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우리나라 – <조선왕조실록>[기획회의 050605]

!@#… 이번 월간 인물과 사상에 쓴 <만화 박정희> 글(발간 후 올릴 예정)과 다소간 이어지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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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우리나라 – <조선왕조실록>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나라의 정권을 잡는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크게 신기할 것도 없는 노릇이다. 권력의 가장 물질적인 형태는 바로 무력이고, 그 무력을 손에 쥐고 있는 자가 서서히 나머지 권력 형태들을 갈구하여 어느날 갑자기 실력행사에 나선다는 시나리오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항상 있어왔던 이야기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말이 하나 있다: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하리라”. 이 말은 어디까지나 무력의 폭풍 앞에 억압당한 불쌍한 우리네 중생들을 위한 위로의 한마디일 뿐이다. 칼로 일어선 자가 칼로 망하리라는 보장 따위는 어디에도 없으며, 행여나 망한다 할지라도 이미 충분한 권세를 누린 다음에 망하는 경우가 사실은 더 많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칼로 일어난 자를 사후에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도 한다. 별로 정당화할 구석이 없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구국의 결단’이니, ‘그래도 덕분에 경제는 살아서 밥은 굶지 않게 되었다’, ‘각하는 청렴하신 분이었다’는 등의 사실검증과는 상관없는 어거지 신화들을 마구 동원한다. 물론 권력을 잡은 자가 스스로 그런 프로파간다를 실시하는 경우도 많지만, 사실 더 중요한 점은 그들의 아래에서 권력의 대상이 되었던 백성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어느 틈엔가 그것을 인정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권력에 복종을 하며 살아왔던 자신들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니까(심리학에서 ‘인지부조화이론’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그것이 약간 오버를 하면, 하나의 종교와도 같은 신념이 된다. 아주 단순한, 권력의 생리다.

박정희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다. 약간 더 – 한 500년 정도는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한 군인이 있었다. 그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기존의 나라를 뒤엎고 새 왕이 되었다. 그리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뿌리도 뭣도 없이 왕 노릇을 하면 분위기가 좀 거시기해지기 때문에,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관리 노릇을 한 그의 고조를 시작으로 해서 ‘조선왕조’를 상정했다. 그리고 그의 자손대에 이르는 파란만장한 왕조의 역사를 주욱 묶어내서 만든 기록이 바로 그 유명한 ‘조선왕조실록’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5권 발매중, 휴머니스트)은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만화로 된 현대적인 화답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갖가지 일화들과 큰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현대의 독자들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적절한 현대적 비유와 그것을 만화적 연출로 버무리는 솜씨를 발휘한다. 진지한 내용과 독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대화 건네기, 그것을 딱딱하지 않게 감싸는 유머감각. 그리고 그 속에 명확하게 묻어나오는 작가 자신의 역사와 사회에 에 대한 시각.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주었던 장점들을 이 작품 역시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 해외문물에 대한 소개라는 화제성과 보수/수구적인 가치관과는 달리, 자세히 알든 말든 우선 사람들이 지겨워하고 보는 한국사 이야기라는 약점과 진보적인 가치관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 속에서 벌어진 일들 이상으로 무척 흥미롭다. 작가는 그 역사가 권력의 암투를 통해서 진행되는 정치사라는 뚜렷한 줄거리를 읽어낸다. 그 정치과정 속에서는 구악을 멸하지 못하여 뒤통수를 맞는 이야기, 힘의 흐름에 따라서 철새짓을 반복하는 군상들, 무력과 모략의 미묘한 결합, 다툼의 속에서 가장 먼저 증발해버리는 신뢰와 사상, 민생 따위의 가치들 등, 무척 친숙한 테마들이 잔뜩 버무려져 있다. 역사가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역사는 바로 권력의 거울이다. 한국사를 다뤄온 다른 어떤 만화보다도 권력의 생리를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현재의 모습과 닮아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조선’이라는 사회가,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곳이 된다. 먼나라, 우리나라인 셈이다.

특정 인물이나 정파에 대한 일방적인 편들기도, 양비론적 패배주의에도 빠지지 않는 절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은 작가의 오랜 신문시사만화 경력 덕분인 듯 하다. 혹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원작 자체가 가지고 있는 풍부함 역시 작용했을 것이다. 권력의 작용 뿐만 아니라, 시대적인 사회상과 민중의 동향 등 총체적인 해석을 통해서 조선 역사를 단순한 탐욕스러운 개개인들이 벌이는 궁중드라마로 격하시키지 않은 점이 바로 이러한 두 가지 배경이 합쳐졌을 때 나올 수 있는 미덕이다. 그림체 및 시각연출 방식 역시 지나치게 설명조도, 지나치게 설명이 없어서 불친절할 정도도 아닌 균형을 맞추고 있다. 선은 명확하며 단순하고, 극적인 과장이나 섬세한 세부묘사에 빠지는 일 없이 가장 필요한 만큼의 정확한 장면묘사를 일삼고 있다. 물론 등장인물이 워낙 많다보니 캐릭터들이 간혹 서로 헷갈린다거나 하는 문제도 있지만, 이만하면 ‘양반’이다.

이 시리즈는 워낙 장편으로 기획되어 있고, 이제 한 고비를 넘겼을 뿐이다. 비록 간혹 스케쥴이 삐걱거리고 있지만, 용케 마지막 권까지 무사히 나와 줬으면 하고 바란다. 벌써 이 정도 수준의 1부라면, 마무리되는 것만으로도 이미 박수를 받아 마땅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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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웹만화 제작툴 Tarquin Engine 일반발매

!@#… 작가 E-Merl이 고안해낸 웹만화 제작툴 Tarquin Engine이 드디어 일반 공개되었다. 혁신적일 정도로 직관적인 줌인-줌아웃 방식으로 무한 캔버스를 자유로이 누빌 수 있는 독서 인터페이스를 가능하게 해주는 장비. 그냥 같은 칸 크기로 한 4칸 쯤 세로 스크롤하는 방식을 취하는 웹만화의 경우는 그다지 효용성이 없지만, 여러 칸 크기와 방향을 오고가는 복합적인 독서방식을 도입하고자 할 경우 꽤 좋은 선택. 

!@#… 기본적으로는 플래시에서 구동시키는 소스파일. 음… 유료판매군. -_-; 20달러. 뭐 소프트웨어치고는 그렇게까지 헉!하고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여튼 유료군. 혹시 생각 있는 사람들은 알아서 구해보길. (혹은 ㅊ대ㅁ과 ㅂ학과장에게 졸라서 학과차원에서 단체구매?)

여기서 산다:

http://www.webcomicsnation.com/tarquin/

이걸로 이런 식의 만화를 만든다:

http://e-merl.com/pocom.htm

http://e-merl.com/form.htm

뚝딱뚝딱, 인권을 짓다 – <뚝딱뚝딱 인권짓기> [으뜸과 버금 0505]

!@#… 이런 주말은, 밀린 투고문들 올려놓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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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딱뚝딱, 인권을 짓다 – <뚝딱뚝딱 인권짓기>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만화는 정보전달에 있어서 효과적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 당시 남북이 서로 뿌려댔던 삐라에 만화가 난무한 것이고, <먼나라 이웃나라>가 일종의 세계화 시대 교과서로 장기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신문만평들이 정치 칼럼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힘은 종종 잘못 평가되고는 하는데, 단지 만화로 하기만 하면 그런 좋은 효과들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착각이다. 다른 어떤 분야라도 마찬가지이듯 결국 어느 정도 이상으로 잘 만든 만화가 효과적인 것이지,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어도 단지 만화이기 때문에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관심의 손길을 당기지만 결국 허접한 품질 때문에 오히려 쓴웃음만 짓게 만드는 수많은 국정 또는 기업 홍보 만화들을 생각해보라.

인권이라는 분야가 있다. 소위 ‘개발 독재’라는 명목하에 자신들에게 부여되었던 말도 안되는 억압을 오히려 그리워하는 이상한 변태피학성 체질을 지닌 사람들이 많은 어떤 이상한 나라에서도, 특히 90년대말 이후로 이 화두가 꽤 주류적인 담론으로 떠올라 있는 상태다. 인권운동가들의 오랜 끈기 있는 노력을 바탕으로, 정치 사형수 출신 대통령이 주도한 인권위원회 설립으로 본격화된 이 움직임은 무척 긍정적이다. 하지만 항상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문제가 하나 있으니, 바로 인권 개념 자체의 난해함이다. 인권이 하나의 궁극선으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이념은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그 인권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가, 무엇이 인권을 침해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범위도 넓을뿐더러, 우리 일상생활 속에 뿌리 깊게 침투해 있는 – 특히 인권을 사치로 여기는 기이한 사회가 수십년간 유지되어 오는 통에 완전히 세뇌 당해버린 내면적 파시즘을 직면시키는 작업은 엄청난 대장정을 요구하고 있다. 어렵다. 설명과 교육으로 계도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쉽게 이해시키기 어렵다. 자, 그럼 이제 해결사가 나타날 차례다. 바로, 만화다. 그렇게 해서 이미 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인권 관련 만화 단편모음집 <십시일반>(창작과 비평, 2004)이 탄생해서 다소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이제, 좀 더 본격적으로 인권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차례다.

<뚝딱뚝딱 인권짓기>(인권운동사랑방 글, 윤정주 그림/야간비행)가 바로 그런 책이다. 부제인 ‘만화 인권 교과서’가 표방하는 포부 그대로, 인종주의, 장애우 차별 문제, 빈부격차, 성차별, 평화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가장 날것 그대로의 문제의식을 풀어낸다. 월간 <고래가 그랬어>에 연재된 분량 가운데 13개 주제를 묶어낸 것인데, 각 주제는 얼핏 거창해질 수 있는 인권 이슈들을, 우리가 지극히 일상적으로 보고 듣는 생활 현실 속에 잠복해있는 모습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장애인 인권을 보장하라!”라는 거친 구호가 아니라, ‘작게 낮게 느리게 함께 걸어요’라는 권유를 하는 모습이 바로 이 만화의 절대적인 미덕이다. 독자대상층은 초등학생 정도에 맞추어 문체와 그림체 등을 조절했는데, 어른들도 전혀 무리없이 독자층으로 포섭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작품이 가능한 것은 역시 인권운동 사랑방이라는 이 분야 최강의 베테랑 집단이 작품에 들어갈 내용을 조율했기 때문이다. 인권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나 감상적인 공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왜, 어떻게, 앞으로 무엇을’이라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방향을 제시해온 이들의 내공이 담겨있다.

물론 좀 더 만화로서 재미있는 서사를 추구했으면, 좀 더 세련된 표현기술들을 구사했으면 하는 자잘한 아쉬움은 여럿 있다. 하지만 그것은 100점에서 99점으로 감소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은 초등학생 자녀에게 줄 수 있는, 혹은 자녀를 핑계 삼아 부모들이 사서 직접 읽는 선물로서 최상의 아이템이다. 부디 이 ‘만화 인권교과서’가 진짜 교과서가 되어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해주었으면 한다.
[으뜸과 버금 20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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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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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본연으로 – <버추얼 그림동화> [기획회의 050516]

동화의 본연으로 – <버추얼 그림동화>

한국에서 동화(童話)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사실 원래는 그다지 아이들이라는 특정한 대상을 위해서 만든 이야기라고 보기 힘들다. 민담과 신화들이란 것은 애초부터 인간사의 여러 모습들에 대한 비유로 가득차 있고, 당연히 성적이든 폭력적이든 미성년자 관람불가일 법한 내용이 많을 수 밖에. 사실 한발 더 나아가서, ‘어린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것도 지금쯤은 이미 정설로 굳어져있다. 일정한 나이를 정해놓고는 그 이하의 사람들을 일종의 사회적 온실 속에서 보호받아야 할 종자로 취급하는 행태가 고래부터 항상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간혹 사람들은 ‘동화’라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세상살이의 회한을 깊이 담고 있는 잔혹한 이야기들인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고는 한다. 그 때 흔히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현대적인 ‘어린이’ 개념을 애써 도입해서 모든 사회적 요소들, 잔혹한 표현, 성적 뉘앙스 등을 억지로 거세시켜버리는 것이다. 물론 그 결과 동화는 무척 재미없어질 뿐만 아니라 핵심 메시지까지도 퇴화해버리지만, 그 빈 자리에는 꿈과 낭만, 보수적인 가족 이데올로기, 귀여운 동물 캐릭터들을 적당히 끼워넣는다. 다른 방법은, ‘알고 보면 잔혹한 동화’ 투로 선정적인 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변태성 악취미에 가까운데, 원래의 동화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쇼킹한지를 가지고 오히려 상업화를 시켜서 성인독자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동화의 본연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우리가 사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교훈을 얻는 것이다. 먼 동화속 유럽 나라의 신데렐라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 속에서 벼락출세를 꿈꾸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동화는 멍청하지 않다. 권선징악에는 댓가가 따르고, 어떤 억울함도 100% 해소되는 일 따위는 없다. 이해관계의 충돌과 약육강식이 선악의 모습으로 치환될 뿐이다. 교훈은 제3자들의 낭만적인 이야기 속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이입을 통해서 삶을 대처해나가는 힌트를 얻음으로서 얻어낸다. 이런 요소들이 빠진다면, 동화는 그 잘못 붙여진 이름 그대로, 온실속 아이들을 위한 싸구려 엔터테인먼트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강경옥의 <버추얼 그림동화>(콘텐츠와이드/2권 발매중)는, 이러한 동화 본연의 목적의식이 잘 살아있는 작품이다. 이미 여러 단편들을 통해서 상상 속 세계와 가상의 설정을 통해서 현실의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져온 작가이기에, 이런 류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실 당연한 행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80년대 이래로 작가가 계속 관심을 보여온 ‘무덤덤한 주인공이 감정을 획득해나가는, 또는 무의식적으로 외면/봉인하고 있던 감정을 재발견해내는 과정’의 이야기라는 소재가 결합하면서 이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내용은 에피소드 방식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주인공들이 어떤 수상한 가게에 들러서 가상현실 기계로 특정한 동화 내용을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체험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현실세상에서 일어났던 문제점들을 직시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매번 주인공은 달라지고 그들의 사연과 경험하게 되는 동화 역시 바뀌지만, 변함없는 것은 가게주인 뿐이다. 이들이 겪게 되는 동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들이면서도 왠지 현실적인 설정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정도의 이야기다. 아예 과격하게 인물들을 통째로 재해석을 해버리는 것 없이, 그냥 은근하게 친밀하다. ‘라푼첼’이야기라든지, ‘푸른수염’이라든지 말이다.

매번, 동화 속 인물들의 관계와 행동거지는 주인공이 현실에서 고민하고 있는 그 사람들의 관계와 유사하다. 그것을 반영해주면서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진짜 감정을 끄집어내서 직면하게 만든다. 주인공은 자신이 실제 그 등장인물이 아니고 단지 가상의 체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처지를 그대로 경험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그리고 물론 동화속 해피엔딩이 항상 현실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실한 선을 그어주고 있지만, 작품 속 주인공들에게 나름의 교훈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주인공들은 동화를 통해서 현실도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자신의 처지를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현실 속에서 그 교훈을 실천하기 위해서 충만한 마음으로 가게를 나선다. <버추얼 그림동화>의 동화체험은, 사실상 전형적인 심리치료 과정에 가까운 것이다. 특히 트라우마와 불안, 우울 증세 등에 대한 치료적 접근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 잔혹동화의 탈을 쓴 심리치료 만화인 셈이다.

2000년대 들어서 주로 과거 작품의 복간에 머물 뿐 확실한 신작 장편이 나오고 있지 않아서 독자들을 아쉽게 했던 한국 순정만화계의 중견인 강경옥의 복귀작으로 이 작품은 썩 만족스러운 편이다. 엄청난 혁신을 가지고 왔다기 보다는, 강경옥 만화가 너무 낡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물론 단점 역시 원래 성향 그대로다. SF의 외피를 쓰고 있으면서도 실제 우주선이나 물리학적인 개념에서는 팬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말았던 <별빛속에>의 악명(?) 그대로, <버추얼 그림동화> 역시 디테일에 대해서는 무척 무신경한 편이다. 동시대적인 감수성보다는, 근본적인 감정과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쪽을 선택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림체나 시각연출 역시 현대적 감각의 스타일리쉬함보다는, 감정선의 변화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기에 한눈에 보기에 ‘80년대틱하다’는 느낌을 받기 십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강경옥 만화의 올드팬들에게는 나름의 친숙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듯하지만, 새로운 젊은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에는 상당한 악재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이 작품이 연재되던 엠파스 연재만화란이 사업을 접어서 현재 연재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어디서 끝맺어도 크게 이상할 것 없는 에피소드 방식이기는 하지만, 역시 오랜만에 다시 상승세를 타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 두 권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단행본이 많이 팔리면 창작 지속에 도움이 되려나? 모르겠다. 이런 상황과 관련된 동화는 없으려나, 괜히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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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제1회 송채성만화상 심사평

!@#… 2005년 제1회 송채성 만화상, 성황리에 마쳤다. 행사 자체에 대해서는 이곳에서도 전에 언급했고, http://www.취중진담.com/ 에 가면 자세히 있으니 패스. 이제 후속 행사로 몇가지 것들이 이어질테고, 이번의 좋은 시작이 더 많은 씨앗을 뿌리겠지. 개인적인 희망은, 이것을 필두로 해서 특정적 취향과 색깔을 가지고 있는 만화상들이 융성했으면 한다. 대충 얼버무리며 ‘좋은 만화’를 뽑는다는 그런 행사들 말고.

여튼, 그쪽에 써준 심사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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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제1회 행사라는 것, 특히 단순히 우수만화를 뽑는 것이 아니라 성향이 뚜렷한 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 속에서 심사위원 일동은 응모작들을 꼼꼼하게 탐독했다. 첫 행사이기에 이전의 참조 사례가 없어서 그랬는지, 응모작들의 전체적인 면모는 여러 방향으로 흩어져있었다. 원래 행사 기획자들이 의도했던 성향의 작품들이 많았지만, 다소 예상외의 느낌으로 다가온 작품들도 여럿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순정극화라는 조건을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서, 여러 응모작들이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하기보다는 감각적인 분위기의 단편적 사건만 나열하고자 하는 면모를 보여서 아쉬움을 자아냈다. 시각적 완성도 역시 편차가 있어서, 인쇄용으로 부적합하다 싶을 정도로 세밀한 원고부터 작품 독해에 다소 무리를 주는 밀도 낮은 시각연출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응모되었다.

수상권에 들어갈 만한 작품들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시각은 대체로 일치했다. 수상작의 2배수인 6편이 결선에 포함되었는데, 결국 박영아의 <갈증>이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이야기 호흡의 고른 안배, 시각적 스타일의 안정성 등 단편 만화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일상성의 분위기 속에서 비일상적 사건을 끌고 나가는 방식이라든지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진솔한 감정과 갈등이 본 상의 취지에 적합하다고 판단되어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가작 두 편은 각각 정진주의 <아이러브커피 아이러브티>, 그리고 송태욱의 <별로 특별하지 않은>이 선정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각각 두 개의 짧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진주의 작품은 일상성 속에 담긴 따뜻한 유머감각이, 송태욱의 작품은 엉뚱한 상상과 현실의 경계선을 능청스럽게 흐리는 솜씨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번에는 아쉽게도 마지막 문턱에서 탈락된 김윤희의 , 이정석의 <하트비트>, 정병식의 <기억을 안다> 역시 추후에 반드시 다시 좋은 기회를 얻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로써 제 1회 송채성 만화상이 결실을 맺었다. 수상자들의 만화가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여 고 송채성 작가를 뛰어넘는 좋은 활동을 보여주기를 기원한다.

– 심사위원 일동 (가나다순)
강성수, 강인선, 김낙호, 박관형, 석동연

만화와 이야기와 그림 도착증.

!@#… 저번 씨네21 원고에서, 만화가의 존칭이 ‘화백’으로 통용되는 현실을 싫어한다고 밝힌 바 있다. 화백은 원래부터 미술계의 용어로서 그림 잘 그리는 이에게 붙이는 것인데, 만화는 그림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만화는 어떤 감성과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하는 매체이며, 그 이야기의 수단으로서 그림이라는 표현방식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이런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 분업화의 시대, 스토리 작가가 따로 있는 경우는 어쩌고? : 스토리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 하지만 결국 만화작가가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사람. 각본가와 감독의 차이다. 사실 분업화가 좀 더 되면, 그림도 직접 다 그리지 않게 된다(어시/문하생을 시킨다). 그 경우 더더욱 화백과 거리가 멀어지지.

 * 여하튼 그림을 그리니까 화백이라고 하는데 뭐가 불만이냐: 호타준족에 지능형 플레이까지 하는 야구선수에게, 당신은 최고의 육상선수라고 ‘나름대로 추켜세우면’ 좋아하겠나. 영화감독을 사진가라고 부르는 격이랄까. 원래 화백은, 신문사에서 신문만화가를 부른 호칭이다. 다른 부분은 어차피 다 빽빽하게 글인데, 만화만 그림이 들어가서 확실히 차별화가 되니까. 그뿐이다. 

 * 그래도 화백이라고 하니까 폼나잖아?: 정확히 하자. 화백이라고 부르면 폼이 나는 것이라고 서로 어느틈에 합의를 했을 뿐이다. 단적으로, 내가 보기에는 하나도 폼 안난다. 고작 그 정도 호칭에 편승하고자 만화를 미술계 담론의 하위분류 중 하나로서 전락시켜버리면서 그게 무슨 폼인가. 그래서, 그냥 보편적인 극존칭인 ‘선생’을 쓰는 것이 좋다. 이야기꾼, 혹은 아예 그림 이야기꾼에 대한 극존칭 단어가 새로 생겨나기까지는. 아니 생겨나지 않아도 사실 상관없다. 영화판에서, 명감독에 대한 전용 극존칭이 따로 있던가?

!@#…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볼 때, ‘화백’ 호칭은 만화계의 만성적인 그림 도착증의 여러 결과중 하나에 불과하다. ‘미술’에 대한 하등 필요 없는 혼자만의 열등감. 

http://montblanc-kay.com/blog/archives/2005_05.html 참조.

…유효적절한 문제제기다. 확실히, 상당수/대다수의 본격 만화 커뮤니티들은 그림 페티쉬에 걸려있다. 이야기의 부재를 메꿔주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오히려 DC 카겔 같은 곳들의 여러 개인플레이어들. 하지만 사실 그 쪽도 90%는 서사적 완성도에 대한 고민보다는 즉각적인 아이디어를 4칸 속에서 발휘하는 것에 매진하고 있다. 물론 만화를 창작함에 있어서,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흉이 아닐 뿐더러 굉장한 장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림 잘 그리는 것이 장땡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나감에 있어서 시각적 연출의 선택의 폭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 만화에서 좋은 그림이란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적합한 그림”이다. 그런데 애초에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는 주제에 그림만 딥따리 수련한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좋은 만화를 만들어내겠다는 것인가. 그런데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우선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소위 대학이라는 곳의 만화학과에 필요한 “교양과목”은 교육학 개론이니 일본어회화니 일과 윤리니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와 철학사와 세계신화학이라는 말이다. 그런 고민들을 갖추지 못하면 단지 속이 빈, 즉각적인 이미지만 난무하는 때깔좋은 쭉정이가 될 뿐. 화려하니까 독자들이 몰려들었다가, 얕으니까 이내 실망하고 우루루 흩어지는 패턴의 반복에 불과하다. 똑같이 그림 도착증에 걸려있는 창작 지망생들에게나 선망의 대상이 될 뿐, 이야기를 느끼고 싶어하는 일반 독자들과는 점점 멀어진다. 

!@#… 뭐 기술이 본질을 압도하는 이런 현상이 오로지 만화만의 문제인 것도 아니다. 영화든 소설이든 뭐든, 현대 이야기 매체들의 보편적인 골칫거리. 기술을 갖추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기술만 갖춰도 얄팍하게나마 호응을 얻어낼 수 있는 듯 보인다(화려한 의상으로 TV화면에서 열심히 춤추는 붕어 엔터테이너 – 자칭 가수 – 들을 생각해보라). 그것이 목표하는 바라면,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10명 중 1명, 아니 100명 중 1명이라도 본질적인 길을 갈 때 비로소 만화는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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