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적 전형성의 섬세함 – 『푸른 꽃』[기획회의 267호]

!@#… 하지만 이쪽 장르는 개인적 취향으로는 그다지;;; (믿거나말거나)

 

장르적 전형성의 섬세함 – 『푸른 꽃』

김낙호(만화연구가)

만화 중심 대중서사문화(만화, 라이트노벨, 애니메이션 등)에는 소위 백합물이라고 일컫어지는, 여성 주인공들 사이에 생겨나는 동경과 유사동성애적 애정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 성장물의 하부장르가 있다. 여타 장르문화와 마찬가지로, 백합물 역시 익숙한 코드들을 대체로 익숙하게 드러내되 그것을 뻔뻔할 정도로 고집스럽게, 거의 새로운 의미가 생겨날 경지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하나의 큰 미덕으로 간주된다. 단순히 여성 동성애 에로씬만 잔뜩 묘사한다고 해서 좋은 백합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백합물이라는 범주에 대해 장르팬들이 기대하는 일련의 코드들 – 순수한 우정과 애정의 희미한 경계선, 남자가 연애대상으로 들어올 구석이 없는 끈끈한 유대, 동경하는 역할모델으로서 바라보기에 생겨나는 캐릭터 성장 구도 등 – 을 고루 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격정적 드라마로 서사 자체에 초점을 맞추게 하기보다, 캐릭터들의 미묘한 애정심리에 집중하도록 방향을 조절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정에 실패하면 시쳇말로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민망한 소녀향 망상으로 전락한다. 그런데 만약 그 작업에 성공한다면, 뻔한 클리셰들이 오히려 장점이 되어줄 뿐만 아니라 고전적 품격까지도 살짝 뿌려준다.

『푸른 꽃』(시무라 타카코 / 세미콜론 / 2권 발행중)은 백합물이라는 개념이 본래의 섬세함을 잃고 단순하게 여성 동성애 소재를 지칭하는 것으로 전락하려는 듯한 최근의 트렌드에서, 백합물 본연의 매력을 제대로 구현해주는 작품이다. 줄거리로 보자면 이쪽 장르 기준으로는 너무나 전형적이다. 명문여고에 막 진학한 활달한 성격의 주인공 아키라, 그리고 어려서 절친했으나 오랫동안 이사로 헤어졌다가 조신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동네로 돌아온 후미가 서로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다르지만 비슷한 사연들이 그 위로 변주되고, 소녀들은 서서히 성장한다.

아름다운 정취를 간직한 도시, 평온하고 일상적 생활, 여주인공들의 끈끈한 관계는 굳이 백합물이라는 특정 장르를 상정하지 않더라도 빨간머리 앤이나 알프스소녀 하이디만큼이나 보편적이다. 다만 그 안에서 정말로 우정과 애정 사이의 미묘함을 그려내며 성장하는 모습들을 담아내어 잔잔하고도 강력하게 흡입력을 발휘하는지가 어린이명작동화의 영역인지 본격적인 백합물의 영역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나눌 수 있을 경계일텐데, 『푸른 꽃』은 섬세한 디테일을 통해서 후자의 영역으로 확고하게 발을 디딘다. 소소한 작은 사건들을 다루든 다소 크고 작위적이지만 것을 다루든(지하철 치한을 퇴치했는데 피해자가 10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라든지), 그것을 통해서 캐릭터들끼리는 서로 표현을 절제하지만 독자에게는 숨겨진 감정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능숙한 연출이 빈번하다. 그 속에 청소년 성장기의 모든 고민들을 애매하게 모두 열거하는 식이 아니라, 그것을 주인공들의 우정/애정 관계를 통해서 산뜻하게 압축하는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더 확실한 자극을 주는 오락성 코드들이 부족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엇갈리는 애정의 화살도 있고, 집착적 캐릭터도 있고, 사건들도 도입부부터 지하철 치한 관련 이야기일 정도로 심심할 겨를이 없다. 다만 백합물 본연의 섬세함을 충실하게 무게중심에 놓고 그런 소재들을 이야기 진행용으로 활용하는 식이라서 어색함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개별적인 소재들에 함몰되기보다 장르적 자의식을 확실하게 고수하는 셈이다. 명대사로 여운을 남기려고 하기보다 감정의 서투른 표현 자체에 특화된 나레이션 활용, 얇은 선의 정적인 화면, 개그씬으로 흐름을 분절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이야기 연출 등이 빛을 발한다.

그 결과 만들어지는 것은 결국 오그라들지 않는 클리셰로 가득한 위화감 없는 백합물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수선스러운 연출을 구사했더라면 개성 없는 여성로맨스 코미디가 되었을 것이며, 동경의 감정들을 서로 확실하게 깨닫고 들이대는 듯 표현했다면 『마리아님이 보고계셔』이래로 쏟아진 각종 양산형 여성간 연애물들과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두 주인공의 섬세한 관계구도에서 조금만 초점이 흐려진다면, 그냥 적당히 성공적인 학원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쉽지 않은 균형을 잡아가며, 백합물에서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장르적 만족을 제공해준다.

그렇다고 해도, 장르 자체가 지니는 클리셰들을 처음부터 싫어하는 독자들이 이 작품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정신적 성장조차 물리적 성취에 발맞추어 일어나야만 하는 뭇 소년만화들과는 당연히 코드가 맞지 않고, 감정이 애정의 실현을 향해 달려가며 성공 혹은 실패를 점치게 되는 드라마틱한 순정만화들과도 다르다. 미형이기는 하지만 특출난 스타일로 빨아들이는 것이 아닌 그림체며, 따로 분리하여 읽어도 울림을 주는 “명대사” 들도 없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성취와 관계없이 순간순간의 감정적 섬세함을 즐기며, 안타까움이나 애잔함보다는 슬쩍 미소를 짓게 하는 적당히 닭살 돋는 순수함을 선호할 때 재미있어진다. 비록 장르 내적으로는 매우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그 영역 바깥의 독자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할 만한 미끼는 딱히 강조할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심지어 그간 야릇한 에로코드로서 백합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소비해온 일부 남성독자들마저도 이 작품에서는 더욱 이쪽 장르의 본질에 가까운 섬세함의 재미를 느낄 것을 요구받게 된다. 그 코드를 확실하게 전제하지 못하면, 딱히 나쁜 것 같지는 않지만 심심한 작품으로 기억될 공산이 크다.

『푸른 꽃』이라는 제목은 마치 파랑새처럼, 동경의 대상이자 얻을 수 없는 환상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러나 그것이 허망한 결과가 아니라 추구하는 과정의 아름다움과 성장을 노골적으로 상징화한다. 섬세한 백합물이 마땅히 지녀야할 아련함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음을 제목에서부터 표방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장기연재 인기 만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패턴인, 캐릭터성에 기댄 줄거리 무한 연장에 빠지지 않고 주인공들의 성장에 초점을 유지하며 무사히 완간되기를 기대한다.

푸른 꽃 1
시무라 타카코 지음, 오주원 옮김/중앙books(중앙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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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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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저도 개인적으로 백합물이나 BL물은 취향이 아니라서 (…) 일상을 건조하면서도 치밀하게 심리를 다룬 작품을 보고 싶은데, 그런 작품은 많이 없더라고요. 마이너 취향의 비극;;

  2. 저도 보면서 좋은 작품이지만 사람을 타겠다 싶더군요. 좀비무비를 다 좋아하는게 아닌거 처럼..

  3. 리뷰 잘 읽었습니다. :) 마이너한 장르를 소개하면서도 치우치지 않은 보편성을 가진 리뷰라 누군가에게 처음 이 작품을 소개할 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시무라 선생님의 동성애 코드를 백합물 범위에서 이해하신 점이나 ‘특출난 스타일이 아닌 그림체다’, ‘명대사가 없다’는 부분은 객관성을 잃은 느낌이라 조금 아쉽습니다. 그림에 대한 판단이나 명대사를 찾아가는 과정은 독자에게 양보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4. !@#… mil님/ 좀비무비는 다 좋아합니다. 그건 진리. (그럴리가)

    morino님/ 음… 백합물 범위에서 설명하는 건 제가 그 이상으로 장르화된 동성애 코드를 파고들 자신이 없어서고(아예 퀴어담론으로 갈 생각이 아니라면), “미형이지만 특출난 스타일은 아닌 그림체”와 “따로 분리하여 읽어도 될 명대사 부재”는 아무래도 제가 그 잣대로 머리 속에서 비교하게 되는 다른 작품들의 풀이 morino님과 달라서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제 평은 항상 “하나의” 의견이자 가이드일 뿐이고, 결국 모든 최종판단은 실제 책을 손에 쥐고 자신의 맥락에서 감상하는 개별 독자의 몫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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