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물과 형사물 – 무림수사대 [기획회의 323호]

!@#… 1.단행본으로 나오기까지 참 오래 걸렸더라. 2.표지 디자인이 무척… 아쉽다.

 

무협물과 형사물 – [무림수사대]

김낙호(만화연구가)

걸작 무협영화 [동방불패]의 급조한 속편 [동방불패2]의 시작 부분에, 한 서양인과 무림인이 나누는 인상적인 문답이 있다. “강호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를 나타내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강호는 어디에나 있다”고 대답하는 대목이다(세부 용어는 조금 달랐을 것이다). 무협물의 배경인 ‘강호’는 그렇듯 단순히 공간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속성을 나타낸다. 강호는 사방 각지 어디든 사람 사는 곳에서, 사회적 제도화가 덜 되어 있는 다양한 속세의 다툼들이 벌어지는 활동 층위다. 그리고 무협물은 그런 강호에서 초월적 수준의 신체적 무력을 지닌 ‘무림인’들이 겪는 모험이다. 그렇기에 긍정적으로 보자면 관의 힘이 온전한 정의를 보장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무림인들이 각자의 의지로 나름의 정의를 관철하는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미화된 조폭들의 역학 관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강호의 그런 속성이, 현대를 배경으로 무협을 재해석하는 매력적 상상에는 방해가 된다. 우리가 흔히 아는 현대의 선진 사회는, 공권력이 아닌 사적 폭력에 의한 정의를 (정당하게도) 금지하는 것이 큰 원칙이다. 그렇기에 만화 [서울협객전]의 경우처럼 무림인들이 사실은 일반 사회와 별개로 숨어서 활동한다고 설정하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아니면 한번 인간 세상이 멸망해서 문명이 후퇴하는 바람에, 다시 무협물의 세계에 가까운 야만이 돌아왔다는 설정도 [남자이야기]에서 활용한 바 있다. 하지만 여전히 아쉽다. 공개적으로 무협이 일상적 현대사회의 시스템과 융합된, 더욱 일상화된 현대배경 무협물은 불가능할까.

[무림수사대](이충호 / 애니북스)의 무대가 바로 그런 것이 가능해진 세상이다. 무협물의 무예가 지니는 강고한 초월적 기술들은 이미 공인되어 있고, 무협지의 문파들에 해당하는 파벌들이 제도권 세력이 되기 위해 적응한다. 그리고 공권력 또한 유능한 무림인들을 모아서 특수 조직인 ‘무림수사대’를 만든다. 여전히 은둔한 지하 고수들의 결투, 세력들간의 마찰과 암투도 횡행한다. 공권력측도 무림을 받아들인 상태를 만들어냄으로써, 가장 전면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현대적 사회를 무협의 강호로 탈바꿈시키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이런 세계관 위에서, 작품은 무협물과 형사물의 성공적 교배를 이뤄낸다. 줄거리는 무림수사대라는 경찰팀이 5대신군으로 칭해지는 대형 문파의 수장들에 대한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며 힘을 탐하는 욕망의 추악함, 과거의 상처, 계속 이어지는 동료애, 인격적 성장 등을 겪어나가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전 세대부터 이어지는 원한과 복수의 굴레, 기연을 통한 무예의 성장,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는 정파들의 암투 등 잘 짜여진 무협물이 일반적으로 담아내는 요소들을 모두 담아내면서, 기본 뼈대는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의 단서를 잡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직면하고 점차 큰 음모를 깨달아가는 형사물을 따르기도 한다. 두 장르의 재미요소를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배합하는 솜씨는 전례를 떠올리기 힘들 정도다. 여하튼 무력으로 제압해버리면 인정받곤 하는 무협물의 대결 룰과, 영장과 증거를 얻어내야 하는 형사물의 현대 공권력 룰이 어색함 없이 공존한다. [무림수사대]는 분명히 분방한 상상력의 판타지인 무협물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현실감을 준다. 생각해보면 원래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강호의 속세적 혼란과(“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발달한 사회 시스템이 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쉽지 않은 과제를 풀어가기 위한 구심력을 제공하는 것은 역시 탁월한 캐릭터 구도 구축이다.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열혈 경장 모지후와 세파에 닳아 냉철한 백운 팀장이 만들어내는 유사 사제관계, 모지후의 과거를 장식하는 사형, 사매와의 미묘한 삼각관계, 연쇄살인자와 5대 문파, 무림수사대 사이의 긴장감 등 다양하게 서로 충돌하거나 이끌어주는 관계들을, 섣부른 전복적 상상으로 비틀려다가 체하기보다는 장르적 공식들을 통해 자연스레 소화해낸다. 그들이 펼치는 관계 속에서 주인공은 성장하고, 큰 의미에서 자신의 과업을 받아들이게 된다. 깊은 원한은 그보다 더 깊은 우정과 서로에 대한 신뢰를 통해 극복해 나아가고 권선징악과 속죄가 이뤄진다. 하지만 역시 명작 무협물과 명작 형사물 양측에서 종종 그렇듯, 여전히 강고한 세상의 벽과 허망함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해당 장르들에서 바라는 재미 요소고, 각각의 합 이상의 것을 이뤄낸다.

다만 장르적 혼합을 하면서 모든 것을 충족해낸 것은 아니다. 공권력화된 무림인들과 기업화하는 무림 문파들 사이의 갈등은 이야기의 중심축에 가까울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지지만, 무예와 거리가 먼 일반인들과 무림인들 사이의 인식 괴리는 상대적으로 등장이 적다. 초능력 슈퍼히어로들을 제도권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소재를 다루는 미국권 만화가 적지 않은데, 무협물의 무림인들도 그들과 비슷한 존재니까 말이다. 장르 혼합으로 의외로 현실적인 세계를 만들어냈으나 각 장르에서 전개하는 줄거리 이상의 세계관 다듬기까지는 아직 부족했던 셈인데, 이를 더욱 심화시키는 속편을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역시 주제나 세계관이라는 알맹이도 알맹이지만, 무협물에서 재미를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예의 박진감 넘치는 대결이다. 적절한 수준의 비급과 필살기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고, 문파들 사이에 사용하는 무예의 차이도 뚜렷하게 부각된다. 여기에는 작가 특유의 탁월한 역동적 신체묘사와 함께, [남자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남성적 비장미가 넘치는 대사와 급작스런 등장 방식들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결투는 과장된 감정묘사보다는 확실한 동작과 비약적 호흡으로 이뤄져서 더욱 긴박감을 만들어낸다. 스타일적으로도 느와르물을 쉽게 연상시키는 간략한 선과 강렬한 흑백대비로 일관하고 있으며, 특히 주요 캐릭터와 이야기의 분위기에 맞추어 전체적 색조를 조절하는 세심함을 보이고 있다. 원래 90년대 소년잡지만화의 스타작가가 웹툰 연재의 일반적 관례에 맞추어 작품 전체를 올컬러로 작업한 첫 작품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잘 통제된 작품이다(사실 그렇기에 수년전 연재 당시의 스타일과 완전히 달라진 단행본의 표지 그림들이 어색해 보이는 감이 있다). 웹 연재시 스크롤 방식에서 구현되었던 시원한 칸들이 페이지에 재편집된 상태에서는 자잘하고 급박한 칸 충돌과 커다란 장면의 연속 사이 다소 애매한 수준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도 또 다른 작은 아쉬움이다.

무림수사대 박스 세트 – 전4권10점
이충호 글 그림/애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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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68년, 5월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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