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 판타지에서 다시금 현실을 읽기 – 미생 [IZE / 130723]

!@#… IZE의 [미생] 특집에 들어간 한 꼭지. 정확히는 한 꼭지에 두 평가를 함께 넣은 기사 중 절반이라서, 함께 읽으면 훨씬 좋다. 게재본은 여기로.

현실적 판타지에서 다시금 현실을 읽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직장생활 만화 [미생]이 독자들의 큰 호응을 끌어낸 것은, 오늘날 화이트칼라 노동의 면면을 세밀하게 소재로 반영한 현실성 덕분이다. 그런데 그 호응이 일회성 공감대를 넘어 공전의 히트로 연결되도록 만드는 것은, 그런 현실적 상황에서 무언가 대리만족을 주고 응어리를 풀어주는 판타지적 요소들이기도 하다. 사업기획 발표현장을 긴장감 넘치는 전쟁처럼 그려낸다든지, 내용의 현실성과 연출의 판타지성을 결합하는 대목의 재미는 꽤 알아보기 쉽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미묘한 재미는, 현실적 그럴듯함이 넘치면서도 무언가 판타지스럽게 건너뛰고 넘어가는 느낌이 드는 부분들에 담겨 있다.

예를 들어 [미생]은 오늘날의 노동현실을 두루뭉술 뭉개지 않는다. 주인공 장그래는 “스펙”이 부족하기에, 인맥에 의한 낙하산으로나 겨우 비정규직으로 취직 기회를 잡는다. 그리고 아무리 업무에서 노력한들, 그런 위치에서 시작한 계약직이 정규직 전환을 얻어낸다는 허울 좋은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 오늘날 월급쟁이들의 험한 처지에 대한 상징이나 다름없는 쌍용노동자 분향소도 작중에 등장하고, 주인공들은 분향을 하고 지나간다.

반면 이런 현실의 이면에는, 정작 작중에 노조라는 개념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큰 틀은 거대한 관료 조직이라는 기계가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굴러가는 모습과 그 안에서 톱니바퀴이면서도 인격체로서 기능하는 개개인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개개인들의 대처만 있을 뿐, 연대와 조직화에 의한 개선은 제외되어 있다. 일종의 자기계발 판타지라고 꼬집어볼만 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정작 또 다른 현실이 겹친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0% 턱걸이하기도 힘겹고, 사무직은 그중에서도 더 낮다. 노동자라는 계급의식은 정규교육과정으로 배우는 것도 아니며, 사회적 규범으로서도 충분히 비주류다. 즉 연대에 의한 개선이 아니라 개개인의 각성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묘사가 되어버리는 셈이다.

[미생]은 그럴듯하지만 판타지, 그런데 판타지에 다시금 현실이 담겨있는 이런 부분들로 가득하다. 직장인의 업무 묘사는 충실하게 현실적이지만, 장그래가 일하면서 정체성을 찾고 깨우침을 얻는 모습에 대해서는 판타지라고 평가받곤 한다. 월급 받으러 직장에 가지, 무슨 회사에서 득도하냐는 비판이다. 그렇듯 직장의 어떤 상황을 통해서 세상사에 대한 어떤 직접적 교훈을 서술하는 대목은, 한쪽에서는 시적이라고 칭송받으면서도 다른 쪽에서는 닭살스러운 훈계질로 취급받기도 한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한국 사무직 노동자들의 여전히 살인적인 근무시간을 놓고 볼 때, 만약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떤 깨우침을 얻게 된다면 아마도 직장 관계에서 얻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만큼 직장 외의 나머지 인생이 빈약하다는 말이다. 일터에서는 날카로운 합리성을 자랑하는 오팀장이, 가족과 여행을 다녀오면서 정작 가정에서는 그저 겉돌고 있었을 뿐이었음을 깨닫는 모습은 슬프게도 전혀 판타지가 아니다.

가장 자주 노골적 판타지 취급받는 것은 장그래가 배속된 영업3팀의 구성 자체다. ‘사수’(업무를 훈련시켜주고 일의 책임을 지는 선임자)부터 팀장까지, 지나치게 실력과 통찰력과 인격이 출중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뒤집어보면, 만에 하나 그런 팀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유능한 비정규직 부하에게 정규직 전환이라는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조차 만들어줄 수 없다는 엄중한 현실감이다.

현실적 디테일에 끌려서 읽기 시작하고, 주인공의 깨달음과 성장이라는 판타지가 가미된 서사로 즐거움을 얻는 것에서 멈출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한층 유용하게 감상하는 방법은 바로 그 위에 다시금 우리들이 처한 현실의 모습들을 반추하는 것이다. 작품을 위안의 쾌감으로 소모하지 않고, 성찰의 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

근래 어떤 작품들보다도 뚜렷한 [미생]의 미덕은, 바로 그런 식의 읽기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유도한다는 점에 있다. 물론 대리급 직원이 거의 신선같은 경지의 통찰로 훈계를 직접 던져주거나, 맞벌이 남녀관계의 부당한 일 분담에서 너무 쉽게 양시론으로 흐른다거나, 극적 판타지가 과도해 보이는 대목도 더러 있다. 하지만 극의 단선적 흐름만 읽고 덮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울만큼 동시대적 현실의 모습들을 풍부하고 세밀한 디테일로 반영하여, 작품과 현실을 다시 비교하게 만든다. 연재 댓글란의 독자들로 하여금, 으레껏 하는 칭찬 너머 자신들의 직장생활 경험과 처지를 나누도록 만든 귀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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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웹진 ‘IZE’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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