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만화의 세계 [시사인 131호]

!@#… 용산철거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 ‘내가 살던 용산’을 계기로 르포만화라는 용어가 표면화되고 있는데, 그 일환인 시사인 131호의 특집에 들어간 글. 기사 묶음의 메인 꼭지와 겹치는 관계로 잡지버전에서는 마지막 두 문단 한국을 다루는 부분을 잘라내고 이런저런 축약. 여기야 원고버전이니까 마음껏 풀버전. 기사화 제목은 “르포만화에 퓰리처상을 주는 이유“.

 

르포만화의 세계

김낙호(만화연구가)

우리가 현재 르포만화라고 칭하는 만화양식은, 몇 가지 흐름이 겹쳐지며 생겨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만화와 저널리즘의 오래된 결합이다. 다만 원래 저널리즘과 만화가 만나는 주된 방식은 시사풍자만화였는데, 제정신인 언론의 경우 글로 된 기사가 비교적 건조하게 사안을 사실 위주로 서술하는 것에 몰두하고 만화가 자유로운 상상력과 생생한 시각적 비유를 통해 상황의 본질을 잔뜩 과장해서 유쾌하거나 서늘한 충격을 주는 분업이었다. 또 다른 흐름은 수기형식 만화의 발흥이다. 소재에 따라서는 논픽션 사연이 어떤 픽션보다도 더 훌륭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착안했으며, 주로 자전적 경험담으로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주로 주류오락물보다는 독립만화계에서 작가주의적 의지의 일환으로 생성되었다. 세 번째 흐름은 학습만화의 전통인데, 작품 속 캐릭터화된 해설자, 나레이션, 드라마화를 자유롭게 오가며 다루는 사안에 대한 효과적인 설명 연출을 발달시켜온 것이다. 즉 사회적 사안을 소재화하는 저널리즘적 전통, 논픽션 사연을 다루는 방식, 사안을 설명하는 기술 등이 합쳐지며 현재 르포만화의 모습이 만들어진 셈이다. 잘된 르포만화는 생생함을 잃기 쉬운 일반 기사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각각의 사연에 몰입시켜주는 장점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르포만화의 장점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 가운데 하나는 아트 스피글먼의 『쥐』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나치 치하 유태인 강제수용소 생존자인 아버지를 취재하여, 그 사연과 취재과정을 같이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단순히 피해자 유태인의 비극적 불쌍함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소 경험과 현재의 모습, 가족의 관계와 또 다른 인종편견의 불씨들을 고루 중층적으로 보여주어 큰 호평을 받았다. 결국 르포타주로서의 저널리즘 가치를 인정받아, 92년에 퓰리쳐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쥐』는 등장인물들을 의인화된 동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유태인이 쥐, 독일인이 고양이, 미국인이 개 등으로 표현되어 각 국민들의 특성과 상호관계를 축약해서 보여주는 효과와 함께, 가벼운 어린이용 활극처럼 보이기 쉬운 모습 속에 가장 무거운 이야기를 넣는 치밀함을 구현한다. 즉 르포라는 정공법과 만화의 분방한 표현력을 함께 활용한 것이다.

자전적 요소보다 현장취재의 저널리즘적 엄밀함을 훨씬 부각시켜서 ‘만화저널리즘’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것은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이다. 작가는 인티파다 이후 팔레스타인 분쟁지역에 방문하여 현지인들을 인터뷰했는데, 그들을 취재하는 우유부단한 서방인인 자신의 모습과 그들의 사연들을 때로는 말로, 때로는 극화하여 촘촘히 보여준다. 이 작품도 역시 단순히 피해자의 불쌍함이 아니라 어떻게 극단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에서 사회가 굴러가고 있는지를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명작이다. 이후 사코는 보스니아 내전을 다룬 『안전지대 고라즈데』에서 한층 서로에 대한 오랜 역사적 가해-피해 관계로 비틀린 사회의 모습을 처연하게 보여주는 것에 성공했다. 사코의 작품들은 극적인 경험일수록 더욱 인터뷰 대상과 적절한 거리를 두는 표현기법들을 구사하는데, 만화라면 당연히 드라마화된 에피소드로 표현될 법한 생생한 비극적 경험담의 묘사에서 오히려 인터뷰 대상의 얼굴을 보여주고 하나 가득 빽빽한 상황 설명을 말풍선에 담아내서 역설적으로 현실감 넘치는 상황을 만들곤 한다. 작가 자신이 취재한 내용들을 곱씹어보며 길거리를 거니는 대목에서 배경으로 보이는 황량하고 생생한 풍경들이 끌어내는 감성도 일류 저널리즘의 면모를 보여준다.

혹은 기행문의 느낌에 더 가까운 접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사진사의 아프간 참상 취재과정을 담은 기베르의 『사진사』, 캐나다 애니메이터 들리즐이 바라본 미얀마 사회의 모습인 『버마연대기』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사』는 ‘국경 없는 의사들’과 함께하며 86년 소련 점령 당시 아프간 땅을 밟은 사진사 르페브르가 찍어온 실제 사진들을 삽입하고, 그 앞뒤 맥락을 만화화한 에피소드로 보여준다. 정지된 장면의 실제 사진과 유연한 이야기의 만화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깊은 상흔의 흔적들, 그 속에서도 생명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어떤 평범한 기사 글귀들보다 뛰어나다. 『버마연대기』는 들리즐의 아시아 방문기 만화 3탄에 해당하는데, 전작에서 다룬 중국 쉔잔, 북한 평양에 이어 권위주의 정권 아래의 경직성과 기이함, 그래도 사람들이 일상을 꾸려가는 모습들을 인상적으로 관찰한다. 이들이 단순한 유람기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개별 사연들을 에피소드로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며 자신들이 궁금해 하는 어떤 모습을 더욱 깊게 파고들어가는 쪽으로 뚜렷하게 방점이 찍혀있기 때문이다.

사안 설명에 훨씬 중점을 두는 방식은 일본에서 사례를 찾기 쉽다. 과거사를 버린 강한 일본을 주장하고 제국주의를 미화하여 일본 극우파들의 교과서격인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고마니즘 선언』, 그와 정반대 입장에서 만들어진 카리야 테츠의 『일본인과 천황』등이 쉽게 떠오르는 유명 작품들이다. 본격적인 학습만화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작품 속 해설자의 사안설명이 중심이 되고 있지만, 취재로 모은 다양한 실제 사연들이 다수 유기적으로 함께 섞여 여느 시사월간지의 심층취재 르포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많다. 다만 메시지성에 중점을 두고있다 보니 에피소드 선택의 의도성이 너무 뚜렷하고, 복합적인 층위를 드러내려 하기보다 단순화해서 설명을 계속 진행하려는 모습이 보이곤 한다.

꼭 사회적으로 무거운 사안이 아니라도, 철도여행 체험기인 『데쓰코의 여행』같은 작품들도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한다. 일본에서 철도 체계의 복잡성 때문에 소위 ‘오타쿠’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대표적 분야인 철도를 소재로, 실제 여행에 동행하며 철도에 얽힌 여러 사람들의 실제 사연들과 전문지식을 풍부하게 풀어내는 작품이다.

한국의 경우는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만화가 사회적으로 개입할 구석이 무척 많았는데, 안그래도 무거운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만화는 주로 통쾌한 풍자 위주로 흘러가곤 했다. 하지만 만화에 대한 작가와 독자들의 인식 폭이 훨씬 넓어진 현재는, 르포만화의 범주로 생각해볼만한 흥미로운 작품들이 이미 여럿 등장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오영진의 『남쪽손님 / 빗장열기』는 국내에 나온 모든 장르의 북한 취재기 중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다. 경수로 사업 관련으로 북한에 파견되어 일하면서 작가가 듣고 겪은, 북한사회의 사람 사는 이야기들을 생활 속 에피소드처럼 담아낸다. 여기에는 남북한 사람들의 은근히 비슷한 정서와 영 서로 다른 모습들이 가감 없이 들어있으며, 통일 염원보다는 서로를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정서가 있다.

다만 최호철의 『코리아 판타지』, 잡지 ‘월간 인권’이나 만화가들의 자선사업 프로젝트 ‘러브툰’에서 연재된 인권침해 또는 불우이웃 사연 등, 르포만화는 주로 단편이 많은 편이다. 아무래도 하나의 내용으로 장편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취재에 드는 시간과 노력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최근 발간된 작품이 용산참사를 다룬 김홍모 외 여러 작가들이 힘을 합친 『내가 살던 용산』이다. 작가들이 모여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것이 작년의 『악!법이라고』의 경우처럼 종종 설명 전달에 치중해온 반면, 이 작품은 취재로 얻어낸 개별 사연에 집중한다. 각 작가가 용산참사에서 사망한 철거민들의 인생 사연을 하나씩 추적하는데, 사건에 대한 각종 정치적 경제적 의미 붙이기 속에서 탈인격화된 개인들을 재발굴하여 오히려 이 사안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귀중한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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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여담이지만 잡지게재분에는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가 도판으로 들어갔는데, 그 작품을 르포만화의 범주로 뚜렷하게 포함시키기 뭐한건 자서전이기 때문. 극중에 삼촌의 사연 같은 것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이야기 전반이 목격과 취재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보기는 좀 힘드니까. 다만 성장 과정을 비교적 건조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어법이 르포에 가까운 면은 있기에 아주 아니라고 하기도 뭐한 정도랄까.

PS2. 또한 잡지게재분에는 ‘사진사’의 만화가 기베르의 이름을 채워넣으면서 모리스 기베르로 표기했는데, 모리스 기베르는 20세기 초 사진사의 이름이고 만화가는 에마누엘 기베르…OTL . 사실 서양쪽 특히 유럽쪽 만화가들은 원래부터 흔히 이름 없이 성으로만 호칭하는 경우가 많으니 굳이 그런 편집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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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thoughts on “르포만화의 세계 [시사인 1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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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 르포만화의 세계 [시사인 131호]…

    SYNC에서 ‘굿모닝 예루살렘’이 연재된다는 소식을 듣고 르포만화에 대해서 알아보다가 캡콜드님의 블로그에서 좋은 글을 발견해서 스크랩. 앞으로 국내에도 양질의 르포만화가 많이 창작되길 기대해본다.!@#… 용산철거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 ‘내가 살던 용산’을 계기로 르포만화라는 용어가 표면화되고 있는데, 그 일환인 시사인 131호의 특집에 들어간 글. 기사…

Comments


  1. 어렸을 때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 그리고 현실문화연구 (지금은 ‘현실문화’로 사명이 변경되었지만) 에서 나온 「국가의 탄생」을 시작으로 미국 / 유럽 만화를 접하게 되었죠. 중학교 사서 선생님께 여러모로 감사드려요. 정작 그 만화 본 사람은 저 말고는 없던 것 같았지만 (…)

    개인적으로 르포 만화에 관심이 많았던터라, 르포 만화의 맥을 짚는 기사가 나온 것에 대해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런데 난 왜 이런 기사를 안 쓰고 ㅠ.ㅠ) 르포 만화의 흐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어요.

  2. !@#… Skyjet님/ 중학교 사서선생님이 상당한 취향의 소유자셨군요;;; 상 드려야함. // 하지만 저처럼 맥을 짚는 작업들을 자주 하다보면 부작용(?)이, 사람들이 손쉽게 무엇인가에 대해 ‘최초’라는 말을 갖다 붙일 때 두드러기가 납니다.

  3. ‘최초’ ‘최대’ 라는 과장적인 용어는 조심하게 붙여야 할 단어인데, 남발하는 경향이 있으니;;;

  4. !@#… Skyjet님/ 사람들이 뭘 믿고 그리 자신감이 넘치는지 부러울/한심할 때가 꽤 자주 있죠;;;

  5. 한국어 판에는 기베르 이름 제대로 나왔습니다. ㅎㅎㅎ 다만 제목이….뭐 좀…. 그렇게 됐습니다. 음흠 (며칠 전에 나왔다능…) / 버마 연대기도 얼마 전 나왔더라구요. / 그나저나 시사인은 괜히 회사 취재만 해가지 말고 이런 거 있을 때 연락 좀 주지… ㅜㅜ

  6. !@#… 수선님/ 헉 나왔군요(그런데 표지가 사진이라서 만화라는 느낌은 살지 않는듯). 미리 신간정보 좀 찔러주셨으면 한국어판 제목도 병기해드렸을텐데 아쉽군요;;; / 옙 버마연대기도 뭔가 다른 제목으로 나온 듯 하더라구요. 왜 그렇게 조용히 몰래들 내는건지;;; / 저라도 혹 좋은 기획 만들면/들어오면 시사인과 세미콜론 세트로 같이 엮어서 한번 제안해보도록 하겠습니다(핫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