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의 글과 마찬가지로, 무크지 ‘밥’에 기고한 글. 원래는 한국에 아직 안들어온 좋은 작품을 소개해준다는 의미에서 앞의 글의 박스기사로 작성되었던 것인데, 별도 코너로 분리되어 실렸다. 원래 이 박스기사의 제목은…
<부록> 해외 요리 접해보기: 영미편
!@#… 앞의 글과 마찬가지로, 무크지 ‘밥’에 기고한 글. 원래는 한국에 아직 안들어온 좋은 작품을 소개해준다는 의미에서 앞의 글의 박스기사로 작성되었던 것인데, 별도 코너로 분리되어 실렸다. 원래 이 박스기사의 제목은…
<부록> 해외 요리 접해보기: 영미편
저물어 가는 것에 대한 관조 – 『카페 알파』
김낙호 (만화연구가)
멸망이란 항상 강력한 임팩트를 지니기 마련이다. 어떤 강력한 힘이 하나의 세계를 소멸시키는 모습이란 소멸되는 대상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비극이며, 그 힘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변변한 저항조차 허용되지 않을 때 오는 비극성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이전의 세계가 사라진 곳에는 새로운 방식의 세계가 들어선다. 이렇듯 멸망은 극적인 요소가 강렬하지만, 사실 현실 속에서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크다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그 자리에 가상의 이야기가 들어서게 되는데, 그렇기에 고대 이래로 수많은 신화와 예언서에서 멸망이 거의 항상 언급되는 것이다. 기독교 성서의 아마게돈이든, 북구 신화의 라그나로크든, 힌두신화에서 이야기하는 파괴신 칼리의 폭주든 마찬가지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서면서 생활 속 불안과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신화와 예언의 기능은 종교기관보다는 대중문화의 손으로 넘어간지 오래다. 즉, 멸망이라는 테마는 만화나 영화, 소설 등 서사형 대중문화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단골소재다.
그런데, 멸망이 항상 모든 것이 부수어지고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운명을 한탄하는 것이어야만 할까. 스피노자가 이야기한 “내일이 세계의 종말이라면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식의 뻔뻔할 정도의 관조는 과연 쓸모없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아주 약간이라도 품어본 적 있는 독자들이라면, 최근 완간된 만화 『카페알파』(아시나노 히토시, 학산문화사, 전14권)가 하나의 좋은 독서 경험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은 인적이 드문 언덕에 있는 카페를 혼자 지키는 여종업원 ‘알파’의 하루하루 일상이 내용의 전부다. 주인은 여행을 떠났다며 자리를 비운 상태이며, 사람들이 사는 도시는 스쿠터를 타고 한참 내려가야 나온다. 그런 평온한 곳에서 자연과 가끔 한 번씩 오는 단골 방문객들을 보며 나른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비록 여종업원이 안드로이드이며, 대도시들이 대부분 파괴되고 물에 잠겼으며, 지금도 해수면이 계속 올라가는 중이라서 인간문명이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멸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배경에 깔려 있지만 말이다. 사실 써놓고 보면 엄청난 설정이지만,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매일을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핵심 정서다.
『카페알파』의 세계는 하루의 흐름에 비유하자면 저녁뜸에 가까우며, 작품에 등장하는 누구하나 앞으로 기나긴 밤이 올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다. 하지만 모두 관조적으로, 그저 그 세상을 살아갈 뿐이다. 더 많은 것을 얻고자 아등바등하지 않고, 주어진 세상에서 평온하게 일상을 영위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삶을 주인공 알파는 그저 미소 지으며 지켜본다. 과도한 극적 감상주의나 직접적인 설교에 빠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따듯한 메시지를 전달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스타일의 이런 작품들을 장르 팬들은 소위 ‘치유계’라고 부르곤 하는데, 『카페알파』는 바로 이런 치유계 작품의 가장 모범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극적인 사건보다는 한 템포 쉬어가며 무언가를 돌아보도록 하는 것, 엄청난 반전에 의하여 세상이 구원받기를 기대하도록 하거나 엄청난 행복의 교훈을 주기보다는 그저 나른하게 지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여유를 잃지 않도록 하는 자세가 이 작품이 느리면서도 12년이라는 긴 작품 연재기간동안 고정 팬을 거느렸던 비결이다.
작품 어디에도 자세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부분 따위가 없다. 핵전쟁이 있었는지, 기상재해로 엉망이 된 것인지, 유전공학이 폭주한 것인지 속 시원한 설명 따위는 없다. 그냥 머리만한 밤이나 과일이 있어서 가끔 따먹을 수 있고, 알파가 커피 원두를 사러 나가는 인근 도시 요코하마(그래서 작품의 원래 제목이 『요코하마 쇼핑 기행』인데, 한국어 번안 제목이 원제보다 한층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가 서서히 물에 잠기며 사람이 줄어들고, 가끔씩 높은 상공에 거대한 로봇 비행체가 날아다니며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호수에는 인간형 야생 생물 ‘미사고’가 살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요소들은 멸망의 비극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바로 이 세상 속 느긋하게 자연과 사람들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자세를 보여주기 위한 자연스러운 세상의 일부로서 그저 그곳에 있다.
주인공 알파는 이 모든 것을 오랜 기억으로 남기는 자다. 어쩌면 앨범이나 사진기 같은 존재다. 늙지 않고 오랜 시간을 살아나가는 그녀의 주변에서, 다른 사람들은 성장하고 늙어가고 2세를 낳고 어느 틈엔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사실 시간의 영속적 흐름과 그 속에서 불변의 존재로 변화를 바라보는 자의 이야기는 고전 SF 단편 소설들에서 원래부터 종종 사용되는 구도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항상 인간의 의식수준을 초월한 세상의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느라 사람들은 정작 그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부수적 도구에 불과하게 다루어지는 반면, 이 작품은 그 반대의 길을 택한다. 어디까지나 사람에 대한 긍정적 관조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영원을 사는 주인공의 운명보다는,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또 천천히 다가오는 멸망의 길에 흥분하거나 피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미소가 핵심이다.
이러한 이야기와 정서를 뒷받침하는 것은 부드러우면서도 둥그런 선, 가끔 나오는 파스텔 톤의 컬러 페이지들, 풍부하고 온화한 표정변화로 가득한 시각연출이다. 극적 긴장감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려는 광활한 파노라마를 남발하지도 않는 절제된 칸 연출 역시 이 작품의 정서에 가장 적합하게 활용되고 있다. 과도한 감상주의적 성찰보다는 그냥 작은 것에 즐거워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자기 할 말을 다 해버리는 관조적 연출의 승리다.
“시대의 황혼기가 이렇게 느긋하고 평화스럽게 오는 것이라니.
이 느릿한 시대에 나는 이 황혼의 세상을 천천히 바라보며 간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1권 중, 알파의 대사)
빠르게 흐르는 현실의 스트레스를 더욱 격렬하고 강렬한 자극적 이야기에 몰입하여 상쇄시키는 것도 하나의 즐김의 방식이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하염없이 느긋한 관조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작품의 팬층 성격상 당연히 세트용 수납 박스라든지 박스 세트라든지 OST 특전이라든지 하는 완결 기념 이벤트가 있을법 했지만 뭐 그냥 조용히 완결. 뭐 출판사가 출판사이니만큼 당연한 건지도.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교양만화가 나아갈 세 갈래 선택지 – 『삼인삼색 미학 오디세이』
김낙호 (만화연구가)
한국에서 만화는 ‘공부를 방해하는 저질 오락거리’로 취급받아온 억울한 과거가 뼈에 사무쳐서 그런지, 교육과 학습에 사실은 도움이 많이 된다는 사실을 상당히 강조하기 위해서 아예 별도의 장르를 발달시켰다. 그것이 바로 학습만화다. 만화를 학습적 목표를 위해서 활용하는 사례라면 세계 어디에나 적지 않게 있지만, 아예 하나의 개별 장르 취급을 하고 유통 측면에서나 독서 문화 측면에서나 독립적 위치를 부여해주는 것은 아직 한국과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들다. 그 와중에서 (필자를 포함) 종종 평론가들이 강변하는 논리가 바로 학습만화가 얼마나 쉽고 재미있게 지식을 전수하는지 알아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만화라는 매체가 지니는 장점과, 장르로서의 학습 교양만화는 반드시 연동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시각적으로 보여주면서 말로 설명하는 것은 강력한 표현력을 지니고, 약호화된 도상이 주는 이입의 폭은 넓다. 하지만 이렇게 접근성이 올라간다고 해서, 어려운 내용이 저절로 쉬워지지는 않는다. 애초에 이쪽 계열 만화의 가장 두드러지는 표현적 장점은 키워드와 핵심 개념들의 효과적인 압축인데, 그 결과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묘한 요점정리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층 난해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그것이 바로 ‘어려운’ 학습 교양 만화의 딜레마다. 이런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서 많은 학습교양만화들은 애초부터 어려운 지식보다는 ‘쉬운’ 부분들만 골라서 다루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우회로가 없다면 어떻게 할까. 『아이콘 총서』시리즈 같이 난해한 지식을 더욱 난해하게 요약한 책이 탄생한다.
그렇다면, 미학이라는 괘 굵직한 인문학적 토양을 주제로 다루고자 한다면 어떨까. 게다가 아예 이미 널리 대학생 이상의 교양서로 자리 잡고 있는 그 분야의 명실상부한 ‘교과서’를 원작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한다.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출판 기획자들이 내놓은 하나의 대답이 바로 『삼인삼색 미학 오디세이』(진중권 원작 / 현태준, 이우일, 김태권 만화 / 휴머니스트 / 전3권)에 들어있다. 이 작품의 원작이 되는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는 미학의 고대부터 탈근대까지 인간이 문화예술을 바라보는 인식틀의 발전과정을 친근한, 하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려운 개념을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만하게 설명하려 노력한 책을, 다시금 한 단계 더욱 이해할만하게 하려고 만화의 힘을 빌리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역시 삼인삼색이라는 작가 시스템의 특이함이다. 원시와 근대,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각각 그 해당분야에 가장 잘 어울릴만한 작가들에게 나눠준 후, 비교적 자유롭게 개성을 발휘하도록 해준 것이다. 그 결과 원시와 근대를 다루는 1권은 키치적 감수성으로 장난감과 잡다한 취향에 확고한 위치를 다진 바 있는 현태준이 맡았다. 평소 하던 방식 그대로, 초지일관의 유치함으로 오히려 하나의 경지에 도달하는 말장난, 그리고 가식에 대한 정면도전이 돋보인다. 원시와 근대 미학에 대해서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한다기보다는, 그냥 그 시대의 ‘디오니소스적’인 정서를 스스로 펼쳐 보인 느낌에 가깝다. 이성적 세계관에 기반한 모더니즘의 시대를 다룬 2권의 경우, 체계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전달하는 것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 영역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설명적인’ 학습만화나 일러스트 분야에서 효과적으로 활약한 바 있는 이우일이 임무를 맡았다. 한쪽에서는 엽기적 낙서체 개그만화로 유명해졌으나, 『노빈손』 시리즈의 삽화 작업 등 오히려 스트레이트한 분야에서 안정적 작업을 해온 경력 그대로 2권은 착실히 원작의 명제들을 그대로 읊어낸다. 전개 형식 역시 설명하는 박사와 그것을 듣는 두 꼬마라는 전통적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하는 3권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의 탈경계성과 복잡성을 효과적으로 만화화해 줄 작가를 필요로 하며, 게다가 가장 어려운 개념들이 난무하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아예 미학 전공자인데다가, ‘어려운’ 학습교양만화 경력이 있는 김태권에게 주어졌다. 3권은 아예 설명보다는 극의 형식을 지니는데, 만화가가 각종 미학개념들의 바다에 뛰어들어 모험을 겪는 과정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틀 위에서 펼쳐진다.
작가가 서로 다른 실질적으로 3개의 작품을 하나의 세트로 묶어낸 것이니 만큼, 당연히 각각의 권은 따로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1권의 경우 친근하다 못해 그 비속함에 공감하고 킬킬거릴 수 있는 점이 장점이라면, 단점은 몰입해가며 읽기 어려운 산만함이다. 생활 속의 일상적 미감에 대한 사진 정리 등 원작 이상의 재해석이 독서에 도움을 주지만, 기본적으로 매니악한 느낌이 강해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남아있다. 표준적인 학습만화의 틀을 따라가고 있는 2권의 경우, 장점이라면 그 표준성 덕분에 학습적 읽기가 가장 수월하며 원작의 내용을 직접 전달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이왕 만화로 읽는 맛이 특별히 더한 것도 뺀 것도 없이 심심하다는 것이 단점이다. 그저 무난하게 읽기에는 작가의 재능이 아깝기도 하다. 가장 만화가의 재해석이 강력하게 개입된 3권의 경우는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소설『소피의 세계』가 철학과 성장소설을 결합했듯, 미학의 세계를 환상문학의 양식에 넣어 만화로 소화해내는 재기가 돋보인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읽고 나면 오히려 더욱 개념들에 대해서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하기야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그런 성향이 있지만 말이다). 즉 개념들을 간명하게 요약 설명해준다기보다는 다양한 복잡한 현상과 모순들을 독자들에게 접하게 해주는 쪽으로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지적 자극으로 인한 교양에는 도움이 되지만 학습에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의 세 권은 모두 다른 접근, 따라서 다른 종류의 독서경험을 준다. 단적으로, 1권을 읽고 마음에 들어서 전3권 세트를 사는 구매 방식은 그다지 권장하고 싶지 않다. 다양한 접근을 경험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득이 되지만, 한 가지 방식의 일관된 설명을 원하는 독자들은 그냥 원작을 다시 한 번 읽는 쪽이 나을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어떤 권이든 나름의 지적 재미를 보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니 만큼 책장 한 켠을 차지하는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각각의 권이 모두 컨셉이 다르다는 점은 마케팅 면에서 득보다 실이 크다고 본다. 하나의 통일된 작품으로서 만족을 주기 힘들다면 누가 세트로 사겠는가. 그리고 본문에서는 비교적 점잖게 말했지만, 학습만화 분야를 공략하면서 정작 학습성이 좋지 않다는 것 역시 큰 마이너스. 시장의 반응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나와줄지, 자못 궁금할(걱정될) 따름.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주술적 독서경험 – 『음양사』
김낙호(만화연구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초월적 현상으로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질서를 읽어내고 또 그것에 개입하고자 하는 시도는 어찌 보면 인류문명의 발달사와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한쪽에서는 종교와 신앙으로 그것을 이루고자 하였고, 다른 쪽에서는 물리적 법칙과 수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과학’을 실현하고자 했다. 아니, 사실 생각해보면 이런 이분법적 사고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과학자들은 신들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도 과학적 방법론들을 확립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았으며, 주역은 대자연의 이치를 하나의 철학적 틀로서 파악해 나갔다. 종교가 믿음을 바탕으로 한 도덕률로만 특화되고, 과학이 방법론적 엄격성에 매진하느라 상상력을 버리게 된 후부터 둘은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여러번 해적판으로 선보였다가, 최근에서야 정식 판본으로 완간된 만화 『음양사』(전13권/ 유메마쿠라 바쿠 글, 오카노 레이코 그림/ 서울문화사)는 일본 헤이안 시대를 무대로, ‘음양도’의 전설적 대가인 아베노 세이메이의 활약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줄거리를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일종의 궁중 주술사인 아베노 세이메이가 악기에 능하고 영적인 친화력이 뛰어나지만 주술에는 문외한인 귀족 친구 히로마사와 함께 각종 기이한 영적 현상들을 해결해 나간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구도는 셜록 홈즈라든지 엑스파일이라든지 대중문화에서 은근히 친숙한 구도다). 만화『음양사』에서 가장 먼저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마치 전통 일본화를 잘라낸 듯 한 어지러우면서도 여백이 있는 그림체다. 기막힐 정도로 고풍스러운 요괴의 모습들은 물론, 정복을 입고 거니는 여러 캐릭터들 역시 현대의 만화라는 느낌보다는 옛 문헌을 들춰보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다. 각종 독백과 싯구들이 그림과 혼연일체되어 옛 서화를 바라보는 느낌을 주며, 때로는 한칸 한칸의 매력에 빠지느라 줄거리 진행을 제대로 따라가기 힘들다는 단점까지도 나을 정도로 화려하다. 이번에 완간된 정식 판본의 인쇄와 식자는 이러한 특유의 수려하고 가는 선을 뭉개지 않을 정도로 나와 주었으니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 하다. 나아가 최대한 성실한 번역(물론 세부적인 하이쿠 한 구절 한 구절의 뉘앙스를 전부 완전히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은 물론, 친절한 주석으로 높은 품질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음양도라는 사상을 다루는 진지한 자세다. 일본의 음양도는 중국에서 들여온 음양오행 사상을 바탕으로,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인정하는 신토 사상을과 일부 밀교(대승불교의 일파) 관행들이 섞여 들어간 종교학문이다. 주로 천문학과 풍수 등을 통해서 요괴퇴치나 각종 제의식 등 여러 주술 활동을 실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덕분에 요괴 기담의 전통이 강한 일본의 각종 대중문화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는 소재 가운데 하나다. 그 가운데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음양사가 아베노 세이메이였는데, 유명 환타지 기담 소설 작가 유메마쿠라 바쿠의 작품을 원작으로 오카노 레이코의 수려한 일본화풍 그림체로 그의 모험담이 새로운 시각으로 현대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음양사』가 음양도를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는 필자 역시 그 분야에 밝지 않기에 잘 알 수 없지만, 음양도를 하나의 무협식 필살기가 아닌 철학이자 세계관으로 다루고자 하는 접근 방식 만큼은 부러울 정도로 집요하다.
같은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동명의 영화가 주인공의 매력을 바탕으로 한 요괴퇴치 활극에 불과했던 반면, 이 만화작품은 뒤로 가면 갈수록 근원에 근원을 추구한다. 이 작품의 전반부는 두 파트너가 수수께끼의 문제에 봉착하고 그것을 주인공의 재주로 풀어나간다는 전형적인 탐정 및 미스테리물, 또는 기담의 전형적인 장르규칙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풀어나간다. 그 중에는 족제비 요괴도 있고, 백귀야행으로 들어갔다가 도망쳐 나오는 이야기, 사악한 마음의 주술사 또는 심지어 신적 존재와 싸우는 모험담도 있다. 그 와중에 두 주인공 캐릭터 및 다양한 조연들의 물고 물리는 관계 역시 그 재미를 배가시켜 준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단순한 시대 모험활극으로 끝나지 않을 조짐은 일찍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한 에피소드에서 세이메이가 히로마사에게 음양오행의 이치를 동그라미 하나에서부터 시작해서 기하학적 도형을 더해가며 오망성과 결국 소용돌이까지 전개시키는 설명해주는 (물론 상대는 경탄할 뿐, 전혀 못 알아듣는다) 대목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주역과 수학적 이치를 응용하여 음양도의 세계관을 압축시켜 보여주는 소름끼치는 명강의다. 그 이후로도 점차 작품의 성격은 단지 요괴를 퇴치한다거나 주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의 이치를 해석해내고 그것을 주술적으로 조합해내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수도에 지어져있는 궁전이 지니는 주술적 의미는 정반형의 수학적 행렬으로 재해석되며, 바둑판의 수학적 조합이 하늘의 별들의 천문학적 질서에 대응되어 번개신과의 바둑 시합이 곧 주술의 경연장이 된다. 그리고 심지어 마지막 권에서는 종교적 제의와 수학적 이해, 물리적 과학의 얼개가 섞여 들어가는 이러한 흐름이 극단까지 흘러가서, 이집트 신앙의 투탄카멘 왕 이야기와 접목되기까지 하는 의외성을 선사한다. 숙적 도만 법사와 주술대결을 펼쳐서 이겼다는 역사 속 일화는 이 즈음에서는 완전히 장르적 활극 특유의 드라마틱한 경쟁이 아니라, 주술적 노력의 난해하면서도 경이로운 해제편으로 바뀐다. 그 과정은 대단히 난해하면서도 매혹적이어서, 마치 독자들마저도 그 경이를 그저 바라만 볼 뿐인 당대 현실 속의 사람들 마냥 얼이 빠지게 만든다.
만약 수려한 미스테리 장르물로서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7권 정도까지만 읽을 것을 권한다. 하지만 만약 종교와 과학이 경계를 녹이고 주술적 경이로 빠져드는 흥미로운 독서체험을 하고 싶다면, 그냥 계속 마지막 권까지 가시기를 권장한다. 음양오행과 수학적 자세가 초월성마저도 지배하는 『음양사』의 세계관을 꼭 전부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할 필요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한번쯤 확실하게 ‘홀려’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확실히, 히로마사와 세이메이의 유사 야오이 관계(?)보다는 음양도의 사상 그 자체로 파고드는 후반부에 대해서는 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꺼버리더라는;;; 한국에서는 워낙 그게 해적판이 그만 나오게 된 타이밍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캐릭터 드라마 방식의 만화전개에 익숙한 주류 독자들에게 아주 쥐약스러운 스토리 변모였다는 것 정도는 확실.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 중앙일보 여름 특집 도서 추천 “떠나자 책캉스” 의 지난주 꼭지, 만화 특집. 기선민 담당기자님이 설정한 컨셉은 만화남녀. 즉 남자 필자에게 남성 취향, 여자 필자 여성 취향의 추천을 받아서 병렬하는 것. capcold는 당연히 남성 필자 부분을 담당(…). 나름대로 평범한 남성 취향에 맞추어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어떨지. 여튼 책으로 나왔으며 대중적 취향을 갖춘 작품 가운데에서만 선정. 시차를 깜박하고 있다가 원고마감을 오버해서 아주 여러 사람 식은땀을 흘리게 만들어 드린 대단히 송구스러운 에피소드를 남김. 여기 백업한 건 당연히 직접 쓴 남자파트 only. 뉴스 편집 거치기 전의 원본.
——————————–
[행복한책읽기Review] 낭만녀 `꿈이면 어때, 백마 탄 왕자님 … 역시 순정물` [중앙일보]
[떠나자 `책캉스` 만화남녀 `네모칸` 속으로]
…(전략)
<일지매> (고우영 / 애니북스 / 전8권)
호쾌한 재미의 원형이란 역시 기구한 운명에 맞서며 대의를 위하여 움직이는 호걸의 일생만한 것이 없다. 다만 그것이 허황된 공상이 아닌 진짜배기 쾌감을 줄 수 있으려면 초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사는 향기가 진해야 한다. 바로 고우영의 사극만화들이 그러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 정수가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일지매>다. 양반계층의 사정으로 버려지게 된 서자 일지매가 기구한 운명을 겪으며, 청나라와 일본에서 수련한 무술을 바탕으로 의적이 되어 부패한 조선사회에서 활약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창작사극. 고우영식 해학과 풍자, 자유로운 서술 방식이 완전히 제 모습을 갖춘 명작. 특히 일지매라는 주인공 캐릭터의 복합적인 심경묘사와 변천과정은 섬세함의 극치를 이룬다. 무협물이자 정치 사극의 요소도 가지고 있으며, 일지매라는 한 인간의 성장드라마이기도 한 탁월한 모험물이다. 특히 고우영 선생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주인공의 성장과 고뇌가 잘 드러나며, 진정한 영웅의 풍모가 강조되고 있다. 사회 모순에 대한 분노가 개별 악당들을 넘어 제도 전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지는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마치 소리꾼이나 마당극의 광대처럼 호쾌하고 시원하게 세상을 풍자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의 솜씨 앞에서는 그냥 작은 옥의 티에 불과할 뿐이다.
<아파트> (강도영 / 문학세계사 / 전2권)
진정한 공포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뒷간에서 귀신 손이 나온다는 식의 설정이나, 호숫가 숲속의 처녀귀신은 유감이지만 유통기한이 지난 셈이다. 진정한 공포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적 공간, 바로 아파트에서 시작된다. 아파트의 사람들은 서로를 잘 모른다. 하지만 항상 공간으로서는 마주보고 좁게 붙어있도록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과 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을텐데, 서로 만나게 되지는 않는다. <아파트>는 바로 아파트라는 공간이 주인공인 공포만화다. 밤 특정시간에 반대편 아파트의 모든 불이 꺼지고, 누군가가 죽는다. 익명의 공간, 익명의 죽음. 그러나 그 속에는 각자의 사정과 깊은 원한이 서려있다. 수많은 주인공들 각자의 사연을 촘촘히 깔고 서로 미묘하게 교차시켜 나가는 작가 강풀의 솜씨는 이미 발군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 속에는 필연적인 비밀, 미묘한 오해들이 서로 엇갈린다. 공포와 해학이 수시로 교차하며, 사람 사는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는 여름철 최고 추천 작품.
<짧은 소개>
– 단구 (박중기 / 학산문화사 / 8권 발간중): 상고시대를 바탕으로 하는 동양식 무협 판타지. 운명과 맞서는 처절하고 호쾌한 싸움의 연속이 강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 식객 (허영만 / 김영사 / 12권 발매중): 한국 요리를 가장 먹음직스럽게 그려내는 만화. 음식 속에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 히스토리에 (이와아키 히토시 / 서울문화사 / 3권 발매중) : 알렉산더 대왕의 전투 서기관 에우메네스의 특이한 일대기. 인간 사회에 대한 물오른 통찰력으로 중무장했다.
– 츄리닝 (이상신, 국중록 / 애니북스 / 5권 발매중) : 허름하고 편한 차림새로 친한 복학생 선배 자취방에서 농담 따먹기를 하는 듯한 분위기의 개그만화. 인간의 치졸함에 대한 멋진 유머.
– 어~이! 료마 (코야마 유우, 타케다 테츠야 / 삼양출판사 / 17권 발매중): 검술의 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세를 평정하기 위해서 힘보다 화합과 실용주의를 펼친 특이한 영웅, 일본 근대화의 일등공신으로 꼽히는 사카모토 료마의 일대기.
– 야후 (윤태호 / 학산문화사 / 전 20권): 8-90년대를 관통하는 이 사회의 부조리함이 한 인간을 어떻게까지 분노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대안역사 SF물. 거침없는 호흡과 전개가 마지막권을 부른다.
– 바람의 파이터 (방학기 / 길찾기 / 전 10권): 강함의 진리를 찾아 나선 구도자, 최배달의 인생. 굵고 간결한 화풍 속에 진정함 강함을 추구하던 의지가 역동적으로 녹아들어가 있다.
– 비천무 (김혜린 / 대원씨아이 / 전 4권): 선 굵은 무협물의 틀에 드라마틱한 순정만화 특유의 섬세함이 결합한 수작. 여성팬들 만큼이나 남성 팬들도 많은 대하 무협사극.
– 아기공룡 둘리 (김수정 / 대원씨아이 / 전 5권): 둘리의 귀여운 모험도 모험이지만, 둘리가 식객으로 눌러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인 고길동이라는 가장의 페이소스가 더욱 일품이다.
김낙호(만화 연구가)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열혈의 정도를 걷다 – 『카페타』
김낙호(만화연구가)
한국은 세계적인 자동차 강국을 자처하면서도 자동차 문화는 그다지 번성하고 있지 않은 특이한 나라다. 자동차 생산이나 판매량에서는 미국이나 일본, 유럽의 강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정작 자동차가 생활 문화의 독특한 단면이 되어있는 자연스러운 이미지가 부족하다. 아, 물론 한국 대도시 특유의 난폭운전이니 비슷비슷한 색상과 모델로 가득한 거리니 하는 정도의 것은 있지만 말이다. 특히 그런 단면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자동차를 대중 스포츠 오락으로서 활용하는 것, 바로 모터스포츠 분야다. 포뮬러 급의 레이스는 F1800 정도 밖에 없으며, 선수층도 좁고 대중적 기반마저 적다. 하기야 모터스포츠는 자동차 회사들이 자신들의 우수한 기술력을 자랑하기 위한 경연장이니 만큼, 기술력보다는 서비스나 가격경쟁력 등을 강점으로 마케팅하고자 하는 업체들이 주종을 이룬다면 그다지 효용이 없기는 하다. 하지만 기계와 인간이 하나가 되어 극단적으로 격렬한 상황 속에서 경쟁하는 스포츠가 지니는 현대적인 매력과 쾌감이란 결코 만만치 않기에, 은근히 아쉬울 따름이다.
카레이싱이 보편화되어있는 자동차 강국 가운데, 미국은 그것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일본은 만화를 만든다. 특히 장편 연재만화에 있어서 카레이싱은 지지기반과 전문지식만 갖출 수 있다면 썩 좋은 소재다. 머신의 세세한 튜닝에 의한 성능 향상, 정비사와 운전사와 매니저 사이의 팀워크, 기계의 부족함을 극복하는 정신력, 0.1초의 승부에 목숨을 거는 장인정신에 가까운 승부욕, 스포츠맨십과 상업성 사이의 갈등까지, 드라마틱한 요소가 넘쳐난다. 게다가 그 것이 한판승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쌓여가면서 성장을 하는 방식의 흐름이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상황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서 트랙과 머신들을 빌려오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자료 참조를 열심히해가면서 멋지게 그려서 연출해내면 된다. 다만 여느 전문 소재 만화와 마찬가지로, 잘못하면 지나치게 세세한 매니아의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대중적 호소력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으니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만 말이다.
『카페타』(소다 마사히토/학산/2권 발매중)는 카레이싱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공식을 엮어내는 장르 오락만화다. 이야기는 편부 슬하에서 살며 자동차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한 어른스러운 소년 캇페이타의 성장담으로 시작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직장에서 폐품과 중고부품들을 긁어모아서 카트를 만들어주고, 소년은 카트를 타면서 자신의 레이서로서의 재능을 발견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표지에서 볼 수 있듯 이야기는 소년이 성장해서 정식 레이서가 되어 활약할 때까지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작품이 주목할만한 점은 어떤 대단히 특이한 새로운 발상을 담고 있거나 독특한 스타일로 독자를 놀래키기 때문이 아니다. 정반대로, 너무나 우직할 정도로 고전적이기까지 한 열혈 성장물의 정도를 가고 있기 때문이다. ‘열혈’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강렬한 열망과 물러서지 않는 고집을 통해서 어떤 불가능한 난관이라도 결국 뛰어넘어버리는 방식의 전개를 지칭하곤 하는데, 원래는 일본 대중문화에서 완성한 공식이지만 오히려 한국인의 정서와 부합하는 부분이 많다 (마치 한국에서 국민스포츠가 되어버린 고스톱처럼 말이다). 이미 전작 『스바루』나 『출동 119』 같은 작품을 통해서 열혈 정서에 대한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 작가의 근작인 만큼, 『카페타』의 정서는 책장을 넘기다가 손이 데일까 걱정될 정도로 뜨겁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한곳으로만 몰두하는 주인공은 정도를 걸어가며 자신의 재능을 하나씩 발견하고 성장시킨다. 아버지와 친구들 등 각종 조력자들은 그의 열정 하나에 반하여 그가 더욱 자신을 불사르도록 도와준다. 소년은 레이서가 돼서 유명해지겠다거나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목표 따위 없다. 다만 자동차로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달리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쏟아 붇고 싶을 정도로 좋을 뿐이다. 폐품으로 만든 싸구려 카트라고 할지라도, 주인공의 그런 열혈이 투여되면 최고의 머신들과 어깨를 견주며 달릴 수 있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 이 작품은 ‘공식’에 충실하다. 공식을 깨버림으로서 즐거움을 주는 길과 좋은 공식의 정도를 우직하게 추구함으로써 즐거움을 주는 길 가운데 명백한 후자인 셈이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캐릭터 구도는 전형적인 완성된 천재와 대비되는 미완성 천연 천재의 성장기다. 완성된 천재는 좋은 환경과 스스로의 노력이 겸비되어 그 자리에 올랐으나 마땅한 라이벌이 없기에 오히려 고독한 존재다. 그에 비해서 미완성 천재는 천부적 재능을 이제야 하나씩 발견해 나아가는데, 그 성장의 속도가 대단히 빨라서 어느 틈에 완성된 천재의 관심을 끌게 되며 라이벌로 올라선다. 천재적 주인공과 천재적 경쟁자가 서로 더욱 큰 완성의 경지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기에『유리가면』같은 고전 만화든, 『대장금』같은 비교적 최근의 드라마든 즐겨 쓰는 구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장기연재를 위해서 각 성장의 과정은 피라미드형으로 단계가 나누어져 있어서, 하나를 해결하고 다음 목표를 향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F1에 나가기 위해서 어릴 적에 카트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이 지점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과정을 질주하게 만드는 추진력은 바로 앞서 이야기한 ‘열혈’이다. 완성된 천재 역시 미완성 천재 주인공의 추격에 감화되어 잊고 있었던 열혈의 불길을 지펴나가는 방식으로 결국 강력한 실력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열혈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역시 작가의 물오른 연출력이다. 둥글둥글한 모양이지만 거친 선으로 이루어진 인물들은 일견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거칠게 불타오를 준비가 되어있다. 풍부한 표정과 땀방울이 만화적 과장을 이루어내며, 리얼하게 묘사된 배경이나 머신과 대비를 이루며 더욱 독자들을 이입하게 만든다. 순간의 클로즈업과 강렬한 순간의 큰 장면묘사를 효과적인 리듬감으로 배치하는 칸 연출 역시 일품이다. 부드러운 독서의 흐름을 막을 정도로 스타일리쉬한 실험을 하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현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자동차의 세세한 부품이나 운전설명에 낯설다 할지라도, 감정적으로 격양된 뜨거운 연출에 공감하며 볼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것은 훌륭한 작가적 재능이다.
물론 아직 연재 초입에 있는 작품에 대해서 완성된 평가를 내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실제로 이 작가는 전작에서, 열혈과 천재성의 성장 속도가 폭주하여 이야기를 도저히 수습 못하고 중도에 하차해버린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이고, 지금 당장은 이 꼬마 카 레이서의 성장담이 궁금해서 계속 몰입하여 지켜 볼 수 밖에 없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PS. 그런데 열혈우주격투발레만화 스바루는 언제 다시?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