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다 넘어간 후 반성문)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처럼, 캣츠비는 사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원작으로 하거나 특별히 구체적인 모티브를 빌려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리뷰 본문에서 언급했듯, 일정 부분 기본설정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굳이 개츠비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만큼 그 ‘낭만’의 공식이 지극히 원형적인 모티브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건데, 다시 읽어보니 그 이야기를 참 애매하게 풀어냈다는 점을 깨닫고는 후회중.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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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 <위대한 캣츠비>
김낙호(만화연구가)
‘위대한 개츠비’라는 미국 소설이 있다. 영미권 문학의 나름대로 걸작으로 칭송받는 작품이지만, 사실 필자에게는 ‘맨 온더 문’이라는 영화에서 짐 캐리가 분한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이, 자신의 코미디 쇼를 보러온 관객들 앞에서 뜬금없이 하루 종일 걸려서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을 함으로써 황당한 물의를 일으킨 그 소설로 더욱 기억에 남아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대충 이렇다: 가난한 농부집안 출신의 개츠비라는 청년이 있다. 그는 데이지라는 상류층 처자와 서로 좋아한다. 그런데 아뿔싸, 이 사람이 군대에 끌려가 있는 동안에 데이지는 부자집 남자와 결혼해버린다. 그래서 수단방법 안 가리고 자기도 부자가 된다. 돈으로 데이지에게 당당해진 개츠비. 하지만 데이지는 부자남편의 정부를 자동차로 치어죽이고 개츠비가 죄를 뒤집어 쓴다. 결말까지 폭로하자면(설마 이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에도 누설방지 유통기한이 적용되지는 않으리라 보고), 개츠비는 결국 죽은 여자의 남편 총에 맞아 죽어버린다.
한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겠지만, 이 공식은 한국 환경으로 그대로 옮겨도 사실 전혀 위화감이 없다. 신분의 차이, 오기에 찬 물리적 조건 극복, 그 속에서의 인간성 상실, 하지만 단 하나의 가치를 위하여 결국 비극적 희생. <공포의 외인구단>을 위시한 수많은 비장미 넘치는 80년대 극화체 만화들이 흔히 써먹었던 기본구도다. 그래서 고전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언제라도 한국으로 번안된 개츠비 이야기가 인기 연재 만화로 등장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은 당연하다. 아니나 다를까, 온라인에서 <위대한 캣츠비>라는 만화가 연재를 시작했다고 한다. 아하, 내용은 “안봐도 비디오”겠구나. 결과는? 부자와 결혼해버리는 여자, 별 볼일 없는 주인공, 시대 속에서 꼬이는 사랑이 이야기 전체의 원동력이라는 정도의 기본설정이 공통점. 하지만 화려한 활극의 느낌마저 있었던 개츠비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쪽의 주인공 캣츠비는 훨씬 더 구차하고, 소심하고, 끝까지 별 볼일 없는, 그냥 어떤 참 운명이 꼬인 현대 한국의 궁상 백수 청년의 사랑담이다.
최근 연재종료를 맞이했고, 종이 단행본 2권이 출간된 온라인 만화 <위대한 캣츠비>(강도하/애니북스)의 연재 당시 인기비결은 무엇일까. 에피소드 중심으로 끊어지기 쉬운 온라인 만화에서는 아직 비교적 희귀한 쪽에 속하는, 장편 연재물이라서? 확실히 그런 측면도 있다. <슬픈나라 비통도시>같은 모음집에서 볼 수 있는 강도하, 또는 강성수라는 작가의 거칠고 실험적인 – 즉 독자들과의 소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 기존 작품성향을 보면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이 작품은 정제되어 있는 드라마적 투르기와 독자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연출과 끊어내는 타이밍 등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시각적 표현 역시, 모든 주인공을 의인화된 동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만화적 표현의 재미’를 부여하면서도(하지만 뚜렷한 상징체계를 느끼기는 힘들다), 대단히 세밀하게 감정선을 따라가는 배경 구도와 풍부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표정묘사로 눈길을 집중시킨다.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주인공들의 감정 상태를 배경 또는 소품의 묘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연출을 너무 남발해서 부담스러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몰입하는 독서를 완전히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심지어 온라인 연재 당시에는 스크롤의 기본문법을 따르는 칸 연출을 하면서도, 종이책으로 출간하면서 그것을 전통적 의미의 종이만화의 칸 배열로 완전히 재편집하는 노력을 투자하는 등 한마디로 세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분명히 시각 연출이든 이야기 연출이든, 표현적인 측면에서 <위대한 캣츠비>는 우수한, 최소한 독자들에게 지극히 성실한 만화다.
하지만 역시 그런 기술적인 완성도만으로 만화가 공감대를 자아내는 것은 그다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생활 묘사가 리얼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아 그래, 내 생활도 그렇지” 하는 마음을 품게 할 정도로 주인공들의 일상 생활 모습 자체에 통찰력을 집중한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리얼한 환경묘사와 달리, 생활은 솔직히 그다지 리얼하지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백수생활의 리얼함이라면 고리타의 <룸펜스타>같은 개그만화가 한 수 위다. 아니 사실 그다지 일상적이지 않은, 꼬일대로 꼬인 치정극 이야기가 훨씬 더 작품 줄거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대와 인기를 끌어낸다면 무언가 다른 좀 더 근본적인 덩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루어지는 사랑과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엇갈리는 우정? 글쎄. 발랄한 여자와 불행한 여자, 발랄한 남자와 궁상맞은 남자의 캐릭터성? 글쎄.
오히려 열쇠는 작가가 스스로 누차 강조하듯이 ‘청춘의 아픔’이라는 엄청나게 구식 느낌을 주는 창작의 변에서 찾아야 할 듯 싶다. 사랑이 존재방식이 되는, 그리고 사랑의 꼬임이 존재의 흔들림으로 이어지는 가히 근대 독일 문학을 연상시키는 이런 고전적인 접근이 다시 복고풍으로 트렌드를 맞추어 냈다는 것인가. 고전적이고 다소 남성 편향적인 청춘의 고뇌에 대한 과잉된 환상이 2000년대 독자들의 취향과도 일치한다고 생각하기는 좀 섣부를 것 같다. 글쎄. 그보다, 애초에 사람들은 그 취향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할 것이다. 지난 수년간을 강타했다가 최근 좀 거품이 가라앉은 감성파 에피소드 만화, 속칭 ‘에세이툰’의 히트를 기억해보면 더욱 그렇다. 한국에서 대중문화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더욱 세련되고 쿨한 것을 소비(!)하도록 종용하고 있지만, 진짜 ‘취향’이라는 것은 소비 트렌드만큼 빠르게 바뀌지 않는다. 아니 소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오히려 더욱 공고하게 원형적인 것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그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은? 소재와 표현은 세련되게, 알맹이는 오히려 더 고전적으로. 예를 들자면 결국 비극적 인간관계 사건들이 꼬리를 물지만 여하튼 사랑이 존재의 원동력이다, 뭐 그런 방식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캣츠비>는 80년대적 비장미 성인극화와 2000년대적 에세이툰 부류의 이종교배에 성공한 셈이다. 나머지는 그냥 연출 표현을 위한 양념일 뿐이다. 작품의 장점도 단점도, 개별 독자들의 취향에 맞고 안 맞는 것도, 이 틀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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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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