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과 도화지

!@#… 상식과 공감과 시민정신과 감동과 아이디어 뭐 그런걸 칭송하는 분위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굵고 복잡하고 무거운 것들을 옹호하는 이야기 또 한가지. 이번에는, ‘이념’이다(…OTL).

!@#… 한국이든 미국이든 기타 어디든 어차피 현실적 필요와 제약에 의해 이쪽 정파나 저쪽 정파나 비슷한 정책으로 수렴되곤 하는데, 왜 여전히 진보/보수를 논하고 노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입장이 필요하다 말하는가. 어차피 혁명을 일으킬 것도 아니면서 왜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사회정책의 기본틀을 극복해야 한다는 거대한 말들을 하는가. 개별 정책이 중요하고 사람이 중요하지 이념이니 철학(사람냄새 나는 세상 뭐 그런 식의 뜬구름 레토릭은 말고)이니 하는게 왜 중요한가, 라는 질문말이다.

여기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직구로서의 대답은 이렇다: 그런 것들이 정책들을 뽑아내는 방향성의 기본틀을 제공하고, 정책 수행방식의 세부를 조절하는 역학을 만들기에 각 행위자들의 움직임을 다른 식으로 배합해야할 필요성을 만들고, 나아가 사회구성원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성적 합의/감성적 공감의 공략점을 바꾸기 때문이다.

!@#… 하지만 역시 재미없다. 그래서 이렇게 풀어놓고 싶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을 떠올려보자. 같은 물감을 흰 색 도화지 위에 칠할 때와 검은색 도화지 위에 칠할 때, 발색이 상당히 다르다. 같은 재료를 쓰면 같아야 할 것 같지만, 만약 양쪽에서 같은 색으로 보이고자 한다면 물감을 엄청 두껍게 덧칠하거나 배경과의 대비를 고려해서 다른 색조로 배합해야 한다. 물감이 닿지 않는 부분은 또 어떤가. 칠하지 않은 부분은 기본적으로 하얀 세상인가 아니면 밤하늘인가. 세상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완벽한 정책적 통제에 의한 사회란 없다. 거대한 종이 위에, 조금씩만 채워넣을 뿐이다.비록 그 위에 어떻게 개별적 형상을 그려넣고 색을 입히느냐라는 층위가 실제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지만, 새파란 도화지 위에 정열의 불꽃지옥을 그리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이 품이 많이 드는데. 심지어 칠하다가 빨간 물감이 떨어져서 난감해지기도 한다. 돈도 없는데 물감은 꼭 12색 세트로만 팔고 말이지. 최악의 경우 초조해지면서 이 색 저 색 마구 발라보다가 앗!하는 순간에 똥색이 되어 있다. “참 쉽죠?”는 밥 로스의 현실왜곡장 속에서나 존재한다.

!@#… 그 위에 결코 쉽지 않은 그림을 그릴 것이기에, 도화지를 고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도화지를 고르지 않고 ‘중립’인 척 한다고 해서 정말로 안 골라진 것도 아니다 – 그냥 선택의 자기통제권만 놓칠 뿐. 경향신문에서 창간특집으로 올해 불을 붙였고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드는 용어, “새로운 사회계약“이 이런 이야기를 위한 매개가 되어주면 좋겠다. 한미FTA가 원래 좋은건데 이번 정권이 망쳤다느니가 아니라, 그런 결코 유리하지 않은 환경변화에도 불구하고 더욱 강력하게 이 사회의 분배 공정성을 강구할 방향성이란 무엇인가 백가쟁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이 “정권을 심판했다 만쉐이! 다음 총선과 대선은 어찌될까”에 머물지 않고 그래서 서울시라는 지역체에서 노동은, 공동체는, 참여와 협업과 견제의 시스템은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의 논의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잘 정의내리고 그 정의를 합의하지도 않은 개념어를 또 다른 개념어들로 파묻는 방언대잔치를 펼치자는 것이 아니다. 중간에 길을 돌아가든 헤매든, 결국 뭔가를 가리키는 나침반 정도는 들고 다닐 필요가 있다는 말일 따름이다. 그런 것이 바로, 이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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