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적 다층성으로 표현하는 우울 – 『지미 코리건』[기획회의 253호]

!@#… 만화를 보는 것을 만화에 대한 폄하의식이 가득한 뭇 사람들에게 굳이 정당화시키는 접근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취향을 존중해달라능” 아니면 “훗, 이게 얼마나 뽀대나는건데”. ‘지미코리건’은 후자를 위한 최강클래스 아이템 중 하나.

 

혁신적 다층성으로 표현하는 우울 – 『지미 코리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

김낙호(만화연구가)

평범하게 훌륭한 작품과 고전의 반열에 오를 걸작의 차이를 만드는 결정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다층성’이다. 여러 층위의 의미와 표현들이 하나로 겹쳐지며 풍부한 해석의 여지와 복합적 감상을 남기기에, 두고두고 여러 방향으로 다시 읽어볼 가치를 만든다. 다만 당연하게도 다층성을 효과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잘못하면 딱딱한 형식주의의 함정에 빠지거나 작가 자신만 알아보고 독자를 소외시키는 자아도취 코드로 귀결되기 쉽다. 그럼에도 성공한다면, 특히 그 안에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낸다면 작품의 매력은 극한으로 올라간다. 다층적으로 겹치고 변주되는 카논 악곡의 화음이다.

최근 한국어판이 출간된 『지미코리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크리스 웨어 / 박중서 옮김 / 세미콜론)는 다층성을 만화에서 구현하는 방식 자체를 재발명하다시피한 기념비적 작품으로, 너무나 영미권 평단에서 일방적으로 칭송받아서 딱히 덧붙일 말을 찾기 쉽지 않다. 하지만 사연과 사연, 시간과 공간, 현실과 상상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겹치며 울림을 만들어내는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어떤 찬사라도 새로 찾아보고 싶어지는 심정이다. 우선 작품의 내용을 줄거리로 쉽게 살펴보겠다면 평이한 편이다. 크게 두 가지의 이야기가 있는데, 하나는 현재의 시카고에서 살고 있는 지미 코리건이라는 소심한 초중년 남자의 이야기다. 우울하고 외로운 직장생활을 하던 그가 어느 날 생전 만나보지 못한 아버지로부터 한번 보자는 연락을 받고 찾아간다.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그의 할아버지인 동명이인 또다른 지미 코리건의 이야기다. 그는 몰락하는 집안 출신으로, 비열한 아버지의 냉대 속에서 우울하게 자라고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한다.

두 지미 코리건의 이야기에는 막 미국 현대도시의 표상으로 떠오르는 시대의 시카고, 그리고 일상화된 대도시 생활공간이 되어버린 시카고라는 두 공간이 연결된다. 현대의 어른인 손자 지미와 과거의 어린이인 할아버지 지미의 이야기는 경계선 없이 수시로 교차하는데, 그 할아버지 어린이가 자라나서 현대의 손자 어른이 되어있다고 해도 어색할 것이 없을 정도로 소외와 우울함의 정서가 연속되어 있다. 그리고 무언가 어긋난 가족 환경과 스스로 자초하는 부분이 합쳐지며 소통의 단절이 만들어진다. 그런 와중에 이야기 전반에 가족에게 머뭇거리며 다가서고 싶지만 버림을 받는 것, 특히 부성 상실의 비극이 여러 모티브로 반복된다. 그 속에는 어떤 유사 자서전적인 추억이 담겨 있다. 죄책감, 그리움, 무력감의 정서를 듬뿍 담아서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일반적인 파편화된 가족과 소외감을 읽어내도 이상하지 않다. 가족들은 서로를 모르고, 알아보려고 노력할수록 어색한 순간들이 늘어난다. 혹은 아예 더 나아가 미국적 희망의 상실과정이라는 시대상을 담은 것으로 읽어도 나쁘지 않다. 게다가 지미 코리건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는 여러 다른 이들 각자의 이야기도 풍부하게 병렬하고 있어서, 더욱 어떤 개인사라기보다 하나의 보편적 우울함의 사회상을 만들어내는 효과가 있다.

내용의 다층성이 지니는 무거움에 허우적대지 않기 위한 작가의 선택은, 사소하고 황당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요소들을 활용한 부조리 개그다. 무엇보다 웨어는 옛날식 종이공작 모형, 동작 완구, 인공적인 제품사진과 글자로 가득한 옛날식 광고전단(그럴듯한 이미지샷 위주의 현대적 광고 전단과는 다르다) 등의 모티브를 적극 활용한다. 키치적 가벼움이 우울한 내용과 아이러니 속에서 부딪힐 때 만들어내는 기이한 부조리함은 순간 혼란스러운 유머가 되어준다. 주인공의 상상과 현실이 매끈하게 교차하듯, 만화 줄거리의 내용에서 자신이 깡통인간이 되는 상상을 하는 대목 뒤에는 그 깡통인간 조립 종이모형 펼침 설계도가 있는 식이다. 또한 디테일에 심어 넣는 각종 반전들도 그런 개그 감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수다스럽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메시지로 여백을 가득 채우거나, 작은 시각적 단서로 이전의 의미 있는 장면들의 의미를 패러디하든지 말이다. 시작 부분 속지의 만화 독법에 관한 장광설과 도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유머러스하게 압도적이다.

모든 내용과 유머러스한 접근은 작가가 구축하는 화려한 시각연출 안에서 비로소 효과적으로 구현된다. 정형화된 인상과 달리 실제로는 변화무쌍한 칸 분할과 회로 설계를 연상시키는 흐름 연출 등을 통해서, 줄거리들의 비선형적 병렬이라든지 다중 내러티브의 요소들을 가득 심어 넣었다(비선형 이야기 표현의 혁신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타임지에서는 소설 ‘율리시즈’에 비유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의 연출은 때로는 비선형적으로 참조 고리를 오고 가는 하이퍼텍스트적 읽기를 요구하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지미의 의붓누이 에이미의 가족사를 한 페이지의 회로도로 압축한 대목은 그 복잡한 외관 속에 담겨있는 다방향적 명료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것이 쉽게 난독증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디자인 조각그림 같이 아이콘화된 그림체의 몫이 큰데, 인공적인 느낌이 강한 이 그림들이 실제로는 전부 손으로 그린 그림이다. 그리고 이런 형식 속에서 두 지미의 이야기는 끝없이 반복과 대비를 이루며 우울함과 후회, 상실감과 소외를 끝없이 확장한다. 시각적 압도에는 강하지만 이야기로서의 깊이는 부족한 것이 이 작가가 종종 지목받는 약점이지만, 이 작품만큼은 확실하게 내용의 깊이와 정서의 울림을 모든 요소들이 효과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지미 코리건』은 내용의 깊이, 연출의 혁신, 시각적 완성도 뭐 하나 고전의 반열에 올리지 못할 요소가 없다. 만화 분야는 물론 문학 및 시각디자인의 역사로도 반드시 말이다. 단점이야 물론 비교적 설렁설렁 배치된 저밀도 만화연출에만 익숙한 독자들이 기가 질린다는 것이고, 웬만큼 여러 만화에 익숙한 이들도 디테일 때문에 눈이 아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보자면 이 작품이 한국어판을 만들며 제작진들에게 안겨주었을 고통이 선하다. 빽빽한 글과 다양한 폰트의 지문들, 중의적 말장난, 그리고 이런 작업을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한국어판 역시 상당히 오랜 작업 기간 후에야 나왔고, 덕분에 꽤 만족스럽게 나왔다.

저렴하지 않은 책이지만, 그 이상의 값어치를 할 것이다. 21세기적 스토리텔링에 대해서, 영미권 문학의 깊이에 대해서, 시각디자인의 첨단에 대해서, 혹은 그저 막연하게 교양인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싶다면, 책장에 구비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왕 책장에 있는 김에 읽어보기로 결심하는 순간, 재기발랄한 형식 속에 담겨있는 이야기의 인간적 깊이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사족. 코리건 가족의 이민사를 마찬가지로 비선형적이지만 읽다보면 익숙해질 만한 형식으로 다룬 웹만화를 미국 출판사 홈페이지에서 읽을 수 있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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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지미 코리건
크리스 웨어 지음, 박중서 옮김/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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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thoughts on “혁신적 다층성으로 표현하는 우울 – 『지미 코리건』[기획회의 253호]

Trackbacks/Pings

  1. Pingback by onoma_

    Jimmy Corrigan, The Smartest Kid on Earth : [Part 1] The monument of the comic book…

    Images Copyright © 2000 Chris Ware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 지미 코리건에 관한 이 책에 대해서 국내에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실제로 만화가이자 예술가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는 작가 크리스 웨어Chris Ware에 대해서조차 거의 소개된 적 없으니까.[각주:1] 그렇다고해서 우리네 인생이 다른 이들보다 더 비참한 것임이 증명되진 않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으며 읽을만한 이야기들은 끝…

  2. Pingback by Nakho Kim

    전에 썼던, 팝업 안 띄운 서평입니다. (핫핫) http://capcold.net/blog/4137 RT @iFoog: @aleph_k 그 책의 서평을 쓰려면 상당히 다층적이고 입체적이고 기하학적이고.. 무슨 팝업도 띄워야 될 것 같고..

  3. Pingback by zune

    지미 코리건 서평 RT @capcold: 전에 썼던, 팝업 안 띄운 서평입니다. (핫핫) http://capcold.net/blog/4137 RT @iFoog: @aleph_k 그 책의 서평을 쓰려면 상당히 다층적이고 입체적이고 기하학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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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Pingback by tzara's me2DAY

    차라의 생각…

    지미 코리건 서평 RT capcold님: 전에 썼던, 팝업 안 띄운 서평입니다. (핫핫) http://capcold.net/blog/4137 RT iFoog님: aleph_k님 그 책의 서평을 쓰려면 상당히 다층적이고 입체적이고 기하학적이고…..

  6. Pingback by capcold님의 블로그님 » Blog Archive » 2009베스트: capcold 세계만화대상 발표

    […] 지미코리건 (크리스 웨어 / 세미콜론 / 서평 클릭). 만화의 공간 문법 자체에 대한 실험성으로 가득한 연출. 우울한 현대인의 […]

Comments


  1. 뽐뿌가 그냥..
    오타쿠는 같은 물건을 3개 모은다던데 지미코리건은 종이모형 때문에 2권 정도는 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근데 그럼 6만원…

  2. !@#… 언럭키즈님/ 사실 아트 스피글먼 부부가 주도한 ‘호롱불’이라는 앤솔로지에서, 크리스웨어가 보드게임(이자 만화)으로 참여하면서 바로 그 이야기를 스스로 작품 속에서 꺼낸 적이 있죠. 오려내서 뭘 만들면 하나 더…;;;

  3. …어찌어찌해서 결국은 책을 구했습니다. (만세이! – 조만간 리뷰도 – ) 원서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번역은 평이하게 된 느낌이고 기존 만화에서는 보기 힘든 스토리텔링 전개에 감탄했습니다. 책을 삼으로써 용돈 1/3이 날아간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사족. 아무리 유전이라고 해도 코리건 가 얼굴 3대가 다 똑같아 OTL

    사족 2. 사실 중간에 지미 코리건이 상상하는 망상을 진짜로 여겨서 “멀티 엔딩!?” 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사족 3. 책 중간 서지 부분에 편집자 이름이 없어서, 서지 매니아로써 (???) 약간 아쉬었습니다.

    사족 4. 아무튼, 명성은 있으나 잘 팔리지 않을 것 같을 (…) 발매한 세미콜론 만세, 민음사 만세이.

    사족 5. 문제가 한가지 더 있다면 세로 부분이 과하게 (…) 길어서 책장에 자리를 마련하기가 어려웠다는 것 OTL

  4. !@#… Skyjet님/ 하긴 책 분위기로 보면 편집자 이름 뿐만 아니라 편집중 원고에 커피를 쏟은 손님 이름도 깨알같이 적어놓았을 법한데 말이죠. // 한국에서 잘 팔리게 만드는 방법은, 역시 스타마케팅. 빅뱅오빠들, 이번 기회에 책 읽는 이미지로…

  5. 이거 어떤가요. 물어보러 왔는데 이미 미셨군요. 으하하. 한양 갔을 때 가격보고 일단 미뤘거든요. 구매예정목록에 넣어두어야겠어요. 그나저나 캣쉿원에 대해서는 하실 말씀 없으신가요. 내용 대충 알면서도 표지가 귀여워서 샀는데 이걸 대체 어떻게 봐야 할지;;

  6. !@#… foog님/ 맛을 완전하게 다 보시려면… 두 권을 사서 한 권은 내용에 나오는 모형과 카드게임을 오려내는 겁니다! (핫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