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의 원천 – 『석정현 소품집 Expression』[기획회의 061101]

매력의 원천 – 『석정현 소품집 Expression』

김낙호(만화연구가)

지난 몇 년 사이, 젊은 전도유망한 재능의 만화작가들이 단편집으로 단행본 데뷔를 하는 일이 연달아 있었다. 장편 연재지면에 곧바로 뛰어들어서 굵직한 작품을 만들어냄으로서 주목을 모으며 데뷔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아무런 기반도 없이 믿을 것이라고는 실력과 패기밖에 없는 젊은 만화작가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적은 지면 안에서 최대한 자신만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자 활동을 해온 결과다. 그런 짧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작가는 자신의 존재를 업계는 물론이고, 특히 웹을 통하여 독자들에게까지도 직접 증명해보이곤 하여 장편 데뷔작 없이 먼저 ‘스타’로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물론 안정적 고료나 단행본 인세를 받는 완성된 스타라기보다는 우선 지명도를 올리고 가능성을 인정받는 불완전한 예비 스타인 셈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실력으로 첫발을 내딛는 중요한 과정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에 이러한 작가들의 첫 단편집이란, 단지 그 작가의 짧은 이야기들의 모음이라기보다 사람들이 이 작가에게 주목한 이유의 재발견이다. 중후장대한 장편의 틈새에서 틈틈이 숨돌리며 만드는 의미의 단편집이 아니라, 작가의 가장 거칠고 원형적인 매력이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 그대로 주어지는 셈이다.

『Expression』(석정현/ 거북이 북스)은 이런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실사풍의 화려한 이미지로 만화 지망생층은 물론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석정현이라는 작가가 왜 지지를 받았는지 복기해주는 모음집인 셈이다. 이 책은 단편집이라는 분류상의 명칭보다, 작품 개개의 역할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의 ‘소품집’이라는 이름을 고집한다. 실제로 이 책에는 일관성 있게 모인 단편들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길이와 형식의 작품들이 섞여있다. 다양한 방식의 작품 활동으로 다양하게 두각을 나타낸 작가의 행보다운 결과다. 작품들은 가장 최근작부터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중간 중간의 풍부한 작가 해설과 함께 작가의 매력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으로 인도한다. 작가의 장편 데뷔작 『귀신』이 화려한 필치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문제의식의 수습이나 이야기 서술의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던 것에 비해, 이 소품집은 훨씬 소탈하고 솔직한 모습, 즉 작가 본연의 매력이 지녔던 호소력을 발휘한다.

수록된 작품들은 시사만평, 일러스트형 카툰, ‘하이라이트 엿보기’ 방식의 작품, 기승전결이 담긴 정식 단편 등 여러가지다. 어느 시기에는 하나만 하고 다른 시기에는 다른 것만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작업을 계속 오갔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하다. 모든 작업 방식을 총괄하는 것은 특유의 섬세한 실사풍 이미지로, 칸간 연결의 역동성보다는 칸 안의 순간의 힘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다. 필체에서도 연출방식에서도 고압축 고밀도를 전개하는데, 장편과 달리 짧은 소품에 있어서는 이런 것이 내용과도 썩 좋은 조화를 이루곤 한다. 다만 칸 자체에 주목하게 만드는 연출에서 작품의 역동성을 보충하기 위하여 보통 취하는 과장된 기하학적 구도와 포즈가 적은 편이다. 그 결과 실사풍에 가깝게 그릴수록 작품이 정적으로 느껴지는 효과가 발생, 액션 위주의 작품일수록 표현력이 부족해지는 약점이 있기는 하다.

카툰의 전통 위에 서있는 시사만평이나 일러스트형 카툰의 경우 작가의 이런 재능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순간의 이미지를 가공하되, 실사풍의 필치는 그것을 만화체로 약호화한 감성과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는 사람 세상의 실제 모습 사이에 있는 영역에서 보여준다. 여타 카툰들이 극도의 희화화와 추상성을 통해서 날 것 그대로의 감수성에 노크를 한다면, 석정현식 카툰은 카툰 특유의 감성을 지니면서도 무언가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사람 세상에 대한 거울 역할을 좀 더 강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만화와 실사의 경계, 만화 작품 속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 단칸 카툰과 연속 칸 만화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려버리는 ‘Expression’이라는 수록작품의 시도 역시 재미있다.

보다 본격적인 극만화풍 단편의 경우는 효과가 덜 명확하다. 기승전결을 지닌 완결성 있는 단편이나 에피소드식 연재물의 경우 석정현이라는 작가가 그림장이 이전에 본디 이야기꾼의 기질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평범한 인간사에 대한 애정은 『순정만화』의 강풀이나 『비빔툰』의 홍승우에 다다를 정도의 따뜻함을 지니고 있어서 이야기의 좋은 뼈대가 되어준다. 아직은 무거운 사회적 또는 철학적 주제를 다룰 때보다 사람들의 온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더 재능이 빛을 발한다.

다만 아직 긴 이야기를 가지고 계속 상대방을 쥐었다 놓는 식의 이야기꾼은 아직 아닌, 순간 반짝이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끌어와서 단번에 매료시키는 식의 재담에 가깝다. 즉 소재의 힘, 이미지의 압도에 많은 에너지가 할애되어 있고, 그에 비해서 밀고 당기는 연출에는 아직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의 경우 다행히도 짧막한 소품들이기에 앞의 강점은 부각되고, 단점이 드러나기 전에 작품이 끝나서 곧바로 여운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가의 프로 데뷔작이자 처음 주목을 모으게 한 『노르웨이의 숲』이라든지, 작가 자신의 해병대 전력과 만화가 생활을 바탕으로 그려낸 연재물 『코미커즈』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이런 경향이 한 단계 더 나아가 『귀신 외전』같은 작품에서는 아예 자체적 완결성보다는 전체 장편을 상정하고 그 중 한 대목을 뽑아낸 듯한 방식까지 구사하기에 이른다. 이 경우 작품 자체로서 읽기에는 지나치게 거두절미지만, 보다 큰 작품을 연상시키는 기대효과에서는 효과적인 것이다.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하나의 책으로 일관성 있게 엮어낸 것은 책 만듦새의 뛰어남 덕분이다. 작가의 작품 설명과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과 동떨어지지 않도록 적절하게 삽입한 것 등 한마디로 ‘잘 프로듀싱된’ 책이다. 다만 소품집이라는 컨셉 자체의 한계 때문에, 이미 작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주목하고 있거나 만화가 지망생으로서 다양한 창작시도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 외에 새로운 독자를 개척하기에 적합한 책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장편작품들이 더 출간되면서, 작가의 매력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들이 항상 돌아오게 될 원천으로서 자리매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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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석정현 소품집 Expression
석정현 지음/거북이북스

현재로 이어오는 향수 – 달빛구두 [기획회의 061015]

현재로 이어오는 향수 – 달빛구두

김낙호 (만화연구가)

인간의 기억력이란 오늘을 살아가기에 가장 편리하게 만들어져있기 마련이다. 좋은 기억은 좋게, 그리고 아프고 힘든 기억들도 나름대로 긍정적인 의미를 덧붙여서 끄집어낸다.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이 작동하지 못하면 기억은 트라우마로 남아서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악귀로 남지만, 대체로는 이런 식으로 과거의 경험들이 현재 삶의 토양이 되어주곤 한다. 그 기억은 때로는 개인의 좁은 삶의 범위가 아닌 그 사람이 살았던 ‘세상’의 방식에 대한 기억이고, 그 사람의 세상을 만들어냈던 그 이전의 다른 사람들의 방식에 대한 나름의 기억이다. 과거에 대한 ‘향수’는 그런 세상에 한번쯤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다. 다만 정말로 단순히 옛날로 퇴행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생각과 정신을 가진 상태에서 과거의 모습들을 보고 그 당시에는 충분히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는데 나중에서야 아쉬움이 남았던 것들을 제대로 경험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에 대한 향수는 복고이면서도 지극히 ‘현재’ 중심적이다.

『달빛구두』 (정연식 / 전3권 / 휴머니스트)는 이런 의미에서 과거 향수의 모범과도 같은 작품이다. 향수 정서를 내세운 많은 크고 작은 작품들이 그냥 과거의 모습을 제시하고 공감을 강요하며 끝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처음부터 여러 시대의 모습 사이에 흐르는 다르면서도 같은 느낌에 집중한다. 작품은 광고회사 기획자 이봄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갑작스런 모친상으로 고향에 내려가서 그간 소원했던 어릴 적 아저씨에게 과거 부모 세대의 사연을 듣는 식으로 전개된다. 크게 3개의 시대가 펼쳐지는데, 현재의 이봄이 살고 있는 세계, 6살 당시의 이봄이 살던 부모들의 80년대 세계, 그리고 그 부모들이 젊어 서로의 사랑과 사연을 만들어나가던 70년대 세계가 그것이다. 어머니가 돈을 벌기 위해 집에서 키우던 개를 잡아 팔아서 어린 가슴에 상처를 받았던 딸내미는 다시 자라나 같은 일로 또 그녀의 딸에 상처를 주고, 그때 어머니가 그 어머니를 이해 못했듯 지금 자라난 현대의 이봄도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가 좋아하지만 딱히 고백하지 못하는,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너무나 애잔해서 열병이 되는 그런 것도 아닌 애매하지만 현실적인 짝사랑과 자신에게 구애를 해온 또 다른 좋은 남자 사이에서의 선택이라는 모습 역시 지극히 현대적인 세상의 이봄의 모습이자, 한 세대 거슬러 올라가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했다. 속절없이 속 좋지만 과거 운동권 경력 때문에 항상 일이 안 풀리시던 아버지, 억척스런 어머니, 동네에서 가장 친한 아저씨와의 80년대 골목길 생활의 기억은 70년대 그 부모 세대들이 젊었을 때 겪었던 70년대의 허름하지만 서로를 아껴주던 친구 생활과 비슷한 대구를 이루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시대이든지 간에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의 냄새가 나며 현재 세상을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까지 이어지는 힘을 지니는 것이다.

물론, 효과적인 과거 향수를 위해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바로 디테일이다. 어떤 좋은 의도도, 구체적인 기억들을 속속들이 새로 불러낼 수 있는 구체성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달빛구두』의 이야기적 매력은 새로움이 아니다. 모범생과 깡패의 우정이든, 그 사이에 삼각관계가 발생하는 것이든, 기본 인물구도나 큰 이야기의 뼈대는 지극히 고전적이고 익숙하다. 하지만 향수에 있어서는 새로운 요소보다는 익숙함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깊숙하게 자극해서 결국 그 속에서 독자들이 새로운 의미와 정서를 읽어내도록 만드는지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 그 세상의 가장 핵심적인 무언가를 연상시켜주는 세부적 에피소드와 소재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 바로 디테일이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수년간 스포츠신문에서 생활 개그만화 『또디』(이상하게도 많은 이들이 ‘또띠’라고 잘못 알고 있다)에서 잡다한 세속성을 묘사해 온 작가의 재능은 큰 장점이 된다. 세 가지 세상 모두, 각각의 현실감과 디테일로 대단히 효과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위 ‘전문소재 만화’들 마냥 전문 지식 자체를 오락거리로 삼는 식이 아니라, 서정적 감수성을 펼치기 위한 인간 세상의 모습이 제대로 압축되어 있다는 말이다.

현재의 세상은 바쁘고 도시적인 경쟁 관계, 하지만 그 속에서 나름대로 구식으로 또는 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간으로, 주인공 이봄이 근무하는 광고 기획사의 구체적인 업무과정 속에서 트렌디하게 담겨있다. 80년대의 세상, 즉 6살 소녀가 바라본 부모님의 생활고와 친구같은 옆집 아저씨의 공간은 골목길이다. 가계가 기울면서 골목길의 끝 쪽까지 이사 가는 모습, 에나멜 구두에 꿈을 담고 아이들끼리 나름의 사회관계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80년대의 삶을 효과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작품 초반의 명장면이자 현실보다는 낭만적 꿈에 가깝게 그려진 어머니의 바이올린 연주 일화 역시도, 아줌마스러운 억척 엄마가 사실 멋지고 세련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밀한 울림을 준다. 봄이의 아버지 어머니와 동네 아저씨, 즉 작품의 진짜 주인공들이 젊은 시절을 보내온 70년대의 세상은 계급과 권력의 세상이고 억압에 짓눌린 저항의 시대다. 고등학교나 동네의 일상의 세밀함도 대단하지만, 특히 주인공들의 평범함이야말로 최고의 디테일을 자랑한다. 운동권에 뛰어든 주인공은 투철한 의지로 불타는 민주 투사가 아니며, 조폭에 뛰어든 다른 주인공은 출세를 위하여 아득바득 기회만 엿보는 대물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극적인 이야기일수록 오히려 세밀한 디테일에 신경을 써야 등장인물들이 대단한 상징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온라인 연재 당시 칸 간 연출에 다양한 실험을 넣지 않아서 다소 심심했던 부분은, 책 형태로 재편집하는 것에는 오히려 편리함으로 다가온 듯하다. 물론 시각적 세부묘사보다는 둥그런 그림체로 감성적인 형상들을 구사하는 것에 더 장점을 지니고 있는 작가의 스타일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칸 들이 큼지막하게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은 들지만, 거꾸로 보면 그런 느슨한 여백의 느낌이 좀 더 편한 독법이 가능했던 7-80년대의 만화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향수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지난날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지나간 것을 기억하며 그 속에서 자신의 현재를 반추하고 과거와 화해하는 것에 있다. 각자 삶의 경험 속 어딘가에 있는 그 달빛구두를 발견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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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달빛 구두 – 전3권 세트
정연식 지음/휴머니스트

그림을 읽는다는 것의 주관성 –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기획회의061001]

그림을 읽는다는 것의 주관성 –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김낙호 (만화연구가)

예술을 감상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그 의미가 ‘아닌’ 것부터 하나씩 살펴보면서 시작해보도록 하자. 우선,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와 가장 거리가 먼 것은 바로 감상에 대한 하나의 모범답안, 절대적인 해답을 요구하는 것이다. 대단히 부실하게 꾸며진 공공교육 미술 교과서에 대한 참고서의 요점 정리마냥 달달 외우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없다. 예술의 감상이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메시지와 감성과, 감상자가 이해하고 싶어 하는 메시지와 감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던 사회적 맥락과 개인적 경험 속에서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것을 그대로 탐정마냥 추리해내는 것은 미술사적 연구의 의미는 있지만, 감상이 아니다. 감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감상자 자신 역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적 맥락과 개인적 경험 속을 작품 속에 투영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간단한 사실은 작가의 작품이 권위의 무게를 뒤집어쓰면 쓸수록 점점 잊혀지곤 한다. 특히 모든 사회적 맥락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거의 권위만으로 사회적 입지를 겨우 유지하고 있는 고전 미술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지나치게 권위로 포장한 나머지 오히려 패러디의 대상이 된다면 모를까, 진정한 ‘감상’이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김치샐러드 / 학고재)은 바로 감상이라는 행위에 관한 만화다. 원래 블로그의 인기 연재물로 큰 인기를 누렸는데, 미술 전문 출판사에서 책으로 엮여져 나온 것이다. 이 작품은 두 개의 손가락을 캐릭터화한 주인공들이 명화 한편을 놓고, 그 속에 담긴 여러 의미구조들에 대해서 분석해가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분석은 결코 교과서적이거나 작품의 무게에 눌린 일방성에 빠지지 않는다. 바로 감상자가 처해 있는 사회적 현실, 바로 인터넷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깊은 집단적 우울함을 지니고도 여하튼 희망도 찾아보는 평범한 현대인들의 세계에 비추어 그림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필리어』그림들은 경직된 현대인들이 ‘미친년’의 내적 평온과 자연성을 갈구하는 매력적인 회귀본능이며, 밀레이의 『눈먼 소녀』속에서 현재의 절망과 미래의 무지개에 대한 희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어떤 미술 교양 해설서보다 더 현대를 살고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 와닿을 수 있으며, 설명에 의한 이해가 아니라 예술의 가장 일차적인 향유 방식인 ‘감상’의 기능을 복귀시킨다.

이 만화의 형식과 서술 방식 역시 이러한 목표를 위한 좋은 도구가 되어준다. 우선, 감상의 각 요소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명화를 조각내고 변형하며 말풍선을 달아가며 상황을 희화화하는 것에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 그림과 사진, 각종 아이콘들을 간단히 포토샵으로 합성한 것에서 오는 아마추어적인 취향 역시 지극히 실용적이다. 하지만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에 걸맞게 쉽게 복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든다는 기법 자체보다는,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인터넷 상의 여러 문화 현상들을 작품 감상의 과정에 깊숙이 개입시키는 것에 일조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바로 이런 표현기법들이, 오늘날 인터넷 게시판과 커뮤니티들의 가볍고도 실용적인 시각문화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특히 감상자가 처한 사회적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서 실제로 인터넷 게시판이나 소위 ‘짤방’ 이미지를 직접 인용하여 엮어 넣는 자유로움 역시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고정된 시각 이미지의 연속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만화 특유의 속성 역시 바로 이런 보여주며 말하는 목표에 가장 적합하게 작용한다. 마치 명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감상해내는 내용처럼, 이 작품 역시 독자들에게 자신의 사회적 맥락, 문화 속에서 읽혀지기 쉽도록 친근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소통으로서의 미술, 미술 감상하기의 자세가 과연 작가가 완전히 의도한 것인가 아니면 기술적 한계의 결과인가 의심을 가질만할 법도 하지만, 작가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가끔 발표하는 미술작업들(특히 재기발랄함이 살아있는 ‘녹차소년’은 압권이다)은 그런 의심을 말끔하게 제거해주고도 남는다.

하지만 인터넷 상의 만화와 책으로 나온 만화 사이에는 다소의 격차가 있기 마련이다. 비단 길다란 횡스크롤을 책의 형태로 잘라 붙임으로서 나오는 연출 상의 변화 뿐만 아니라, 인터넷의 세계에서 인터넷을 이용하는 평범한 누리꾼들에게 공감을 자아내는 발표형식과 두꺼운 미술서적을 사서 읽고 싶은 사람들 사이의 격차라는 것이 있다. 특히 출판사가 원래 ‘무거운’ 미술 교재 전문 출판사라는 점은 책의 품질에는 플러스, 책의 수용 방식에 있어서는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양날의 칼이다.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은 미술 전문 서적이 아니라, 현대 문화 비평 에세이에 가깝다. 인터넷 상에서는 그런 감상을 자아낼 수 있는 작품이었으나, 미술 서적의 형식으로 나온 책 버전은 자동적으로 다른 맥락을 요구하게 되는 셈이다. 작가가 재구성한 듯 한 책의 흐름 역시 그런 점을 어느 정도 의식하여, 우울함의 바다에 빠지는 일화부터 시작하여 후반에는 보다 내밀한 고백과 결국 불안한 독백과 암전으로 끝나는 ‘닫힌 구조’를 취한다. 책으로서는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작품의 가장 큰 매력 가운데 하나이자 이 작품이 공감을 자아낼 수 있었던 기반인 열린 감상이라는 측면을 쇠퇴시킨 셈이다. 이 작품의 원래 인터넷 팬들은 한 명의 작가에 의해서 창조된 명화에 대한 한명의 미술전문가에 의한 구조적 해석을 바란 것이 아니라, 감상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즐거움을 원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화 해설이 아니라 현대 인터넷 문화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이 돋보이는 ‘외전’격 작품이었던 ‘의기양양 조선 고양이’ 라든지, ‘21세기 풍속화첩’이 이번 책에서 제외된 것이 적잖이 섭섭하다. 책의 구성적 일관성 측면에서는 분명히 제외되는 것이 타당하지만, 작품의 진정한 매력에 있어서는 가장 노른자위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도시문명과 인터넷 속에서 소통하며 살아가는 현대 문화에 대한 감성적이고 날카로운 통찰이, 단순히 약간 대중적인 그림 해설서처럼 보이기 쉽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즉 이 작품의 출판과 홍보의 컨셉 조절에 있어서 근본적인 발상의 재정비가 필요한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대적 감수성에 대한 탁월한 통찰, 자신의 감성에 대한 솔직함,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만화적 의지, 이 모든 것에 인터넷 세대의 연결 지향성이 더해지자 명화의 감상이라는 행위는 이 작품 속에서 새로운 차원 – 어쩌면 가장 본질적인 원래의 차원 – 으로 이동했다. 뭉크도 쿠르베도 브뤼겔도, 결국 우리 자신을 읽어내기 위한 도구다. 우울해(海)를 떠도는 이상한 손가락들의 그림 읽는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예술의 감상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약간 다시 생각할 자극을 주는 작품이라는 것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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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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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김치샐러드 지음/학고재

하드보일드 고농축 원액 – 『씬시티』[기획회의060915]

하드보일드 고농축 원액 – 『씬시티』

김낙호 (만화연구가)

하드보일드라는 대중문화 장르가 있다. 비록 장르 중 일부가 ‘느와르’라는 수식어로 미학적 가치까지 부여받을 정도로 나름의 굳건한 지위를 보장받고 있지만, 여전히 이 장르의 핵심은 바로 폭력, 섹스에 대한 탐닉으로 무장된 범죄물이다. 그런데 그 범죄라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인 것 정도로 그려지고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밑바닥 인생들의 최대한 “폼 나게” 사는 인생살이에 대한 도취로 가득하다. 나쁜 놈들도 폭력적이고 막나가지만, 좋은 놈들도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로 폭력적이고 막나간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탐욕과 욕망이 뒤섞인 속에서도, 주인공 쪽은 한 가닥 지고지순함만은 간직하고 있기에 구분이 되는 정도에 불과하다. 선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 악을 누르는 이야기. 험난한 세상 찌든 도시 속, 서로 범죄적 음모로 물고 물리는 밑바닥 활극의 카타르시스가 바로 이 장르의 재미이자 인기의 비결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 극단적으로 슬럼화된 어두운 도시가 있고, 그 거리에는 온갖 조직 범죄와 일반 범죄가 들끓는다. 도시는 부패한 공무원과 종교인들의 지배하에 있으며, 이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기 터전을 지켜야 한다. 악당들만큼 비정하고 거칠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이 도시에서, 여러 인간군상들이 서로 음모에 얽히고 먹고 먹힌다. 이것이 바로 『씬시티』(프랭크 밀러 / 세미콜론 / 전7권 중 3권 발행중), 문자 그대로 ‘죄악의 도시’의 세계다.

원작자의 광팬과 원작자 본인이 공동 감독한 동명의 영화로 한국에는 먼저 소개된 바 있는 이 작품『씬시티』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드보일드 농축액이다. 실제로 책을 펼쳐보면 매 페이지, 매 장면마다 하드보일드의 극치를 표현해 보겠다는 의지가 넘친다. 어둡고 모노톤인 하드보일드물의 공간은 이 작품에서는 아예 중간톤 없는 강렬한 흑백의 세계다. 여성들은 더할 나위 없이 뇌쇄적이면서 동시에 강하고 위험한 팜므 파탈들 이며, 남성들은 근육질이든 왜소하든 하나같이 “순수한 폭력의 덩어리” 그 자체다. 도시의 뒷골목은 극단적으로 어둡고 더러우며 범죄의 때가 찌들어있고, 멋진 자동차 추격과 술집의 주먹다짐이 넘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이 놈의 망할 세상에 대한 폼나는 시적 독백을 읊조린다. 물론 이런 묘사 속에서 인간의 고독이니 사회의 어두운 그늘과 혼란에 대한 실존적 은유니 하는 수사를 뽑아내고 싶은 뭇 문학청년 후보생들도 있겠지만, 역시 이런 하드보일드의 핵심은 바로 성과 폭력이 멋들어지게 포장되는 것 자체에서 나오는 원초적 쾌감이다. 그리고 바로 『씬시티』는 하드보일드 장르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들을 모두 하나씩 분해해서 극단까지 끌고 가면 어떻게 될지 시험해보는 장렬한 실험실 같은 느낌이다.

이야기 구조 역시 하드보일드 펄프픽션들이 원래 그래왔듯 여러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에피소드로 펼쳐진다. 그리고 하나의 세계관 속에 공존하기 때문에 가끔 서로의 이야기에 찬조출연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한 스토리에서는 죽어버리고 나중에 나오는 다른 스토리에서는 다른 시간대를 다룬다는 명목 하에 살아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러한 구조는 만화라는 형식에 한층 더 잘 어울리는데,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가끔 섞여 들어가는 장편이야기와 단편 에피소드들을 어색함 없이 쉽게 이어놓을 수 있는 출판물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이 작품 역시 완성도가 높은 이야기도 있고, 다소 미흡한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전체 세계관과 표현력의 매력은 시리즈 전반에 걸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작품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역시 중간색을 생략한 흑백의 대비로 그려진 장면들이다. 그것도 바탕이 검은 색이고, 흰 부분은 가끔 빛이 들어와서 사물과 사람들의 윤곽선을 식별하게 해주는 정도에 가깝다. 나아가 거칠고 직선적인 필체, 역동적 화면구도와 시점처리는 강력한 마초 에너지를 발산한다. 현실감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극단적인 스타일 과잉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이런 과장은 영화로 치자면 오우삼 영화에서 주윤발의 트렌치코트가 휘날릴 때 슬로우 모션이 되는 것과 맞먹는 강렬한 효과를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어판에서 만화의 식자 처리를 김수박 작가를 통해서 전문적으로 작업한 것 역시 좋은 선택이다. 그림과 문자가 잘 녹아들어가지 않으면 그 스타일리쉬한 시각세계가 망가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전체 대사에 하지 않고 효과음에만 그런 전문적 처리를 한 것은 다소 아쉽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이번 한국어판은 출판 품질이 잘 나온 느낌이지만, 아쉬운 부분은 있다. 바로 번역의 부분이다. 매끈하고 별다른 오역 없는 ‘좋은 번역’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원작 특유의 거친 하드보일드 문체를 살린 ‘훌륭한 번역’에는 못 미친다. 예를 들어 1권의 첫 부분에 주인공 마브가 “천국의 향기가 코를 찌르는군”이라고 독백하는 부분이 있다. 원작의 대사를 직역하자면 “그녀는 천사가 풍겨야할만한 냄새가 났다”에 가깝다. 즉, 마브 같은 거친 마초의 상상력으로는 천사라도 어떤 냄새(향기가 아니라!)가 날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이런 말을 하는 셈이다. 그냥 멋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거친 밑바닥 상상력으로부터 시적 감수성을 끌어올리기 때문에 멋진 대사인데, 그런 맛깔스러움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좋은 작품을 좋은 출판 품질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대단히 멋진 일이다. 인생에 대한 교훈적 성찰로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 아니라 폼 나는 쾌감 에너지로 충만하다는 의미의 좋은 작품이고, 그 분야에 있어서 『씬시티』는 추종불허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사족: 작품 외적인 문제지만, 출판사의 보도자료 역시 성의가 아쉽다. 예를 들어 마치 밀러가 ‘데어데블’ 캐릭터의 창작자인 듯 이야기한다든지, 87년작 『배트맨:원년』을 『씬시티』 이후에 창작했다고 하는 등 사실 관계의 오류가 적지 않다. 아무래도 출판사 담당자들이 아직은 만화 문화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하기에 일어난 현상인 듯 한데, 차차 나아지기를 바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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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씬시티 1
Frank Miller 지음, 김지선 옮김/세미콜론

설정과 표현과 이야기 -『귀신』[기획회의060901]

설정과 표현과 이야기 -『귀신』

김낙호 (만화연구가)

99년부터 한 3-4년간, 한국에는 유럽만화 출간 붐이 일어났던 적이 있다. 홍대 앞 미술전문서점이나 미술평론가들의 소개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니코폴』이나 『잉칼』, 『쌍브르』같은 예술적 성취도가 높이 평가받는 작품들이 썩 괜찮은 번역과 출판 품질로 한국 독자들 앞에 선보인 것이다. 비록 그쪽 작품들의 이야기 표현 방식이나 상상력의 방향 등이 아시아 만화권의 화법에 익숙한 국내 독자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니지 못했기에 붐은 저조한 판매 속에서 이내 사라졌지만, 적어도 그 작품들이 주었던 시각적 임팩트만큼은 강렬하게 자리매김했다. 흑백이 아닌 컬러, 그것도 익숙한 셀 애니메이션풍이 아닌 다양한 기법들의 향연은 만화 속 그림 자체의 쾌감을 일깨워주는 힘이 있었다. 주류 흑백 장르만화라는 출판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출판형태가 곳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내, 한국 작품 중에도 그런 식의 강력한 그림실력과 표현력을 온전히 발휘하도록 허용 받는 형태의 책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때맞춰 컴퓨터 모니터와 컬러링에 익숙한 젊은 작가 세대가 데뷔를 해주었다. 한국에서 만화라는 분야는 한층 더 자신의 운신의 폭을 넓힌 것이다.

그 중에는, 만화 특유의 과장을 절제하고 사진에 가까운 수채화풍 그림체로 높은 인지도를 쌓아올린 작가 석정현이 있다. 그가 작업해온 일러스트들은 대중적 인기에서 부족함이 없었고, 가끔 선보이는 단편들은 감동 에세이 스타일이든 짧은 개그물이든 감각적인 위트를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작가의 본격적인 극만화가 완성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폐간된 ‘영점프’ 등 여러 지면에서 작가 자신이 오래 동안 구상하고 있던 근미래 군대경찰 이야기의 설정은 그런 기대를 더욱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작품, 『귀신』(석정현 / 길찾기)이 출간되었다.

『귀신』은 평화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 군대가 할 일이 없어진 한반도 서울시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의문의 테러 사건이 일어나고, 사태를 해결하려는 군인들의 활약과 그 이면에 있는 군대와 미디어 등이 뒤얽힌 커다란 음모가 복잡하게 진행된다는 것이 자세한 내용 누설을 방지한 상태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주요 줄거리다. 사회와 미디어, 생체병기로 비유되는 비인간성, 평화의 의미 등에 대한 여러 화두들이 그 속에서 던져진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미 예상 가능했듯 시각적 쾌감의 즐거움이다. 섬세한 필치의 고밀도 그림들은 지나친 부담감 없이 페이지 속에서 멋진 사건 시퀀스들을 연출해낸다. 화려하면서도 현실적인 액션 연출, 역동적인 포즈, 많은 구상을 투여한 흔적이 엿보이는 각종 기계와 소품 디자인 등은 이 작가에게서 기대했던 바를 어김없이 충족시켜준다. 세계관에 대한 설정 역시 치밀하여 작품 속에 그려지는 제도와 사회가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분명히 있을 법한” 곳으로 느껴지도록 만드는데, 근미래 SF로서 중요한 미덕을 충족시킨 것이다. 또한 이 장르 특유의 현실적인 문제제기와 매력은 이 작품을 만화로서 읽고 소장할 정도의 명분은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는다.

하지만 아직, 그 이상의 점수를 주기는 망설여지기도 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좋은 문제의식과 섬세한 세계관의 반대편에는, 그것을 풀어내는 주제와 이야기 전개의 미숙한 부분들이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큰 차원에서는, 좋은 문제의식 방향 설정을 피상적 고민으로 승화시키는 선에서 머물렀다는 것이다. 미디어의 대중 여론 조작이라든지 평화의 진정한 의미란, 현실 속에서는 다양하고 미묘한 모순들로 가득하다. 평화를 바라는데 그것이 오히려 평화를 옭아맨다든지, 더한 미디어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자극에 둔감하게 만든다든지, 사회속의 누구나 결국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이며, 보호자이자 동시에 감시대상이라는 점 등 복잡하기에 더욱 중요한 지점들이 많다. 하지만 『귀신』은 아쉽게도 너무나 쉽고 빠르게 주연들과 조연들, 하나의 시스템과 다른 시스템 사이에 선악의 선을 그어버리고 후반으로 갈수록 헐리우드식 주류 액션 활극의 방향으로 달려 나간다. 실제 현실의 중층적 모순을 다루기 좋은 주제와 세계관을 가지고, 어째서 이 정도까지로 타협했는지 아쉬움이 남을 따름이다.

주제라는 큰 차원을 떠나서, 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로서의 재미 역시 아직 미완성이다. 여러 매력적인 설정을 지닌 주요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 누구에게도 공감할 여지가 충분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독자는 등장인물의 행동 동기와 패턴에 어떤 식으로든 공감해야 작품을 행위자들의 이야기로서 즐길 수 있다. 그렇기에 작가는 인물들의 감정과 행동에 필연성을 부여하고 극의 완급을 끌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귀신』에 등장하는 여러 매력적인 인물들은 그런 부분이 피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오히려 처음 시퀀스의 이름 없는 희생자로 잠깐 출연한 젊은 연인들이 훨씬 효과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인물구축이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주인공이 소위 ‘귀신’이 된 이유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어나지 않으며, 부대원들이 재등장할 때 통쾌한 반전의 기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다시금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서 표현되어야 할 주제의식의 효과적인 발현에도 방해가 된다. 예를 들어 미디어를 통해서 주인공들에게 닥쳤던 비극은 공감 가능한 절망이 아닌 ‘설정’으로서만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명실상부한 2005년도 최고의 활극 모험 영화 가운데 하나인 『킹콩』에서 피터잭슨이 3시간 영화 중 무려 초반의 1시간여를 감정이입 가능한 캐릭터의 구축에 할애했던 전례를 참조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전체적으로 『귀신』은 탄탄한 시각표현과 상상력으로 제작되었으나 결정적인 주제 표현과 캐릭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에 실패한 몇몇 대형 블록버스터 장르 영화들과 비슷한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단위 시퀀스 내에서 감수성 있는 전개를 보여주는 것 까지는 당초 작가에게 기대한 만큼의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주제와 설정의 무게가 부담을 주었는지, 정작 필연성 있는 캐릭터들의 일관된 이야기로 성립시키는 것에 있어서는 아직 다듬을 여지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편과 일러스트에서 뛰어난 감수성을 인정받은 신인이, 중/장편 극만화 작품 첫 데뷔작에서 나름의 희망을 던져주며 동시에 일종의 통과세를 지불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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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