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함의 아쉬움 – 『거짓말』[기획회의 071115]

!@#… 핵심은, 이 무크지 시리즈의 장점도 단점도 이 3권째에 이르면서 확고해졌다는 것.

소심함의 아쉬움 – 『거짓말』

김낙호(만화연구가)

거짓말이란 참 재미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어떤 의사소통 행위보다도, 내용 자체보다 그 말이 오가는 상황 맥락이 중요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이야기되는가에 따라서 엄청난 죄악이 되기도 하고 유쾌한 즐거움이 되기도 하며, 상대를 거꾸러트리는 무기가 되기도 하고 또는 따듯한 배려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은 단순히 말의 내용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말이 나오게 되는 상황, 즉 이야기의 맥락을 궁금하게 만들어 이끌어내는 효과가 있다. 때로 그것은 황우석 줄기세포 사기사건의 거짓말처럼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세계적 규모의 음모론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하고, 때로는 연애의 솔직하지 못한 애틋한 마음의 교차로를 나름대로 이해하게 만드는 쪽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거짓말은 대단한 이야기 거리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뻔한 이야기지만, ‘픽션’이라는 말 자체가 결국 지어낸 이야기, 즉 거짓말이라는 것 아니던가. 거짓말은 상상력과 이야기 같은 개념들과 찰떡궁합이다. 다만 독자들에게 그럴싸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감을 스스로 즐기는 쾌감을 주는가, 아니면 되도 않는 설득에 짜증이 발생하도록 만드는가에서 이야기 품질의 승부가 갈릴 따름이다.

만화 무크지 『거짓말』(토마 외 / 거북이북스)는 거짓말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여러 만화작가들이 만들어내는 짧은 이야기를 모은 무크지다. 만화 테마 무크지 시리즈의 세 번째 결과물인데, 이전의 테마 ‘밥’, ‘에로틱’에 비하면 한층 추상적인 주제를 선택하는 모험을 했다. 각각의 모음집이 전혀 다른 작품들을 담고 있고 또한 편집 지향점 역시 다름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은 이 시리즈의 장점과 단점들을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무크지로서 다양한 작가들의 시도에 지면을 마련해준다든지 하는 비장한 목적의식을 옆으로 치워두고 책 자체로서 감상을 할 때, 이 책은 통일된 방향성의 ‘컨셉 앨범’이라기보다는 ‘테마가 있는 모음집’에 가깝다. 『거짓말』의 첫 번째 장점은 주류/비주류, 중견/신인을 아우르는 다양한 작가군의 고르고 동등한 참여, 그리고 테마로 주어진 거짓말이라는 소재의 충실한 사용이다. 특히 다양한 화풍과 연출을 구사하되, 이미지의 실험 위주가 아니라 철저하게 이야기 만화로서의 독서경험에 강세를 두고 있는 것이 돋보인다. 물론 만화에 있어서 이미지의 중요함을 폄하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이야기지만, 독서경험을 리드하는 이야기와 그 경험 과정을 깊게 각인시키는 이미지의 사이에서 잡아야할 균형이라는 것은 필요하니까 말이다. 이런 류의 모음집은 작가 개인의 개성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미명하에 이야기로서의 재미를 버리고 작가 자신만 아는 애매한 정서적 세계에 함몰되는 위험에 항상 처해있기 마련인데, 총 13편 가운데 어떤 작품도 이야기로서 말이 되지 않는 작품이 없다.

그 속에서, 어떤 작품들은 상당히 뛰어난 이야기를 구사한다. 자연스럽게 사람 사이의 연애감정 속 거짓말을 스타일리쉬한 그림체와 평온한 이야기 속에 그려내는 토마의 ‘바보 같은 너’, 혹은 친숙하면서도 유쾌한 허풍으로 일관하는 김진태의 ‘J의 거짓말’, 여성 가족 사이의 해묵은 애증을 담담하지만 섬뜩하게 이야기하는 한혜연의 ‘Butterflies’ 같은 작품들은 각 작가의 평소 개성을 잘 반영하여 예상 가능한 수준의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좋은 발견이 이런 모음집의 가치를 더욱 빛내주는데, 다시 못 만나게 된 제자를 추모하는 심경을 여러 스타일을 섞은 아름다운 거짓말로 완성시킨 정철의 ’사라지는 아이‘라든지 송채성 만화상에 빛나는 신인 조아영의 ’From me, From you’의 귀여운 서정성이 바로 그렇다. 비록 연출의 만듦새는 다소 만족하기 힘든 점이 있지만 모음집에서 가장 재미있는 거짓말을 다루며 밀도 높은 이야기를 한 최덕규의 ‘아빠의 로또’ 역시 필독 코스다. 이런 잘 된 작품들의 공통점은 역시, 거짓말을 매개로 해서 사람들의 관계를 섬세하게 파고들며 뻔한 교훈적 성장과 주입식 감동의 함정을 피해간다는 것이다. 모음집의 모든 작품들이 이런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이런 작품들이 간간히 발견된다는 것은 전체 독서의 만족도를 높여준다.

하지만 거짓말이 곧 이야기의 상상력과 직접적으로 연계된다는 것은, 거꾸로 작품들 가운데 숨어 있는 단점들을 쉽게 드러내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모음집의 작품들 가운데 태반이 죽음이나 어두운 삶의 현실 같은 소재로 흐른다. 만화이기 때문에 밝은 것을 다뤄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이라는 소재를 여러 다양한 이야기 가능성으로 활용하기보다는 그 속에 담긴 부정적 이미지를 손쉽게 사용하는 선에서 머문다는 이야기다.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작중인물은 물론 독자들마저도 속여먹는 거대한 뻥이나 미묘하게 상황을 비틀어서 입가에 미소를 머무르게 하는 희극적 거짓말이 부족하다. 한 두 작품만 오려내면, 책 제목을 ‘어둠의 거짓말’로 바꿔도 무방할 정도로 말이다. 모음집이라는 형식이 가질 수 있는 다양성을, 거짓말로 꾸려나갈 수 있는 이야기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줄 수 있도록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거짓말이라는 소재에 대한 다소 소심한 접근이랄까.

또한 만화 무크지로서 보다 좋은 독서경험을 남기기 위해서 활용되었으면 하는 것은 만화 외적인 요소, 즉 글이다. 글이 많이 또는 중요하게 들어가야 한다기 보다는, 전체 흐름 속에 적절하게 녹아들어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서사성과 거짓말을 연결 짓는 박인하의 글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글이지만 이런 모음집보다는 전문저널에 어울리는 모양새로 독서의 흐름을 끊는다. 또한 김낙호의 한국 만화사에 대한 가짜 특종 다큐멘터리는 야심찬 기획이기는 하지만, 글 내용도 편집 구성도 이런 식의 거짓말이 재미를 주기 위해서 필요한 선정성(!)이 턱없이 부족하다. 즉 모음집에서 독서의 호흡을 가다듬어 줘야할 만화 외적인 요소들이 소심할 정도로 점잖게 들어가는 바람에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단점들을 감안해도 종합적으로 볼 때는, 테마가 있는 모음집으로서 『거짓말』은 일독을 권할 만하다. 한국만화의 최첨단이라든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테마 아래 묶인 여러 종류의 작가와 작품들을 보며 즐기는 ‘문집’ 독서의 즐거움을 주니까 말이다. 이런 기본기를 유지하면서, 차기 모음집들은 『거짓말』에서 엿보인 소심함을 한층 벗어나서 더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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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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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 토마 외 12인 지음/거북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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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houghts on “소심함의 아쉬움 – 『거짓말』[기획회의 071115]

Comments


  1. 만화는 당장 기억이 안나지만, 영화 중에서 거짓말이 인상 깊었던 것은 [굳바이 레닌]이 아니었을까 하는…

  2. 이제 ‘거짓말’과 ‘진실’이 얼마나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지. 신뢰와 배신감과 오해와 화해가 서로 얼마나 친한가족인지를 깨닫는 그런 주제가 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쯤에서 제가 떠올리는 ‘거짓말’에 대한 훌륭한 화두: Big Fish 제목부터 주제 그리고 결론에 이르기까지 , 거짓말 자체를 다루면서 거짓말의 모든 경계를 허물어줍니다.

  3. !@#… 시바우치님/ 특히 그 영화 마지막 거짓말은, 진짜 ‘꿈’이 담겨있는 모두가 함께한 초대형 거짓말이기에 감동적이었죠.

    nomodem님/ 빅피쉬는 삶의 아름다움을 이야기를 하기 위해 ‘거짓말’이라는 매개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런 자연스러움이 있었죠. 무언가를 속이고 피하기 위한 거짓말이라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