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합체, 절대적 힘, 선택의 문제 [팝툰 11호]

!@#… 팝툰에서 부천판타스틱차 방한했던 나가이 고 특집. 인터뷰 들어가고, 다카이 오사무라는 일본 필자의 정신분석적 접근, 작품세계 소개 등이 있다. 그런데 역시 그 분의 분석은 좀 난이도가 있는지라, 좀 더 친절한 이야기를 한 꼭지 넣도록 임무 부여. 별호가 ‘친절’인 capcold 출동.

변신, 합체, 절대적 힘, 선택의 문제

김낙호(만화연구가)

나가이 고 만화의 매력은, 마징가제트라는 거대로봇에 대한 향수로 그칠 만한 것이 아니다. 일본만화에서 나가이 고라는 작가는 선악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성장이라는 소년만화적 모티브를 완전히 새로운 경지로 이끌며 로봇물의 주제의식과 초인 전투의 컨셉을 근본부터 뒤바꿔 놓은 괴인이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는 절대적인 힘이다. 사실 원래부터 많은 오락작품들이 결국 힘에 대한 것이지만, 나가이 고가 이야기하는 힘은 성과 폭력의 형태로 발현되는 원초적이고 절대적인 무력이다. 이러한 절대적 힘 앞에는 선악의 구분 따위는 의미 없다. 그래서 마치 악으로 악을 때려잡는 것처럼 보여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가이 고의 만화를 아동용 TV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버전에서는 항상 크게 바뀌곤 하는 부분이 바로 박애정신 넘치는 정의의 주인공이라는 개념의 도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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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동경 – 『바벨2세』[기획회의 070215]

소년의 동경 – 『바벨2세』

김낙호(만화연구가)

활극형 서사문화에서 종종 사용되는 몇 가지 원형적 요소들이 있다. 초월적으로 강력한 주인공, 그 힘을 더욱 배가시켜주는 동료, 물리쳐야할 대상인 강력한 적. 이 공식을 성장하는 소년들을 대상으로, 이입이 가능하도록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우선 힘을 놓고 보자면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주어지는 초월적인 힘’이 되어주는 것이 좋다. 실제로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고 근육이 붙는 (혹은 옆의 친구들이 그렇게 변모해나가는 것을 목격하는) 시기, 엇비슷하던 또래 동료들이 서로 다양한 개성으로 분화해나가는 시절, 본격적인 사회적 경쟁에 눈을 뜨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엇비슷하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엇비슷한 사람들 중에, 혹시나 내가 급격한 성장, 거의 변신에 가까운 성장으로 초월적인 힘을 얻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동경을 충족시켜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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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을 바라보며 성장하기 -『핑퐁』[기획회의 061102]

영웅을 바라보며 성장하기 -『핑퐁』

김낙호(만화연구가)

소년은 히어로를 동경한다. 미디어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현대 세계의 소년들은 확실히 그렇고,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오래전의 소년들도 나름대로의 히어로를 동경하며 자라났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히어로의 양상은 고대의 영웅과 아버지에서 현대의 슈퍼영웅과 멋진 또래 친구로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기본 속성은 여전히 하나다. 바로 감정 이입 가능하면서도 압도적으로 강하고, 자기 세계의 기준에서 최상의 ‘멋’을 구현해주고 있는 커다란 존재. 히어로는 자신이 동경하고 추종하는 대상이자, 자신이 언젠가 되어보고 싶고 뛰어넘고 싶은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강함을 추구하는 성장을 사회적으로 저지당하곤 하는 ‘소녀들’은 히어로에 대한 동경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그런데 그렇듯 히어로를 바라보면서 열심히 성장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겪는 통과의례가 있다. 스스로도 성장하고 더 강해지다 보니 자신이 쫒아 다니던 히어로가 사실 생각만큼 압도적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성장통이 시작된다. 나의 지금까지의 동경, 즉 목표로 삼아온 길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연 내 히어로를 뛰어넘어도 되는 것일까. 따라잡힌 히어로 입장도 복잡하기는 매한가지다. 나는 이제 히어로가 아닌 그냥 아무나인 것일까. 나는 그에게 따라잡혀도 괜찮은 것일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패턴이며, 친한 친구들끼리도 나타날 법한 패턴이다. 구식으로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청춘의 고민이다. 연애 말고, 성장의 청춘.

『핑퐁』(마츠모토 타이요 / 전5권 중 제2권 발행중 / 애니북스)은 탁구를 매개로 한 멋진 성장만화다. 사실 스포츠물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거의 모두 성장물일 수 밖에 없지만, 스포츠 경기 자체와 운동능력에 집중하는 작품들이 있고 스포츠를 주요 소재로 하되 그 속에서 각각 주인공들이 겪는 인간사의 갈등에 집중하는 작품들이 있다. 전자의 경우 경기의 승부에서 나오는 재미가 강점이고 인간사의 상대적 등한시가 약점이라면, 후자는 풍부한 인간이야기가 강점이고 박진감의 저하가 약점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명작 스포츠물로 기억이 되는 것은 항상 인간사를 중심에 놓으면서 그 위에 박진감 넘치는 승부를 얹어놓은 형식의 작품이지, 경기 자체에만 집중하느라고 물리법칙을 한참 벗어나는 온갖 초월적인 기술들이 무한 상승 난무하는 설익은 사이비 무협물이 아니다. 이렇게 놓고 보았을 때, 『핑퐁』은 명작 스포츠물이자 소년 성장물의 교과서적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동네 친구 페코와 스마일이 있다. 페코는 재능과 함께 쾌활한 성격, 그리고 탁구에 노력과 목숨을 걸지 않고 그저 즐기는 쪽을 선택하는 쿨한 자세를 지녔다. 그렇기에 스마일에게 있어서 페코는 히어로이며, 페코는 자만하지 않으면서 히어로의 지위를 즐기는 관계다. 그러나 성장의 시련은 다가오기 마련. 페코는 더 강한 천재와 노력으로 실력을 얻은 다른 친구에게 지고 만다. 히어로는 몰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무뚝뚝한 스마일도 재능을 발굴당해서, 실력이 성장한다. 페코에게는 히어로로서의 모습을 회복하면서도 난데없이 모든 것을 탁구에 걸고 구차하게 매달리지 않는다는 과제가 주어지고, 스마일에게는 스스로 실력이 자꾸 늘어나면서도 굳이 승부욕에 휩쌓이지 않으며 그 낙천적인 히어로를 여전히 동경하고 싶다는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를 각자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 둘에게 한 단계 성장한 우정은 커녕 자신들의 삶의 자세에 마저 금이 갈 것이다. 여기서는 탁구의 실력이 국가 대표급으로 우주 대표급으로 마구 치솟는 것이 성장이 아니라, 바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깊이를 키우는 것이 성장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해서 작품이 제시하고 있는 해답이다. 비록 맨 마지막에 완전히 밝혀지기는 하지만, 내내 복선으로 깔고 있는 메시지가 있다. 바로 지금 순간을 즐겨가면서 스스로의 성장을 하나씩 받아들이며 살아라, 라는 것. 사실 국내에 아직 소개가 되지 않았지만 만화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상당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동 작가의 여러 청춘 관련 작품들에서 비슷하게 강조되고 있는 메시지이기도 한데, 청춘의 성장통을 외면하지도, 그것에 매몰되지도 않으며 여하튼 계속 성장하는 두 친구의 모습을 담담하게 던져주는 방식이다. 두 주인공은 서로 대비되는 속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상호의존적이고, 사이가 좋으면서도 서로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고고몬스터』같이 직접적인 방식으로 주거나 『철콘 근크리트』같이 추상적인 방식으로 주는 경우도 있지만, 『핑퐁』은 이 메시지를 장르 스포츠물의 줄거리 형식 속에서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구사해내는 중용을 발휘하고 있다. 뚜렷한 해결보다는 무언가 모자라지만 계속 다음 단계를 살아나가는 모습이 갑갑하게 느껴질 독자들도 있겠지만, 바로 그것이 이 작가의 작품세계의 매력이다.

스포츠물로서의 재미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것은 마츠모토 타이요 특유의 시각연출의 공이 크다. 광각과 다양한 시점변화로 점철된 칸연출은 탁구라는 좁은 공간의 스포츠가 지니는 격렬함을 역동적으로 강조해준다. 그리고 공이 공중에 멈출 수 밖에 없는 만화의 속성을 역이용, 빠른 속도와 한없이 시간이 정지한 듯한 틈새 속에서 주인공들의 사색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또한 작가 특유의 대담하게 거칠면서도 세밀한 데생은 성장하는 소년들의 장난끼와 무정형성, 뻗어나가는 성장과 동시에 현실적인 세상의 다중성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마츠모토 타이요풍 그림에 담겨 있는 ‘쿨함’은 멋진 패션 모델들의 ‘쿨함’이 아니라, 불안과 낙관, 여하튼 질러보자는 도발성에서 나오는 그것이다. 타이요의 그림체가 주는 정서는 『GO』로 유명한 소설가 가네시로 카츠키의 문장이 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다행히도 출판사는 작가의 매력을 제대로 살려주기 위한 좋은 품질의 도서를 만들어냈다. ‘애장판’이라는 이름표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성의 있는 번역과 인쇄, 멋진 표지디자인, 컬러 페이지 복원 등 이전 출판사의 판본이 지난 세기에 절판되었던 이래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독자들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켜주고도 남는다. DVD로 출시되는 영화판과 공동 판촉이벤트를 하는 등의 마케팅 노력이 결실을 맺어서, 좋은 작품을 좋은 품질로 만들어내면 좋은 결과가 뒤따른다는 또다른 사례를 남겨주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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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본문에서는 좀 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황당한 초월적 기술의 경연장인 아스트랄 스포츠물도 만약 정말 안면몰수하고 끝까지 가주기만 한다면 충분히 나름대로 명작(괴작?)의 반열까지 오를 수 있다. 게다가 얼마나 재밌는데… 아, 그리고 하나오에 이어서, 열심히 마츠모토 타이요 작품들을 좋은 품질로 내주고 있는 애니북스 출판사 만세.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핑퐁 1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애니북스

성인과 어른의 간극에서 하는 재담 – <다르면서 같은> [기획회의0502]

꼭 자서전 차원까지 가지 않더라도,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여러모로 작품의 생동감 확보라는 측면에서 참 편리하다. 특히 성장이라는 모티브를 가진다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반대로, 자칫 잘못하면 자아성찰이라는 무게에 어깨가 짓눌려서 지나친 자기연민의 어두운 나락으로 빠지기 십상이다. 유머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성장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실 무척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다. 하지만 한국계 미국 작가인 데릭 커크 킴(한국명 김지훈)의 작품집 <다르면서 같은>을 읽다보면, 그런 어려움이 전혀 실감이 가지 않는다. 그가 풀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쫒아가다 보면, 유머감각과 자기연민은 애초부터 너무나도 친한 파트너처럼 느껴진다.

<다르면서 같은>은 원래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에서 연재한 같은 제목의 중편과, 기타 짦막한 단편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개인 출판으로 처음 발간되었다가, 대형 출판사에 발탁되어 다시 출간된 후 그 해 북미지역의 대표적인 3대 만화상인 하비, 아이스너, 이그나츠에서 신인상을 모조리 휩쓴 화려한 데뷔를 거두었다. 이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유는 표제작인 ‘다르면서 같은’를 살펴보면 금방 드러난다. 이 작품은 20대 후반을 살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인 주인공 사이먼과 그의 친한 친구이자 마찬가지로 한국계 미국인인 낸시가 어느 주말에 한 낯선 남자를 찾기 위해 벌이는 작은 모험(?)담이 줄거리인데, 사람과 사람의 만남, 성장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섬세한 집착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어떤 순간에도 낙천주의에 빠지지도, 유머감각을 잃어버리지도 않는 절묘한 균형감각이 이 모든 것의 척추를 이루어주고 있다.

한국계라고 해서 왠지 뻔한 기대를 가지고 있을 독자들도 있겠지만,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은 옛 TV시리즈물 의 이상한 이국 공간이 아니라 그냥 미국이다. 정체성과 관련된 고민이 인위적으로 제거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민족주의의 차원이 아니라 인종적 출신 성분의 문제다. 이들의 생활은 ‘교포’가 아니라 ‘한국계 미국인’인 것이다. 좋은 예는 사이먼과 낸시가 슈퍼마켓에서 오리엔탈 맛이라고 쓰여진 라면을 놓고 펼치는 짧은 만담대화인데, 미국사회가 아시아계에 대해서 가지는 생활화된 편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무척 자연스럽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내고 있다. 여하튼, 결국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성장은 추상적인 정체성을 찾기 위한 애매한 과정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사람들과 같이 살아나가기 위한 삶의 지혜를 배워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에는 2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철없이 방황할 시기는 이미 지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활에 찌들고 굳어버리기에는 다소 이른 나이이기 때문이다. 법적인 성인이지만 아직 완전히 ‘어른’이 되지는 않은 시기. 장래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지는 않지만 직장은 있고, 결혼에 진지하게 목매이기는 아직 싫지만 고등학교 동창 녀석 가운데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시기인 것이다. 사람들과의 인연 속에서 조금씩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조금씩 성장을 이루어내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성장통과 자기연민적 성찰은 결코 과잉된 낭만으로 무겁게 짓누르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일하며 취미로 만화나 그리는(!) 자기연민으로 가득한 주인공일지라도 삶의 무게에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이유는, 바로 수다다. 혼자 독백으로 중얼거리는 일방향 뱉어내기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주고받으며 이루어진다. 고민은 바로 그 속에서 수정되거나 부정되고, 때로는 북돋아진다. 시시한 고민, 깊은 성찰, 실없는 농담 그 모든 것이 박진감 넘치는 수다 속에서 펼쳐진다. 마치 우디 앨런의 코미디 영화를 연상시키는 자아몰입형 주인공과 주변 캐릭터들의 화려한 재담이 촘촘히 수놓아지면서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이다.

이런 모티브들이 제대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만화의 표현적인 속성들을 120%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대화가 아닌 ‘수다’의 박진감 넘치는 과정을 이토록 명쾌하게 표현하는 것의 일등공신은 칸 안팎을 넘실대며 서로 꼬이고 연결되어 있는 말풍선들이다. 대화하는 주인공들은 서로 말허리를 끊으며, 서로의 말꼬리를 부여잡고 비꼬고, 그 속에서 모든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 과정이 말풍선이라는 장치 속에서 완전히 시각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급격한 시점 전환과 긴 응시를 효과적으로 배분하는 안정감 있는 칸 연출이 결합하여, 더욱 대화의 박진감이 깊이를 더한다. 그림체 역시 인종적 차이나 개별적인 표정을 섬세하게 잡아낼 수 있는 세밀함과, 만화적 여유를 쉽게 구사할 수 있는 약호화된 그림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내고 있다. 4칸 이상 가는 미국만화를 볼 때 한국의 독자들이 흔히 느끼곤 했던 필체나 문법에 대한 거부감은 적어도 이 작품을 읽을 때는 벗어던져도 좋다.

사실 자신이 직접 발굴해서 번역 소개한 책에 대한 리뷰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겸연쩍은 일이기는 하지만, 다행히도 작품 자체의 우수성이 개인적 쑥스러움을 가볍게 넘어서줄 만한 힘이 있다. 물론 신인 작품 모음집이 첫술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실제로 표제작인 ‘다르면서 같은’ 이외의 단편들의 수준은 고르다고 하기 힘들다. 성찰의 무게감에 짓눌린 자전적 초기 작품들도 있고, 너무나 날 것 그대로의 거친 풍자 때문에 김이 빠지는 것도 있다. 그에 비해서 작가가 겪은 한국에서의 일화를 소개한 단편들이 한국 독자들에게 주는 은근한 미소는 아마도 각별할 것이고, ‘올리버 픽’ 같은 짜증날 정도로 자기연민의 극단을 달리는 이야기들에 매니악한 재미를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인의 첫 단편모음집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볼 때 그 정도의 들쑥날쑥함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르면서 같은>은 사람들 사이의 만남과 자기연민에 관한 재담이다. 그것을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나간 표제작, 또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시도를 하고 있는 여타 단편들이 어울려서 각각 다르면서도 같은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다르고도 같은, 다르기에 같은, 다르다는 점이 바로 같은 사람들의 관계맺음 – 사실 그것이 우리들의 삶 그 자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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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성장의 풍경 – <난 널 좋아한 적 없어> [기획회의041228]

!@#… 여담: 내가 참 짜증나는 건, 이런 책들이 나와도 제대로 보도자료 한번 나한테 도달하는 경우가 없다는 거다. 나도 나름대로 만화판에서는 ‘이리저리 떠들고 다니는 사람’ 축에 속할텐데 말이다. 덕분에 나온지 한참 뒤에야 우연히 발간 사실을 알게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거름 출판사에서 낸 <자살토끼>의 경우… 기획단계 당시 담당 편집자분이 나에게 찾아와서 자문까지 받아갔으면서, 정작 책이 나왔을 때 나왔다는 최소한의 연락 한번 안하더란 말이지. 공짜로 책달라고 조르지 않을테니까 (일정량의 보도용 증정본 돌리는 것 마저도 무척 아까워하는 출판사들이 가끔 있다; 거꾸로, 뭔가 써줄 것도 아니면서 온 시리즈를 전질로 한부씩 더 달라고 요구하는 도둑놈 심보의 기자들 역시 있고), 제발 이런 좋은 책을 냈으면 냈다고 좀 사방에 알리고라도 다녀 보란 말이다! 난 좋은 책이 나와주면 소개시켜주려고 안달인데, 어째서인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게 아닌가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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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풍경 – <난 널 좋아한 적 없어>

  사춘기라는 시기가 있다. 그것은 급격한 육체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고, 정신 역시 그것을 헐레벌떡 뒤따라 가기 위해 휘둘리는 인생단계다. 더욱이 사춘기는 같은 사춘기에 돌입한 친구들과 사춘기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어른들 등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더욱 더 복잡한 고민거리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누구에게나 사춘기는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그때는 격정과 혼돈, 절망과 희망으로 살았던 때”라고 열심히 기억속에서 미화(?)를 하기에 이른다. 마치 한국의 보통 예비군 남자가 누구나 다 술자리에서는 왕년의 특공대원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의도적인 허풍 또는 기억의 과장일 뿐이다. 실제로 그렇다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느꼈던 것 뿐이다. 딱 한 발짝만 뒤에 서서 가만히 살펴보면 그 전에는 안보였던 것, 즉 그 당시의 감정 가운데 격정과 불안함의 방패 밑으로 숨기고 싶어했던 것들 – 바로 외로움과 공허함이 드러난다. 

  캐나다 만화가 체스터 브라운의 <난 널 좋아한 적 없어>(열린책들)은 바로 그런 감수성에 관한 이야기다. 이런 류의 작품들 가운데 삶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각이 담긴 것들이 의례껏 그렇듯이, 이 작품 역시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 특별히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보통 마을. 엄청나게 불행한 환경은 아니지만 뭔가 살짝 어긋나 있는 부분이 있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한 소년의 이야기다. 이 속에는 극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성숙해지는 초월적인 성장담도, 과거의 충격적인 사건을 제시해서 현재의 내 모습을 정당화시키는 고백 수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변화과정을 낮게 읊조릴 뿐이다. 섬세하고 세부적인 작은 사건과 묘사들이 주는 커다란 여운 속에서, 그 사소한 일상이 쌓여나가서 성장이라는 커다란 모자이크가 되는 것이다. 평범한 대화가 이어진다면 그것은 뭇 탐정물 마냥 나중에 엄청난 단서가 되어 사태를 반전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조금씩 쌓여나가며 하나의 감수성을 가진 성장과정의 모태가 될 뿐이다. 이것은 주인공이 나중에 무엇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열린 결말로 끝나는 성장물들이 지니는 핵심적인 정서다. 왜냐하면, 그 이후의 성장은 단지 주인공의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세가 있는 어머니, 어릴 때의 강박으로 욕지거리(보통은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내세우고는 하는 것이다)를 스스로 봉인한 과거. 그러나 특별히 왕따인 것도, 엄청난 괴짜 천재 인기인도 아닌 그렇고 그런 삶이다.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애,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 친구, 동생, 동생의 친구… 그냥 일상적인 인간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다. 유머로 과장하지도 않고, 신파로 치장하지도 않는 평범함이 이 만화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 무거운 평범함 속에서 점차 삶의 무게가 쌓여나간다. 별로 극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가슴 아파지는 어긋난 애정 관계, 패거리들의 우정과 결별, 그리고 어머니의 병세 악화… 이 속에서 주인공 소년은 미묘하게 조금씩 성장해 나아간다. “난 널 좋아한 적 없어”라는 대사 속에 담긴 자기 감정의 부정. 그 부정을 할 수 있다는 상황이 나타내주는 것은 바로 어느틈에 부쩍 다가 와버린 성장 그 자체다.  원래 우리들의 진짜 인생은 극적으로 확 변하기보다는 미묘하게 쌓여나간 부분이 대부분이니까.

  이런 감성을 잡아낼 수 있는 것은 꽉찬 사건의 연속보다는, 바로 관조와 여백의 정서다. 이런 여백 넘치는 감수성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화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이전에 <헤이 웨잇>(제이슨 작)에서 증명되었다시피, 단촐한 선화 위주이며 4등신화한 깡마른 사람들의 모습에서 풍겨나오는 쓸쓸함은 다른 어떤 이야기 장르에서도 이 정도까지 재현하기 힘들 정도로 일품이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처럼 강제로 움직임을 강제하지도 않고, 소설이나 시처럼 머리 만으로 모든 것을 그려내라는 이성적 호소를 하지도 않는다. 그저 비지 않았으나 읽으면 읽을 수록 뭔가 비어보이는 그림판의 연속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페이지 가득한 역동적인 연출을 완전히 배제하고, 각각 그린 칸을 마치 앨범에 사진을 붙이듯 한 장 한 장 부착한 시도는 더욱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페이지당 6칸씩 같은 크기로 여백을 가지고 나열된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참을 수 없이 지리한 삶의 여백이 외로움의 정서가 되어 독자를 괴롭힌다. 아무도 특별히 외로워하지 않는 그 이야기 속에서, 사춘기와 성장의 외로움이 가득히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절대적으로 미덕만 있는 건 아니다. 외로움과 궁상은 때로는 위태로운 외줄타기니까 말이다. 특히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이, 한국의 일반적인 독자들이 살아온 성장과정은 작가의 그것보다 다른 의미에서 훨씬 더 극단적이고 역동적이기 때문이다(군대식 교육제도와 입시전쟁이라는 것만 놓고 보더라도 말이다). 즉 어떻게 보자면 ‘싱거운 명품녹차’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화라면 자고로 명쾌한 극적 전개와 결론을 원하는 사람들과도 확실한 상극이다. 그 반대로 정적인 만화라면 따듯한 메시지가 넘쳐흘러야 한다고 생각하며 최근의 속칭 ‘에세이툰’ 만을 떠올리는 사람들과도 상극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한국의 대중적인 만화독자들 대다수의 취향에 어긋날 위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내준 출판사의 용기에 응원과 걱정을 동시에 보내고 싶다. 또한 이런 식의 독서에서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는 새로운 만화독자들이 발견되는 계기가 되어주길 바란다.

  성장물을 보고 즐기는 것은 그 성장기를 이미 다 건너버린 후, 안전한 곳에 서있는 ‘어른’들이다. 성장기 이전이라면 어차피 공감할 수 없고, 성장기 와중이라면 굳이 다른 작품 속에서 무언가를 찾을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난 널 좋아한 적 없어> 같은 작품을 보면서 다시금 자신의 성장기를 돌아보며 새로이 발견한다… “나도 그때 외로웠던 것이구나”.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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