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치맨을 왓치했다

!@#… WATCHMEN 영화판. 그럭저럭 재미있게 잘 봤다. 만약 아주 팬이라면 장면들이 재현되어 움직인다는 사실에 이미 감격할 것이고, 원작을 아예 모른다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이 사실 한국의 원작 팬들. 영미권의 원작 팬들 원작을 꽤 오래전에 문화충격으로 받아들이고 마음 속에 하나의 고전으로 위치시켰기에 ‘돌아온’ 숭배의 대상에게 열광할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책이 나온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기에 그냥 이 명작의 영화화겠거니 정도지 어떤 스스로 열광할 만한 심리적 기대가치가 없다. 작품 자체로서 말고는 즐길 부분이 없다는 것. 뭐… 아까운 일이다. 그건 뭐랄까, 닥터맨하탄이 코끼리를 노출시키며 돌아다니는 것에 환호를 하느냐(그래, 원작을 재현하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지!) 아니면 그것 때문에 감상을 방해받느냐의 차이랄까. 혹은 로어셰크의 움직이는 가면에서 변화하는 표정을 읽어내느냐, 아니면 움직이는 것에 그냥 신기해하느냐의 차이. 뭐 그런 것은 사실 어쩔 수 없는 차이다. 열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 더 즐길 수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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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치맨, 슈퍼히어로장르를 재발명하다 [판타스틱 0807]

!@#… 기획회의의 서평 버전에 이어, 지난 판타스틱에 기고한 Watchmen의 만화문화적 맥락 이야기. 본문에도 언급하고 있지만, 이 작품이 미국이 아닌 영국 만화라는 점이 어떻게 이런 작품이 나왔는지 이해하기에 무척 도움이 많이 된다.

 

히어로는 무엇으로부터 사회를 지키는가
– <왓치맨>, 슈퍼히어로장르를 재발명하다

김낙호(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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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누구로부터 지키는가 – 『왓치맨』[기획회의 226호]

!@#… 작품이 작품이다보니 여러 지면에서 소개하게 되었고, 기획회의에는 책으로서의 맥락, 판타스틱에는 다른 꼭지들 사이에서 만화문화적 맥락으로 쓰게 된 물건. 민란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 하는 압박스러운 정부와 초인을 자처하는 듯한 수장 덕에, 오늘날의 한국에서는 더욱 여러가지 의미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품.

사회를 누구로부터 지키는가 – 『왓치맨』

김낙호(만화연구가)

문화권에 따라서 정도 차이는 있지만, 스스로 무장하여 질서를 지킨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큰 미덕으로 칭송되어 왔다. 민병대든 동네 방범이든, 이런 자경단 정신은 자율적 인간이 사회적 몫을 자발적으로 다하며, 나아가 사회 속 타인에 대한 애정까지 보여주는 것으로 쉽게 간주된다. 그 자발성이 지니는 도덕적 훌륭함의 느낌은 확실히 크다. 하지만 사회가 미국 서부 시대의 개척촌이나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 임진왜란 한복판이 아니라면, 즉 사회가 나름대로 정의를 강행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면, 자경단 정신을 칭송하는 것은 몇 가지 난점에 봉착한다. 제도의 정의와 개인의 정의의 마찰, 제도 속을 사는 일반인들과 제도를 넘어서는 영웅의 마찰, 공공선의 한도, 불의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합의 등 끝이 없다. 이런 것은 특히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도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결코 낯설지 않을만한 문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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