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치맨, 슈퍼히어로장르를 재발명하다 [판타스틱 0807]

!@#… 기획회의의 서평 버전에 이어, 지난 판타스틱에 기고한 Watchmen의 만화문화적 맥락 이야기. 본문에도 언급하고 있지만, 이 작품이 미국이 아닌 영국 만화라는 점이 어떻게 이런 작품이 나왔는지 이해하기에 무척 도움이 많이 된다.

 

히어로는 무엇으로부터 사회를 지키는가
– <왓치맨>, 슈퍼히어로장르를 재발명하다

김낙호(만화연구가)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장르 특성과 ‘맨’이라는 어미 덕분에 착각하기 쉽겠지만, <왓치맨>(Watchmen)은 그 어떤 히어로의 이름도 아니다. 그냥 감시자들이라는 의미의 일반 명사일 뿐인데 몇 가지 코드만 맞추고 나니 저절로 그런 착시가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물론 이것은 의도적이다). 즉 왓치맨은 사회를 감시하는 히어로라는 개념 그 자체를 칭하며, 스스로 무장하여 자기 주변을 수호한다는 자경단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 정의로운 마음으로 분연히 일어나서 사회를 지키는 것의 낭만은 슈퍼히어로물의 기본이니, 이 정도로는 별반 대단할 것이 없다. 하지만 <왓치맨>은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더 제기하고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나아가 이 질문은 영미권 만화, 나아가 환타지/SF 문화 전반의 주류 장르인 슈퍼히어로물의 궤도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질문은 아주 명료하다. “사회를 누구로부터 지키는가?”

<왓치맨>이라는 작품의 탄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미국식 슈퍼히어로물의 전통으로 거론되는 초강력 초능력 향연의 골든 에이지, 고뇌하는 히어로들의 실버 에이지 같은 것 이외에도 영국이라는 특수성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원래 영국만화는 산업적 연관성이 워낙 가깝고 비슷한 주류 취향을 공유하다 보니 대충 미국만화와 같이 묶이곤 한다. 하지만 영국은 (펑크의 본고장답게) 만화가 저항의 하위문화 트렌드가 주류 장르화하는 패턴이 미국보다 훨씬 탄탄하다. 즉 저항문화가 나 크럼의 경우처럼 언더그라운드 전위 문화화한 미국과는 달리, <저지드레드>등으로 유명한 같은 성년 지향 SF만화잡지들이 당대 청년문화의 첨단에 설 수 있던 것이다. 또한 국영 TV방송 BBC가 <닥터후>시리즈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만들어 온 사실에서 볼 수 있듯, SF적 상상력에 대한 주류문화의 기반이 탄탄하다. 게다가 80년대의 영국은 그 자체가 하나의 SF적 디스토피아였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물론 <왓치맨>이 80년대의 영국만화이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은 SF 창작을 위한 천혜의 보고나 다름없었고, 그 와중에 베테랑 SF만화 스토리작가 앨런 무어Alan Moore가 있었다.

80년대 중반의 앨런 무어는 <닥터후> 만화판을 포함한 각종 SF/판타지 시리즈를 위한 시나리오를 써오다가, DC코믹스의 곁가지 식물성 슈퍼히어로 스왐프씽Swamp Thing을 중후하고 복합적인 캐릭터로 재해석하여 명성을 얻었던 바 있다. 그리고 점점 더 기회가 주어질 수록 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뽑아냈는데, 주로 서로 비극이 꼬이면서 생겨나는 인간사의 암울한 측면, 어두운 본성을 발견하며 정체성을 고뇌하는 캐릭터들을 다루는 것에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 같은 영국인 데이브 기본스Dave Gibbons와 함께 작업한 슈퍼맨 단편 “모든 것을 가진 남자를 위해”(85)는 크립톤 별에서 평범하고 권태롭게 살아가는 날조된 천국의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슈퍼맨을 그려내며 어두운 재능을 최고조로 가다듬었다(당연히 그 작품은 대단한 비평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슈퍼히어로의 우울한 노이로제와 향수라는 테마는 이듬해 시작한 새로운 시리즈, <왓치맨>으로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무어는 <왓치맨>에 대해서, “밀도와 무게를 지닌, 일종의 슈퍼히어로판 ‘모비딕’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원래는 이미 대중적으로 알려진 슈퍼히어로들을 등장시켜서 현실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의도였기에 MLJ코믹스나 찰튼 코믹스 등의 다소 고전적인 슈퍼히어로들을 섭렵했는데, 작품적 필요에 따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들이 되었다 (결국 실제 대중문화의 히어로들을 팀으로 모은다는 발상은 이후에 <특별한 신사들의 리그League of Extraordinary Gentlemen>으로 미루어졌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86년 에 연재를 시작했고, 87년에 종결되어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결과물은 암울하고, 복합적이며, 미묘하고, 신랄하며, 동시에 무엇보다 장르적인, 심도 있는 걸작이었다. 그리고 같은 87년에 나왔으며 마찬가지로 자경단 의식에 기반한 미국 작가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이야기 <다크 나이트 리턴즈>와 함께 슈퍼히어로 장르의 대변혁을 불러왔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미국적 관점에서 국가(연방)주의적 관료성에 반기를 들고 자경단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갔다면, <왓치맨>은 영국적 관점에서 자경단식 정의가 파시즘적 이상향과 맞물릴 때 생기는 진정한 재앙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가 ‘스폰Spawn’을 위시한 90년대의 다크히어로 전통을 열어 주었다면, <왓치맨>은 슈퍼히어로에 대한 암울한 정신분석적 접근을 열어주어 슈퍼히어로의 내면을 소재로 하는 일련의 작가주의적 작품들에 대한 기틀을 마련했다. 그 전통 위에 <킬링 조크>나 <아캄 어사일럼> 같은 작품들이 대중성과 깊이를 동시에 거머쥐게 되었다.

<왓치맨>의 이야기 구조나 소재는 기존의 장르만화는 물론 브레히트, 블레이크, 버로우즈 등의 문학적 전통도 깊숙하게 흡수하고 있다. 여기에 종말시계 같은 당대 키워드까지 끌어들이고, 모든 것이 절묘하게 섞여들어가며 탄생한 것은 깊이 있는 걸작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슈퍼히어로 장르로 소화했다는 점이다. 당시 영미권에서 만화 자체의 예술성이야 이미 <쥐>든 아이스너Will Eisner의 작품들이든 이미 어느 정도 성립되고 있었다. 하지만 전위나 문학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모두가 만화라고 알고 있는 그 장르문화를 진지한 대상으로 복권시켜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왓치맨>은 유치한 만화의 대명사격으로 동원되곤 했던 슈퍼히어로 장르 자체에 깊이를 부여했다. 단지 진지하고 예술적인 방향으로만 임팩트를 주었다면 컬트일 뿐, 장르 변혁적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왓치맨>은 어떤 부분은 이미 담겨있는 깊이를 재발굴해내고, 어떤 것은 자신의 압도적인 스토리 솜씨로 만들어나가며 장르 자체를 진화시켰다. 항상 무어가 강조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림을 그린 기본스의 역할 역시 지대해서, 단순히 무어의 시나리오를 충실하게 옮겼다는 것을 뛰어 넘어 섬세한 표정, 숨겨진 디테일로 다층적인 독서경험을 창조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이 지독히도 슈퍼히어로물다운 모습이다.

그런데 슈퍼히어로물이라면 단순히 개별 작품으로서의 우수함이 아니라, 개별 캐릭터의 압도적인 매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마저도 <왓치맨>은 훌륭하게 충족시켰다.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로어샤크Rorschach(로샤 테스트에서 따와서 영어식으로 발음한 이름)가 최근 미국의 만화전문지 <위저드 매거진>의 역대 200 만화캐릭터 순위에서 쟁쟁한 다른 슈퍼히어로들을 재치고 6위에 올라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는 원래 맨얼굴 트렌치코트 히어로 ‘더퀘스쳔’The Question을 모델로 만들어진, 악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신념에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건 히어로다. 그런데 기존의 다른 어떤 히어로들이라도 치를 떨 정도로, 한 치도 타협하지 않고 악을 폭력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신조인 강력한 캐릭터로 탄생했다. 도덕적 절대주의를 신봉하는 진정한 의미의 극우주의자인 셈인데, 그 모습에 이르게 한 극단적으로 어두운 사연이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본질 역시 모호함에 있으니, 가면 자체가 모호한 형상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로샤테스트다. 이 모든 요소들은 당대 슈퍼히어로 장르의 예상을 크게 뛰어넘어 팬들을 열광시켰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왓치맨>은 히어로로서의 캐릭터성이 출중하기에 슈퍼히어로물로서 큰 호응을 얻었던 것이다.

사회적 정의의 본질을 캐고 들어가 버린 문제작이자 대중적 히트 장르물인 <왓치맨>은, 결국 만화로서 최초로 휴고상을 받고 유일하게 타임지의 2005년 100대 영어권 소설에 포함되는 등 큰 족적을 남겼으며 당연히 이후의 영향 역시 막대했다. 우선 히어로와 현실적 삶의 모습들, 힘의 제도에 의한 제어 등의 이슈가 장르만화의 주된 테마로 부각되었다. 히어로의 노이로제 등 어두운 내면 역시 여기부터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슈퍼히어로들이 정부요원 등록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는 <시빌워>나 슈퍼히어로들을 관리하는 거친 정부 요원들을 다루는 <더 보이즈> 같은 작품들이 나올 수 있던 기반이었던 것이다. 혹은 슈퍼히어로의 어두운 이야기가 아니라도,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 역시 주요 소재를 그대로 차용하는 직접적 영향권에 있다. <왓치맨> 작품 자체나 캐릭터들이 대중문화에서 인용되는 것 역시 종종 있는데, 좀처럼 자기 작품의 미디어 이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무어가 유일하게 흡족해하는 <심슨 가족>의 사례가 가장 재미있다. 내용은 앨런 무어의 사인회에서 독자가 <왓치맨 베이비: 브이포바캉스>라는 제목의, 작가가 출판에 동의했을 리 없는 싸구려 어린이 책을 들고 와서 사인을 부탁하는 것이다(작가 자신이 직접 목소리 출연).

<왓치맨>은 20년이 넘게 지난 2008년 현재도 꾸준히 매달 수 천 부씩 팔리며 그래픽 노블 판매 순위권에 오르는 스테디셀러로, 마치 음반으로 치면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 같은 입지를 지닌 작품이다. 가장 장르적이면서도 장르를 개혁한 선구적 작품이자,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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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치맨 Watchmen 1
Alan Moore 지음, 정지욱 옮김/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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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왓치맨, 슈퍼히어로장르를 재발명하다 [판타스틱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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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치맨(Watchmen)을 보고 나서…..

    얼마전 맥의 프론트로우에서 제공하는 영화 예고를 보다보니, Watchmen이라는 새로운 영화의 예고편이 올라왔고, 대충 보니 내가 좋아하는 히어로물인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알아보니.. 이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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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