날 때, 낙서체 같은 분방하고 삐뚤어진 선, 비례보다 느슨한 형상을 중시한 인체묘사 등이 빛을 발한다. 바로 그런 모습들이기에, 장면마다 민화적 해학과 만화적 캐릭터성이 함께 한다. 굳이 전통적 동양회화의 기법들을 적극 차용하겠다고 호언장담하지 않더라도, 골칫거리고 사악하지만 아예 파멸적이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부분이 있는 존재로서의 요괴와 도깨비들을 효과적으로 그려내다 보면 자연스레 해학적 느낌이 묻어난다. 비장한 히어로들이 아니라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낙천성이 깔려있는 이들의 생활을 시각적으로 풀어내기에, 꽉 찬 계산된 공간보다는 느슨한 여백이 생긴다. 동시에 구미호 빼길이나 귀장군의 매력에서 드러나듯, 현대 만화 취향문화의 기준으로 봐도 캐릭터 형상의 완성도가 뛰어나다(속칭 ‘모에도가 높다’).

[도사랜드]는 영화로 치자면 일류 블록버스터로 생각할 수 있을만한 골고루 완성도 높은 오락물이다. 빼어난 세계관을 풀어나가는 솜씨, 잘 묘사된 현대적 캐릭터들, 효과적 그림과 이야기 전개, 취향문화에 대한 풍부한 연상 등 뭐 하나 빠질 것 없다. 첫 부분에서 청년실업 같은 사회적 메시지도 건드릴 듯 했다가 결국 계속 연결되지 않아 아쉬운 점도 있지만 딱히 흠결은 아니다. 기나 도는 믿지 않지만, 기나 도를 다루는 좋은 작품의 재미는 얼마든지 믿게 해주는 작품이다.

도사랜드
이원식 지음, 두엽 그림/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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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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