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엔 불과 바람의 나라로! [한겨레21/629호]

!@#… 이번에는 올해 추석특집호 한겨레21에 들어간 글. 역시 데스크 거친 완성본은 지난주부터 정식 사이트에서 공개중. 분량과 컨셉 조절 상 리드문은 거의 담당 기자님의 재작업(깔끔발랄하게 잘 작업해 주셔서 감사. 정말 운나쁘게 실력없는 데스크를 만나면 대략 피눈물인데). 여기 사이트는 항상 그렇듯 원고 버젼으로 공개. 주어졌던 컨셉은 “대하서사”, 덤으로 고대사 테마도 같이 넣으면 좋지 않을까, 라는 쪽이었음.

한가위엔 불과 바람의 나라로!

김낙호 (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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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가족만화 10: 가족 그 엽기성에 대하여 [씨네21/572호]

!@#… 꽤 긴 추석 맞이이기에, 여러 주간지에서 연휴용 만화 추천 기사를 냈다. 그 중 올해 capcold는 씨네21과 한겨레21에 기고. 양쪽 모두 기자님들이 센스 있게 특정 컨셉을 주문해주셔서 한층 수월하게 그리고 즐겁게 원고작업을 할 수 있었음 (가장 난감한 것이 그냥 ‘좋은 만화 추천해줘요’ 같은 주문). 여튼 이건 그 중 씨네21 글, 컨셉은 ‘좌충우돌 가족‘. 데스크편집을 거친 최종 게재물이야 공식 사이트에 이미 지난 주부터 열려있고, 여기는 원고작성 버전. 사실 좋은 지면일수록, 리드문이라든지 소제목, 큰제목 등이 데스크의 손길을 거치면 한층 부드럽고 해당 지면의 느낌이 잘 살아난다 – 바보같은 지면들은 데스크의 실력도 안습이자만. 씨네21에서 이번에 만들게 될 만화잡지 역시 좋은 데스크를 갖추어 좋은 인연이 되어주기를 희망. 여튼, 이런 기사다. (정정: 납골당 모녀는 3권 발행중이다. 4권이라고 쓰여진 것은 그냥 4권을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 오타 -_-; )

추석, 가족, 그리고 약간 다른 가족만화
김낙호(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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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고농축 원액 – 『씬시티』[기획회의060915]

하드보일드 고농축 원액 – 『씬시티』

김낙호 (만화연구가)

하드보일드라는 대중문화 장르가 있다. 비록 장르 중 일부가 ‘느와르’라는 수식어로 미학적 가치까지 부여받을 정도로 나름의 굳건한 지위를 보장받고 있지만, 여전히 이 장르의 핵심은 바로 폭력, 섹스에 대한 탐닉으로 무장된 범죄물이다. 그런데 그 범죄라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인 것 정도로 그려지고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밑바닥 인생들의 최대한 “폼 나게” 사는 인생살이에 대한 도취로 가득하다. 나쁜 놈들도 폭력적이고 막나가지만, 좋은 놈들도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로 폭력적이고 막나간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탐욕과 욕망이 뒤섞인 속에서도, 주인공 쪽은 한 가닥 지고지순함만은 간직하고 있기에 구분이 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선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 악을 누르는 이야기. 험난한 세상 찌든 도시 속, 서로 범죄적 음모로 물고 물리는 밑바닥 활극의 카타르시스가 바로 이 장르의 재미이자 인기의 비결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극단적으로 슬럼화된 어두운 도시가 있고, 그 거리에는 온갖 조직 범죄와 일반 범죄가 들끓는다. 도시는 부패한 공무원과 종교인들의 지배하에 있으며, 이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기 터전을 지켜야 한다. 악당들만큼 비정하고 거칠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이 도시에서, 여러 인간군상들이 서로 음모에 얽히고 먹고 먹힌다. 이것이 바로 『씬시티』(프랭크 밀러 / 세미콜론 / 전7권 중 3권 발행중), 문자 그대로 ‘죄악의 도시’의 세계다.

원작자의 광팬과 원작자 본인이 공동 감독한 동명의 영화로 한국에는 먼저 소개된 바 있는 이 작품『씬시티』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드보일드 농축액이다. 실제로 책을 펼쳐보면 매 페이지, 매 장면마다 하드보일드의 극치를 표현해 보겠다는 의지가 넘친다. 어둡고 모노톤인 하드보일드물의 공간은 이 작품에서는 아예 중간톤 없는 강렬한 흑백의 세계다. 여성들은 더할 나위 없이 뇌쇄적이면서 동시에 강하고 위험한 팜므 파탈들 이며, 남성들은 근육질이든 왜소하든 하나같이 “순수한 폭력의 덩어리” 그 자체다. 도시의 뒷골목은 극단적으로 어둡고 더러우며 범죄의 때가 찌들어있고, 멋진 자동차 추격과 술집의 주먹다짐이 넘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이 놈의 망할 세상에 대한 폼나는 시적 독백을 읊조린다. 물론 이런 묘사 속에서 인간의 고독이니 사회의 어두운 그늘과 혼란에 대한 실존적 은유니 하는 수사를 뽑아내고 싶은 뭇 문학청년 후보생들도 있겠지만, 역시 이런 하드보일드의 핵심은 바로 성과 폭력이 멋들어지게 포장되는 것 자체에서 나오는 원초적 쾌감이다. 그리고 바로 『씬시티』는 하드보일드 장르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들을 모두 하나씩 분해해서 극단까지 끌고 가면 어떻게 될지 시험해보는 장렬한 실험실 같은 느낌이다.

이야기 구조 역시 하드보일드 펄프픽션들이 원래 그래왔듯 여러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에피소드로 펼쳐진다. 그리고 하나의 세계관 속에 공존하기 때문에 가끔 서로의 이야기에 찬조출연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스토리에서는 죽어버리고 나중에 나오는 다른 스토리에서는 다른 시간대를 다룬다는 명목 하에 살아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는 만화라는 형식에 한층 더 잘 어울리는데,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가끔 섞여 들어가는 장편이야기와 단편 에피소드들을 어색함 없이 쉽게 이어놓을 수 있는 출판물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이 작품 역시 완성도가 높은 이야기도 있고, 다소 미흡한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전체 세계관과 표현력의 매력은 시리즈 전반에 걸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작품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역시 중간색을 생략한 흑백의 대비로 그려진 장면들이다. 그것도 바탕이 검은 색이고, 흰 부분은 가끔 빛이 들어와서 사물과 사람들의 윤곽선을 식별하게 해주는 정도에 가깝다. 나아가 거칠고 직선적인 필체, 역동적 화면구도와 시점처리는 강력한 마초 에너지를 발산한다. 현실감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극단적인 스타일 과잉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이런 과장은 영화로 치자면 오우삼 영화에서 주윤발의 트렌치코트가 휘날릴 때 슬로우 모션이 되는 것과 맞먹는 강렬한 효과를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판에서 만화의 식자 처리를 김수박 작가를 통해서 전문적으로 작업한 것 역시 좋은 선택이다. 그림과 문자가 잘 녹아들어가지 않으면 그 스타일리쉬한 시각세계가 망가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전체 대사에 하지 않고 효과음에만 그런 전문적 처리를 한 것은 다소 아쉽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이번 한국어판은 출판 품질이 잘 나온 느낌이지만, 아쉬운 부분은 있다. 바로 번역의 부분이다. 매끈하고 별다른 오역 없는 ‘좋은 번역’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원작 특유의 거친 하드보일드 문체를 살린 ‘훌륭한 번역’에는 못 미친다. 예를 들어 1권의 첫 부분에 주인공 마브가 “천국의 향기가 코를 찌르는군”이라고 독백하는 부분이 있다. 원작의 대사를 직역하자면 “그녀는 천사가 풍겨야할만한 냄새가 났다”에 가깝다. 즉, 마브 같은 거친 마초의 상상력으로는 천사라도 어떤 냄새(향기가 아니라!)가 날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는 셈이다. 그냥 멋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거친 밑바닥 상상력으로부터 시적 감수성을 끌어올리기 때문에 멋진 대사인데, 그런 맛깔스러움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좋은 출판 품질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대단히 멋진 일이다. 인생에 대한 교훈적 성찰로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 아니라 폼 나는 쾌감 에너지로 충만하다는 의미의 좋은 작품이고, 그 분야에 있어서 『씬시티』는 추종불허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사족: 작품 외적인 문제지만, 출판사의 보도자료 역시 성의가 아쉽다. 예를 들어 마치 밀러가 ‘데어데블’ 캐릭터의 창작자인 듯 이야기한다든지, 87년작 『배트맨:원년』을 『씬시티』 이후에 창작했다고 하는 등 사실 관계의 오류가 적지 않다. 아무래도 출판사 담당자들이 아직은 만화 문화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기에 일어난 현상인 듯 한데, 차차 나아지기를 바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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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씬시티 1
Frank Miller 지음, 김지선 옮김/세미콜론

이 만화를 노려라! 영화가 탐낼 만한 한국 만화 추천작 [씨네21/570호]

!@#… 지난 씨네21 570호(그러니까 지지난주)의 ‘한국만화의 영화화’ 특집에서 한 꼭지로 실린 글.

이 만화를 노려라!
<돌아온 자청비> <바람의 나라> <폐쇄자> 등 영화가 탐낼 만한 한국 만화 추천작

김낙호(만화연구가)

영화는 만화를 사랑한다. 영화가 오래전부터 스토리보드라는 공정을 통해서 만화언어를 제작과정에 활용한 역사를 고려하자면, 90년대 중반 이래의 만화 원작 영화제작 붐이 오히려 지나치게 늦었다고 느껴질 정도다. 물론 다른 매체양식을 옮겨오는 과정은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기에 <비천무>(김혜린)의 경우처럼 어설픈 캐릭터 해석과 낮은 영화적 완성도로 오히려 원작 팬들의 원성만 산 경우도 있다. 하지만 원작의 몇 가지 핵심 정서를 효과적으로 영화만의 색으로 녹여낸 <비트>(허영만·박하)라든지, 원작의 설정과 이야기 뼈대를 전혀 새로운 주제와 결론으로 이끌어낸 <올드보이>(쓰지야 가론·미네기시 노부아키) 같은 매력적인 성공 사례들이 있다. 나아가 최근의 <신 시티>(프랭크 밀러)처럼 아예 만화의 시각적 표현 하나하나를 그대로 이식하는 것만으로도 영화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디서 어떻게 영화로 이식하면 좋은 도전이 되어줄 만한 원작 만화를 찾아볼 수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드넓은 만화의 바다 그 어디에나 있다.” 이미 영화화 기획이 진행 중인 <위대한 캣츠비>나 <로맨스킬러>(강도하), <26년>(강풀) 등 인기 만화들 말고도 시기나 장르 가릴 것 없이 고르게 한번 후보군을 모아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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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과 표현과 이야기 -『귀신』[기획회의060901]

설정과 표현과 이야기 -『귀신』

김낙호 (만화연구가)

99년부터 한 3-4년간, 한국에는 유럽만화 출간 붐이 일어났던 적이 있다. 홍대 앞 미술전문서점이나 미술평론가들의 소개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니코폴』이나 『잉칼』, 『쌍브르』같은 예술적 성취도가 높이 평가받는 작품들이 썩 괜찮은 번역과 출판 품질로 한국 독자들 앞에 선보인 것이다. 비록 그쪽 작품들의 이야기 표현 방식이나 상상력의 방향 등이 아시아 만화권의 화법에 익숙한 국내 독자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니지 못했기에 붐은 저조한 판매 속에서 이내 사라졌지만, 적어도 그 작품들이 주었던 시각적 임팩트만큼은 강렬하게 자리매김했다. 흑백이 아닌 컬러, 그것도 익숙한 셀 애니메이션풍이 아닌 다양한 기법들의 향연은 만화 속 그림 자체의 쾌감을 일깨워주는 힘이 있었다. 주류 흑백 장르만화라는 출판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출판형태가 곳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내, 한국 작품 중에도 그런 식의 강력한 그림실력과 표현력을 온전히 발휘하도록 허용 받는 형태의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때맞춰 컴퓨터 모니터와 컬러링에 익숙한 젊은 작가 세대가 데뷔를 해주었다. 한국에서 만화라는 분야는 한층 더 자신의 운신의 폭을 넓힌 것이다.

그 중에는, 만화 특유의 과장을 절제하고 사진에 가까운 수채화풍 그림체로 높은 인지도를 쌓아올린 작가 석정현이 있다. 그가 작업해온 일러스트들은 대중적 인기에서 부족함이 없었고, 가끔 선보이는 단편들은 감동 에세이 스타일이든 짧은 개그물이든 감각적인 위트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작가의 본격적인 극만화가 완성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폐간된 ‘영점프’ 등 여러 지면에서 작가 자신이 오래 동안 구상하고 있던 근미래 군대경찰 이야기의 설정은 그런 기대를 더욱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작품, 『귀신』(석정현 / 길찾기)이 출간되었다.

『귀신』은 평화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 군대가 할 일이 없어진 한반도 서울시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의문의 테러 사건이 일어나고, 사태를 해결하려는 군인들의 활약과 그 이면에 있는 군대와 미디어 등이 뒤얽힌 커다란 음모가 복잡하게 진행된다는 것이 자세한 내용 누설을 방지한 상태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주요 줄거리다. 사회와 미디어, 생체병기로 비유되는 비인간성, 평화의 의미 등에 대한 여러 화두들이 그 속에서 던져진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미 예상 가능했듯 시각적 쾌감의 즐거움이다. 섬세한 필치의 고밀도 그림들은 지나친 부담감 없이 페이지 속에서 멋진 사건 시퀀스들을 연출해낸다. 화려하면서도 현실적인 액션 연출, 역동적인 포즈, 많은 구상을 투여한 흔적이 엿보이는 각종 기계와 소품 디자인 등은 이 작가에게서 기대했던 바를 어김없이 충족시켜준다. 세계관에 대한 설정 역시 치밀하여 작품 속에 그려지는 제도와 사회가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분명히 있을 법한” 곳으로 느껴지도록 만드는데, 근미래 SF로서 중요한 미덕을 충족시킨 것이다. 또한 이 장르 특유의 현실적인 문제제기와 매력은 이 작품을 만화로서 읽고 소장할 정도의 명분은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는다.

하지만 아직, 그 이상의 점수를 주기는 망설여지기도 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좋은 문제의식과 섬세한 세계관의 반대편에는, 그것을 풀어내는 주제와 이야기 전개의 미숙한 부분들이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큰 차원에서는, 좋은 문제의식 방향 설정을 피상적 고민으로 승화시키는 선에서 머물렀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대중 여론 조작이라든지 평화의 진정한 의미란, 현실 속에서는 다양하고 미묘한 모순들로 가득하다. 평화를 바라는데 그것이 오히려 평화를 옭아맨다든지, 더한 미디어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자극에 둔감하게 만든다든지, 사회속의 누구나 결국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이며, 보호자이자 동시에 감시대상이라는 점 등 복잡하기에 더욱 중요한 지점들이 많다. 하지만 『귀신』은 아쉽게도 너무나 쉽고 빠르게 주연들과 조연들, 하나의 시스템과 다른 시스템 사이에 선악의 선을 그어버리고 후반으로 갈수록 헐리우드식 주류 액션 활극의 방향으로 달려 나간다. 실제 현실의 중층적 모순을 다루기 좋은 주제와 세계관을 가지고, 어째서 이 정도까지로 타협했는지 아쉬움이 남을 따름이다.

주제라는 큰 차원을 떠나서, 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로서의 재미 역시 아직 미완성이다. 여러 매력적인 설정을 지닌 주요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 누구에게도 공감할 여지가 충분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독자는 등장인물의 행동 동기와 패턴에 어떤 식으로든 공감해야 작품을 행위자들의 이야기로서 즐길 수 있다. 그렇기에 작가는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에 필연성을 부여하고 극의 완급을 끌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귀신』에 등장하는 여러 매력적인 인물들은 그런 부분이 피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오히려 처음 시퀀스의 이름 없는 희생자로 잠깐 출연한 젊은 연인들이 훨씬 효과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인물구축이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주인공이 소위 ‘귀신’이 된 이유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어나지 않으며, 부대원들이 재등장할 때 통쾌한 반전의 기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다시금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서 표현되어야 할 주제의식의 효과적인 발현에도 방해가 된다. 예를 들어 미디어를 통해서 주인공들에게 닥쳤던 비극은 공감 가능한 절망이 아닌 ‘설정’으로서만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명실상부한 2005년도 최고의 활극 모험 영화 가운데 하나인 『킹콩』에서 피터잭슨이 3시간 영화 중 무려 초반의 1시간여를 감정이입 가능한 캐릭터의 구축에 할애했던 전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전체적으로 『귀신』은 탄탄한 시각표현과 상상력으로 제작되었으나 결정적인 주제 표현과 캐릭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에 실패한 몇몇 대형 블록버스터 장르 영화들과 비슷한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단위 시퀀스 내에서 감수성 있는 전개를 보여주는 것 까지는 당초 작가에게 기대한 만큼의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주제와 설정의 무게가 부담을 주었는지, 정작 필연성 있는 캐릭터들의 일관된 이야기로 성립시키는 것에 있어서는 아직 다듬을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편과 일러스트에서 뛰어난 감수성을 인정받은 신인이, 중/장편 극만화 작품 첫 데뷔작에서 나름의 희망을 던져주며 동시에 일종의 통과세를 지불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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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