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라고 [팝툰 37호]

!@#… 넉넉한 추석을 맞이하여, 쪼잔한(…) 정치성 이야기. 지난 호 팝툰 칼럼.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라고

김낙호(만화연구가)

세상에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이도저도 선택하기 힘든 상황이 주어지곤 한다. 지뢰찾기 게임의 마지막 두 칸이든, 어장관리남녀들의 연애사든, 혹은 좀 더 진지한 사회적 문제의 경우든 말이다. 그런데 선택의 어려움이 생기는 대부분은 각 선택의 장단점이 비등해서 그렇게 되기보다, 사실은 훨씬 단순한 이유가 있다. 바로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큰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합리적 판단이라면 그 중 손해를 덜 보는 쪽을 택하면 되겠지만, 만약 어느 쪽이든 예상되는 손해가 크기가 궤멸적일 정도로 크다면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그런 상태가 약간만 더 지속된다면, 선택은 합리성이 아닌 임의성에 몸을 맡기게 된다. 애초에 특정한 선택을 강요했던 각각의 주체들조차 주체할 수 없을 파국의 시작이다. 지뢰찾기라면 다행, 연애사라면 본인들만 비극. 하지만 진지한 사회적 문제라면 좀 파장이 크다.


80년대말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당시 박재동 화백이 담당하던 <한겨레그림판>은 한국 신문 만평의 의제 설정 방식과 시각적 문법을 일거에 업그레이드시킨 바 있다. 한겨레만평의 미덕은 정치인들의 권력놀음이나 소박한 신세한탄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시각에서 시작하되 사회의 각 부문을 향한 본격적인 날카로움으로 무장한 작품들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게다가 인터넷 붐 이전의 시기였던 만큼 시각적 패러디의 유머러스하고 강력한 사회비판적 힘은 아직 신문 만평의 독무대였는데, 따라서 한겨레그림판은 대학가나 집회현장의 각종 유인물과 대자보에서 끊임없이 인용되고 변용됐다. 그런데 많은 작품 가운데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낸 하나의 작품이 바로 한국통신노조의 노동운동에 대한 정부의 자세를 비판했던 1995년 5월 27일자 만평이다. 법적 기준 이상으로 작업을 요구받는 부분들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태업의 효과를 만들어내는(!) 투쟁방식이 당시에 ‘준법투쟁’이라는 명칭으로 떠오르고 있었는데, 김영삼 정부는 그것 역시 불법파업에 준하는 것으로 보고 압박을 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겨레만평은 불법도 하지 말라 준법도 하지 말라는 이런 갑갑함을 선불교 화두의 모순형용에 비유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선택을 강요함의 이면에 있는 본질, 즉 “가만히 앉아서 죽으라는 의도”를 직접적으로 드러냈다. 그렇듯 득이 없는 선택이란 잔인할 뿐이다.

이 만평의 경우 선택을 강요한 것은 정부라는 구체적인 권력자들이고, 진퇴양난에 빠져서 기어가 어긋나기 일보직전인 것은 특정 부류의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구도가 약간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시민들이라는 민주주의의 권력자들이, 정치인들에게 진퇴양난의 선택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다. 광우병 방지라는 사안을 대변해주지 못하면 무능한 야당 취급해서 지지를 접겠다고 해놓고는, 그 광우병 방지를 관철시키느라 여당과 합의가 계속 미루어져서 국회 개원이 늦어지면 놀고먹는다고 지지를 접는다든지 말이다. 아니면 시대착오적 친북사상에 빠져 있으니 싫다고 해놓고는, 그 사상을 털어버리고 어렵게 독립해서 신당을 만들었더니 ‘듣보잡’ 정당으로 취급하든지 말이다. 이쪽의 선택으로도 저쪽의 선택으로도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도대체 왜 정치인, 정당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궤멸적인 수준의 지지율에 허덕이며, 그 동안 아무 것도 잘 하는 것이 없는 여당은 안정적으로 지지기반이 탄탄해져가고 있다면?

정치에서 누군가가 내 이익을 위해 싸워줄 때 그들에게 구체적 지지를 보내주는 인과응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과는 뻔하다. 굳이 내 정의, 내 이익을 위해 싸워주지 않고, 이상한 다른 규칙 내지 아예 임의의 방식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아니면 진짜로 그냥 가만히 앉아서 죽어버리거나. 그렇기에, 판 전체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 같은 “중2병”스러운 냉소가 아니라 구체적인 지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싫어하는 것은 아무런 힘이 없다. 싫어하는 것을 막아보겠다는 이들에 대한 지지가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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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팝툰>. 씨네21 발간.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양상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만화를 가져오는 방식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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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라고 [팝툰 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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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얼마전에 말씀하신 상대평가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저 만평 참 오래만에 보는군요. 추억의 박재동 화백…

  2. !@#… 지나가던이님/ 현재 눈에 띄게 만평의 전반적 품질이 저하된 한겨레만평에 그 노하우를 좀 전수해주셨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