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 고수가 웹툰에 적응하는 방법 [IZE / 160506]

!@#… 종이만화스타의 웹환경 적응기 관련해서는 몇가지 더 준비해놓은게 있는데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더 이야기할 일이 생기겠지 한다. 게재본은 여기로.

 

[고수], 고수가 웹툰에 적응하는 방법

김낙호(만화연구가)

고수는 무기를 탓하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다. 물론 실력이 좋다고 해서 어떤 무기든 상관이 없을 리는 없지만, 주어진 조건에 신속하게 적응하여 그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뽑아내는 것이 바로 고수다. [용비불패]로 무협만화의 한 획을 그었던 문정후 작가의 웹툰 [고수]는 바로 그런 풍모를 뽐내는 작품이다. 네이버 미리보기 유료결제에서 1위를 거의 놓치지 않는 힘은 무엇인가.

사실 [고수]의 기본적인 매력요소는 [용비불패]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진지하고 정교한 무협 세계관 위에서 펼쳐지지만 헐렁하고 경쾌한 개그 요소가 넘친다. 주인공은 나름의 사연을 지녔고 딱히 힘자랑을 즐기는 것이 아니지만, 이야기의 시작부터 무공이 이미 압도적인 ‘만렙’이다. 덕분에 주인공의 성장은 힘이 아니라 의미, 일상, 속죄 같은 쪽에 있다. 하지만 확실한 차이라면, [용비불패]가 90년대 만화 잡지의 틀에서 움직였고 [고수]는 오늘날 웹툰 매체의 틀에 최적화했다는 점이다. 당장 면이나 감정, 질감의 표현에서 잔선을 줄이고 색채 요소를 활용하는 그림체 차이가 뚜렷하다. 세로 스크롤에 적응하여, 전개를 따라가는 시선의 움직임을 최대한 세로 방향으로 이끄는 칸 연출도 눈에 띈다. 이런 측면만으로도, 아직 웹툰에 적합한 가독성을 온전히 찾아내지 못한 여러 종이만화의 실력자들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갔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게감과 개그의 균형, 전개 과정의 배분 등 이야기 측면에서 더욱 성공적이다. [고수]의 웹툰으로서의 매력은, 같은 작가가 그 매체양식에 처음 도전했던 전작 [팔라딘]과 [초인]의 사례와 비교하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팔라딘]은 판타지를 내걸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힘을 지닌 주인공이 속죄의 여정을 다니는 무협스러운 이야기였고, [초인]의 주인공 또한 가공할 능력을 지닌 신의 사자였다. 화면을 통한 감상에 적절한 그림체 변형을 이루지 못하거나 아예 종이출판 형식 그대로 갔다는 표현적 측면도 있었지만, 당장 이야기 전개 방식의 재미가 미묘하게 어긋났다. 이야기 시작부터 캐릭터를 알아가기 전에 설정의 무게에 살짝 눌렸고, 매 회에 전개되는 이야기 진도가 들쑥날쑥했다. 하지만 오늘날 웹툰 형태로 연재만화를 읽는 방식은 갈수록 빠른 캐릭터 매력 구축을 요구하고, 이야기 분량에 민감해지고 있다. 어느 정도 충성도를 가지고 특정 잡지를 계속 사서 모으며 함께 묶인 개별 작품에 일정한 인내심을 발휘하기도 하던 시절과는 달라진 것이다.

그런 적응을 영리하게 완성한 것이 바로 [고수]다. 주인공의 깊은 사연은 사부의 원수를 갚기 위한 수련을 했으나 하산하고 보니 원수들이 이미 사라져버렸다는 허망한 개그를 선보인 프롤로그 한 화로 완성해버렸다. 그 후 객잔의 점원으로 정착했고 만두를 좋아하는 현재 주인공의 모습, 핵심 주변인들의 성격 또한 그 다음 한 화로 매력적으로 성립시킨다. 이것은 웹툰 시대 독자들의 취향에 맞춘, 시원시원한 초반 에피소드 전개 방식에 가깝다. 혹은 한편으로는 종이잡지와 달리, 배정된 페이지 숫자가 아니라 이야기 단위의 필요성에 따라서 분량을 할애하는 것이 가능한 웹툰 연재의 특성을 활용한 덕택이다.

나름의 일상을 하나의 기준으로 두고 유머와 진지함이 수시로 교차하는 단편적 에피소드를 누적시키며, 조금씩 더 드러나는 큰 이야기의 복선을 깔아나간다. 어떤 까다로운 독자라도 쉽게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내용 진도를 나아가고, 덕분에 긴장감 넘치는 순간에 다음화로 절단신공을 발휘해도 짜증보다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이렇게 이야기의 흐름이 안정되자 심지어 무협 액션 또한 더욱 다채로워졌다. 압도적인 힘의 대결은 장쾌한 기공 폭발의 커다란 풍경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가위바위보 놀이의 심리전이라든지 한 칸 만에 다들 쓰러져 있는 과감한 축약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정제되어 펼쳐진다.

결국 비급, 그러니까 말만 쉽고 실현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정공법은, 가장 잘 다룰 줄 아는 장르 요소를 간직하며 지금 주어진 매체 요건에 적응하여 환골탈태시키는 것이다. 돌아보면 [용비불패]도 애초에 무협물의 전통을 소년만화잡지의 취향에 성공적으로 접목시킴으로써 속칭 ‘신무협’의 대표작이 되었듯 말이다. 그렇게 작가는 [팔라딘]의 애매함을 딛고 넘어, 웹툰으로서 훌륭한 무협물의 하나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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