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하게, 깊이를 찾아 – 이미지 앤 노블 창간호 [기획회의 364호]

!@#… 테마의 구심력이 강한 계간지 창간호나 무크지의 경우는 잡지도 단편 모음 단행본에 준하여 리뷰. 메일의 오배송 사고로 원래 362호(즉 한 달 전)에 나왔어야 했으나 순서가 밀림.

 

섬세하게, 깊이를 찾아 – [이미지 앤 노블 창간호]

김낙호(만화연구가)

만화의 원류가 되는 양식들이 어떻든 간에, 현대에 들어와서 만화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확고한 이미지를 구축한 것은 주로 장르오락물의 영역이었다. 신문 풍자만화로서든, 펄프 픽션의 좀 더 화려한 계승자로서든, 저항적 하위문화의 상징으로서든, 교훈적 학습교재로서든 말이다. 반면 상당한 성과를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역에 묶이는 듯한 사회적 편견도 많이 얻었는데,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이든 프랑스든 미국이든 양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현상을 역사적으로 겪어온 바 있다.

만화가 장르오락물이라는 꽉 짜인 틀거리의 범주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전위적 도발이다. 미국의 로버트 크럼, 일본의 사사키 마키, 한국의 코믹스 집단 등 속칭 언더그라운드 만화 운동이 이런 성향의 극명한 사례로, 편안하고 대중적인 소재 선정과 표현 공식의 적극적 파괴 자체가 부각되곤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장르오락 특유의 호쾌한 자극성과 반대 방향에서, 인간사의 섬세함에 주목하는 이야기예술을 펼치는 것이다. 문학에서 이런 것을 경우에 따라서 문예, 순수문학 등의 용어로 부른 것처럼, 만화에서도 호명에 대한 노력으로 순만화, 예술만화 등의 호칭을 시도했고, 인디만화나 그래픽 노블 같이 살짝 의미 범주가 다른 용어를 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문예만화’라는 야심찬 용어를 전면에 내건 잡지의 창간호가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이미지 앤 노블 / 창간호](편집부 편저 / 이미지앤노블)는 “어른들을 위한 풍부하고 예술적인 시각연출과 문학적 깊이의 서사를 담은 만화”를 표방한 계간지다. ‘어른들’이라는 부분은 구매력을 노린 마케팅 측면의 서술에 가까우니 넘어가고(일반적 의미에서 성인과 미성년의 매체 향유를 가르는, 표현 수위의 자극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책이다), 강조되는 부분은 결국 예술적 연출과 문학적 깊이다. 이를 위해 만화를 통한 섬세한 표현력을 강조하는 작품들을 전면 배치하는 것은 물론, 만화를 중심축에 놓고 일러스트레이션, 소설, 에세이, 르뽀 등 인접 분야와의 협업도 시도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문예계간지의 느낌을 지니며, 장르오락에서 소위 절단신공이라고 부르는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연재방식보다는 단편 모음집에 가까운 포만감을 준다.

책을 펼치자마자 편혜영 작가의 대표작을 변병준 작가가 만화화한 [서쪽 숲에 갔다] 가 이 모음집의 성격을 확실하게 선보인다. 커다란 사건이나 박진감 넘치는 갈등의 대화가 아니라 그저 숲의 입구에 서서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는 내용임에도, 대화를 그려내는 시각적 리듬감과 그들을 감싸고 있는 숲의 다양한 모습이 이야기 전체를 이끈다. 글의 사색적 측면을 그림으로 옮기기 위해 무리한 드라마성을 부여하기보다는, 마치 숲이 진정한 주인공이 될 듯할 정도로 섬세한 공간 분위기 연출에 집중하는 식이다.

르포, 또는 여행기 양식으로 진행되는 만화들도 ‘문예’적 느낌과 상성이 좋은 편이다. 레바논에서의 전쟁을 소재로 삼은 사피에딘과 박경은 작가의 [얄라바이]의 선명한 관찰기도 지난 수년간 부각된 바 있는 수작 르포만화의 흐름에 합류할 조짐이 조금씩 보이고 있고, 최호철 작가의 제주도 여행기 [파격특가 2박3일]도 자잘한 이야기와 그것을 한번씩 가로지르는 커다란 풍경화의 리듬감 속에 독특한 완성도를 선보인다. 이외에도 [숙식제공 월 200]처럼 동시대 일상을 담담하고 섬세하게 풀어내는 만화, [독립운동가 변강쇠] 같은 강한 위트의 소설 등 매력적 작품이 포진하고 있다. 여기에 평론과 인터뷰 기사 등을 더하며 섬세한 깊이에 대한 무게중심을 확실하게 강조해낸다.

물론 만화가 지닐 수 있는 표현과 깊이를 알리고자 잡지를 창간한 것은 이 책이 결코 처음이 아니다. 그 과제를 향한 세부적 접근 방식들 역시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선례를 찾기 어렵지 않다. 2000년대 초반의 계간만화든, 후반의 팝툰이든, 만화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양식으로 강조해내고자 한 노력들은 인접매체를 예술 표현적 확장 파트너로 삼고, 진지한 분석 평론을 함께 묶고, 섬세한 표현력의 단편들을 발탁해냈다. 반면 작가주의적 개성을 우선시하다가 실험과 전위의 길로 빠지는 경우들도 있었다. [이미지 앤 노블]의 장점은 무언가의 최초라서가 아니라, 그간 이 방향성으로 축적된 역량들을 뚜렷하고 차분하게 펼쳐 보일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만화의 명예 획득에 대한 비장함이나 자유로운 상상력 과시가 아니라, 서점코너의 약간 더 진지한 문학 코너, 자기계발서의 떠들썩함과 달리 잠시의 성찰을 부르는 에세이 서가, 아예 박물관까지는 아니라도 제대로 예술성을 논할 수 있는 정식 공간의 미술전 같은 감각을 담아내고 있다. 포함된 여러 작품들이, 다루는 소재나 표현법보다는 그런 식의 섬세한 진지함에 대한 수위로 통일성을 꽤 고르게 이루어낸다. 들쑥날쑥함이 적음이야말로 기존의 여러 유사 시도들보다 확실히 진일보한 측면이다.

그런데 하나의 모음집으로서 지니는 일관성이 주는 매력과 별개로, 이 책이 수용될 현실은 또 다른 문제다. 전반적으로 기발함이나 긴박감의 재미는 물론이고 심금을 흔드는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보다는 담담한 섬세함을 기조로 삼는 느낌인데, 잡지가 타겟층으로 삼겠다고 선언한 ‘진지한 만화를 원하는 성인층’ 가운데에서도 이쪽 범주는 훨씬 좁다. 현실에 대한 위안이나 도피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일정한 예술적 취향 혹은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적 허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물론 문학소년, 문학소녀의 꿈을 간직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적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만약 그들이 충분한 시장 영향력을 과시할 수준이었더라면 시집과 순수문학 계열 출판물들이 처한 냉엄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향유자의 폭이 좁으면 더 비싼 가격을 책정해서 고가문화로 노선을 틀기도 하는 일부 미술이나 음악의 영역과 달리, 문예는 흔한 책값의 한도 안에서 무엇이든 계속 해야 한다. ‘문예만화’는 이 부분에 있어서 기존의 다른 문예 분야들과 다른 길을 걷기 위해 어떤 묘안을 내놓을 수 있는가. 앞서 언급한 예술 취향을 대중적으로 히트시킬 전략이든, 안정적 도서관 고정 보급이든, 아니면 다른 곳에서 확실한 수익을 내며 일방적으로 제작비를 투여하든, 이 정간물이 지속되고 작품을 계속 감상할 수 있으리라는 안심을 독자들에게 주는 것이 관건이다. 그런 안도감이 다시금 독자로 하여금 잡지를 계속 구해 읽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전위를 통한 가치선언도 아닌, 맞춤형 오락성도 아닌, 그저 좋은 표현력과 섬세한 접근의 만화를 모아서 본다는 ‘취향’으로 묶인 잡지의 등장을 환영한다. 이 취향이 계속 충족되도록 잡지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이미지 앤 노블
이미지 앤 노블 편집부 엮음/이미지앤노블(코리아하우스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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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선생님의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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