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왕 도덕성과 돈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 김에, 아예 약간 다른 의미에서 본격적인 잡설 뻘글을 잠깐 끄적거릴까 한다. 바로 돈으로 도덕성을 사는 것, 그게 사실 꽤 필요한 것이라는 이야기.
!@#… 오랜만에 다시 한번 기억을 되돌려보자. 지난 4월, 벤츠로 SK건물 입구 회전문을 들이받았다는 소위 ‘돌진남’ 사태. 뭐 사태 줄거리야 간단하다. 삼성폰-SK서비스를 사용중인 한 소비자가, 로밍 등 기기 기능이 제대로 안되고 부품호환이 안되어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자꾸 거절당하고 급기야는 경비원들에게 물리적인 제제까지 당하자 결국 확 열받아서 들이 받았다는 것. 기껏 몇십만원 대 휴대폰 건에 대한 항의를 위해 억대 손실을 감수했다는 점에서 온라인에서는 거의 소비자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현상도 생겼던 바 있다(인터뷰 동영상 클릭). 뭐 그래도 인명손실이 따를 수 있었던 위험한 짓을 했으니 응당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런데… 기사 리플과 관련 블로그포스트들에 나타난 당시 그 환호의 내역을 보면 은근히 흥미롭다. 다들 SK의 부도덕함, 기업으로서의 비윤리성을 이야기한 것. 너도나도 그런 경우를 당했다, 역시 한국 기업들은 소비자를 뭐처럼 안다, 이제부터 SK 불매한다, 등등.
아 그렇구나. 그런데 왜 SK텔레콤은 정작 해명기사 하나 없이, 꿈쩍도 안했을까. 간단하다. 해명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러다가 어차피 사그러질테니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건 사고 그 자체고, 그 사고에 대해서는 어차피 들이받은 그 아저씨가 전적인 책임이 있다. 영 뭐하면 폰이나 하나 새로 바꿔주면 땡이다. 물론 회전문 값 배상금은 다 뜯어내고.
!@#… 도대체 왜 한국사회에서는 유독 기업들의 사회적 역할이니 윤리니 양심이니 하는 것이 안지켜지는 것 같아 보일까. 사실 간단한 이유다. 그런 것을 지켜야할만한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인센티브가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누구나 공감하고 있으니까. 안지켜도 잠깐 시끄러울 뿐, 앗 하는 사이에 원상회복 또는 앞서나간다. 한국이라는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비윤리적,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기업에 대해서 장기적으로 보이콧을 하고 그들을 선택에서 영구 제명하는 일이 없다. 음식물에서 벌레가 나왔다거나 한다면 자신들의 건강에 직접적인 해악이 되는 만큼 과잉에 가까울 정도로 확 불타오르기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사실 한순간 (물론 그 한순간만으로도 여러 중소업체들은 망할 수 있지만). 그럴진데, ‘윤리성’은 아예 선택의 기준에 들어가지 않는다. 윤리를 뭔가로 쳐주지도 않으면서, 상대가 윤리를 중요시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차라리 무리. 화제성이 있고 따라서 상업성이 뒤따르면 땡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겁한 일들이 발생하는 거다:
YTN, 지난해 순익 500% 상승 [미디어오늘/2007년 04월 12일]
지난해, 2006년이라면 YTN이 한 해를 화려한 황빠질로 시작한 해다. 2005년 12월부터 시작된 허위보도, 악의적 왜곡, 사건에 대한 직접 개입 등등 언론사의 ‘윤리’적 측면으로 보자면 아주 막장 중 막장을 달린 THE 막장 언론사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에 대한 반성 따위는 제로. 그러나! 시청자들은 여전히 아니 더욱 더 YTN을 사랑했고, 광고주들 역시 같이 사랑해주었다(기사 중 인용된 관계자의 표현으로, “매체 이미지가 제고되어” 이득을 올렸다니). 비윤리의 문제보다, 화제성의 힘이라든지 담론 지명도가 더 중요시된 셈이다. 그 결과 아주 아름다운 수익을 냈다고 자랑할 수 있기까지. 참 행복한 세상이다. 그러다보니, 지금쯤이면 YTN이 어떤 짓거리를 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물어지고 있고.
아니면 이런 건 또 어떤가. 날로 먹는 문화일보, 돌려 먹는 한국일보. 희대의 가상 기사 사건.
문화일보 이번엔 ‘가상 기사’로 독자 기만
[국정브리핑 2007-06-27 13:41]
하지도 않은 행사에 대해서 누가 누구를 ‘질타했다는’ 실감나는 기사가 나와버렸다. 미래 예지, 대략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 꼴깝사건이 터지자 수많은 인터넷 유저들은 그럴 줄 알았어 찌라시가 그렇지 뭐 같은 이야기를 꽃피웠다. 하지만, 이따구 골때리는 짓거리를 하고 다닌 문화일보 한국일보에 대한 절독 움직임이 거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이승연 위안부 누드집 당시 네띠앙 아이디 해지 운동 마냥 자신들이 나름대로 생각하는 자기정체성(대한국인 뭐 그런거)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서는 선뜻 반응하더니만. 그에 비해서 사실은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인 기업윤리가 개판인 것에 대해서는 나에 대한 직접적 공격은 아니라서 그런지, 진짜 거부반응을 던져주기를 주저하는 속성.
!@#… 세상에 도덕이 필요하다고, 윤리를 지키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백날 시민운동진영이 성명서를 내든 그걸로 사회면 단신이 몇개쯤 실리든 소용없다. 실제 방법은 결국 세 가지다.
1) 법적 차원. 즉, 고소해버리는 것. 가장 확실한 길이다. 문제는, 워낙 개별 시민이고 시민단체고 간에 법적 대처, 법적 승부에 약하다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운동가, 행정가라면 이쪽을 추구해야지.
2) 그게 안되면 외곽에서, 담론 차원으로 풀기. 부도덕이 바로 당신에 대한 공격이라는 쪽으로 자꾸 틀지워주는 담론 전략 되겠다. 예를 들자면, OO신문의 과거 친일경력 백날 이야기해봤자 말짱 헛 것이다. 그 것을 좀 더 효과적인 것, 즉 직접적인 나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해줘야 한다. “그 신문의 조낸 야매성은 바로 당신들 독자에 대한 우롱이다, 당신들을 조낸 바보천치 그지깽깽이로 취급하는 거”라고. 하지만 문제는, 담론 싸움같은 섬세한 것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전략도 복잡해지고 돈도 더 든다는 것. 게다가 부도덕하지만 실력은 있는 상대한테 쉽게 밀린다. 하지만 학자, 언론인이라면 최소한 이쪽에 도전해야지.
3) 그런데 누구나 가장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 자기 자신부터 시작할 수도 있고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전파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문화소비적 차원이다. 기업 윤리에 상품 가치를 부여하는 것. 이거, 특별히 적을 만들지 않고도, 실무지식이 있으면 있는데로 없으면 없는데로 추진할 수 있다. 컨셉은 전에 말 꺼냈던 소비를 통한 정체성 형성. 진짜 자본주의라면, 소비가 곧 내 정체성이다. I am what I consume. 언제까지 자신의 소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소비를 통해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구성하고 돌아보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어설픈 소비자 노릇이나 할 셈인가. 언제까지 그저 하루하루 돈 토해내는 기계로 살 것인가. 비윤리적 행위를 한 기업의 것을 소비함으로써, 나 자신의 정체성이 ‘비윤리적인 소비자’가 되어버릴 때 오는 소비자로서의 불쾌감을 의식하자는 말이다. 이 상품/서비스/사회제도를 소비함으로써 나는 잘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만큼 잘난 사람이 못되었을 경우 열받아보자는 말이다.
윤리를 소비하는 소비자가 되자는 것. 이왕 한국사회가 국경없는 무한 자본주의라는 수라의 길을 가겠다면, 차라리 적극적으로 도덕을 상품화하고 소비하는 쪽이 실용적이지 않을까. 여러가지 도덕률을 시장 속에서 경쟁시키고 유통시키고 소비하기도록 만들기 말이다. 자본주의적으로 훌륭하게 자리를 잡아버린 페어트레이드 커피 같은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아니 오히려 사실은 자본주의에 훌륭하게 적응하다 못해 너무 사기적 꼼수까지 배워가서 탈이지만(여기 참조). 그렇다고 중세에 면죄부 판매한 양 돈이 장땡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윤리라는 가치, 인과응보라는 이상을 사회 속 시스템의 ‘변수’로 받아들이려는 전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항상 문제의 핵심은, 많은 경우 소비의 패턴이 너무 단순하다는 점이다.삼성이 노동자 조직화 움직임은 모조리 탄압하는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삼성폰의 품질에 영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소비의 큰 의미에 대해 무관심한 소비자에게는 직접적 효용에 차이가 없다. 그럴 경우 삼성폰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단순한’ 소비의 패턴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한국은 많은 분야에서, 윤리를 기반으로 선택을 하기에는 선택의 폭이 너무 좁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선택의 폭을 좁혀놓고 생각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있다. 어차피 꼴통급 박정희주의 유권자라면, 그냥 화끈하게 허경영한테 한표 주면 어때서! 그런데도 마냥 박근혜와 이명박 사이에서 누가 더 박정희의 후계자일지 고민하고 있다니까. 어떤 선택을 버릴 경우 존재하는 ‘대안’이 적을 수록, 윤리 같은 비교적 간접적인 효용가치들은 더욱 입지가 좁아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더욱 더 필요한 것이 바로 윤리의 명품 브랜드 가치화. 명품을 사면 그것에 부여된 품질 이상의 가치에 기뻐하며 자랑하는 것, 누구나 꽤 익숙하지 않던가. 그건 나는 명품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남과 자기자신에 대한 과시다. 명품인 줄 알고 샀는데 짝퉁이면 비록 품질에서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무지 기분이 더럽고 사기당했다고 분노하는 것은 바로 그 과시 가치에 투자한 돈이 날라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리에 대해서도, 돈을 써서 소비하고 나는 윤리를 향유쓰는 잘난 사람이라는 과시를 좀 하면서 살면 어떨까.
예를 들어, 윤리라는 사치재를 명품처럼 소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최근 하나 생겼다. 참시사기자단(구 시사저널 파업기자단)의 신매체 창간 준비공간에서 여러분들에게 돈을 소비해달라고 좌판을 차렸다. 현재, 8일만에 3억이 모였고. 이것이 바로 도덕이라는 상품에 대한 매출고다. 아직 창간도 안한 매체, 품질을 알 수 없는 매체지만, 대자본에 굴종하는 야매 언론사주들과 장렬하게 맞짱을 떳다는 그 언론 윤리가 바로 상품이다. 일반 후원금을 내신 분들이야 그냥 성금 마인드지만, 투자나 구독의 경우는 다르다. 윤리라는 가치를 산 것이다. 평소 언론들의 행태에 불만이 많으셨던 모든 분들에게는 뭔가 진짜로 뛰어들어 볼 수 있는 기회다. 언론은 거지같다고 확신해온 내가, 돈으로 정의로운 자신을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리고 자기 자신과 남들에게 자랑하라, 나는 이것을 지지하기에 내 명품 언론윤리 자존감을 구입했다고. 이제 짝퉁시사저널이 매출급감 덕에 망하기만 해주면 이건 언론시장에 ‘언론윤리’라는 것이 하나의 명품 산업 요소로 자리잡는 훌륭한 전례가 되어줄 것이다 (아, 방금 뉴스를 보니 청와대에서 구독을 끊었다고 한다).
!@#… 부덕함이 싫으면, 도덕을 소비하라. 돈으로 도덕성을 사라. 그리고 마음껏 과시해라. 과시했는데 그게 알고보면 진짜 그 정도로 과시할만한 도덕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면 쪽팔려하며 수정하고. 누구를 돕는다 어쩐다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얻을 도덕적 쾌감에 집중하는거다. 마치 여타 사치재를 고르고 사고 자랑하듯 말이다(구찌 가방 사면서 세계 피혁시장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사나?). 그러면 여러분도 소비의 쾌감을 느끼고, 기업들도 세상 다른 사람들도 인센티브를 느끼고 도덕/윤리를 자신들의 중요한 상품가치로 고려하여 신경쓰게 될 것이다. 세상을 위해서 이왕이면 도덕적 소비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당신 자신의 만족을 위해 도덕성 자체를 사라는 말이다.
!@#… 아, 물론 capcold는 돈이 없으니 도덕도 별로 소비 못한다. 그러니까 돈 안드는 말빨만 쎄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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