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편리한 장치 -『일본인과 천황』[기획회의 071101]

!@#… capcold의 영원한 테마인, “with no power comes no responsibility”(영화 Clerks2에서 차용) 마인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신 좀 차리게 해주기 프로젝트™의 연장선 상에서 쓴 내용의 도서 리뷰.

무척 편리한 장치 -『일본인과 천황』

김낙호 (만화연구가)

마치 남한의 정치인이 북한의 공식 국호인 ‘북조선’이라는 용어를 쓰면 큰 홍역을 치루듯, 한국에서 일본의 왕을 그들의 용어인 천황이라고 부르는 것은 터부시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왕’이라고 하면 별다른 울림이 없지만, ‘천황’에게는 강제부역과 인권탄압의 고통을 겪은 현대사가 있으니까. 물론 천황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하늘의 직계손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식의 발상으로 세계 도처는 물론 한국의 건국신화에서도 사용하는 코드이고, 현대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고도 상징적 존재로서 군주를 두고 있는 입헌군주제 국가가 특별히 드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영국의 제국주의적 식민지배가 여왕의 이름보다는 대영제국 자본의 이익 논리에 입각해서 이루어진 것과 달리, 일본은 어째서인지 천황이라는 상징체를 모든 것의 중심에 놓고는 했다. 덕분에 천황과 천황제는 전체주의, 군국주의, 파시즘 등 일본식 극우 일반의 폐해를 논할 때 항상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핵심 개념이 되어 있다.

『일본인과 천황』(가리야 테츠 글, 슈가 사토 그림 / 김원식 옮김 / 길찾기)은 현대 일본사회의 여러 억압적 요소들의 근원으로 천황제를 꼽으며 집요하게 분석하는 만화다. 이 작품은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는 학습만화의 형식을 지니는데, 대학 축구부의 인기선수 주인공이 결승전 개회식에 국기에 대한 경례와 국가를 거부해서 물의를 일으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전범으로 처형당했는데도 총책임자인 천황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기에 항의의 표시를 한 것이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주인공과 친구들은 일본 사회의 여러 폐단들을 천황제의 잔재라는 맥락을 통해서 하나씩 발견해나간다. 물론 편리하게도 각각의 해당 주제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사람이 등장해서, 탐험이라기보다는 학습의 방식으로 주인공은 물론 독자들에게도 비교적 직접적으로 지식과 주장을 전달하고 있다.

작가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대단히 극명하다. 천황제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전체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도입된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사회로부터 이득을 보는 세력들이 그것을 마치 일본 문화의 오랜 전통이며 정수인 것처럼 포장함으로써 그 구조를 현대에까지도 일상생활 속에 공고하게 하고 있다는 것. 천황제라는 제도가 이대로 존속되는 한, 그 상태 역시 계속될 것. 그러니까, 천황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이다. 천황의 자리에 앉아있는 한 명의 인간을 어떻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를 규정해온 하나의 구성방식을 뒤엎기 위해서 그 핵심적 상징체를 없애버리자는 선언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 작품은 장면 한 칸 대사 한 문장을 낭비하지 않고 전력 질주한다. 하나라도 더 직접적인 폐해의 근거를 제시하기에 바쁘고, 현행 사회가 이 구습을 어떻게든 간직하기 위해 모순된 제도들을 만들어놓고 있다는 것을 전방위로 꼬집느라 바쁘다. 일본사회의 전체주의적 면모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제의식은 스토리작가의 유명 요리만화 『맛의 달인』에서도 간간히 제기된 바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주제에 도달하기 위한 소재의 흥미성 구축이나 만화적 스토리 문법, 특히 유머감각까지 과감하게 희생하면서까지 직접적으로 접근한다. 절실함이 다른 것이다.

확실히 천황제는 편리한 장치다. 천황이라는 최상위급 주체를 상정하고는, 큰 사회적 문제가 생길 경우 책임을 그쪽으로 돌리면 되는 것이다. “천황에게 복종했을 뿐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천황이 왜 책임을 지지 않느냐고 분노하는 것 역시, 어떻게 보자면 천황제의 논리에 빠져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여전히 미결인 훨씬 더 복잡한 책임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황이라는 개인이 전범으로서의 최고 책임자이자 상징체가 되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심지어 천황은 신의 자손이라는 캐릭터 설정이 되어있기에 그보다 한 단계 더 강력하기까지 해서, 사회적 책임의 도덕률로부터 불가침 영역으로 빠지기 까지 한다. 이런 책임 전가의 구도 속에서 몇 단계만 주고받다 보면, 어느 틈엔가 책임은 사라지고 만다. 천황은 개인이 아니라 천황으로 대변되는 일본이라는 커다란 개념이며, 책임의 도피처로서의 절대자다. 게다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들을 하나의 전체로 모아놓기 위한 구심점으로서 더할 나위 없다. 다른 어떤 인간들의 이익을 위해 나라는 개인의 이익을 희생한다면 거부감이 들지만, 하나의 상징, 이상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그렇지 않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온전히 자기 의지로 그러고 있다는 상상에 빠지기에도 용이하다.

작품이 제시하는 근거는 뚜렷하고, 비록 일본에서 현실화되기에는 힘들 주장이기는 해도 그 진중함은 다른 비판적 사고방식의 씨앗을 잉태시키기에 충분하다. 물론 작가들의 접근에도 한계는 있는데, 바로 천황제 자체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느라고 천황을 숭배하는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라는 요소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국민들이 현행 천황제에 복종함으로써, 또는 방치함으로써 얻고 있는 진짜 이득(의 느낌)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비교적 피상적인 수준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다. 즉 천황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해서는 강력하지만, 왜 천황제가 정작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각각의 성찰을 촉구하는 부분이 약한 것이다. 물론 독자들의 치부 자체를 직접 공격해서 설득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작업이지만, 실제 사회적 변화를 목표로 하는 서적으로서는 더욱 집중해야할 영역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일본의 천황제 논의가 한국에서 타산지석이 될 수 있는 진짜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읽고 나서 폭력적 전체주의 같은 천황제의 잔재가 한국의 일상성에 유입되어 남아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해봐야 사실 별반 소용없다. 개혁의 방식으로 이 작품은 천황제를 없애자고 목표를 제시하는데, 한국은 천황제라는 실제 상징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조국’이라는 상징체가 종종 애용되곤 하지만, 동시에 천황제 같은 순수한 상징체가 아니라 국적 소유자에게 국가로서 실제 사회보장 기능을 하는 기구이기도 하기 때문에 경우가 다르다. 그렇기에, 한국 사회가 이런 논의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부당한 구조로부터 스스로 이익 또는 이익의 느낌을 얻어내는 구조에 대한 자기 성찰으로 이어나갈 수 있어야만 한다.

책으로서 『일본인과 천황』은 정확한 자료가 번역과 출판의 과정에서 왜곡되거나 소실되지 않도록 쉽지 않은 작업을 한 역자와 출판사의 노력이 돋보인다. 다만 마케팅 포인트가 다소 애매할 수 밖에 없는데, 뚜렷하게 한국 사회에 대한 교훈이라고 호소하기에는 천황제의 특수성이 걸리고, 일본사회 내면 읽기라고 하기에는 책 자체의 사고방식이 일본의 주류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런 난점을 극복하고 꾸준히 책이 홍보되어 작품의 진짜 역할인 한국사회에 대한 더욱 깊은 논의의 촉발점이 되어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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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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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과 천황 – 카리야 테츠 지음, 슈가 사토 그림, 김원식 옮김/길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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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무척 편리한 장치 -『일본인과 천황』[기획회의 071101]

Comments


  1.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이거 꼭 사서 읽어보고 싶군요.
    개인적으로 (Larry Gonick류의) 학습만화를 좋아하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시면 학습만화추천 포스트 부탁드립니다.^^

  2. !@#… advantages님/ 그러게 말입니다. 가끔 연휴 추천만화 같은 원고를 의뢰받곤 하는데, 다음번에는 이왕이면 학습만화로 한번 주욱 깔아보면 좋겠군요.

  3. 천황제에 대해 궁금한 독자에게 추천이랄까요. 작가의 의견개입은 좀 많이 들어가 있지만 실제로 탄탄한 조사와 자료 위에 성립된 것이기에 일본연구하는, 예를 들어 인류학과나 사회학과 쪽으로 홍보하면 어떨까…는 생각도 듭니다. 이 작가 [맛의 달인] 때도 그렇지만 우익에게 칼맞을 것 같은 주장을 참 당당하게 외치는….그래도 [맛의 달인]의 단체 커플되기, 단체 출산하기는 제발 좀 참아줘….

  4. !@#… 시바우치님/ 인류/사회’학과’라면야, 아마 본문 내용에서 그림을 모두 빼고 설명 부분만 글로 적어서 보내주면 명저로 칭송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