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이 습격해도 여하튼 살아가기 [팝툰 42호]

!@#… 지면 개편 후 새 칼럼, 첫 회. 험난하고 이상한 세상의 어떤 괴이한 조건에서라도, 여하튼 그럭저럭 살아가보기 위한 지혜를 만화에서 빌려보자는 컨셉. 약간 시사성, 약간 개그성, 약간 매니악. 본문은 투고 버전, 제목은 편집자분의 우월한 센스.

 

[새연재: 만화로 배우는 생존법]
적과 꿀이 흐르는 공생: 외계인이 습격해도 여하튼 살아가기

김낙호(만화연구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가장 원초적인 공포라면, 누군가가 내가 사는 세상을 습격한다는 것이다. 나를 노예로 삼기 위한 것이든 무언가를 강탈해가려는 것이든 아니면 그냥 파괴 그 자체가 목적이든 간에, 여하튼 ‘우리’라고 상상할 법한 범주 바깥에 있는 낯선 누군가가 내 세상의 근간을 흔든다는 점이 무섭다. 그런 습격의 꽃은 역시, 외계인이다. 아무리 낯설어도 지구의 생명체라면 대자연은 하나라든지 생명의 순환이라든지 통 크게 외쳐보기라도 하겠지만, 외계인의 습격은 참 할 말이 없다. 궁극의 낯선 존재가 습격해올 때, 그들이 이 세상을 바꿔놓을 때, 그래도 여하튼 살아가려면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 수 년치 예비식량을 챙기고 지하 벙커로 들어간다느니 하는 ‘살아남기’ 말고, 그런 세상 속에서도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기 위해 선지자들의 지혜를 빌릴 때다. 그런데 그 선지자들, 지혜를 만화의 형식으로 남겨놓곤 한다.

외계인 침공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볼 것은, 도대체 왜 쳐들어오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외계인들에게 인간들의 지구는 별반 매력이 없을 법하다. 인류를 노예로 삼기 위해서? 우주를 건너 습격해오는 우월한 기술문명을 지닌 외계인들에게, 미개한 인류가 어떤 고용가치가 있다는 것은 심각한 자아도취다. 혹은 지구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뭐 그런 경우라면 확실히 인류는 방해되니까 쓸어버려야지. 그런데 개별 자원으로 보자면 굳이 지구로 올 것 없이, 각 자원에 특화된 별들로 가서 광산을 파는 것이 더 낫겠다 싶다. 무엇보다, 인류가 이미 너무 온갖 자원들을 퍼다 써버렸다. 혹은 그저 본능의 차원에서 인류의 절멸이 목적일 수도 있겠다. 만화 『아마게돈』을 보면 안드로메다의 원초 문명에서 만들어낸 여러 문명 가운데 하나인 ‘이드’가 지구라는 다른 문명을 침공한다(인류는 어째서인지 한국의 애국가를 부르면서 열심히 저항하다가 장렬한 종의 최후로 달려간다). 뭐 그런 경우라면 어차피 상대를 거꾸러트리는 것 말고는 살아갈 방도가 없으니 끝이니 그냥 논외로 하자. 따라서 외계인이 습격한다면, 좀 다른 목적이 있다고 봐야 한다. 마치 지구에서 강대국들이 식민지를 삼을 때 했듯, 현재의 인류 문명 자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물건들과 서비스 노동이 탐나고, 그것을 확실하게 얻어내기 위해서 확고한 지배권을 확보한답시고 식민지로 삼는다는 말이다. 이런 주권의 위협, 그 후 이어질 필연적인 탄압과 차별 앞에 어떻게 해야 잘 대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외계인 습격 분야의 필수 아이템, 『개구리중사 케로로』를 펼쳐보도록 하자. 개구리의 형상을 닮은 케론별의 침략자 외계인들은 오매불망 지구를 정복하고 싶어서 우월한 기술력의 침략소대를 파견한다. 하지만 이들은 여차저차 지구인 가족의 집에 눌러 살게 되고, 침략이라는 임무와 빈대 더부살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점점 나태해진다. 외계인 습격에 대처하며 살아가는 지구인들의 지혜는 실로 훌륭하다. 별로 대단할 것이 없기에 더욱 그렇다.

외교로 살아가기
『케로로』에서, 습격당하는 중인 지구인들은 현대적 외교 관계의 묘미를 구현한다. 자신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여러 외계 종족들에게 동시에 먹잇감이 되어줌으로써 그들이 서로 견제하며 먼저 나서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런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지구는 일종의 중립지대처럼 되어 수많은 외계종족들이 오가며 눌러 앉는다. 나아가, 큰 문제를 해결할 때 항상 자신의 이용가치를 걸고 넘어진다. 사실상 침략자 케론성인들과 가장 최일선에서 협상을 하는 역할인 (즉 친한 친구가 되는) 주인공 후유키는 실로 천재 외교관이다. 케론성 침략대의 대장인 케로로가 어떤 황당한 대형 파괴 전략을 들고 나올 때, 그는 “그러면 네가 좋아하는 건프라(건담 프라모델) 공장도 부숴져서, 신작이 안나올꺼야”라고 이야기한다. 자연스럽게, 인류문명의 핵심 이용가치인 건프라를 걸고 시도때도없이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다. 지구인의 명민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외교전선의 구성에서도 돋보인다. 케로로 소대를 수용하고 있는 주인공 가족은 친화력을 바탕으로 하는 후유키와 무력을 바탕으로 하는 미소녀 나츠미, 막강한 포용력과 잠재된 무력을 구사하는 엄마 아키로 구성되어 있다. 문무겸비, 전방위 외교랄까. 게다가 흩어져있는 각 소대 구성원들에게도 어쩌다보니 대립하기보다 수용을 하는 지구인들이 각각 붙어서 외교적으로 침략활동을 억제한다. 전면적으로 무력대립에서 맞설 힘은 지구인들에게 없겠지만, 치밀한 외교 관계를 통해서 수십배의 효과를 누린다. 본인들은 물론 별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말이다.

문화로 살아가기
시대를 대표한 SF 오타쿠 환타지 『마크로스』에는 외계의 전투종족을 아이돌 가수의 노래가 주는 문화충격으로 마비시킨 후 무찔러버리는 패턴이 등장한다. 뭐 그 정도로 과장하지 않더라도,『케로로』의 핵심에는 문화의 힘이 있다. 건프라, 만화책, 애니메이션, 캐릭터 용품 등 서브컬쳐 취향은 케론인들을 지구 문명권에 붙들어매는 최고의 수단이다. 지구상에 만화잡지와 프라모델이 없었다면 케로로는 피도 눈물도 없이 인류를 수 십번 파멸시키고도 남았으리라. 이런 키덜트 내지 오타쿠 취향 (『미스문방구매니저』라는 만화에 등장하는 구분에 따르면, 잘생기면 키덜트족, 못생기면 오타쿠)을, 케로로 소대와 같이 지내는 지구인들은 무리 없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용하기까지 한다. 신작 건프라를 대신 구해줌으로써 신세지게 만든다든지, 건프라를 살 수 있도록 지구의 현금을 지급하고 대신에 노동력을 착취한다든지 말이다. 그리고 걸핏하면 만화책과 프라모델들을 치워버리겠다는 위협을 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침략외계인들을 통제하면서 유유자적 살아간다.

탈력을 유도하기
외계인이 습격해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은, 습격할 의지를 잃게 만드는 것이다. 습격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은, 습격하지 않아도 이것저것 알아서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물론 반대급부로 댓가를 받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 와중에 외계인은 침략보다는 그냥 눌러 사는 것에 익숙해지고, 너도 나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굳이 지구를 정복하지 않아도 케로로 소대는 지구의 온갖 재미난 것들을 즐기고 있고, 다른 외계인들과 적대적 견제 혹은 친밀한 균형을 이루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지구에 계속 눌러앉아 있으면서 다소의 허위보고를 케론성에 보내주는 것을 통해서, 침략은 진행중이라는 자기만족 속에서 모성도 파견대도 나름대로 평안하다. 굳이 너무 노력할 것 없이, 그냥 사소한 것에 신경쓰며 즐기며 사는 상태인데, 물론 이 상황에도 지구인들의 강력한 개입이 작용하고 있다. 계속 재미난 지구 풍습에 말려들게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즉 같이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외계인의 침략은 급속히 힘이 빠진다!

***

이렇게 놓고 보자면, 역시 외계인이 습격해도 여하튼 잘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은 적당히 같이 맞춰주며, 하지만 지구를 빼앗기지는 않으며 능글능글하게 같이 지내는 것이다. 상대와 목숨을 건 일전을 벌이기보다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서 줄 것 주고 받을 것 잔뜩 받으며 대등한 친분관계를 유지하여 결국 힘을 빼는 것 말이다. 어쩌면, 꼭 외계인까지 가지 않더라도 보다 작은 차원의 낯선 이의 습격에 약간씩 적용해볼만한 지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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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팝툰>. 씨네21 발간. ‘만화로 보는 생존법’ 칼럼: 험난하고 이상한 세상의 어떤 괴이한 조건에서라도 여하튼 그럭저럭 살아가보기 위한 지혜를 만화에서 빌려보자는 컨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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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oughts on “외계인이 습격해도 여하튼 살아가기 [팝툰 42호]

Comments


  1. 시간내서 케로로를 함 봐야겠군요. 시리즈가 너무 많아서 엄두를 못내고 있었는데…오랜만에 일본어 공부도 할 겸… ㅎㅎ

  2. !@#… 마나각님/ 그건 좀 무섭…;;;

    JNine님/ 만화책의 경우 핵심 테마별로 엑기스 에피소드만 따로 뽑아낸 특별본들도 몇 가지 있습니다. :-)

  3. 그 능글능글 혹은 유들유들 혹은 넉살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춰야할 필수 덕목인 듯 한데 좀 더 나은 표현이 없을까 고민중입니다. 근 그렇고 약간의 오탈자 발견.
    “자구”라는 다른 문명, 살아갈 방도가 없으니 끝이니 그냥~

  4. !@#… 모과님/ 음, 아예 신조어로 만들면 어떨까요. ‘캡스러운’ 이라든지…(핫핫) // 오타는 낼롬 수정했습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