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바라보며 성장하기 -『핑퐁』[기획회의 061102]

영웅을 바라보며 성장하기 -『핑퐁』

김낙호(만화연구가)

소년은 히어로를 동경한다. 미디어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현대 세계의 소년들은 확실히 그렇고,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오래전의 소년들도 나름대로의 히어로를 동경하며 자라났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히어로의 양상은 고대의 영웅과 아버지에서 현대의 슈퍼영웅과 멋진 또래 친구로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기본 속성은 여전히 하나다. 바로 감정 이입 가능하면서도 압도적으로 강하고, 자기 세계의 기준에서 최상의 ‘멋’을 구현해주고 있는 커다란 존재. 히어로는 자신이 동경하고 추종하는 대상이자, 자신이 언젠가 되어보고 싶고 뛰어넘고 싶은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강함을 추구하는 성장을 사회적으로 저지당하곤 하는 ‘소녀들’은 히어로에 대한 동경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그런데 그렇듯 히어로를 바라보면서 열심히 성장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겪는 통과의례가 있다. 스스로도 성장하고 더 강해지다 보니 자신이 쫒아 다니던 히어로가 사실 생각만큼 압도적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성장통이 시작된다. 나의 지금까지의 동경, 즉 목표로 삼아온 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연 내 히어로를 뛰어넘어도 되는 것일까. 따라잡힌 히어로 입장도 복잡하기는 매한가지다. 나는 이제 히어로가 아닌 그냥 아무나인 것일까. 나는 그에게 따라잡혀도 괜찮은 것일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패턴이며, 친한 친구들끼리도 나타날 법한 패턴이다. 구식으로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청춘의 고민이다. 연애 말고, 성장의 청춘.

『핑퐁』(마츠모토 타이요 / 전5권 중 제2권 발행중 / 애니북스)은 탁구를 매개로 한 멋진 성장만화다. 사실 스포츠물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거의 모두 성장물일 수 밖에 없지만, 스포츠 경기 자체와 운동능력에 집중하는 작품들이 있고 스포츠를 주요 소재로 하되 그 속에서 각각 주인공들이 겪는 인간사의 갈등에 집중하는 작품들이 있다. 전자의 경우 경기의 승부에서 나오는 재미가 강점이고 인간사의 상대적 등한시가 약점이라면, 후자는 풍부한 인간이야기가 강점이고 박진감의 저하가 약점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명작 스포츠물로 기억이 되는 것은 항상 인간사를 중심에 놓으면서 그 위에 박진감 넘치는 승부를 얹어놓은 형식의 작품이지, 경기 자체에만 집중하느라고 물리법칙을 한참 벗어나는 온갖 초월적인 기술들이 무한 상승 난무하는 설익은 사이비 무협물이 아니다. 이렇게 놓고 보았을 때, 『핑퐁』은 명작 스포츠물이자 소년 성장물의 교과서적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동네 친구 페코와 스마일이 있다. 페코는 재능과 함께 쾌활한 성격, 그리고 탁구에 노력과 목숨을 걸지 않고 그저 즐기는 쪽을 선택하는 쿨한 자세를 지녔다. 그렇기에 스마일에게 있어서 페코는 히어로이며, 페코는 자만하지 않으면서 히어로의 지위를 즐기는 관계다. 그러나 성장의 시련은 다가오기 마련. 페코는 더 강한 천재와 노력으로 실력을 얻은 다른 친구에게 지고 만다. 히어로는 몰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무뚝뚝한 스마일도 재능을 발굴당해서, 실력이 성장한다. 페코에게는 히어로로서의 모습을 회복하면서도 난데없이 모든 것을 탁구에 걸고 구차하게 매달리지 않는다는 과제가 주어지고, 스마일에게는 스스로 실력이 자꾸 늘어나면서도 굳이 승부욕에 휩쌓이지 않으며 그 낙천적인 히어로를 여전히 동경하고 싶다는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를 각자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 둘에게 한 단계 성장한 우정은 커녕 자신들의 삶의 자세에 마저 금이 갈 것이다. 여기서는 탁구의 실력이 국가 대표급으로 우주 대표급으로 마구 치솟는 것이 성장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깊이를 키우는 것이 성장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해서 작품이 제시하고 있는 해답이다. 비록 맨 마지막에 완전히 밝혀지기는 하지만, 내내 복선으로 깔고 있는 메시지가 있다. 바로 지금 순간을 즐겨가면서 스스로의 성장을 하나씩 받아들이며 살아라, 라는 것. 사실 국내에 아직 소개가 되지 않았지만 만화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당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동 작가의 여러 청춘 관련 작품들에서 비슷하게 강조되고 있는 메시지이기도 한데, 청춘의 성장통을 외면하지도, 그것에 매몰되지도 않으며 여하튼 계속 성장하는 두 친구의 모습을 담담하게 던져주는 방식이다. 두 주인공은 서로 대비되는 속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상호의존적이고, 사이가 좋으면서도 서로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고고몬스터』같이 직접적인 방식으로 주거나 『철콘 근크리트』같이 추상적인 방식으로 주는 경우도 있지만, 『핑퐁』은 이 메시지를 장르 스포츠물의 줄거리 형식 속에서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구사해내는 중용을 발휘하고 있다. 뚜렷한 해결보다는 무언가 모자라지만 계속 다음 단계를 살아나가는 모습이 갑갑하게 느껴질 독자들도 있겠지만, 바로 그것이 이 작가의 작품세계의 매력이다.

스포츠물로서의 재미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것은 마츠모토 타이요 특유의 시각연출의 공이 크다. 광각과 다양한 시점변화로 점철된 칸연출은 탁구라는 좁은 공간의 스포츠가 지니는 격렬함을 역동적으로 강조해준다. 그리고 공이 공중에 멈출 수 밖에 없는 만화의 속성을 역이용, 빠른 속도와 한없이 시간이 정지한 듯한 틈새 속에서 주인공들의 사색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또한 작가 특유의 대담하게 거칠면서도 세밀한 데생은 성장하는 소년들의 장난끼와 무정형성, 뻗어나가는 성장과 동시에 현실적인 세상의 다중성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마츠모토 타이요풍 그림에 담겨 있는 ‘쿨함’은 멋진 패션 모델들의 ‘쿨함’이 아니라, 불안과 낙관, 여하튼 질러보자는 도발성에서 나오는 그것이다. 타이요의 그림체가 주는 정서는 『GO』로 유명한 소설가 가네시로 카츠키의 문장이 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다행히도 출판사는 작가의 매력을 제대로 살려주기 위한 좋은 품질의 도서를 만들어냈다. ‘애장판’이라는 이름표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성의 있는 번역과 인쇄, 멋진 표지디자인, 컬러 페이지 복원 등 이전 출판사의 판본이 지난 세기에 절판되었던 이래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독자들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켜주고도 남는다. DVD로 출시되는 영화판과 공동 판촉이벤트를 하는 등의 마케팅 노력이 결실을 맺어서, 좋은 작품을 좋은 품질로 만들어내면 좋은 결과가 뒤따른다는 또다른 사례를 남겨주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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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본문에서는 좀 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황당한 초월적 기술의 경연장인 아스트랄 스포츠물도 만약 정말 안면몰수하고 끝까지 가주기만 한다면 충분히 나름대로 명작(괴작?)의 반열까지 오를 수 있다. 게다가 얼마나 재밌는데… 아, 그리고 하나오에 이어서, 열심히 마츠모토 타이요 작품들을 좋은 품질로 내주고 있는 애니북스 출판사 만세.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핑퐁 1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애니북스

야구광을 보며 성장하기 – 『하나오』[기획회의 060401]

야구광을 보며 성장하기 – 『하나오』

김낙호(만화연구가)

야구라는 스포츠는 자고로 수많은 대중문화, 특히 만화에서 많이도 소재로 활용되었다. 분명히 야구는 한국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고, 열정과 극적인 드라마가 가득하다. 비록 축구도 공은 둥글다며 격동의 승부를 강조하지만, 시간 제한으로 움직이는 스포츠가 아니기에 소위 ‘9회말 투아웃 끝내기 만루 홈런 1점차 승리’가 가능한 야구만큼은 아니다. 게다가 팀 스포츠이면서도 선수 개개인의 기량이 돋보이는 1대1 승부가 게임의 기본 룰이기 때문에, 통계적 수치화라든지 기타 등등 팬들이 광적으로 좋아해줄만한 요소가 많다. 하지만 반대로,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야구만큼 뻘쭘한 스포츠도 영 없다. 규칙에 익숙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떤 식으로 경기가 진행되는지 별로 직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세세한 규칙을 몰라도 적들을 피해서 공을 그물에 넣기만 하면 되는 여타 구기 종목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강렬한 열정의 대상이 되지만, 관심이 없는 자들에게는 열정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기 십상인 종목이다. 그렇기에 야구 경기 자체는 열정적인 드라마적 대결의 장이지만, 야구를 ‘바라보는’ 이야기로 간다면 열정과 이해의 충돌을 만들어주는 좋은 소재가 된다. 야구라는 스포츠 자체보다, 야구라는 스포츠를 좋은 소재로 활용하여 결국 꿈을 꾸는 것의 즐거움, 즐길 줄 아는 것의 즐거움을 서로 이해해나가는 이야기를 만들기가 좋다는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 완간된 『하나오』(전3권 / 마츠모토 타이요 / 애니북스)는 야구광 아버지와 야구에 관심 없는 아들 사이에 이해의 고리가 생겨나는 과정을 그린 유쾌한 성장물이다. 일본 최고 프로팀의 4번타자가 되겠다는 꿈 속에 살고 있는 아버지와, 모범생으로 살며 야구에는 관심 가지지 않고 살고 싶은 초등학생 아들이 같이 살게 된다. 그리고 여러 좌충우돌 속에, 역시 꿈을 꿀 줄 아는 것의 미덕에 아들도 점점 마음을 열게 된다. 그리고 황당하고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향해 간다. 동네야구에 열 내며 프로 최강을 꿈꾸는 아버지가 오히려 소년스러우며, 현실에 완전히 적응하여 합리적 인생설계만을 목표로 하는 초등학생이 어른스럽다. 그러나 그 애어른은 결국 나름의 오해와 성장통을 거치면서 꿈이 있는 소년으로 자라난다. 배트와 공, 글러브의 힘이다.

『하나오』의 작가 마츠모토 타이요는 한국의 여러 젊은 작가주의 만화 지망생들에게 필수 참조 작가로 등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만화라는 매체가 지니고 있는 특유의 ‘젊음’이라든지 ‘자유분방함’의 이미지를 내용도 연출도 만화 특유의 방식으로 스타일리쉬하게 소화해낼 줄 아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그간 한국에는 『핑퐁』이라는 탁구만화 한 편만 소개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좀 더 발랄하고 대중적인 또다른 대표작으로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핑퐁』이 작가의 성향 가운데 보다 리얼한 묘사법을 추구하는 방향에 있다면, 『하나오』는 유희적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두 작품, 아니 나아가 작가의 모든 작품을 꿰뚫는 핵심 모티브들이 효과적으로 농축되어 있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작품세계의 핵심 키워드는 청춘, 유희, 그리고 광각렌즈다. ‘청춘’은 작가의 핵심 주제로, 주로 성장통이라는 모티브로 발현된다. 그런데 그 청춘은 바로 지리한 세상과 강렬하고 자유로운 자극 사이에서 발생하는 마찰의 시기다. 그 청춘의 끝(?)에, 작가는 마지막에 슬며시 자유로움의 손을 들어주곤 한다. 때로는 확실히 희극적인 해피엔딩으로, 때로는 세상에 대한 적응을 하면서도 속에는 자유의 희망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말이다. 두 번째 키워드인 ‘유희’는 자유의 연장선상이다. 그것은 장난의 재미, 노는 것의 희열, 그것을 묘사하는 낙서의 즐거움이다. 때로는 등장인물들의 도피적 행위에서, 때로는 아예 동화적 상상으로 비틀어지고 기묘하게 여로 요소들이 제멋대로 혼합된 살짝 왜곡된 가상 세계로 나타난다. 낙서를 하고 공상을 하는 소년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세 번째 키워드는 ‘광각렌즈’다. 광각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특유의 과장된 앵글과 원근법은 앞서 이야기한 주제와 감수성들을 표현해내는 시각연출 방식이다. 이 기법은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를 극단적으로 주관적인 공간으로 만들며, 무언가를 단번에 뛰어넘고 싶어 하는 역동성의 이미지를 만든다. 중력이나 관성 같은 물리적 속박으로부터 자기 힘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핵심 키워드는 『하나오』에 대단히 뚜렷하게 발현되어, 작품을 읽는 내내 독자를 즐겁게 만든다. 물론 아들은 변하지만 아버지는 사실상 변하는 게 없다는 점이라든지, 부자의 뜨거운 유대관계 속에 어머니는 별 역할이 없다는 것이라든지 이야기상의 허점을 찾아나서는 것이 어렵지는 않겠지만, 작품의 재미를 즐기는 즐거움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이번에 한국에서 출판된 『하나오』의 소장 가치 역시 높다. 100% 완벽하지는 않지만 95점 이상은 줄 수 있을 정도로 세심한 번역, 좋은 인쇄품질과 멋진 제본이 그 핵심이다. 게다가 원래 작품 자체도 분량이 3권으로 마무리되어, 중간에 늘어지는 일 없이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만족감을 준다. 반드시 짧은 만화가 우수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훌륭하게 시작했던 만화 작품이 적당히 높은 인기 속에서 연재를 하며 줄거리 무한 엿가락 늘이기라는 함정에 빠져버리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특히 캐릭터성과 에피소드 방식 전개로 되어있는 경우에는 더욱 더 말이다. 작가의 밥벌이는 보장하나 작품으로서는 무너지는 연재물들의 바다 속에서, 자기 작품을 완전히 관리할 줄 아는 귀중한 참조 사례이기도 하다. 작가에게도 출판업계에도 독자들에게도, 문자 그대로 ‘모범적인’ 만화로 널리 추천할 만 하다.

하기야 이런 세세한 부분에서 장점을 찾고 주변에 추천을 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은, 만화라는 문화의 재미에 관심이 없는 분들에게는 마치 야구 관심없는 사람들에게 야구의 재미를 설파하는 야구광의 모습과 진배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다가 이 즐거움의 세계, 꿈을 꾸는 즐거움에 한사람이라도 더 입문시킬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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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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