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적 독서경험 – 『음양사』 [기획회의060715]

주술적 독서경험 – 『음양사』

김낙호(만화연구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초월적 현상으로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질서를 읽어내고 또 그것에 개입하고자 하는 시도는 어찌 보면 인류문명의 발달사와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종교와 신앙으로 그것을 이루고자 하였고, 다른 쪽에서는 물리적 법칙과 수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과학’을 실현하고자 했다. 아니, 사실 생각해보면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과학자들은 신들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도 과학적 방법론들을 확립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았으며, 주역은 대자연의 이치를 하나의 철학적 틀로서 파악해 나갔다. 종교가 믿음을 바탕으로 한 도덕률로만 특화되고, 과학이 방법론적 엄격성에 매진하느라 상상력을 버리게 된 후부터 둘은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여러번 해적판으로 선보였다가, 최근에서야 정식 판본으로 완간된 만화 『음양사』(전13권/ 유메마쿠라 바쿠 글, 오카노 레이코 그림/ 서울문화사)는 일본 헤이안 시대를 무대로, ‘음양도’의 전설적 대가인 아베노 세이메이의 활약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줄거리를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일종의 궁중 주술사인 아베노 세이메이가 악기에 능하고 영적인 친화력이 뛰어나지만 주술에는 문외한인 귀족 친구 히로마사와 함께 각종 기이한 영적 현상들을 해결해 나간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구도는 셜록 홈즈라든지 엑스파일이라든지 대중문화에서 은근히 친숙한 구도다). 만화『음양사』에서 가장 먼저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마치 전통 일본화를 잘라낸 듯 한 어지러우면서도 여백이 있는 그림체다. 기막힐 정도로 고풍스러운 요괴의 모습들은 물론, 정복을 입고 거니는 여러 캐릭터들 역시 현대의 만화라는 느낌보다는 옛 문헌을 들춰보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다. 각종 독백과 싯구들이 그림과 혼연일체되어 옛 서화를 바라보는 느낌을 주며, 때로는 한칸 한칸의 매력에 빠지느라 줄거리 진행을 제대로 따라가기 힘들다는 단점까지도 나을 정도로 화려하다. 이번에 완간된 정식 판본의 인쇄와 식자는 이러한 특유의 수려하고 가는 선을 뭉개지 않을 정도로 나와 주었으니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 하다. 나아가 최대한 성실한 번역(물론 세부적인 하이쿠 한 구절 한 구절의 뉘앙스를 전부 완전히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은 물론, 친절한 주석으로 높은 품질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음양도라는 사상을 다루는 진지한 자세다. 일본의 음양도는 중국에서 들여온 음양오행 사상을 바탕으로,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인정하는 신토 사상을과 일부 밀교(대승불교의 일파) 관행들이 섞여 들어간 종교학문이다. 주로 천문학과 풍수 등을 통해서 요괴퇴치나 각종 제의식 등 여러 주술 활동을 실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덕분에 요괴 기담의 전통이 강한 일본의 각종 대중문화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는 소재 가운데 하나다. 그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음양사가 아베노 세이메이였는데, 유명 환타지 기담 소설 작가 유메마쿠라 바쿠의 작품을 원작으로 오카노 레이코의 수려한 일본화풍 그림체로 그의 모험담이 새로운 시각으로 현대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음양사』가 음양도를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는 필자 역시 그 분야에 밝지 않기에 잘 알 수 없지만, 음양도를 하나의 무협식 필살기가 아닌 철학이자 세계관으로 다루고자 하는 접근 방식 만큼은 부러울 정도로 집요하다.

같은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동명의 영화가 주인공의 매력을 바탕으로 한 요괴퇴치 활극에 불과했던 반면, 이 만화작품은 뒤로 가면 갈수록 근원에 근원을 추구한다. 이 작품의 전반부는 두 파트너가 수수께끼의 문제에 봉착하고 그것을 주인공의 재주로 풀어나간다는 전형적인 탐정 및 미스테리물, 또는 기담의 전형적인 장르규칙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풀어나간다. 그 중에는 족제비 요괴도 있고, 백귀야행으로 들어갔다가 도망쳐 나오는 이야기, 사악한 마음의 주술사 또는 심지어 신적 존재와 싸우는 모험담도 있다. 그 와중에 두 주인공 캐릭터 및 다양한 조연들의 물고 물리는 관계 역시 그 재미를 배가시켜 준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단순한 시대 모험활극으로 끝나지 않을 조짐은 일찍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한 에피소드에서 세이메이가 히로마사에게 음양오행의 이치를 동그라미 하나에서부터 시작해서 기하학적 도형을 더해가며 오망성과 결국 소용돌이까지 전개시키는 설명해주는 (물론 상대는 경탄할 뿐, 전혀 못 알아듣는다) 대목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주역과 수학적 이치를 응용하여 음양도의 세계관을 압축시켜 보여주는 소름끼치는 명강의다. 그 이후로도 점차 작품의 성격은 단지 요괴를 퇴치한다거나 주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의 이치를 해석해내고 그것을 주술적으로 조합해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수도에 지어져있는 궁전이 지니는 주술적 의미는 정반형의 수학적 행렬으로 재해석되며, 바둑판의 수학적 조합이 하늘의 별들의 천문학적 질서에 대응되어 번개신과의 바둑 시합이 곧 주술의 경연장이 된다. 그리고 심지어 마지막 권에서는 종교적 제의와 수학적 이해, 물리적 과학의 얼개가 섞여 들어가는 이러한 흐름이 극단까지 흘러가서, 이집트 신앙의 투탄카멘 왕 이야기와 접목되기까지 하는 의외성을 선사한다. 숙적 도만 법사와 주술대결을 펼쳐서 이겼다는 역사 속 일화는 이 즈음에서는 완전히 장르적 활극 특유의 드라마틱한 경쟁이 아니라, 주술적 노력의 난해하면서도 경이로운 해제편으로 바뀐다. 그 과정은 대단히 난해하면서도 매혹적이어서, 마치 독자들마저도 그 경이를 그저 바라만 볼 뿐인 당대 현실 속의 사람들 마냥 얼이 빠지게 만든다.

만약 수려한 미스테리 장르물로서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7권 정도까지만 읽을 것을 권한다. 하지만 만약 종교와 과학이 경계를 녹이고 주술적 경이로 빠져드는 흥미로운 독서체험을 하고 싶다면, 그냥 계속 마지막 권까지 가시기를 권장한다. 음양오행과 수학적 자세가 초월성마저도 지배하는 『음양사』의 세계관을 꼭 전부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한번쯤 확실하게 ‘홀려’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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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확실히, 히로마사와 세이메이의 유사 야오이 관계(?)보다는 음양도의 사상 그 자체로 파고드는 후반부에 대해서는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꺼버리더라는;;; 한국에서는 워낙 그게 해적판이 그만 나오게 된 타이밍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캐릭터 드라마 방식의 만화전개에 익숙한 주류 독자들에게 아주 쥐약스러운 스토리 변모였다는 것 정도는 확실.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경이와 초월성에 관한 우화 – 충사(우루시바라 유키) [기획회의 051115]

!@#… 애니 시리즈 일본 현지 방영 및 실사영화화 계획 발표 기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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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와 초월성에 관한 우화 – 충사(우루시바라 유키)

김낙호(만화연구가)

오만하게도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생물인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 즉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지극히 제한된 지능과 인식의 폭을 넘어서는 사건에 마주칠 때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붙여서 설명을 해내곤 했다. 밤에 숲에서 소리가 나면 누군가의 유령이 돌아다니는 것이고, 착하게 살아가고 있는데도 온갖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평가와 보상을 중요시하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시련이다. 모든 것은 어떤 인격화된 주체의 행위의 결과다. 그리고 그 주체가 어떻게 해서 그런 대단한 일들을 벌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그들을 초월적인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적당히 넘어가지만, 최소한 그 누구 또는 무엇인가가 어떤 특정한 이유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하고, 그 결과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지극히 쉽게 이해 가능한 명제를 만들어낸다. 굳이 무신론을 설파하며 모든 초월적 존재들을 덮어놓고 부정해야할 필요는 조금도 없지만, 그 초월적 현상들을 인식하는 방식 그 자체는 분명히 인간의 발명품이다. ‘신’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신을 인격화시키는 것은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화권에서는 유일신을, 어떤 문화권에서는 다양한 층위와 관계망으로 엮여진 신적 존재들을, 어떤 문화권에서는 모든 사물에 깃든 영령을 초월적 현상 속에서 인식해 낸다.

<충사>(우루시바라 유키, 대원CI / 6권 발간중)는 초월적 현상들을 다루는 에피소드들로 엮여진, 환상 기담이다. 원래 국내에 4권까지 출간되었다가 출판사가 만화사업을 접는 바람에 후속편을 기다리던 독자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작품인데, 몇 달 전부터 출판사를 바꾸어 재출간되기 시작하여 최근 후속편들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키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 오토모 가츠히로가 연출을 맡아서 실사 영화판을 제작하겠다는 발표가 있었고, 또한 얼마전 일본에서 방영을 시작한 애니메이션 TV 시리즈 역시 작품의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연출해냄으로 시청자들에게 큰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작품의 성향 자체는 정작 지극히 평온하고 사색적인 기담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작품의 구성은 비교적 전형적이다. 기이한 현상이 있고, 그런 현상들을 다루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작품의 진짜 주역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기이한 일 그 자체,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삶의 한 단면이다. 따지고 보면 전설의 고향부터 엑스파일까지 수많은 기담들의 기본 형태인 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유령이나 혼백이나 신적 존재라든지 하는 등 지금껏 동서양 문화권에서 흔히 접해온 설명들과는 살짝 다른 해석을 내리며 세계관을 구축한다. 그것이 바로 ‘벌레’인데, 작품 속 설명을 인용하자면 이런 식이다:

“…이 손가락 네 개가 동물이고, 엄지가 식물을 표시한다고 하면? 사람은 여기, 심장에서 가장 먼 중지의 끝부분 쯤에 있겠죠. 손바닥의 안쪽으로 갈수록 하등한 동물이 되는 거죠. 점점 밑으로 내려가 손목부분에 이르면 혈관이 하나로 되어 있잖아요. 여기에 있는 것이 균이나 미생물이고, 이 근처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동물과 식물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지죠. 하지만 더 나아가, 손목을 거슬러 올라가 어깨를 지나서 심장에 가까운 부분에 있는 것을 바로 ‘벌레’라고 부릅니다.” (1권, ‘녹색의 좌’)

‘벌레’는 생명 그 자체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들, 형태와 존재 방식조차 지극히 모호하며 너무나 다양하게 뻗어있는 어떤 것이다. 소리나 빛을 먹고 사는 것도 있고, 인간 형태로 유령처럼 존재하는 것도 있고, 문자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형태로 보존되는 것도 있다. 벌레는 거대한 초월적인 의지 즉 신이기 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나가는 생명 그 자체다. 인간세상을 조종하고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들의 방식으로 살아갈 따름이다. 물론 각 에피소드의 이야기는 벌레의 생활로 인하여 인간 세상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그것을 해결해 나아가는 과정이지만, 그것은 혼령의 한을 풀어주는 무당의 푸닥거리도, 분노한 자연의 신령을 달래어주는 제의식도, 신에게 믿음을 회복하는 신성한 과업도 아니다. 약간은 경험의 축적으로 인하여 알고, 더 많은 부분들은 여전히 이해영역을 벗어난 존재들로부터 나름대로 인간의 생활방식을 지켜내는 것에 불과하다. 벌레는 오염된 인간문명에 대한 대자연의 복수가 아닌, 그냥 이 세상의 일부다. 즉 인격화되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초월적 존재인 것이다. 벌레라는 명칭은 이런 속성에 대한 지극히 역설적인 간판이 되어주는 셈이다.

주인공 긴코는 충사, 즉 ‘벌레’전문가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다른 충사들보다도 더욱 더 벌레를 퇴치하기보다는 그냥 살짝 사람 사는 집에서 쫓아 버리는 방식을 취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대한 경이를 잊지 않은 진정한 방랑자다. 강한 자의식으로 독자를 억지로 감정 이입시키지 않고, 한발짝 물러서서 초월성의 경이와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 인간세상의 모습들을 담담하게 구경시켜주는 역할이다. 그 덕분에 눈꺼풀을 감아도 오지 않는 진정한 어둠에 대해서 알게 되며, 무지개를 쫒듯 근원적 생명에 홀린 방랑자를 만나기도 하고, 몸 안에 들어온 벌레와 공존하기 위하여 벌레의 모든 것을 글로써 적어내야 하는 기이한 사연(명백히, ‘작가’라는 직종에 대한 알레고리다)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관찰자적 자세는 시각적 묘사에서부터 뚜렷해지는데, 아직 근대화가 오지 않은 듯한 전통적 일본 시골 산하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유일하게 긴코만이 기모노가 아닌 티셔츠와 바지 차림이다. 물론 등장인물 중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주인공 캐릭터 자체에 거리감을 부여하는 재미있는 장치로 작용한다. 인간과 자연을 묘하게 섞어 넣는 거친 그림체와 현실과 몽상의 경계가 수시로 무너지는 칸 연출 역시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물론 기담 장르가 원래 그렇듯 반복적 패턴이 계속되다보면 결국 서서히 경이로움이 감소하는 점이라든지, 반대급부로 긴코의 캐릭터성이 점차 부각된다는 점 같은 점은 대표적인 한계다. 출시된 한국어판의 경우 원작의 시적이고 고풍스러운 어감을 효과적으로 번역해내지 못한 점도 만화번역에 대한 빈약한 질적 투자를 증명하는 듯하여 아쉽다(그나마, 이전 출판사의 경우는 아예 말 자체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오역 투성이였다).

충사를 읽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고 그것과 함께 살아간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 바로 진정한 경이를 회복하는 여정이다. 한번쯤 홀려볼만한 멋진 독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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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