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pcold.net에서 리플 제로인 경우가 은근히 적지 않은, 출판전문저널 기획회의의 연재 만화 서평들. 설마 이 작품에도 무플사태가 벌어지지는 않겠지!!! (은근히 신경쓰나…?)
진화하는 영혼은 진행형 –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김낙호(만화연구가)
육체의 진화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아주 극단적인 창조론자가 아니고서야). 어쨌든, 주어진 환경에 대한 효율적인 적응이라는 비교적 강력한 기준이 있기에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낌이 뚜렷하다. 그 속에는 “만약 내 목이 더 길었다면 저 나뭇가지 위의 열매를 따먹어서 생존을 할 수 있을꺼야” 같은 욕망의 규칙도 쉽게 들어선다. 하지만 영혼의 진화라면 어떨까. 도대체 영혼이 진화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할 것인가. 보다 완전한 인격체가 되는 것 같은 편리한 대답 정도로 만족할 만큼 만만하지 않다. 어떤 이들은 사람들 사이 모든 단절의 벽이 없어져버리고 모두의 영혼이 하나의 군집체로 융합하는 상상을 발휘하기도 했고, 순환 속에서 카르마의 적립을 통한 영혼의 해탈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상, 아마 진화하고 있는 영혼이 바로 자신이라 할지라도 영혼의 진화가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그저 나아간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인식하고 있고, 아마도 육체의 제한과는 달리 여러 시대를 초월하며 과정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사연을 겪고, 자연의 여러 면모들을 느끼며, 세상에 대한 여러 생각과 느낌들이 퇴적된다. 해탈이나 최종융합 같은 ‘끝’이 오기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느릿느릿 현명해져 갈 따름이다.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권교정/ 2권 발매중 / 길찾기)는 우주정거장 함선 디오티마호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을 다루는 만화다. 그 곳의 함장 나머 준은 아름다운 외모와 달리 털털하고 수더분한 성격의 소유자다. 젊은 나이에 함장으로 들어왔으며 이력도 불분명하고 시도 때도 없이 몰래 낮잠을 자고 일을 땡땡이치지만, 육체적 나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의 깊이와 세상을 보는 관점을 지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진화하는 영혼”의 소유자다. 그 뜻을 담고 있는 단어 ‘디오티마’는 사실 원래 그녀의 오래 전 이름이었고, 어떤 시대에 어떤 육체로 살아가고 있든지 간에 그 이름이 때로는 별명, 그리고 이번 생에서는 자신의 분신격인 우주정거장의 이름으로 따라붙는다. 현재의 나머 준이 되기 26년 전에는 디오티마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 선장이었고, 현세에도 그 관계를 아는 이들이 소수 존재한다. 어떤 육체로서 살든 그 영혼은 생명으로 충만한 지구를, 그 지구를 바라보는 거울 같은 달을, 이 모든 것을 담아내는 우주를 온전히 느껴보고자 한다. 그렇기에 그런 그/그녀를 동경하던 우주선 회사 사장은 함선을 달과 지구 사이의 중력 중립지대인 라그랑쥬 포인트에 배치하여 태워 넣었고, 그 곳에서 여러 사람들과 사연을 만나며 천천히 영혼은 진화를 계속한다. 애틋하게, 무심하게, 유쾌하게.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는 SF 설정을 제대로 풀어나가고 있다는 측면에서, SF를 표방하는 여타 많은 순정만화들보다 특출난 구석이 있다. 사실 많은 우수한 한국 순정만화들은 SF를 이야기할 때, 그것을 순정만화 특유의 분위기와 감성적 주제 전달을 위한 운명적 굴레나 약간 특이한 이질적 환경 정도로 치부하곤 했다. SF의 소재들을 차용하더라도 과학이라는 요소를 이야기의 일부, 작품 속 세계의 규칙으로 흡수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지극히 현실적인 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우주개발 시대이며, 중력이라는 물리적 법칙이 인종을 나누고 신체조건을 가르는 세상이다. 우주개발 기업들의 산업적 논리가 상충하며, 작중 인물들은 피상적 관계의 구름이 아니라 굳건한 사회적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많은 ‘남성’ SF만화들이 빠지곤 하는 설정 중심주의의 함정도 동시에 피하고 있다. 세부적 설정과 나름의 고증에만 지나친 신경을 써서 세계 자체가 주인공이 되고 끝나버리는, 그래서 정작 사람들의 이야기는 김빠지는 폐단에서 벗어나 있다. 예를 들어 윤회라는 신비주의적 테마가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굳이 과학적 개념으로 풀어내기 위한 무리수로 쓰지 않고 있다. 더 많은 사람 사이의 만남과 시간의 흐름을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로만 활용하는 식인 것이다. 이 속에는 시공간 개념을 스케일 크게 재해석하는 정통파 고전 SF 소설들의 감수성이 녹아들어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작품의 상상력을 매력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바로 우주정거장/함선 안에서만 주로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이다. 이미 『헬무트』 등으로 자기 색을 구축한 권교정 작가의 핵심 매력인 특유의 캐릭터 성격들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경험의 깊이를 지닌 주인공의 헐렁한 여유로움이 있고, 현실적이고 세세한 성격으로 그것을 관찰하는 (종종 곤혹스러워하는) 자가 있다. 진화하는 영혼의 헐렁한 함장 나머 준, 그리고 굳은 일을 궁시렁거리며 처리하는 부함장 지온이라는 두 사람의 콤비 속에서 건강한 긴장과 넘치는 여유는 즐거운 균형을 이룬다. 그렇기에 여러 상황들에 대처하는 주인공들의 현실적 사소함에서 나오는 유머 감각이 겉돌지도 부담스럽지도 않게 활력소가 되어줄 수 있다. 작가의 특기인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미소의 멍한 표정을 잡아내는 그림체로 묘사된 함장은 무척 매력적이며, 항상 잔소리를 하며 딴지를 걸 수 밖에 없는 입장의 부함장의 곤혹스러워하는 얼굴도 일품이다. 나아가 주로 상황들을 전개하고 해결하는 흐름은 바로 평온한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화려한 폭력이나 기발한 새로운 발상의 전환과 속임수가 없다. 그런 것은 생존경쟁의 육체적 진화의 몫일 테니까. 영혼의 진화를 이야기하는 이 작품의 색에는,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열어보고 공감대를 형성해보고 조언을 주고받는 것이 어울린다. 수다의 치유적 힘인 셈이다. 수다 속에서 주인공은 물론 등장인물 모두의, 나아가 독자들의 영혼도 조금씩 같이 진화한다.
『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는 1999년 연재를 시작한 이래 연재 지면이 사라지는 우여곡절을 몇 번 겪은 후 현재 다시 장르문학 전문지 ‘판타스틱’에 연재를 재개한 작품이다. 작가는 “이젠 그림도 줄거리도 잊어버렸다”고 너스레를 떨지만, 연재 재개를 외쳐준 팬들의 성원은 이 작품을 다시 전면에 불러냈다. 그 결과 고품질 복간에 노하우를 쌓아온 길찾기 출판사에서 이전에 대원CI에서 나왔던 두 권을 설정자료 등 부록을 추가하여 고급 판형으로 냈고, 현재 연재분으로 3권 이하 계속 발간을 할 예정이다. 물론 사건의 전개가 느리다든지 카리스마적인 조연들이 부족하다든지, 인기 연재작 요소들이 몇 가지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만약 현재의 질적 수준을 유지 혹은 향상시키면서 처음 계획했다는 6권 완결까지 간다면, 한국의 SF만화라는 장르에 큰 발자국을 남겨줄 듯 하다. 디오티마의 영혼의 진화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만화의 혼이 진화하는 것에는 확실하게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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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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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멋대로 함선 디오티마 1 권교정 지음/길찾기 |
Pingback by decadence in the r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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