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런데 계속 한다 – 『백도씨』[기획회의 251호]

!@#… 이번 여름은, 사회성 짙은 만화책들 가운데 재미와 품질을 갖춘 양질의 작품들이 풍년이다. 실로 바람직한 현상.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런데 계속 한다 – 『백도씨』

김낙호(만화연구가)

모든 이에게 행복한 사회는 좀처럼 존재하기 힘들겠지만, 사회성원 상당수를 체계적으로 억압하고 소수만이 자신들 유리한 방식으로 정책을 끌고 가는 사회라면, 확실히 부당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 부당함의 정도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사회 성원들의 불만이 쌓이다가 결국 변혁이 일어난다. 그 변혁이 더 좋은 쪽으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물론 없지만, 최소한 더 인간다운 세상을 실현해볼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훌륭한 선진적 사회라면 그런 변혁의 요소들을 사회성원들의 합의에 의해서 원만하게 도입하는 곳이지만, 보통은 대규모의 전면적인 저항과 많은 희생을 딛고 큰 단층을 이룬다.

그렇기에 그런 사회변혁은 종종 물이 증발점에서 끓어 수증기가 되는 것, 즉 열의 양이 축적되어 어느 순간 질적 변화를 이루어내는 ‘양질전환’으로 비유되곤 했다. 하지만 물과는 달리, 어떤 특정 사회의 열이 어느 정도 축적되어 있는지 측정할 수 있는 단일한 방법은 지금까지 아무리 사회과학을 발전시켜왔다 한들 항상 부족하다. 앞으로 더 투자해야할 노력, 더 흘려야할 피와 땀을 예측할 수 없기에, 영원히 안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오고 사회 진보에 대한 동력은 사라지기 쉽다. 결국 적당히 현 상황에 만족하며 뉴타운 유치하고 대운하 파서 땅값 올려주겠다는 후보들이나 찍어주고, 나도 소싯적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적이 있다며 공경심이나 구걸하는 최악의 어른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계속 나아갈 수 있을까. 87년의 6월 민주화 항쟁을 다룬 만화 『백도씨』(최규석/창작과 비평)에서 한 양심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이 99도다 하고 믿어야지.” 앞으로 1도만 더 올라가면 끓어오른다. 지금까지 99도까지 올려온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계속 할 수 있다. 바꿀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백도씨』는 2008년에 인터넷으로 공개되어 적지 않은 화제를 모은 이후, 단행본으로 묶여진 작품이다. 줄거리는 전형적인 반공교육을 받고 자라난 주인공 영호가 대학생이 된 후 80년 광주의 사진을 보고 점차 학생운동에 몸담게 되는 이야기, 머리는 좋으나 형편상 대학을 못간 그의 누이인 여공이 공장에서 탄압에도 불구하고 노조를 만들어가는 이야기, 유신의 억압을 겪었고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지만 샐러리맨으로서 가족을 챙기는 그의 형 이야기, 어릴 때 빨갱이로 몰려 처형된 가족의 기억 때문에 본능적으로 권력에 대한 복종과 빨갱이 공포증을 체득하였으나 아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자 민가협에 들어가 사회운동에 앞장서는 어머니의 이야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박종철, 이한열 등 역사적 사례들이 줄거리의 일부로 스며든다. 여러 세대와 여러 사연들이 있지만, 한국사회가 걸어온 현실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봤다면 누구라도 여러 번 접해봤을 법한 흔한 패턴들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같이 한국사회의 모습이라는 하나의 맥락 속에서 엮여 들어가고, 결국 87년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모두 한자리에 모여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거대한 변혁의 물결로 수렴될 때, 그 흔함은 고스란히 감동으로 바뀐다.

우선 그런 직선적인 감동의 코드가 있기에, 그 시대 혹은 그 시대가 이후에 미친 영향을 느끼는 이들은 쉽게 만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승리한 독재타도 민중항쟁 특유의 고전적 코드 때문에 감동을 하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다. 그렇듯 많은 독자들은 끈질기게 싸우는 이들이 결국 승리의 순간을 맛보는 것에서 감동을 느끼겠지만, 사실 이 작품이 진정한 의미에서 빛나는 순간은 그 과정의 어려움에 대한 남다른 디테일에 있다. 박종철 사망 뉴스가 나오는 식당에서 그와 동지애를 느끼는 대학생들이 옆 테이블의 샐러리맨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가 좋은 예다. 움직이지 않는 기성세대가 된 상태에서 비극적 사건 자체에 대해서 불평만 하는 이들에게 분노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에, 작품 속 인물들은 “같이 분노할 수 있는 많은 이들을 밀쳐내고 거리감을 늘려서 어쩌려는 건가.” 폭력적 시위 방법 말고 무엇이 가능한가, 그것이 오히려 일반 학우들과 거리감을 만든다는 회의심과 그래도 이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는 현실의 마찰도 있다. 왜 하필이면 내가 나서야 하는가, 어디까지 스스로의 생활을 희생하는 것이 현명한 짓인가, 열심히 하는 것과 오래 하는 것 사이의 딜레마도 있다. 백도가 되어 끓어오르는 어떤 순진한 감동의 순간보다, 그렇게 끓어오르지 못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현실들의 교차가 작품이 주는 문제의식이자 최고의 매력포인트다. 그리고 직선적인 감동스토리보다는 여러 현실적 입장들 사이의 모순이 낳는 블랙코미디가 장기인 작가의 능란함이 살아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단순히 작품으로서 흥미로운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지점이야말로 작품 속의 내용들이 오늘날 삶의 현장과 만나는 지점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자잘한 어려움의 기억들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당시 순간의 결과 자체를 중심으로 한 향수만 남는다. 하지만 오늘날 살아가는 현실은 디테일 그 자체이기에, 어려움이 구체적이다. 더 나은 사회로 변혁시키고 싶을 때, 혹은 사회가 노골적으로 멍청한 과거로 회귀하는 것에 저항하고 싶을 때 겪는 어려움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87년의 사회 변혁의 어려움을 단순히 강고한 독재정권의 억압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망설임, 사회 전반의 누적된 그러나 지나치게 익숙한 경직성, 먹고 살아야 하는 개인들 등 여러 부분에서 끄집어내는 접근은 탁월하다. 그 단서를 역사의 반복되는 패턴에서 찾고, 삶의 아이러니를 받아들이고, 그 과정에서 분노와 냉정한 방향성을 같이 생각해보기에 좋은 재료다. 박종철이 죽음에 이르는 시퀀스의 스크린샷과 함께, 그가 지켜내고자 한 동지 박종운이 현재는 한나라당 중진이라는 아이러니컬한 내용이 블로고스피어에서 공감을 받으며 돌아다닌다든지 말이다.

그 엄청난 항쟁으로 결국 얻어낸 것은 투표 용지 한 장이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미 민주주의를 다 이뤘다는 듯이 대충 만족해버릴 수 있다. 그간 쌓아놓았다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일거에 무너뜨릴 만한 구시대적 사고방식의 세력과 일확천금을 약속하는 천박한 대표자에게 나라를 맡기고는,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모순을 견디다 못해 엉뚱한 적을 만들어 때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표를 얻어낸 것에 만족하여 표를 제대로 행사하기 위한 조건인 다양성의 존중이나 토론과 합의의 힘을 탐구하지 않고, 단지 시끄럽고 귀찮은 것으로 치부하여 민주주의를 굳이 하는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다. 그런 분들을 배려해서, 단행본에는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담아내는 부록만화가 추가되었다. 시민교육센터의 이한 씨가 만든 청소년을 위한 민주주의 교안 「어떤 민주주의로 갈 것인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비록 결론은 결국 민주주의에 신경 할애하고 공부하자는 이야기라서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겠으나, 정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바로 그게 정답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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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100℃
최규석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PS. 본편의 온라인 버전은 이미 널리 링크 돌아다니듯,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음. 특정 장면의 역사적 맥락이 마우스 가져가면 주석처럼 클릭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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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thoughts on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런데 계속 한다 – 『백도씨』[기획회의 2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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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헉, 애초에 작품이 너무 좋은 작품이라 리뷰보고 댓글 달면 뽐뿌질을 참을수 없어서 안 단 것 뿐이지 말입니다.
    라곤 해도 댓글 달아버렸군요.[….]

  2. !@#… 모과님/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전세계가 울었다!

    언럭키즈님/ 결재 클릭 한번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핫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