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팬들 사이에서 속칭 하렘물이라고 불리우는 장르가 있다. 하렘물은 이름이 주는 ‘19세 미만 구독불가’스러운 느낌과는 달리, 러브 코미디물의 하위 장르 가운데 하나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여러 매력을 각각 형상화한 다수의 여주인공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한명의 다소 소박한 남자 주인공에게 동시에 매력을 느끼고 접근하면서 일대 혼란이 일어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써놓고 보니, 별로 간단하지 않은 듯도 하다). 물론 반대의 경우, 즉 한명의 일견 평범한 여자 주인공과 다수의 멋진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렘물은 주로 연애에 대한 현실론보다는 망상(?)으로 가득한 뭇 남녀 청소년들의 성장기 판타지로서 가장 큰 재미를 보았다. 일방적인 연예감정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인간관계는 지극히 단순화되고, 평범한 주인공은 더욱 감정이입이 잘 될 수 있도록 몰개성화되어가기 마련이다. 인간관계에 대한 성숙한 성찰이라는 주제가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목적이 ‘다른 곳’에 있는 장르로 치부받은 것도 사실 당연한 일이다.
<루나 하이츠>(호시사토 모치루 / 북박스)는 하렘물이 주는 대리연애 쾌감과, 현실적이고 성숙한 인간관계가 잘 결합되면 얼마나 멋진 러브코미디가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오랜만의 수작이다. 원래 이 작가는 일관된 작품 흐름을 유지했다. 30대 회사원이며, 영업직을 맡고 있으며, 적당히 사람들 사이에서 맞추어 주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만 스스로 어떤 강력한 출세욕을 불태우지는 않는다. 무난하게 생활을 꾸리고 있지만 내심 뭔가 자극에 대한 욕망이 있는, 하지만 탈선은 그다지 꿈꾸지 않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일상으로 일련의 여성들이 들어오면서 그의 생활이 서서히 변해나가는 이야기 구조다. 그리고 <루나 하이츠>는 그 흐름 속의 최신작이자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결혼식을 목전에 두고 있는 남자주인공 난조가 작은 신혼주택 건물을 마련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아뿔싸, 신부가 약혼파기를 선언하고 모처럼 무리해서 마련한 집은 텅 비게 된다. 그러자 회사 과장의 아이디어… 인원부족으로 폐쇄직전에 있는 사내 여자기숙사를 이 집으로 옮기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결국 난조는 얼떨결에 기숙사관리인이 되어, 4명의 직장여성들과 한가족 생활을 하게 된다. 당연히 4명의 여성들은 모두 각각 뚜렷한 개성으로 각자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하렘물 구도이며, 2권까지 왔는데 벌써 그 중 두 명이 공개적으로 대시를, 두 명은 부분적인 호감을 드러내고 있는 정도의 경지다.
이들이 벌이는 일상적인 이야기와 마찰, 연애감정의 미묘한 밸런스는 회사생활이라는 대단히 현실적인 틀거리 안에서 결코 과장되지 않게, 하지만 심심하지도 않게 멋진 웃음을 선사한다. 여기에는 과장된 성적 매력이나 성적 연상작용을 시키는 상황과는 거리가 먼 담담한 연출과 그림체도 큰 몫을 하고 있다. 게다가 이 장르에서는 보통 몰개성/평면성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주인공 역시 여성들과의 열린 관계를 통해서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난조의 모습을 보는 것도 적지않은 즐거움이다.
물론 이 작품이라고 해서 하렘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원죄 – 즉 이성의 객체화라든지 하는 한계가 극복된 것은 아니다(생리대를 소재로 하는 몇몇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 생활에 대해서 다소 피상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약점이라든지). 하지만 뭐라고 할까, 하렘물은 하렘물인데 한층 성숙한 하렘물이다. 그래서, 재미있다.
[으뜸과 버금 2004. 9.]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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