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의 현실, 소통의 기술 [자음과 모음R 3호]

!@#… 청소년 인문 격월간지 ‘자음과 모음 R’ 3호 커버스토리 “토론의 기술”에 들어간 꼭지 중 하나. 이전에 올린 소통 관련 글과 한 뿌리 다른 가지의 내용으로, 실제 잡지에 게재된 재구성판(의 원고본의 오타/비문 일부 정정본)이다. 위에 링크 건 버전은 소통의 역할과 방향에 대한 기틀을 다지는 식의 접근이라서, “소통에 관해 어떻게 정리하고 설명해야할지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사람들이나 좋아할 내용에 더 가깝다(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마 그냥 시간낭비고). 반면 편집부의 요청에 따라 재구성한 이번 판본은 틀거리 설명은 대거 압축해버리고, 왜 안되고 있는지 키워드를 뽑는 식으로 “그런 고민 좀 해봐야하지 않을까”라고 제안하는 방식이다. 좀 더 얄팍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흥미’를 끌기에는 더 나으니 조금이라도 더 널리 읽히기에 적합할 듯 싶다.

 

불통의 현실, 소통의 기술

김낙호(미디어연구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어떤 사회에서 자주 거론되는 개념은 주로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다. 민주주의 제도가 미비한 사회에서는 그것을 이루겠다며 누구나 민주주의를 거론하지만, 정작 사회의 당연한 기본전제가 되어 있는 곳이라면 그보다는 구체적 세부 제도들이 오르내린다. 최근 수년간 한국사회에서 ‘소통’이라는 말이 부쩍 흔하게 들리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위정자들이 국민과 소통을 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소통이 부족하다, 소통을 해야 선진사회가 될 수 있다, 주로 그런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소통이 필요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정부가 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를 일정장소에 막아두기 위해 트레일러로 장벽을 쌓은 것이 불통의 상징으로 꼽히며, 연인들이 상대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도, 심지어 그냥 서로 의견이 도저히 좁혀지지 않을 때도 “소통이 안 된다”고 불만을 터트린다. 널리 이야기되는 개념들이 흔히 그렇듯 소통이라는 개념 역시 각자 의미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고 종종 지나치게 포괄적이 되기 쉬운데, 그래도 공통분모를 찾는다면 사안을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는 “규범”과 서로의 말을 효과적으로 전하고 받아들이는 “기술”이라는 두 가지를 담아낸다. 반면 어떤 사안을 말로 조율하지 못하여 겉돌고, 그 결과 서로에게 상처와 경멸만 남기고 흐지부지 묻히거나 결국 아예 강제력으로 겨룰 수 밖에 없게 되는 경우를 불통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더 나은 소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말이 통하지 않는 특정인이나 집단을 지목해서 그들이 소통을 못하는 것이 문제니까 뒤집어 엎어버리자 주장하는 것도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소통에 의한 해결과 거리가 멀다. 그저 “우리 소통합시다”라고 추상적 구호만 외치는 것도 허망하다. 그렇기에 다소 돌아가는 감이 들더라도, 정석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 좋은 소통이란 무엇이고 왜 필요하며, 소통을 불만족스럽게 만드는 요소들은 무엇이 있으며, 사회와 개인이 해야 할 몫은 무엇인가. 한국 사회는 패거리주의가 강하다 빨리빨리 문화다 근대화 망탈리테가 각인되었다 그러니 그것을 극복하자 같은 두루뭉술한 문화인류학적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이면 좀 더 기술적인 설명을 시도하고자 한다.

 

좋은 소통의 조건

좋은 소통을 논하기 위해서는, 애초에 소통이란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인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한된 지면에서 커뮤니케이션학 개론의 몇 개 챕터를 풀어낼 수는 없지만, 압축해서 요약하자면 소통은 인간사회에 있어서 개인, 대인 및 사회적 차원 모두에서 근간이 되어준다. 개인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이해시킴으로써 개체로서의 개성을 확보하며, 사람들이 서로 맺는 대인 관계의 성질 역시 소통을 통해서 결정되며, 사회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역시 소통을 기본으로 한다.

특히 사회 구성 원리로서의 소통이라는 인식은 사회학자들이 여러 가지 매력적 발상으로 풀어온 주제다. 소통을 통한 체계성의 발생으로 인하여 사회가 일반적 자연환경과 분리되어 나간다는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시스템 이론, 사회적 공론을 만들어내는 기본조건이 소통에 있다는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의 공공사안에 대한 참여행동이 소통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듀이의 실용주의, 소통기술을 통해서 공동체 구조가 집단 중심에서 네트워크 중심으로 변하고 있음을 역설하는 웰먼의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 개념 등, 현실사회에 대한 실용적 함의가 만만치 않은 접근방식이 많다. 마치 물질이 분자로 이루어졌듯, 정글을 벗어난 사회적 삶은 소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기능들을 고려할 때, 좋은 소통은 좋은 사회의 기본 요건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민주주의는 소통 없이는 굴러가지도 않을뿐더러, 소통을 추구하지 않으면 애초에 민주주의 같은 것은 굳이 할 필요조차 없다는 점을 직면시켜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냥 때리지 않고 이익을 많이 떨어트려주는 “어진 왕”을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든 진짜로 민주주의를 해보고 싶은지 바닥부터 다시 서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일종의 전사회적 민주주의 재교육인 셈이다.

의미전달이라는 기술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 구성요소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즉 사회적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로 인식하게 되면 좋은 소통이 되기 위해 어떤 가치들을 추구해야할까. 필자는 매개성, 상호성, 개방성이라는 3가지 요소로 종합해볼 수 있다고 본다. 첫째, 매개성은 소통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언어는 물론이고 그림이든 음악이든 몸짓이든 무엇이든, 소통은 뜻을 상대에게 직접 각인하는 것이 아니라 매개된 표현으로 알아듣게 만든다는 의미를 지닌다. 반면 강제나 폭력에 의해 특정 조건에 대한 반응을 각인시키는 것은 소통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짓을 했을 때 말로 이유를 설명하여 못하게 하는 것은 소통이지만, 그냥 몽둥이를 들어 두들겨 패는 것을 소통이라고 인정할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매개라는 것은, 그것이 실체를 반영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A라는 정책에 반대한다”는 메시지 속에는, 그 정책에 반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실제 의지가 있다. 이것은 나중에 이야기할 소통의 현실영향력이라는 측면과도 곧바로 이어진다.

둘째, 상호성은 일방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기술적 개념 자체만 놓고 보자면 일방향이라도 메시지만 전달되면 되겠지만, 현실 사회에서 소통은 거의 항상 어떤 사회적 관계맺음과 결부된 하나의 ‘과정’이다. 예술가와 청중, 정부와 시민, 개인과 개인 그 어떤 관계든, 말하는 이의 건네는 내용 그리고 듣는 이의 그 내용에 대한 반응이라는 두 방향이 함께 한다. 두 방향의 흐름이 더 대등하게 보장될 때 소통이 잘 된다고 일컫어지곤 하며, 그렇지 않을수록 소통이 안 된다고 느낀다. 특히 미디어기술의 발전상황과 그것의 활용문화가 상호성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더욱 불통의 인상은 강해진다. 예를 들어 전국민과 정책 상황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이 말을 탄 전령들이 팔도를 돌며 거리에 큰 종이로 방을 붙이던 시절이라면 어느 정도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을 납득할 수 있었겠지만, 인터넷이 소셜미디어 중심으로 재편되는 2010년에 대통령 국정연설을 일방적으로 라디오 방송으로 한번씩 터트려주는 식이라면 좋은 소통으로 여겨지기 힘들다.

셋째, 개방성이란 소통이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역할의 측면에서 소통은 뜻을 합의하는 과정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참여할 필요가 있는 사람은 원한다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발언이 동등하게 다루어질 필요는 없지만 공정하게 발언기회가 주어질 때 소통으로 여겨지고, 사안에 대해 발언할 필요가 있는데도 발언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게 된다. 특히 사회성원들에게 동등하게 권력을 분산해주겠다고 표방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라면, 잠재적으로 누구라도 참여할 필요는 충분히 있다. 하지만 의결과정의 토론에 중요 당사자들이 참가하지 못하고 특정 진영과 위치에 있는 한 줌의 인력들만이 권력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재단한다면, 밀실행정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충분한 공청회와 환경영향평가, 포괄적 의견조율을 거치지 않고 4대강 시멘트 공사 같은 국가 규모의 대형 토목산업을 추진하는 것이 불통의 전형으로 보이는 이유다.

매개, 상호, 개방이라는 기본가치를 놓고 볼 때, 사회적으로 소통을 망가트리는 요소들 역시 더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구조적 요인, 사고 체계, 그리고 기술적 진행 방식들이 섞여 있는 문제들 가운데 필자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5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불통1. 소통에 영향력을 부여하지 않는다

좋은 소통은 현실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소통의 매개성은, 소통이 그 자체로는 비강제적이면서도 실체를 대신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가치다. 공공 사안의 의결이든 개인의 공감대 획득이든, 현실에 영향을 줄 것으로 보여야 비로소 사람들은 소통이라는 방식을 활용한다. 현실 영향력이 없는 소통은 만약 이루어지더라도 단순한 말의 향연으로 끝날 수 있으며, 토론이 오가도 의견의 조율이나 정보의 수용이 이루어지기보다 쉽게 공회전으로 빠진다. 예를 들어 지역에 기피시설을 세우는 것에 대해 주민들과 소통을 해본다고 생각해보자. 실제 담당자들이 자리에 배석하는 충분한 양과 질의 공청회, 세부 정책 수립에 도움이 되는 구체적 내용의 공개토론, 그런 논의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으면 현 행정세력에게 합리적 불이익을 가할 것이라는 압력의 표명,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공단체의 투명한 자료 공개 등이 더 나은 소통의 정석이다. 반면 현실을 보여주는 자료도 미비하고 공청회도 형식적이며 너희들이 어디서 게시판질하면서 반대하든 말든 우리는 상관없이 강행한다, 하지만 우리의 홍보광고를 열심히 구경해봐라 뭐 그런 식이라면, 그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물리력까지 동원해서라도 반대하고 나설 수 밖에 없어진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오늘날 비일비재하다.

모든 불통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말만 그랬지 실제로는 별반 소통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통에 현실영향력을 충분히 부여하지 않는다. 즉 사회적 사안 해결의 필수 조건으로 충분히 제도화시키고 강제하지 않으며, 또한 개개인들도 사안에 대한 판단을 함에 있어서 얼마나 좋은 소통을 하는가를 그다지 보상이나 처벌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총선에서 여당인 H당의 서울시장 O후보는, 진보를 표방하는 소형 야당의 R후보가 나오는 TV토론 프로그램이라면 자신은 참석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하게 입장을 밝혀서 결국 R후보와 토론을 회피함은 물론 R의 출연까지도 사실상 막아냈다. 그동안 대형 야당인 M당은 서울시장 후보를 경선으로 뽑는 과정에서, 인지도는 높지만 세부정책 준비는 물론 토론기술 역시 부족한 H후보가 각종 토론회를 적극적으로 무산시키며 결국 경선후보가 되었다. 두 경우 모두 민주적 대표 선출이라는 기본과정에 있어서 소통을 열심히 거부한 이들인데, 딱히 그것으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없다. 제도적인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유권자들마저 정권심판이니 하는 다른 것들에 집중했지 소통 거부를 주요 판단기준으로 꼽지 않았다. 토론을 거부해도 별반 영향력이 없는데 굳이 힘들여서 토론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고급스러운 소통으로 세부 정책을 논하고 장단점을 비견하며 의견을 조율하고 판단을 돕기보다는, 물량공세 홍보전으로 단순화된 구도와 적당한 이미지만 뿌려대는 것이 나은 선택이다.

소통의 영향력은 제도화하여 강제할 때 가장 뚜렷하게 확보될 수 있는데, 제대로 된 소통을 거치지 않으면 원하는 의결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식이다. 혹자는 민주주의의 핵심은 다수결이라는 이상한 신앙을 신봉하는데, 진짜 핵심은 그런 결과 이전에 이루어지는 충분한 소통과정이다. 소위 ‘국회 날치기’를 욕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국회의원들이 몸싸움을 벌이기 때문이 아니다. 입법내용에 대해 충분히 전문적 내용조율을 거쳐서 의원들, 관련인들 및 국민들의 합의를 이끌어낸 후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권력구도에서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이들의 이해만을 반영하여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날치기에 대한 구체적 처벌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애초에 제도적 조건범위 내에서 악용하기에 날치기이므로 처벌의 종류는 좀 더 자세한 고민이 필요하지만) 그런 구조 속에서 소통은 여전히 별 것 아닌 것이 된다. 소통도 다른 모든 사회적 절차나 장치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당위가 아니라 시스템적 조건으로 만들어야만 작동하게 되어있다. 필요하면 도덕적 당위마저 시스템적 조건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회적 정신구조를 걱정하거나 미디어통로를 하나 두개 더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제도와 관행 자체를 하나씩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늘 제자리걸음이다.

 

불통2. 전문성의 경시

좋은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소통 과정에서 오고 가는 정보의 품질이 무엇보다 좋아야 한다. 안건과 관련된 유용한 사실들과 관점들이 사람들이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으로 정리되고,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런 것이 가능하려면 가장 먼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정보 제공자들의 전문성이다. 사회적으로 소통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지목하고 설명하며,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설명하고, 어떤 선택이 왜 중요한지 누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시야를 제안해야 한다. 전문성은 소통의 상호성과 개방성이 단순한 혼란으로 이어지지 않게 소통되는 내용의 갈피를 잡아준다.

하지만 이런 전문성은 제공자의 노력과 그 정보를 받아들이는 이들 양쪽 모두가 노력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전문성이 있는 이야기일수록 온전히 알아듣기 위해 필요한 배경지식이 늘어나는 경우가 흔한데, 그것이 전제되지 않았을 때 소통이 끊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따라서 반드시 소통해야 하는 내용이라면 배경지식이 덜 필요한 설명방식으로 바꿔보거나, 배경지식 자체를 추가로 이해시키는 또 다른 소통이 필요하다. 반면 수용자들 역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그저 ‘잘난체 함’으로 인식하기 쉽다. 물론 전문성을 참칭하여 지배계층 지식인으로서 거들먹거리는 경우가 적은 것도 아니고, 오늘날 정보환경에서 그런 이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전문성이 떨어지는지 반증되는 사례도 매일 등장하기에 충분히 생겨날 수 있을 법한 편견이기는 하다. 하지만 전문적 내용의 존재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면 소통의 질이 나아질 리가 없다.

전문성의 무시가 사회적 소통을 엉망으로 망가트린 극명한 사례는 2005년의 줄기세포 조작사건이었다. 과학의 전문적 권위를 가장한 뒤에 연구조작이라는 비전문성이 있었고, 탐사저널리즘 프로가 오히려 전문적 과학적 검증의 기초에 입각하여(“만들었다는 그 결과물을 실제로 보여달라”) 뒤집고, 과학의 진실과 국민적 염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대다수 다른 언론사들의 비전문적 보도가 넘쳐났다. 그 와중에서 많은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브릭 같은 과학자 커뮤니티에서 계속 축적해가는 과학적 반증근거들을 경청하기보다는 세계가 자랑스런 한국의 과학적 성과를 음해한다는 음모론을 열심히 전파하며 애초에 문제를 제기한 방송에 광고 중단을 압박했다. 아직도 당시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묻어둔 사람들이 넘쳐나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대형 소통불량 사건이었는데, 그 근간이 바로 전문성에 대한 인정 부재다. 만약 실험자의 검증 의무가 현대 과학의 기본 소통 규칙이라는 분야 전문성을 사회가 바로 납득했다면, 혹은 사실을 캔 방송이 과학프로는 아닐지언정 문제제기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음을 인정했다면 이것이 여타 과학 사기사건보다 더 크게 혼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전문성을 인정하는 정신을 장착하라는 재촉은 덧없다. 소통에서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한 구조를 만들어 그런 결과를 유도해내야 한다. 한 가지 방법은 어떤 분야 또는 사안에 대해 여러 전문성의 깊이 층위들에서 나오는 담론들을 서로 긴밀하게 교류하게 만드는 미디어 환경이다. 전문적인 이야기의 대중적/일반적 함의가 풍부하게 유통되고, 다시금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살이 붙어서 전문적 정책으로 가게 만드는 일종의 “지식생태계”다. 여기에는 여러 전문성과 대중성 층위 사이에서 교량역할을 해주는 저널리즘의 역할이 특히 중요한데, 유감스럽게도 언론사도 지원기구도 교육기관도 기자들의 개별 분야 전문성에는 투자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불통3. 2항 대립과 무오류 강박

흔히 한국사회에 대해서 이념과 명분이 과잉이라고 지적하는 칼럼들이 적지 않은데, 실제 목격되는 현상은 단지 이념을 표방한 간판만 과잉이고 실제로는 과소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마치 너도나도 한국의 엄청난 교육열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대다수가 추구하는 것은 교육이라는 개념에서 떠올리는 지적 수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롯이 “입시경쟁에서 승리하기”에 가깝듯 말이다. 만약 이념의 논리적 완성과 명분의 사회적 합치성을 열심히 추구했더라면 개발독재를 그리워하는 자칭 ‘보수’는 있을 수도 없고, 종교단체화하는 주체사상 추종자들이 ‘진보’를 운운하는 일이 생길 수 없다. 그저 이념과 명분을 진영을 만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뿐이다. 특히 가장 널리 사랑받는 진영구도는 2항 대립으로, 세상을 내 편과 상대 세력으로 나누어버린다. 2항 대립이 매력적인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우선 무엇보다 복잡한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 쉽게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고, 외부의 적을 상정함으로써 내 편으로 규정한 이들에게 하나로 묶일 것을 종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세상사의 사안 대부분은 꽤 여러 가지가 함께 얽혀있다. 사안에 관여된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작용하는 제도나 기술적 요소들도 뒤엉킨다. 각각의 요소만 떼놓고 보면 단순명쾌할 수도 있지만, 서로 얽히며 상호작용하다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들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복잡성을 무시하고 2항 대립으로 단순화할 경우, 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정치 사안에 대해 오가는 이야기들, 특히 정당 지지에 대한 이야기들은 태반이 이 문제를 안고 있다. “반**”의 기치로 서로 다른 사회적 목표와 성립배경을 지닌 정당들에게 정책 연대 이상의 무조건적 선거연합을 부르짖는 목소리에 감동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소통을 통해 차이를 조율하고 최선의 합의를 찾는 정석적 접근은 발 딛을 곳이 없다. “이기적인 떼쟁이들 대 의로운 경찰”과 “소외된 억울한 시민들 대 폭력정권”의 각자 생각하는 2항 대립 세계관만 존재한다면, 용산 철거민 참사는 폭넓은 사회적 소통에 의한 현실적 함의와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고 언제라도 다시 반복될 수 있다.

그렇기에 사안을 파악하려면 여러 관점을 모아 비견하는 것이 중요하며, 단순한 찬/반 따위가 아니라 각자 바라보는 영역의 다름과 상호작용을 생각해야 한다. 세부적 디테일이 조건에 따라서는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의외로 서로 다른 사안에서 큰 그림을 보면 보편적 패턴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런 맥락 속에 있을 때 비로소 발전적 해결을 위해 더 적절한 입장을 골라내거나 새로 만들어 취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러 입장을 접해볼 만한 경로가 없다면 모를까, 무슨 일에 관해서든 빠르게 정보가 넘치는 세상이니 충분히 추구할 만 하다.

2항 대립이라는 동전의 반대면에는 무오류에 대한 강박이 있다. 적과 나, 둘이 싸우는데 나에게 오류가 있으면 상대가 옳은 것이 되어 패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통에 개방성이 필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현행 사회 시스템 가운데 그나마 가장 효과적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오류 수정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의결의 속도나 파격성은 떨어질지라도, 크고 복잡하게 발달한 사회일수록 어디선가 발견될 문제점을 수정할 수 있는 장치가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소통을 통한 오류 수정이 가능하기 위한 첫 번째 전제는 “내가 틀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흔히 거론되곤 하는 ‘성찰’이라는 개념의 핵심이기도 하다). 각자가 그런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상대의 오류를 수정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물리적 싸움을 필요로 하게 된다.

자신을 고쳐내는 능력이란, 자신의 주장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근거가 뒤집히면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유도를 배울 때 안전하게 넘어지는 낙법을 가장 먼저 익히듯, 소통에서는 안전하게 틀린 부분을 도려내고 판단을 고치는 논리의 낙법이 필요하다. 그 능력이 없을 경우 자신은 무오류여야 한다는 착각에 빠져서 자기 입장의 오류를 증명하는 근거들을 부정하고, 그 결과 대결적 아집이나 심한 경우 음모론에 빠진다. 정상적인 소통은 물론 불가능해진다. 자신은 무오류니까, 반론은 나를 음해하는 것이다. 전투상황이 되기 때문에, 더욱 내 편을 결집해서 그들을 배척해야 한다. 점점 내용은 선명하게 극단화되며, 피해의식은 커진다. 더욱 그 기조에 맞는 더욱 극단적인 지지자들만 남게 되고, 그게 다시 더 극단적인 자기 침작으로 돌아온다. 이런 하향나선 과정을 몇 바퀴 돌면, 점점 더 가속도가 붙어서 웬만한 노력으로는 더 이상 거스를 방도가 없다.

과다 경쟁을 유도하는 사회 환경일수록, 소통에서 2항 대립과 무오류 사고방식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은 쉽지 않다. 추상적으로 다양성과 성찰의 미덕을 이야기해봤자 경쟁이라는 현실에서 승리하기 위한 인지적 효율성을 버리게 하지 못한다. 현대 사회의 복잡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오류를 제 때 수정하지 않으면 그 쪽이야말로 오히려 개인과 그 사회가 경쟁에서 패배하는 길이라는 식의 설명으로 경쟁 프레임을 역이용하는 방법이 차라리 조금이나마 실용적이지 않을까.

 

불통 4. 이치와 룰의 부족

축구를 처음 보는 이에게 설명할 때 흔히 시작하는 방법은 “공을 손으로 잡지 않고 운동장 끝의 골대에 넣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왜 축구가 재미있는지, 훌륭한 플레이에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수 있는지 알려줄 길이 없다. 사실 축구는 핸들링 이외에도 시간제한, 라인아웃, 선수 교체 규정, 오프사이드 등 수많은 룰이 주어진 상태에서 실행되는데, 그 룰들이 있기에 멋진 플레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가능해진다(그런 것이 없는 동네운동장의 ‘뻥축구’를 상상해보라). 개인 기량과 팀 전술을 공정하게 발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소통에도 비슷한 이치가 있다. 다만 소통에서 공정성은 모든 이들에게 무조건 모든 것을 보장한다는 것이 아니라, 뛰어들 수 있는 기회를 주며 내용과 무관한 요소에 의해 부당하게 차별받지 않도록 한다는 선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소통의 과정에서 더 나은 발상을 돋보이게 만들고, 문제점을 비판하여 탈락시킬 수 있는 기준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선별 또는 조율 기제 자체가 없다면 그것은 만인이 각자 허공에 소리를 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참여와 판단이라는 공정성을 추구하기 위한 기제가 바로 ‘이치’이며, 이치를 극대화하기 위한 약속이자 방법론이 ‘규칙’이다.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이치와 규칙을 지니는 소통은 소통하기 전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낳고, 반면 그런 것이 없다면 단순한 아우성과 끝나지 않는 막말 싸움으로 귀결되곤 한다. 온 주변에 넘치는 온라인 게시판의 정치관련 토론을 떠올려보자. 비교적 전문분야가 뚜렷하고 커뮤니티 결속력이 강한 게시판이라면(예를 들어 BRIC 같은 곳이 과학정책에 대해서 토론한다든지), 사실성, 논리적 정합성, 정책적 실용성 같은 것을 이치로 삼을 수 있다. 나아가 근거의 거짓이 드러나거나 논리로 밀리면 자기 의견을 수정한다는 과학계의 일반적 규범을 암묵적 규칙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전제를 공유한 상태에서 토론을 하면 결국에는 멋진 토론정리 포스팅이든 유용한 정책제안이든, 온라인 협업에 의한 건설적 생산물 탄생하곤 한다. 그런 것이 없는 곳에서라면, 대부분의 토론은 결국 지리한 답글 말꼬리 잡기와 대화 중단 후 자신의 지지자들만 데리고 혼자 승리를 선언하는 “정신승리”로 귀결된다.

이치와 룰을 지키는 아름다운 정신을 찬양하는 것도 좋지만, 늘 기억해야할 것은 그것들은 제도적으로든 문화적 압박으로든 두 가지의 결합으로든 일정 부분 강제될 때에만 자리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사회의 전반적 법제도도 그렇듯, 개별 소통 상황에서도 의식적으로 그런 이치와 룰을 구체화하고 끄집어내어 준수하도록 압박하는 구조를 만들 필요가 있다.

 

불통5. 상호성의 지속 노력은 힘들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소통에서 상호성을 지속하는 것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사귀던 사람과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차버릴 때는 이별 선언을 하고 연락을 두절하는 것이 편하지, 왜 헤어지는지 상대방과 수차례에 걸친 토론을 주고받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다. 정치인의 공약도 마찬가지라서, 공약을 선언하여 당선된 후에는 되는 부분은 하고 못하겠다 싶은 부분은 그냥 하지 않는 쪽이 지속적으로 모든 사안을 유권자들과 상호간 대화를 나누며 납득시키는 것보다 쉽다. 물론 지속노력을 들이지 않아서 상호성이 끝나는 순간, 좋은 소통 역시 끊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길거리 시위의 진로를 막기 위한 트레일러 바리케이드가 ‘산성’으로 조롱당하고, 반론 발언권이 없는 “국민과의 대화” 같은 것들이 불통의 사례로 꼽히며 불만의 대상이 되는 이유다. 중간에 다른 근거가 나와도 나는 옳고 오류가 없다는 독선, 열띤 논쟁 와중에 자기 블로그를 폐쇄하고 ‘잠수’하는 것, 정책 공청회의 일방적 축소 내지 취소, 토론을 빙자한 일방적 자기 홍보 등 문제 사례는 끝도 없다.

상호성이라는 가치에 기반한 소통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한쪽에서 발언한 후 그것에 대해서 반응이 돌아오는 것을 막거나 피하는 행위를 방지해야 한다. 물론 사람들이 특정한 표현을 하거나 사안논의에 대해 할애할 수 있는 시간과 노력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개개인이 늘 모든 반응에 응대할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언제라도 다른 이들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소통 통로를 열어두고, 의사결정 직전까지는 최대한 그간 모인 반응들을 취합하여 반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며, 소통과정의 규칙을 세울 때는 1회적 질의와 해명보다는 그에 대한 재반론과 추가 논의 등 상호대화의 틀을 기본으로 잡는 것이 낫다. 이런 것을 등한시하면 결국 소통의 흐름이 금방 끊길 뿐이다.

블로그에 간단한 만화 감상을 올릴 때, 단순히 “이거 짱 재미있음”을 외치며 이미지 수십 개를 올려놓을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도 그 작품을 구해 읽을 매력을 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감상글을 가다듬으며, 다른 작품들과 비교당할 때 논리적으로 변호하고, 계속 다른 의견도 답글로 달 수 있도록 열어두는 것이 더 나은 소통이다. 사회운동을 하고 싶다면, 나는 분노했다 다들 나를 따르라 외치며 조잡하고 자극적인 설명용 이미지를 뿌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왜 이런 운동이 필요한데 어떻게 여러분도 참여할 수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하며 직접 살펴볼 수 있는 원본 자료들을 제공하고, 반론에 대해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받아들일 부분은 수정하는 것이 소통으로서는 단연 더 낫다. 일방적인 이미지가 강한 홍보나 공지라고 할지라도, 각각의 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해도 그것들이 속해 있는 캠페인 과정 또는 정책집행 과정이라는 차원에서는 이런 원칙들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

 

소통의 기술, 무엇을 훈련할 것인가

지금까지 불통을 만드는 문제요소들을 살펴보면서,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주로 구조적 요소 같은 것들을 언급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들이 만들어갈 소통 상황 – 개인적 대화든, 커뮤니티 운영이든, 훗날 기업이나 공공행정에서 책임자가 되어 보다 큰 사회를 다루든 – 에서 다소간의 지향점으로 염두에 두면 된다. 하지만 그와 함께, 지금 당장 개인으로서 소통의 기술을 훈련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무엇이든, 개인의 능력과 사회적 구조가 함께 맞물릴 때 원활하게 작동하니 말이다.

소통에 필요한 첫 번째 기술은 사실과 의견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된다. 여기에는 수집력과 선별력이라는 두 가지 능력이 포함된다. 수집력은 어떤 사안에 대해 적절한 판단을 내리기 위한 정보를 충분히 많은 출처로부터 끌어 모으는 능력이며, 선별력은 모아낸 자료를 솎아내서 가장 질적으로 좋은 내용으로 자신이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양을 남겨내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사례를 들자면 수집력은 적절한 검색어로 여러 검색엔진을 효과적으로 돌려서 정보소스를 뽑아내는 능력에 가깝고, 선별력은 그렇게 뽑아낸 2만개의 결과 중 실제로 읽어볼 20개를 추려내는 능력에 가깝다. 어떤 사안에 대한 소통에 참여하고자 하면서 관련 정보 검색도 잘 하지 않고 그나마 그 중 내용은 별 볼 일 없는데 포장만 자극적인 정보만 읽는다면, 예상되는 결과는 명백하다. 미디어를 통해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에는 선별력이 더 중요하게 부각되곤 하는데, 이미 과거에 많은 논의가 되어 거의 결론이 난 사안이 다시금 옛날의 문제제기만 다시 ‘펌’ 당하며 인터넷상에서 화제로 떠오르는 사례들이 가끔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수집력 역시 여전히 훈련이 필요한 영역이다.

나아가, 정보들을 연결하고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이 더해져야 한다. 각각의 정보가 사안의 어떤 부분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러 입장들은 어떤 맥락에서 서로에게 관여하고 있는가. 소통은 하나의 과정이고, 그 과정에 의미 있게 뛰어들기 위해서는 그간 논의의 흐름과 구도를 읽어낼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정보의 출처를 확인해두는 버릇 역시 중요하다. 아무래도 현대 사회에서는 접하게 되는 정보의 대부분을 미디어를 통해서 전달받게 되는 만큼, 정보 수집력, 선별력, 맥락 파악 능력 등에 대한 교육과 훈련 역시 주로 ‘미디어 리터러시’ 분야에서 주로 다루고 있다.

소통의 표현 부분에 있어서는 고등학교 논술교재의 논리 오류 목록 같은 것도 나름대로 유용한 부분이 있을 수 있겠지만, 논리구조가 덜 세련되었거나 아예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경우에서도 널리 범할 수 있는 몇 가지 설명방식의 보편적 오류를 피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첫째는 비유나 개념어를 내용설명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비유는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의 어떤 특성을 좀 더 친숙한 어떤 것으로 흥미롭게 포장하여 관심을 끌어오는 것이지, 실제 설명이 아니다. 개념어는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의 복잡한 실체 가운데 가장 특징적이라고 판단한 일부를 추상화한 것인데, 이것 역시 이해를 위해 단순화한 공식이며 딱히 개별 사례의 내용 자체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비유나 개념어로 내용설명을 충분히 소통했다고 착각하는 순간이 서로의 의미가 어긋날 가능성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둘째는 가정을 결론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논의가 길어질수록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데, “만약 한민족이 바이칼까지 퍼져있었다면…” 으로 논리를 쌓아가기 시작했으나 결론에 도달할 때 즈음에는 “그런데 대쥬신제국의 광활한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가 되는 식이다. 가설연역법을 시도하다가 중간에 잊어버린 격인데, 그 결과 당연히 논의는 산으로 간다. 셋째는 규범적 신념과 물리적 현실을 착각하는 것으로,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믿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라고 전제하는 오류다. 강력하게 지지하는 대상이 있기에 모든 근거를 그 믿음에 쏟아 붓곤 하는 이들이 흔히 범하는 문제다. 자신과 타인들이 이런 식의 오류들을 범하려고 할 때는 적절히 지적해서 방향수정을 해가는 소통 관리가 중요하다.

또한 논의의 흐름을 끌어가는 것도 중요한 소통 능력이다. 당장 훈련해서 일상에서 활용해 볼 만한 것으로 소통을 지속시킬 수 있는 예의, 자신을 고쳐내는 능력, 그리고 소통 참여자들이 함께 득을 보도록 하는 능력에 관한 기술을 제안한다. 특히 예의에 관한 기술은 바로 내용 바깥의 것으로 상대를 공격하지 않기다. 주장이 아니라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실생활의 많은 장면에서 소통을 시궁창으로 몰아넣고 단절시키는 일등공신이다. 그 사람이 이전에 했던 발언들을 근거로 비판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표현하는 내용과 관계없는 경우에도 출생지, 성격, 성별, 종교, 국적, 외모 등을 바탕으로 비판하면 소통 끝 싸움 시작이다.

이런 능력들을 향상시키기 위한 훈련이라면, 당연히 실제로 사안에 대한 논의에 직접 뛰어들어보는 것이 가장 좋다. 그 주제는 가능하면 효능감이 있는 것, 즉 논의를 통해서 실제로 어떤 가시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좋다. 소통능력을 훈련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철학적 논제보다도 학급 환경미화에 대한 논의가 더 의미 있을 수 있다. 소통이 그저 말의 향연이 아니라, 현실에 관여하여 무언가를 움직인 경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또한 논의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한 익명 리플로 단발마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블로그가 되었든 더 간략한 트위터가 되었든 일관된 정체성(꼭 실세계의 자신과 동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이라는 기반 위에 자신의 사고의 맥락을 축적해보는 것도 좋은 훈련이 된다.

세부적인 실습 방법들과 관련해서는 다른 더욱 좋은 글들이나 프로그램들이 많은 관계로, 여기서는 그런 곳에서 소개하는 훈련들을 시도해보면서 지금껏 장황하게 설명한 좋은 소통의 요소라든지 소통 능력의 종류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고 좀 더 능동적으로 달려들어 보라는 이야기 정도로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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