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을’들의 이야기 – 야옹이와 흰둥이 [기획회의 303호]

!@#… 단행본을 낸 출판사가 온라인 활동력이 상당히 미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훨씬 메인스트림에서 인기를 끌어주지 않으면 무척 아쉬울 만화다냥.

 

이 세상 ‘을’들의 이야기 – [야옹이와 흰둥이]

김낙호(만화연구가)

사회 속의 복합적인 불평등한 관계들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지금껏 다양한 학자들이 여러 개념들을 도입해왔지만, 적어도 오늘날 한국사회로 한정지어 보자면 그 어떤 잘 연구된 정밀한 용어보다도 확실하게 직관적으로 전달되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갑을관계”다. 갑을관계는 거래 계약을 맺을 때 사용하는 용어인 돈을 주는 ‘갑’, 돈을 받고 재화나 노동을 제공하는 ‘을’을 빗대어 지칭하는데, 흔히 갑의 위치에 있는 이가 무리한 요구를 일삼고 을의 위치에 있는 이가 아무리 비합리적이라도 참고 맞춰주는 식의 구도가 발생한다. 한번 갑을관계로 묶이면, 아무리 공정하지 않더라도 아예 관계를 깨지 않는 한은 각종 불평등을 감수해야 한다. 양측이 공통된 목적을 향한 협업의 파트너십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확고한 권력의 우열로서 부리는 자와 매달리는 자가 갈라진다. 지나치게 격심한 갑을관계를 완화할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장치들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턱없이 부족하고, 특히 사회의 말단으로 갈수록 더욱 희미하다. 법정 최저임금은 당장 일자리 자체가 보호되지 않는 비정규 일용직들에게 종종 사치에 불과하며, 노동시간이나 조건에 대한 편법은 일상적이다. 원래 수행해야할 업무를 넘어, 다른 이들의 억지를 친절로 덮어줘야 하는 “감정노동”까지 강요당하곤 한다. 설상가상으로, 사회가 움직이는 방식이 을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쪽으로 간다.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분노로 혁명에 나설 수도, 그보다는 좀 더 체계적으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조직화해서 정치적 압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에, 당장 미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절망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갈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 상태에 만족하라는 것이 아니라, 반대급부로 세상을 외면하고 포기하지 말고 그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이다. “네가 열심히만 하면 출세할 수 있어” 따위의 엉터리 주문에 걸리라는 것이 아니라, 쓰러지지 않도록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

[야옹이와 흰둥이](윤필 / 길찾기 / 1권 출간중)는 이 세상 여러 을들의 이야기다. 화려한 성공에 대한 조명과 관심이 닿지 않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늘 묵묵히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다. 건조한 관찰과 아픈 드라마보다는 그들의 삶이 지닌 일상적 현실성을 통해서 정서적 울림을 주는데,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뤄내는 장치는 의외로 동물의 의인화에 있다. 주인공인 야옹이와 흰둥이는 이름 그대로, 고양이와 개다. 줄거리는 주인이 사채빚을 지고 야반도주한 상황에서, 남겨진 두 “애완동물”이 각종 일자리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인간들의 세계에서, 아무런 자격증도 배경도 없이 그저 주어진 일을 불평 없이 열심히 수행해 낸다는 능력 하나만 가진 두 동물이 좌충우돌한다. 말을 할 줄 아는 야옹이는 접객을 하는 대형마트 시식요원, 빵집 종업원 등을 거치고, 말을 못하는 흰둥이는 공사장 인부, 학원건물 청소, 피자배달 등을 거친다. 안 그래도 고된 일인데 인간세상에서의 ‘자격’이 없기에 노동조건은 더욱 좋지 않지만, 야옹이와 흰둥이는 매 일자리마다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들의 열심과 무관하게, 사소한 불합리한 계기로 혹은 필연적 구조의 흐름으로 다시금 쫒겨난다. 고객의 무리한 요구에 때문에, 대형체인망의 확산 앞에 망하고 마는 동네전문점이라서, 자신보다 더 딱한 사연의 동료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밀려나고 새로운 자리를 찾게 된다.

야옹이와 흰둥이는 어디에 가더라도 또 다른 을의 삶을 사는 인간들을 가득 만난다. 자신들에게는 무서운 갑인 사채업자 역시 다른 관계에서는 을의 위치에 서있다. 배달원을 수탈하다시피 하는 피자가게의 사장도 이유도 방향도 알 수 없는 격한 가게들 사이의 경쟁관계 속에서 끌려다닌다. 그 안에서 사람들을 사람 대우 해주며 착하게 장사하는 것은 지속되는 일이 드물다. 그런 구도를 통해, 이 작품은 우리 사회 곳곳의 비정규직 노동의 풍경 및 그것과 엮여있는 사회 속 여러 문제들을 정직하고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장애인 인권, 비한국인 노동자 처우, 의미 없이 비싼데 다들 끌려 다니고 있는 대학등록금,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메워지지 않는 빈부계급격차 등이 그런 여러 관계 속에서 묘사된다. 이들의 삶은 가상의 평행 세계가 아닌 우리 현실에 같이 존재하는 삶들이기에, 그리 간단한 감동과 해결책이 아니라 매사가 복잡하게 엮여있다. 악의 화신인 악덕 재벌총수 하나가 있어서 그를 무너트리면 해피엔딩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들이 각자의 몫을 통해 이런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 작품은 이런 세상을 뒤엎는 혁명의 방법을 제시하지 않지만, 이런 쉽지 않은 세상임을 명확하게 보여주며 그 안에서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준다.

의인화된 동물 주인공이라는 노골적으로 허구적인 접근이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를 살려낸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인간세계에서 일하는 애완동물(요즈음 말로는 ‘반려동물’)을 다루는 작품은 [오늘의 네코무라씨], [알바고양이 유키뽕] 등의 선례가 여럿 있으나, 사람들의 감성에 대한 일상 드라마가 아니라 노동관계라는 지극히 사회적인 구도에 초점을 두는 것에 이 정도로 효과적이라는 점은 놀랍다. 원래 만화라는 양식에서 의인화된 동물 캐릭터는 쉬운 만큼이나 생각 없이 남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로 상성을 지닌 다른 인종의 표현 같이 의인화로 인한 뚜렷한 효과가 있던 [쥐] 같은 경우가 있는 반면, 같은 이야기를 인간으로 그려도 별반 차이가 없을텐데 그저 대충 우겨넣은 의미 없는 의인화 동물 작품들이 넘친다. [야옹이와 흰둥이]의 주인공들은 의인화되었지만 동물의 속성을 상당부분 그대로 지녀서, 상자에서 잠을 자는데다가 둥글게 말아서 사람 무릎에 눕기도 한다. 게다가 주인공들만 동물이고 나머지는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입장에서(!) 인간세계의 이상함을 한발짝 뒤에서 보여줄 수 있다. 절망하지도 않고 너무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애완동물로서의 속성을 가져오고, 일자리에 들어가서 인간들 사이에서 구르는 점에서는 의인화 속성을 활용한다. 게다가 간단하고 귀여운 모습 덕에, 사실은 꽤 잔혹한 사회상을 딱히 내용적으로 희석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좀 더 편하게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의인화 주인공을 통해, 노동현실을 직면시키는 이야기에 대한 쉬운 몰입과 적당한 거리감을 동시에 이뤄내는 셈이다.

[야옹이와 흰둥이]는 노동현실에 대해서 개인의 노력으로 적응하는 부분 이외의 것들은 그려내지 않는데, 그 갑갑함이 단점이 되기도 한다. 묵묵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있듯, 문제를 깨달아 고뇌하거나 한발 더 나아가 싸움에 나서는 이들도 현실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 노동관계들에 대해서 거부감 낮게 묘사해내고 살아갈만한 희망을 주는 것만큼은 매우 성공적인 작품이다.

야옹이와 흰둥이 1
윤필 글 그림/이미지프레임(길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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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살인자ㅇ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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