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전에 블로그에 썼던 이 글을 바탕으로 쓴 팝툰 칼럼. 지금이야 대세가 분노에서 다시 한풀 꺾이고 호사가 모드(신정아 사태라든지, 디워 미국 정복 자뻑기라든지)로 바뀐 듯 하지만, 분명히 다시 기회만 되면 터질 패턴이니 역시 적어두는 것이 좋겠지. ‘출처 묻지마’ 문화의 폐단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 수도.
가정에 기반한 분노의 민폐
김낙호(만화연구가)
더운 여름 한 철 동안, 한국 시민들의 담론 공간은 열심히 분노하느라 바빴다. 아프간 피랍사건, 학력위조사건, 영화 ‘디워’를 둘러싼 논쟁… 이런 큰 사건들은 하나같이 열렬한 분노로 이어졌다. 한국 개신교에 대해서, 학력사회의 엘리트들에 대해서, 소위 ‘충무로’와 ‘평론가들’에 대해서 평소의 불만을 분노의 형태로 표출하느라 분주했다. 개인들은 점점 더 강해지는 온라인의 1인 미디어들의 힘까지 얻어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뱉어내며 서로 뭉치고, 기성 언론은 이들의 분노를 가지고 장사를 해먹기 위해서 충실히 부채질을 했다. 그리고 여름의 끝무렵, 석방된 아프간 피랍자들에 대한 비난으로 분노의 여름은 클라이막스를 맞이했다.
분노 자체는 당연히 특별히 나쁠 것 없다. 하지만 분노는 본인에게도 분노를 받는 이에게도 심지어 그 광경을 옆에서 구경하는 이들에게도 워낙 에너지 소모적이기 때문에, 발전적인 결과를 끌어오기 위한 촉매로 써먹지 못하면 모두에게 손해다 – 그저, 표출하는 사람에게 약간 스트레스 해소가 될 뿐. 그런데 발전적 결과, 즉 내실 있는 토론과 교훈, 향후 계획으로 이어가기 위한 기본 조건은 바로 ‘믿음’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에 휩싸인다는 것은 종종 믿음의 격렬한 확대 전파로 끝나버리곤 한다.
90년대의 걸작 애니메이션, ‘자이언트로보 – 지구가 정지하던 날’은 팩트 확인을 안거쳐서 생기는 거대한 민폐에 대한 대하서사시다. 세계를 바꿔놓은 궁극의 에너지원을 발명했으나 성과를 인정받지 못한 한 과학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그가 죽기 직전에 남긴 에너지원 소멸 방법으로 전 세계를 정지시키려는 음모를 수행한다. (주: 스포일러 있음) 그런데 온갖 싸움 끝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그 에너지원의 치명적인 결점을 알아냈고 죽기 전에 아들에게 알려준 것은 사실 그 결점을 보완하여 파국을 막아내는 방법이었던 것. 허무한지고. 거대한 악의 조직과 결탁하며 세계를 멸망시킬 거대 로봇들을 만드는 과학력, 그리고 그것에 평생을 투자할 근성이라면 우선 실험이라도 한번 제대로 돌려서 아버지의 연구에 담긴 팩트부터 검증했어야 했다. 덕분에 가족도 잃고 자기 목숨도 잃고 조직도 타격입고… 애초에 아버지의 그 마지막 의도가 세계멸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라는 ‘가정’을 했을 뿐이다. 약간만 더 노력해도 팩트를 검증할 수 있었건만, 그냥 하나의 ‘가정’ 위에 분노를 하느라 한 세월 다 보낸 것.
세상사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들어갈 수는 없기에, 가정을 기반으로 추론을 하고 상황을 계획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가정을 기반으로 분노하는 것은 좀 낭비다. 아프간 인질 석방의 대가로 400억이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다고? 그랬을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아직 사실로 판명된 것은 없다. 지불했으면 분명한 금전적 손실이 있으니 열받을 수 있다. 지불 안했으면 열받을 필요가 없다. 모르는 상태에서라도 만약 그랬을 경우 발생하는 손실들을 계산해보고 그 경우에 대한 대처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 하지만 미리 열부터 받아버리면, 그냥 우스워질 뿐이다. 게다가 더 위험한 것이, 분노하다보면 자신이 열받은 이유가 그저 가정에 불과했다는 점 자체를 쉽게 망각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가정은 사실로 포장된다. 사실로 포장되기에 더욱 많은 분노를 일으켜서 더욱 많은 파국적인 가정들을 일으켜낸다. 이것이 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지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적으로 확장될 때, 소문은 실체가 되고 사회적 망상은 확장된다. 린치하러 달려드는 흥분한 군중의 탄생이다.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고 미디어가 발달해서 개인의 발언 및 이들 간의 네트워킹이 더욱 활발해진 것은 민주주의의 축복이다. 바로 일반 개개인들이 사회 담론이라는 영역에서도 주인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주인이 된다는 것이 무언가. 특권만큼이나 책임과 의무가 동시에 주어지고, 그것을 해내지 못할 때 판 자체가 망하는 법. 우선은, 분노하기 전에 검색엔진 한번이라도 더 돌리고 출처 확인 한번이라도 더 해서 사실관계 확인부터 하는 것으로 그 책임의 작은 한 조각을 실현하는 마인드가 절실한 때다.
— Copyleft 2007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불허/영리불허 —
최근 일련의 사태들에 대한 글들 ‘정말로’ 잘 읽고 있습니다.
비록 눈팅족이긴해도 capcold님의 팬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대중의 속성상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건강한 상식인이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유익한 포스팅 또 기다리겠습니다. :)
검색만으로도 확인 가능한게 얼마나 많은데..
진짜 글쓰고 오타한번 확인할 시간에 검색이라도 한번 하는 자세가 필요할듯요.
다만, 팩트 확인하고도 오리발 내밀며, 딴소리하는 비양심들은 정말 구제불능임.
!@#… 먼훗날언젠가님/ 대중이 건강한 상식인이 되기는 힘들지만, 건강한 상식인도 대중 속에서 나오게 되곤 하지요. 그래서 (저 자신마저도 포함되어 있는) 대중에 대한 애증을 거둘수가 없다는…;;;
비정규인생님/ 많은 이들은, 사실 오타도 확인 안하는 것 같던데요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