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호 문화저널 ‘백도씨’ 커버스토리인 장난감 특집의 도입글. 장난감 수집가 현태준씨의 장난감관이라든지 발랄하고 재미있는 꼭지들이 많은데, 어쩌다가 하필이면 도입글만 이 모양인가하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고나. 덕분에 유일하게 사진 위주로 운영되는 ‘모형모형’ 카테고리에도 문자 압박의 습격이… -_-; 여튼, 이전의 키덜트 글에 이어, 토이 좋아하는 어른들이 주변의 열렬한 박해를 이겨내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나름대로 지적인 변명 되겠다. 여기 방문객 중 그런 종족의 분들이 많은 것 다 아니까, 알아서들 열심히 퍼트리고 써먹으세요.
장난감 열광: 이야기의 역습
김낙호(만화연구가)
사람들이 장난감에 (대놓고) 열광하는 모습이 최근 여러 지면에서 수년간 신기한 트렌드로 다루어지곤 한다. 그러면서 대부분 제기하는 질문이 바로 ‘왜’ 장난감에 열광할까, 라는 것. 하지만 질문이 잘못되었다. 왜 열광하는가라고 묻지 말고, 왜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원래는 열광하다가, 어느 특정 연령대에 들어서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만둘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렇게 놓고 봐야 비로소 장난감의 진짜 매력, 기능이 생각난다. 바로 각자의 가슴 속, 기억 속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난감을 가지고 어떻게 놀았을까. 우선 장난감의 범주를 살짝 설정하면서 가보자. 모형과 액션토이의 차이는 무얼까. 모형은 놓고 구경하는 것, 토이는 가지고 노는 것. 운동기구와 운동용 장난감의 차이는 무얼까. 운동기구는 진지하게 스포츠를 하는 도구, 운동용 장난감은 그 스포츠를 놀이 수준으로 흉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소꿉놀이 기구나 악기 장난감도 이쪽 범주다). 중간 과정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거두절미 결론을 말하자면, 장난감은 상상력을 개입시키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놀이 활동을 매개하는 도구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상상력 속에, 물건을 쓰는 사람 혹은 아예 물건 그 자체가 새로운 생명과 사연을 부여받는다. 즉 장난감은 상상력과 이야기가 응축된 집약체인 것이다.
이야기로서의 장난감
이야기 집약의 방식 가운데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캐릭터성이다. 조악한 조형의 못난이 인형 하나, 팔 다리만 겨우 돌아가는 염가 프라모델 로봇 하나일지라도 이야기라는 내용물과 만남으로서 그 이야기 속의 어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중요한 의미가 부여된다. 그냥 세워놓고 있을 때의 괴수 인형은 그냥 물건이다. 하지만 크아! 하고 입으로 울부짖으며 한 손으로 들고 하늘을 나는 시늉을 할 때, 그것은 이야기 속에서 하늘을 나는 대괴수라는 설정과 포악한 성격이 부여된 하나의 캐릭터가 된다. 꼭 손과 입이 아니라 머리 속에서만 그 이야기를 펼치더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고가의 구체관절 인형, PG급 건프라라고 할지라도 결국 자신이 부여하는 캐릭터성의 양만큼 가치가 생겨난다. 혹은 세계를 구축하는 방법도 있다. 작은 세계를 재현한 장난감으로 다양한 풍경을 구축한다. 본격적으로 가면 미니어쳐 장난감을 통해서 세계의 외관에 신경을 쓰는 디오라마, 자기 자신을 그 세계 속에 사는 캐릭터로 만들어내는 체험형 장난감 세계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여하튼 이 방향의 핵심은 자신의 상상력과 손재주가 절대적인 신의 법칙으로 작용하는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조종하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는 점이다. 진정한 자신만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당연히 보통은 이 두 가지가 합쳐진다. 세계와 그 속의 캐릭터들을 만들어내야 온전한 이야기가 되니까 말이다. 심지어, 굳이 모든 세계와 이야기를 바닥부터 새롭게 만들 필요도 없다. 이미 만들어진 설정을 들고 오는 것 역시 부자연스럽지 않다. 트랜스포머 변신로봇들의 장난감은 각자 어느 정도 완성된 캐릭터 설정들이 주어져있고, 세력간 구도나 줄거리 전개도 기본적으로 설정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이야기를 반복하려면 그냥 DVD를 돌리지 뭐하러 장난감을 사겠는가. 기본 설정 안에서도 살짝 다르게, 살짝 내 맘대로 가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이야기 향유의 방식은 만화에서 꽤 보편화되어 있는 동인 창작 등에서도 흔히 보는 종류의 것으로, 궁극의 향유방식으로서의 자기 창작이다. 즉 장난감은 이야기를 한층 능동적으로 향유하기 위한 매개체가 되어준다. 그리고 이야기를 향유하는 것, 다양한 상황을 간접 경험, 또는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놓고 직접 경험하는 공상의 즐거움이 바로 장난감에 열광하게 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다.
장난감을 찾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고 상상력을 풀어나가는 여유가 사라질 때 장난감의 기능 역시 소멸한다.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향유하지 못하고 그저 일방적으로 소모하기에 바쁘다면 굳이 장난감이라는 매개체에 집착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운 나쁘게도, 전통적으로 어른이 된다는 과정 가운데 상당수가 이런 부작용을 낳곤 했다. 공상하는 능력도 시간도 잃어버리도록 교육받는 것. 정신적 유희를 즐기는 것은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쉬우며 육체적 유희, 직접적인 말초적 자극만이 ‘어른용 놀이문화’로 규정되기 십상이다. 술이든 담배든 성욕추구든 소위 ‘레포츠’든 말이다. 장난감이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최근 수년간 특히 가시화 된, 어른이 되어서도 장난감을 찾는 트렌드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난데없이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 팬이 되었다거나 그냥 단순히 철딱서니 없어져서 그런 것일까. 뭐 그런 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세상 사는 것, 혹은 최소한 세상살이를 보는 인식은 오히려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는 만큼 설득력은 떨어진다. 오히려 직접적으로는 이런 요소들을 꼽을 수 있다. 첫째는 물건 자체에 대한 미련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며 즐겼던 과거의 어렴풋한 이미지를 상기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장난감을 다시 찾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세상사는 것 힘들어진 것에 대한 반작용인 셈이다. 굳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단순한 표피적인 집착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둘째는 미디어 오락 문화, 장난감 문화가 급속하게 발달했던 80년대 이후에 유년기/청소년기를 보낸 세대가 성인사회의 주류로 떠오르는 시대적 배경이다. 즉 성인이 장난감을 가져도 나쁜 것이 아니라는 환경이 서서히 조성되어 나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세 번째 이유가 있는데, 바로 이야기 향유의 지평 자체가 넓어졌다. 즉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이 심지어 꽤 바람직할 수조차 있다는 이미지가 형성된 셈이다. 미디어 산업의 발달은 한 가지 이야기를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할 수 있는 방법을 열어주었고, 이야기를 다양하고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것이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좋은 것’이라는 이미지를 사회적으로 심어줬다. 그래야 시장이 커지니까. 특히 성인들이 적극적으로 향유하며 지갑을 열어준다면 더없이 좋다. 그 와중에, 장난감이라는 궁극의 이야기 향유 매개체의 역할이 성인층에게도 다시 부활한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필연적으로 때로는 우연하게 한꺼번에 겹치면서, 어른들의 장난감질이 정당화되는 참 바람직한 세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너무 오버하지는 말자. 여전히 장난감 가지고 노는 어른들은 부러움보다는 박해(?)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광처럼 보이는 트렌드가 있다면 그것은 장난감 애호가들 자신의 목소리가 적극적이고 커졌기 때문이다. 인터넷 문화의 발달 덕분에 그들이 서로 취향을 공유하고 연대할 수 있고, 사진을 찍어 올리고 리뷰를 올리고 아이템들을 쉽게 구매, 교환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솔직히, 실세계에서 박해받는 만큼 더욱 열심히 온라인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측면도 있다. 명절날 조카들의 대습격에 벌벌 떠는 건다머들, 친척 어르신들의 방문을 앞두고 장식장을 효과적으로 정리할 궁리를 하는 피겨인들, 술값 영수증보다 토이샵 영수증을 더 한심하게 생각하는 배우자의 눈치를 보는 소심한 지름꾼들은 이 말을 뼈저리게 공감할 것이다. 즉 정말로 열광 트렌드가 이미 여기 있다기 보다는, 한참 시끄럽게 지평을 넓히는 중이라는 말이다.
성인들의 장난감 추구는 칭송받아 마땅한 가치다. 우리가 본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차원적인 정신적 유희, 이야기의 상상력을 성인이 되어서도 아니 성인이기에 더욱 한껏 훌륭하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어디 있겠나. 현재 한창 지평을 넓히고 있는 움직임을 더욱 강력하게 펼쳐서, 5살짜리가 자신에게 맞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 만큼이나 35살이 자신에게 맞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존중받는 세상을 앞당길 필요가 바로 여기에 있다.
— Copyleft 2007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참 시원하게 쓴 글입니다. 이래서 제가 여기 단골이 된거입죠.^^
그런데 개인적으로 서론부분에 비해 본론에 해당하는 세가지 이유부분에 아쉬움이 좀 남습니다.
이유1은 개인적 동기이고, 이유2는 ‘그런 개인들의 집합으로서의 세대’로 봤을때 나오는 결과란 측면에서, ‘이유2는 이유1의 합’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아 보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문화산업에 대한 글들을 보면 이런 접근들(개인욕구가 되는 이유 설명, ‘그런개인들의 합으로서의 세대’로 집단현상 설명)이 꽤 일반적으로 보이더군요. 일면 적절한 접근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쉬운건, 이 두가지 이유들을 분리할 만큼 충분히 쌈박한 설명이 결여되면 읽기가 밋밋해지곤 하죠.
이유3에서 외생적 player(문화산업가)가 좋은이미지를 ‘만들었다’라는 주장은 충분한 배경설명없이는 왠지 ad hoc한 근거로 읽혀집니다.
그러니까, 제가 시식한 바 로는 이런거죠.
“왜 어른들이 장난감 x를 사게 될까? 장난감 x를 가지고 놀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구매력이 생겼고 옛생각에 사보는 거야. 그런 사람들 수가 어느정도 되니까 그리고 그 구매력을 노리는 문화산업영역의 좋은 이미지 만들기가 먹히면서 사회적 인식도 달라진거구.”
‘멋진 서론’과 연관이 되려면 대략 전 이런걸 예상했었거든요. (딱 이런 건 아니고 이런식)
“장남감은 상상의 매개체 역할을 하며, 그로 인해 가치가 배가되는 대상이다. 어른이 되면 1)상상력과 상상에 대한 욕구는 체감하는 경향이 있으며, 2)상상의 매개체를 비현실적인 장난감에서 보다 현실적인 ‘노동’이나 ‘사회에 대한 이상’로 이동되는 경향이 있다.
한편, 현실이 너무도 현실적이 되어버릴수록, 노동은 상상의 매개체로의 역할보다는 생계의 매개체로의 역할만이 강조되며, 사회이상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상상에 대한 욕구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개인들’에게 장난감은 다시금 하나의 대안이 될수 있다.
노동소외가 이야기되기 전 사회에서 장난감가지고 노는 어른이 왜 퇴행적으로 이해되었는지, 가깝게는 사회이상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왜 386세대들과 90년대 학번들이 ‘장난감찾는 어른’의 세대적 구분점이 되는지 설명된다고 할수 있지 않을까?
미디어-오락문화의 도입은 그런 ‘노동상상’, ‘사회상상’에 대한 대체수요에 대한 전초적 반응이거나 혹은 그런 수요창출을 위한 의도적 반응인 면이 있지 않을까?”
꼭 집합주의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상의 매개체로서의 장난감이란 너무도 멋진 인트로를 살리는 reasoning이 있는 본론이었으면 한다는 말이죠.
뭐, 블로그 포스팅 하나가지고 너무 까탈스러움을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죄송 -_-;
그냥 저도 읽다보니 흥이나서.^^
!@#… advantages님/ 우와, 앞으로도 종종 흥을 내주세요. :-) 본문의 내용 정도에서 제가 브레이크를 건 것은 사실 원글을 보낸 지면 성격, 엮인 다른 글들 성격 및 주어진 분량이죠 뭐. 만약 시사in이나 한겨레21 같은 지면이었더라면 저는 100% 노동생활 (및 그에 따른 문화생활 환경)의 변화를 따로 챕터로 뽑고, 문화’산업’ 세력의 역할을 훨씬 강조했을 겁니다. 만약 지면분량까지 넉넉한 월간지였다면 아예 구체적인 장난감 문화 사례들까지도 갔을테고 말이죠 (사실은 한국의 건프라 문화에 대해서 반드시 쓰고 싶었어요 징징). // 여튼 제시하신 아이디어들에 대해서는, 이야기 상상에 대한 수요의 충족 방식이라는 것이 정말 중요한 화두입니다. 당장 포장마차 술자리 정치토크만 하더라도 상당수가 결국 진지한 정치적 고민이라기보다는 캐릭터들을 가지고 노는 동인지 창작에 가까운 이야기인 경우들이 많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사실은 성인 토이 애호가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노동과 생활 패턴, 상상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는 방식 등에 대한 설문조사 연구라도 한 번 돌려보고 싶습니다. 누가 그런 주제의 연구에 연구비 좀 안 주려나…
장난감을 무척 좋아하나 경제 능력의 태부족 때문에 결국 늘상 침만 흘릴 수밖에 없는 가련한 모델러(-_-;;)의 입장에서, 미래 사회에는 장난감 시장에도 양극화의 물결이 거세게 일렁일 것이라는 예측을 조심스럽게 해봅니다. 즉 인류의 궁극적(!)인 장난감이라 할 수 있는 로봇이 실생활에서 상용화되는 세상이 온다면, 어떤 사람은 1:1 스케일의 인공지능 메이드 로봇을 가지고 이것저것(…)을 하면서 놀고, 어떤 사람은 가슴 속 충만한 갈구를 6인치 피겨로 해소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는 거죠. 뭐, 결론은 정부는 각 가정에 메이드 로봇을 보급하라! 기왕이면 엠마 스타일로! 정도가 될까요 -_-;;
!@#… stirner님/ 그런 세상이라면, 저는 공터에서 나무토막을 주워다가 조각칼로 깎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