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대로 선생이 꿈꾸는 가부장 유토피아[인물과 사상 2005/02]

!@#… <인물과 사상> 올해 2월호에 실린 원고. 조선중앙에 이어서, 당연히 동아. 이후에는 반대쪽 선수들도 다루겠지만. 보통 월간 인물과 사상 -> 미디어오늘 온라인 -> 개인 블로그에도 백업조로 올려놓기 순으로 가고 있음.

!@#… 글 독서의 연출상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접어서’ 올리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앞으로는 원고지 30매를 넘는 나름대로 장문의 경우는 접어서 보여주기로 결심. 현대인의 문자해독력 퇴행(즉 한두화면 이상 넘어가는 글은 못읽는다는 말. 일부 사람들은 벌써, 3줄로 요약해줘야만 겨우 무슨 뜻인지 알아먹는다)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주기로 했다는 말이다. -_-; 자, 그럼 밑에 클릭을 하면서 시작. (주: 그림 이름은 모두 해당 개제일. 예: 041218 -> 2004년 12월 18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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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로 선생>이 꿈꾸는 갈등 없는 가부장 유토피아

김낙호(만화연구가)

오랜 기간 동안 만화를 저열한 것으로 폄하해온 일반 인식과는 대조적으로, 정작 사회인의 교양 그 자체인양 취급 받아온 속칭 ‘종합 일간지’ 들은 만화를 중용했다. 맨 앞부분의 한 칸짜리 만평이 그날의 정세를 압축적으로 요약을 해주고 있다면, 맨 뒷부분에서는 그 날 신문을 읽고 느껴 봄직한 전체 감상을 4칸 만화로 정리해주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만화로 시작해서 만화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하기야 그렇게라도 해주지 않았다면 우리네 소시민들이, 엘리트성 자아도취와 근엄함으로 똘똘 뭉친 기사들의 압박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4칸 만화가 시사 만평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것은 한국 신문만화의 독특한 현상이다. 신문의 4칸 만화가 시트콤 방식의 생활소극으로 수렴되어 버린 구미나 일본의 경우와 달리, 한국의 경우는 50년대 이래로 오히려 한 칸 만평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사설 만화’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방향으로 진화해버렸다. 게다가 대중적 인지도와 사랑 역시 대단해서, <고바우 영감>이나 <두꺼비> 같이 오랜 기간 장기 연재되었던 시리즈들은 지금까지도 언론사와 만화사 양쪽에 큰 족적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고바우 영감은 은퇴하고, 왈순 아지매도 자리를 떴다. 심지어 최근, 한겨레의 탄생부터 자리를 함께 해왔던 미주알 씨도 작년에 마지막을 고했다. 그러고 보면 결국 수십년된 장편 시리즈 가운데 사실상 ‘마지막’ 생존자는 동아일보의 <나대로 선생>이다.

<나대로 선생>은 원래 동아일보에서 연재 중이던 <고바우 영감>이 조선일보로 이적한 직후인 1980년에 첫 회를 시작한 이래로, 특별한 중단 없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오고 있는 장기 연재물이다. 필자는 이전부터, 한 신문의 본심은 바로 만평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한 칸 만평의 작가가 여러 번 바뀌어 나가는 동안에도 한 결 같이 자리를 지켜온 <나대로 선생>이야말로 ‘동아일보’의 쌓이고 쌓여온 속내 그 자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특히 지금의 언론구도를 만들어낸 계기인 조중동이라는 암묵적 카르텔의 조성, 그리고 조선일보의 독주 및 동아일보의 2인자화(실제로 조선일보는 79년까지 업계 3,4위에 머물다가 전두환 대통령 집권 이후에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5년여 만에 부동의 1위를 굳혔다; 이유는 상상에 맡기기로 한다)의 물결 속에서 자기 색을 마련해나간 작품이기에 그 의미는 더욱 크다. 그런 조건 속에서 탄생하고 가꾸어진 <나대로 선생>이 바라보고 있는, 그리고 바라고 있는 세상은 과연 어떤 곳일까?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자.

4칸 시사만화의 재미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4칸 시사만화라는 형식이 어떻게 재미를 만들어 내는지 간단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만화라는 이야기 장르의 특성상 여러 칸을 활용한다는 것은, 순간의 풍경만을 묘사하는 한 칸 만평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풍부한 표현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4칸 시사만화들은 그런 가능성을 십분 활용해온 것이다.

첫 번째 특징은 바로 서사에 의한 전개를 통한 친밀감 형성이다. 쓸 수 있는 칸이 하나밖에 없다면 순간의 즉각적인 시각 비유에 의존해야만 하겠지만, 연속된 칸 덕분에 보다 풍부한 논리 흐름 즉 “이야기”가 가능한 것이다. 이야기의 서술은 한 번에 주어지고 독자가 깨달을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차를 두고 펼쳐진다. 예를 들어서 가장 흔히 쓰이는 고급 비유구조인 “A대B는 C대D와 같다”는 것을 한 칸 안에서 펼치려면 상당한 묘사능력, 그리고 독자의 독해능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4칸 만화에서는 A를 한 칸, B를 한 칸 하는 식으로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주면 된다. 또한 전통적인 서사기법인 기승전결 구조, 특히 마지막 반전을 통한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 역시 가능하다. 즉 한 칸 만평이 모든 것이 일거에 적혀있는 전단지라면, 4칸 만화는 내용을 하나씩 순서대로 설명해주는 점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결과를 먼저 보고 나머지를 유추하는 것이 아니라, 전개과정 속에 이입해 들어가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내부적인 캐릭터의 구축이다. 장기 연재를 하는 시사 4칸 만화는 주인공 캐릭터들이 있다. 희화화된 정치인 등의 외부의 모델을 단순히 끌고 들어오는 경우가 아닌, 자체적으로 활동하는 등장인물들 말이다. 이들은 여러 회에 걸쳐 연속적으로 등장하며 자신들의 성격과 인간관계를 점점 명확하게 드러내게 된다. 자신의 독자라고 생각하는 그 층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그 캐릭터에 이입해서 작품의 줄거리를 함께 ‘겪어보라는’ 장치인데, 이것은 이야기 장르의 정석이다. 그런데 특히 시사만화에서 이러한 특징이 중요한 것은, 정치꾼들 같은 ‘남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감정이입을 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로서 흡입력이 있기 위해서는 감정이입이 상당 부분 필수적이고, 이 때 이런 내부 캐릭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캐릭터는(보통 주인공의 이름이 곧 작품의 제목이다) 대체로 성인으로서 가족을 꾸리고 있는 평범한 소시민을 상정하고 있다. 즉 작가의 세상 관찰기가 아닌, 독자 자신의 세상 살기가 되는 것이다. 특히 실제 정치인들을 작품에 등장시킬 때, 좀처럼 내부적인 고정 캐릭터들과 직접 대면하는 일이 없는데, 이것 역시 정치를 TV와 신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한국의 서민생활이기에 묘한 사실성을 획득한다.

세 번째 특징은 시각화의 간결성이다. 대부분의 4칸 시사만화는 한 칸 만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약호화된 필치와 열린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지면 크기에 따른 가독성 문제 등의 요인도 있지만, 표현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작품 속의 특정한 인물들의 개인적인 사건들보다는, 불특정하고도 친숙한 공간인 독자 자신의 생활공간처럼 쉽게 이입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4칸 시사만화의 특징은 바로 이입에 의한 경험이다. 독자는 기사 읽듯이 사건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와 그들이 펼치는 이야기에 이입해 들어감으로써 그런 사건이 벌어지는 세상 속에 살아가는 단면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세상은 현실세계라기 보다는, 작가의 가치관을 담고 있는 주인공 캐릭터에 의하여 재구축된 곳이라는 사실이 종종 은폐되지만 말이다. 

나대로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나대로 선생>의 특징은, 4칸 시사만화 중에서도 특히 고정 캐릭터들이 잘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제 본연의 과제로 돌아와서, <나대로 선생>의 등장인물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주인공인 ‘나대로’ 선생이 있다. 그 나대로는 과연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룸살롱 양주가 아닌 소주잔을 기울이고, 골프 치는 장면 한번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상류층의 전형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집에서 쫒겨 날까 걱정하거나 취직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것이, 빈곤층도 아니다. 어떤 회사 어떤 직종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출퇴근 장면에서는 코트를 입고 서류봉투를 들고 다니니 화이트칼라로 보인다(그림)[041104]. 나이는 그리 젊어 보이지 않지만 경영에 대해서 엄청나게 고민하는 모습은 없는 것으로 보아 중간 관리자 정도. 가족은 부인, 그리고 아직 어린이인 아들이 한 명이며, 나대로 선생이 집안의 가장이다. 이 정도면 사회통념상의 ‘서민’ 기준에 얼추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 듯 하다.

자, 그렇다면 어떤 서민인가? 집에서는 텔레비전과 신문 보는 것이 전부고, 일자리 모습은 묘사되지 않지만 퇴근 후 회사동료 한명과 소주잔 기울이며 세상 한탄을 한다. 하지만 그 세상 한탄은 말 그대로 한탄이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울분이나 열정과는 거리가 멀다. 세상의 문제를 어떻게 고쳐야 한다는 구체적인 의견은 제시하지 않고, 현상에 대한 실망의 토로라는 선을 절대 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젊은이들을 볼 때는 항상 표정이 한심하다는 듯 일그러져 있다. 시끄럽게 싸우며 들고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일관되게 거부감을 드러내지만, 노골적으로 어느 쪽을 직접 자기 입으로 지지하거나 나무라지는 않는 방관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모든 특질들을 하나의 키워드로 정리하면, 바로 ‘침묵하는 다수’라는 보수층의 신화에 상당히 근접한다. 기득권은 아니지만 잃을 것은 많고, 세상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바꾸느라 시끄럽고 힘든 건 싫으며, 잘 굴러가고 있다고 믿는 위계질서와 가치를 흔드는 무리들에 대한 큰 반감이 있지만 적극적으로 혐오하고 나서지는 못하고 투덜대는 성향의 사람들 말이다.

나대로의 이런 특징들은 주변의 캐릭터들에 의해서 더욱 강화된다. 나대로 선생과 자주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는 회사동료가 대표적인 예다. 회사동료의 가족이나 다른 배경은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회사나 사회에서는 아마도 비슷한 위치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대로와 회사동료는 결코 의견이 충돌하는 일이 없이, 완전히 같은 사고방식을 공유한다. 다시 말해, 회사동료의 역할은 나대로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결코 특이한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경우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도식화된 보조자아성 고정 캐릭터와의 대화 패턴은, 고작 독백으로 세상에 대한 코멘트를 날리는 여타 시사 4칸 만화보다 <나대로 선생>의 세계를 더욱 몰입도 높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림)[041018]

나대로의 부인은 또 어떤가. 지난 수년간 양성평등적 시각에서 이미 여러 차례 문제점을 지적받았던 캐릭터로서, 집에서 신문이나 TV를 보는 나대로에게 항상 커피를 날라다 주는 역할으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머슴형 가정주부다. 언뜻 생각해보자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류의 50%를 대변하는 캐릭터로서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야 할 듯 하지만, 사실 나대로 부인에게 이입을 할 여지는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대로가 안방에 앉아서 내뱉는 한탄에 추임새를 넣는 것이 대부분이거나, 때로는 아예 나대로의 대사를 가로챈 듯한 세상 진단을 던질 뿐이기 때문이다. 즉 주부의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거나 문제의식을 짚어내는 장면이 거의 없이, 나대로가 바라보는 세상을 강조하기 위한 보조도구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다. 순종적인 주부상 정도가 아니라, 숫제 주부는 커녕 자아를 지닌 존재 자체도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대로가 가장, 다시 말하자면 ‘성숙한 어른이고 사회인’이라는 든든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림)[050103]

   

[041104], [041018], [050103]

하지만 나대로의 고정 캐릭터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존재는 따로 있다. 그는 바로 점집의 할아버지다. 어째서인지, 나대로는 정말로 세상에 대한 불만이 많거나 뭔가 이해하기 힘들다 싶은 일이 있으면 점집으로 간다. 선거철을 앞둔 정치인이라면 모를까, ‘침묵하는 다수’의 일반 서민, 그것도 가장이 점집 가는 것을 특별히 좋아한다거나 자주 간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점집 할아버지의 역할은 단순히 생활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점집 할아버지의 진짜 역할은 무엇인가? 다음 만화를 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오른쪽 그림)[040714]

점집 할아버지는, 선문답처럼 말을 꺼내지만 실상은 엄청난 독설가다. 소심하고 착한 서민을 일단 상징하고 있는 나대로라면 결코 내뱉지 못할만한 날카롭고 직접적인 비난의 화살이 수염 사이에서 거침없이 발사된다. 이 사람은 나이만큼이나 진짜 어른이고 세상의 본질을 보는 날카로운 내공을 지닌 인물이다, 라는 설정인 것이다. 물론 이 할아버지 역시 나대로라는 주인공의 세계관과 상충될 만한 말을 내뱉는 경우는 절대 없다. 흔히 구사되는 연출은, 할아버지가 의외로 나대로의 생각과 상충되는 발언을 할 듯 한마디를 내뱉어서 깜짝 놀랐다가, 마지막 칸에서 오히려 더욱 더 신랄하고 구체적으로 나대로의 숨은 생각을 내뱉고 긍정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물론 나대로는 세상에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채로 점집에서 걸어 나오고 말이다. 즉 점집 할아버지는 작가의 직접적인 본심에 한층 더 가까운 캐릭터이자, 나대로의 해탈한 보조자아 같은 존재다.

요약하자면, 나대로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나대로의 동급 분신인 회사동료, 가족으로서 밑에서 떠받들어 주는 아내, 그리고 위에 서서 해탈과 직설의 경지로 인도해주는 점집 할아버지 등이 나대로의 세상인식을 종합적으로 강화시켜주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사람들, 그것도 서민들이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틀렸을 리가 없다고 웅변하기에 무척 좋은 구도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나대로 선생>은 다른 어떤 4칸 시사만화보다도 이러한 고정 캐릭터 체계가 확고하며 그만큼 더 효과적이다.

발언권에 대한 열망

침묵하는 다수로서의 주인공 나대로라고는 하지만, 작품 전반에서는 작가가 발언권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곤 한다. 하기야 그것은 <나대로 선생>의 탄생 환경만 보더라도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대로 선생>의 작가 이홍우 화백은 1949년 출생으로, 이미 67년부터 이미 중도일보에 <두루미>, 73년에 전남일보에 <미나리 여사>를 연재했다. 당대의 메이저 신문인 동아일보에서, 그것도 <고바우 영감>의 후속이라는 부담 속에서 작품을 시작했던 1980년에는 갓 서른을 넘긴 젊고 패기 있는 작가였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검열 정책 속에서, 당장 첫 회부터 “규제 명단에 빠진 새 인물 인사드립니다”라는 도발적인 시도를 했다. 물론 검열에 걸려서 “새 시대 참신한 인물 인사드립니다”로 바뀌어 나갔고, 결국 이후에도 발언권 통제에 대한 민감한 관심을 보였다. ‘언론 길들이기’에 대한 발언을 할 때는 우회적으로 꼬집는 여유마저 상실된다. 특히 최근, 조중동 카르텔에서 중앙일보가 빠져나갈 조짐이 보이자 그것을 직접 지적하는 만화는 절박함이 절로 묻어난다. (그림)[041218]

물론 언론 길들이기에 대한 분노는 그 자체로서는 정당할 수 있지만, 만화가가 신문사에 정규 직원 대우로 소속되어 있는 일간지의 특성상 아무래도 마냥 곧게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2001년의 언론사 세무조사라든지 과당 경품 제공에 대한 제한 조치라든지 하는 것은 언론 길들이기라기보다는 신문 시장 정상화를 위한 필수적인 조치들이었다. 그 와중에서 상대적인 손해를 보는 신문사의 입장에 처해있었다는 것이었을 뿐이지만, <나대로 선생>은 이것을 무려 박정희 시절, 전두환 시절의 탄압과 등가시키거나 심지어 북한의 노동신문까지 동원해서 언론탄압으로 포장했다 (그림)[010212, 010206]. 그 정도의 악의적인 표현이 여과 없이 버젓이 개제될 수 있는 것으로만 보아도 자유로운 발언권은 충분히 확보되었다고 보지만, 이홍우 화백이 동아일보의 국장급 편집위원이라는 점이 자꾸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혹은 당시, 조중동을 제외한 다른 신문들에서는 이것을 언론탄압으로 주장하는 만평을 거의 구경한 적이 없어서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041218], [010212], [010206]

여하튼, 자유로운 발언을 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열망은 <나대로 선생>에 있어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비교적 진취적인 인식 가운데 하나다. 이렇듯 억압에 대한 거부를 표방하는 것은 <나대로 선생>의 캐릭터들과 세계관이 지니는 보편적 선량함을 강조해주는 것에 일조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자유로운 발언을 바탕으로 충돌을 일으키고 합의를 해나가는 사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듯 한데,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나대로가 바라보는 오늘날의 모순

그렇다면 나대로는 지금 세상 돌아가는 모습 가운데 무엇이 그렇게 걱정이고 못마땅한가. 2000년대를 살아가는 오늘, 가시적인 억압과 싸울 만한 일은 별로 없다. 사회체계라든지 하는 너무나 거대해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물론 언론탄압 같은 주제를 잡아내면 뚜렷한 적을 만났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지만, 도통 공감을 살 만한 권위적인 지배자가 없다. 워낙 무능해서 그렇지, 특별히 권위적이거나 사악한 무언가를 하고 있지는 않은 현 정권을 어떻게 비판해야 할지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분명히 경기도 침체되고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듯 한데, 어떻게 적대세력을 마련해야 하나. 그렇기 때문에 학연 정치 같은 구식의 비판틀을 무리하게 적용하거나 (그림)[041127] 아니면 막연한 불안감 속에서 새로운 적대 세력을 만들어낸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세대 대결’인데, 25년 연재 와중에 이미 속칭 구세대 쪽에 속하게 되어버린 작가의 입장을 반영해서 젊은 세대가 사정없이 깎아내려진다. 국회의 문제는 속칭 ‘386’ 위원들의 득세 때문이라는 한탄은 그나마 애교이며(그림)[041216], 일반 젊은이들은 취업난에 시달리는 백수 아니면 시위현장의 싸움꾼들, 아니면 세상에 무관심한 날라리로만 등장한다. 친일 친독재로 기득권을 누려온 자칭 ‘원로’들의 자칭 ‘시국 선언’이 전혀 무비판적으로 무척 훌륭한 발언으로 소개된 것과는 정반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젊은 세대와 싸우자, 몰아내자고 노골적으로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확실하게 ‘제거해야 할’ 악을 찾아야 한다. 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확실한 증세를 뽑아내야 한다. 묘수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시끄럽게 서로 싸우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비난하면 되는 것이다. 자칭 침묵하는 다수, 진정한 서민들은 그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면 사회가 망가질 것이라고 걱정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나대로 선생>은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서 조선일보의 만평들 마냥 한나라당 기관지 역할을 자처할 정도로까지 적극성으로 무장한 작품이 아니다. 나서서 안 싸우고, 뒤에서 혀만 차고 싶은 정서를 대변하는 만화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바로 양비론이다. 둘이 싸우고 있으면, 이놈도 저놈도 나쁘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 공정한 양비론 따위는 없기에 실제로 결과적으로는 한쪽이 더 폄하 당하게 되어 있고, 연재신문의 특성상 그것은 주로 노무현 정부와 국회 여당이다. (그림)[041214]

   

[041127], [041216], [041214]

이 사례의 경우, 한나라당의 우리당 이철우 의원 과거 캐기가 시대착오적인 구태라는 것을 셋째 칸에서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편파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한나라당이 여당보다 더 잘못했다고 나오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였는지, 넷째 칸에서 진짜 결론을 내민다. 1940년이라고 찍힌 달력을 통해서 친일 과거사법이 더욱 더 심한 시대착오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색깔론을 통한 헐뜯기의 전형을 보여준 구태와, 한번도 제대로 정리된 바 없어서 각계의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았던 친일 과거사 정리를 동일한 레벨로 놓고 양비론을 펼쳤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경악스러운 일이다. 하물며 만화의 서사적 어법을 통해서 은연중에 저질 색깔론 공세보다 그것이 더 심한 짓이라는 주장까지 심어넣는 것은 작가의 기본적인 역사인식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80년대에 보여준 ‘억압은 싫다’ 정서, 그리고 90년대 중반 이후로 보여준 ‘하지만 뒤집느라고 시끄러운 것은 더 싫다’는 정서 속에서 탄생한 기형적인 양비론은 이렇듯 왜곡된 역사인식으로 이어지기 쉽다. 전두환 정권의 억압을 싫어해온 만화가, 정작 더욱 더 억압적이었던 박정희 정권에 대한 향수를 넌지시 내비친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억압적이었지만, 경제는 살아났으니 박정희가 역시 잘 했어”라는 식의 인식은 원래의 <나대로 선생>이 표방하는 일관성에서 크게 벗어난다고 봐야 하는데 말이다. (오른쪽 그림)[040805] 하기야, 시끄러움과 충돌이 바로 권위적인 억압이 사라진 세상의 기본 구동 원리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가부장 유토피아를 향하여

그렇다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나대로 선생>이 지향하는 이상세계는 무엇일까? 몇가지 전제를 가지고 추론해볼 수 있다. 우선, 권위에 의한 억압은 싫다. 하지만 그 억압이 없어진 결과 다양한 목소리들이 불거져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다양한 목소리들은 서로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충돌 때문에 시끄러운 것은 싫다. 한눈에 봐도 모순된 조건이지만, 작품 속에서 나름대로 조금씩 그 조건을 충족하는 방법이 흘러나오곤 한다. 그것은 바로 “합의과정 없이도 굴러가는 세계”다. 다들 자유롭게 사는데, 서로 충돌할 일 없이 잘 산다! 대등한 대화와 토론으로 매번 문제를 해결할 없이, 모두들 자발적으로 합의한 질서체계가 잡혀 있으면 된다. 그 체계에 도전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시끄러운 것들이 문제인 것이다.

위계 구조가 자발적으로 유지되는 상태는 일종의 ‘가부장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추석 차례를 지내고 구석에서 고스톱을 치면서, 가족과 전통의 소중함을 설파하는 가부장의 마음에 비유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음식을 준비하고 뒷정리를 하느라 허리 휘지만, 그리고 그 와중에 자신이 도움을 주는 것은 뭐 하나 없지만, 그 모든 것은 당연한 전통인 것이다. 누군가가 토를 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다들 너무나 자발적으로 집안의 전통적인 질서와 분업을 지켜준 덕분에 올해도 즐겁게 추석을 보낸다. 흐뭇함에 빠져버린 가부장은, 모두들 자기처럼 즐겁고 한가하게 보냈으리라고 아주 확신해버린다.

당사자간의 구체적 합의 없는 위계 구조라는 것은, 작게 보면 허상, 있는 그대로 보면 가장 위험한 형태의 억압이다. 하지만 이것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나대로 선생>은 차만 나르는 마누라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상고 출신 대통령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은 시끄럽게 하지 말고 묵묵히 일이나 하고, 젊은이들은 윗사람 말을 잘 따르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소수자들의 권리 찾기는 관심 밖이고, 국보법은 반드시 유지되어야만 한다. 때로는 그런 풍경들을 자연스러운 모습인양 보여줌으로써, 때로는 그렇지 못하고 있는 세태에 혀를 차는 어르신들의 모습에 긍정적인 시선을 던짐으로써 이러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오죽하면 국회 앞에서 국보법 폐지 1인 시위를 하는 밀입국 탈북자에게마저 한심하다는 조소를 보내고 있을까. (왼쪽 그림)[041203]

자유는 보장되는데, 아무도 자유를 행사하지는 않고 묵묵히 기존 통념의 자기 자리만 지키는 세계. 필자 같은 삐딱한 사람이야 그것을 단지 상상속의 가부장 유토피아라고 비웃지만, 한국형 자칭 보수주의자들의 성향이나 그들의 무시무시한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그 ‘침묵하는 다수’라는 종족은 2004년 총선에서 도덕적으로도 실무적으로도 문제 투성이였던 구태 정당에게 40%의 의석을 몰아주어 유의미한 좌석수를 지닌 제1야당을 만들어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것을 ‘균형 잡힌 선택’이었답시고 자축하고 앉아있고 말이다. 그리고는 약간 지나자, 이놈도 저놈도 똑같다며 양비론에 빠져있다. 나아가 국가보안법 폐지 같이 지난 50여년간 필요성이 검증된 당연한 사안마저도 국민여론조사를 하면 폐지반대 여론이 6-70%에 달한다는 이야기를 접할 때면, 가히 절망감이 감돈다. 그리고 그들의 감성이 <나대로 선생>의 세계관과 맞닿아 있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버릴 수 없다. 메이져 일간지의 25년 장기 연재작이라는 위업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다. 나대로가 바라보는 세계, 지향하는 세계가 과연 특이하고 드문 시각일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는 것이고, 또 두려운 것이다.

<나대로 선생>, 대로를 걸어갈까

<나대로 선생>은 시사 4칸 만화로서 탁월한 표현력을 지니고 있다. 특별히 톡 쏘는 재능으로 무장하지는 않았으나, 안정된 캐릭터 구도를 바탕으로 한 효과적인 표현법으로 폭넓은 호소력과 시리즈 지속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 속에 무엇을 담아낼지에 대해서는 가면 갈수록 기대심리가 줄어들고 있다. ‘나대로’라는 이름은 ‘大徑大路’에서 가져온 것이다. 정도를 걸으며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담겨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대로가 어느 쪽으로 가는 길인지, 압력이란 도대체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사고방식이 없다면, 그 길은 단지 많은 사람들의 성향에 맞추었을 뿐인 ‘넓은 길’일 뿐이다. 갑자기 내일부터 당장 나대로의 부인이 차 나르기를 그만두고, 나대로와 회사동료가 사회 사안에 대한 이견을 드러내고, 신구세대가 화합하는 장면들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금씩이나마, <나대로 선생>의 세계에서도 갈등과 대화, 합의에 의한 세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시작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품어볼 따름이다.

 

—- 2005. Copyleft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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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thought on “나대로 선생이 꿈꾸는 가부장 유토피아[인물과 사상 2005/02]

Comments


  1. [네이버덧글 백업]
    – freki – 나대로 선생은 사실 불건전한 의미에서 주목하고 있는 만화였기 때문에 꽤 재미있게읽었습니다. 때로는 동아일보의 386c가 더한 시사성을 보여줄때가 있어 이제 나대로선생은 좀 쉬시고 386c가 메인으로 들어가시는게 어떨까라는 망상도 해본답니다. :D
    2005/01/24 02:42

    – ruin – 퍼.. 퍼갈래요 출처는 안적어도 되죠’_’ 안되나요? (된단다) 넵 퍼가겠습니다! 2005/01/24 02:56

    – ruin – 어.. 지금봤다..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 동의..해주세요’_’…… 2005/01/24 03:20

    – 캡콜드 – !@#… freki님 / 사실, 386c와 나대로선생이 같은 신문에 연재중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동아일보의 괴이함을 느낄 수 있죠. 2005/01/24 08:33

    – 캡콜드 – !@#… 참 그리고 맨 밑에 달린 이 글의 라이센스 정보… 이동은 자유라는 말임. 출처는 이게 원래 ‘인물과 사상’ 개제문이고 capcold라는 사람이 썼다는 것이 출처. 아니 사실 네이버 안에서 스크랩 기능으로 퍼가면 출처표기(원 블로그명)가 어차피 따로 신경쓸 필요도 없이 자동으로 들어가지만. 동의없는 개작불허는, 예를 들어 난데없이 이 글이 “나대로 선생 최고~!” 라는 제목으로 둔갑하여 이상하게 재편집되어 돌아다니는 꼴을 보기 싫다는 이야기;;;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인용이나 발췌소개야 어차피 큰 문제 없음. 여튼 최근 다음 RSS넷의 후안무치한 “대규모 블로그 콘텐츠 저작인격권 침해 사태”도 있고 해서, 왠만하면 글마다 라이센스 정보를 따로 삽입하려고 함. 2005/01/24 08:39

    – 정석환 – 잘 봤습니다. “권위에 의한 억압도 싫”지만 “시끄러운것도 싫”고, 결국 “이놈도 저놈도 다 똑같”다는 양비론으로 흘러가는 사고방식은 나대로씨의 세대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닌것 같군요. 2005/01/24 16:18

    – 玄武 – ..나대로 선생은 정말 메세지가 대놓고 욕을 해대는 느낌이 들어서 보기가 민망하더군요. 고바우영감님은 재미라도 줬지만… 2005/01/24 23:00

    – 잠본이 – 이홍우씨 만화는 ‘오리발’에서 스포츠 얘기할 때가 훨씬 재미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5/02/12 1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