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 아이스너 타계. (1917-2005)

!@#… 미국만화…아니, 만화라는 양식 자체의 거장, 윌 아이스너 타계. 2005년 1월 3일, 심장수술 중 운명. 장수를 누리면서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은 노 작가의 명복을 빈다. 그러고보니 얼마전에 소설가(이자 운동가…아니 운동가이자 소설가?) 수전 손탁도 타계. 음음음…

!@#… 윌 아이스너는 한국에서는 스콧 맥클루드의 만화이론서 <만화의 이해>를 통해서 주로 알려졌다. 사실 <만화의 이해>는 핵심논리의 상당 부분을 아이스너의 <만화와 연속예술>(국내 출간명은 생뚱맞게도 “그림을 잘 엮으면 만화가 된다”)에 빚지고 있고, 스콧을 포함한 대부분의 의식있는 미국작가들은 아이스너라는 영웅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현하고 싶어서 항상 안달이다.

!@#… 하기야 그럴만하기도 한 것이, 이 사람은 한 평생 미국 만화 발전의 최전방에서 뛰어왔기 때문이다. 지난 70년간 수많은 주류/비주류 작가와 작품들이 아이스너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에서 자라났다. 그럼에도 과거의 명예에 집착하기보다는 지금 더 좋은 작품을 만들고, 후배들이 활동하도록 판을 짜주고, 만화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인식 개발을 위한 캠페인과 교육을 벌였다. 정말, 만화 그 자체를 사랑한 작가.

!@#… 간단히 약력을 요약하자면:

1936 잡지에 정식 데뷔.  해적 모험만화 Hawk of the Seas 연재.

1936-39 Eisner & Iger Studio 를 통해서 미국만화의 중추를 이룰 수많은 인재 양성. 미국식 히어로물의 비주얼을 완성시킨 잭 커비, 배트맨의 밥 케인, 작가주의 쥴 파이퍼…

1940  연재 시작. 사상최초로, 일요일자 신문에 16페이지 별책부록으로 수록. 이 작품은 가면을 쓴 탐정이 등장하는 수사물인데, 나중에는 인간사 전반을 다루고 만화의 형식적 연출실험의 장도 되는, 아이스너의 라이프워크이자 최대 베스트셀러.

1942-45 펜타곤에서 준사관으로 복무. 교육/홍보 만화의 문법과 활용을 새로운 경지로 발전시킴.

1945-52  연재 재개. 이 후기 시리즈의 원숙미는 지금봐도 가히 발군.

1978 이런저런 작은 시리즈물과 홍보에 전념하는 듯 하다가, 이 때 큰 건을 하나 터트림. 바로, Graphic Novel 이라는 개념의 발명. . 연재 시리즈물이 아닌 완성된 단행본으로 발행하고, 시각 연출과 문학적 깊이에 초점. 이후 1년에 한 권 꼴로 이런 류의 작품 발표. 부지런하기도 하지. 이후 New York School of Visual Arts 에서 만화 강의. 후에, 이를 기반으로 이 분야의 고전격인 교과서 출시.

1988 샌디에고 코미콘에서 수여하는 대상에 Eisner Award 라는 명칭 부여. 그런데 이 사람, 여전히 유능한 현역이어서 자기 이름으로 된 상을 여러번 수상. -_-;

…이후에도 계속 작품 발표하고, 상타고, 공로상 부여받고, 교육하고… 그런 것들의 연속. 5월에 출간 예정인 유작 THE PLOT: The Secret Story of 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 의 설명을 읽어보니, 이 사람은 정말 젊은 작가의 패기와 노 작가의 원숙미를 겸비한 괴인이었다는 느낌이 마구 든다. 100년전 러시아의 유태계 지오니즘과 관련된 음모론의 발생과정을 통해서 시대와 사회를 꿰뚫는 통찰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니… 서문은 움베르토 에코.

!@#… 꼭 한번 한국으로 초빙해서 세미나/강좌 테이블로 끌고 나오고 싶었던 인물이었는데… 타이밍을 영원히 놓쳐버리고 말았다. 만화인생 70년, 평생 현역. 작가로서도 활동가로서도 교육자로서도 솔선수범 진두지휘. 이제는 평안하게 휴식을 취하시기를. 

– 작가 소개 (영어의 압박): http://deniskitchen.com/docs/bios/bio_will_eisner.html

– 윌 아이스너 공식 홈페이지: http://www.willeisn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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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저편으로 – <미스터 레인보우> [으뜸과 버금 0404]

무지개 저편으로 간 만화 – <미스터 레인보우>

김낙호 (만화연구가 / 웹진 <두고보자> 편집장)

  예를 들어 비가 온 직후처럼 수분이 채 증발하기 전인데, 갑자기 햇살이 비추는 순간이 있다. 이 때, 운이 좋으면 빛이 대기중에서 파장길이에 따라서 분광현상을 일으키면서 커다란 곡선을 그려내는 경우가 있다. 생활용어로, 이것을 우리는 ‘무지개’라고 부른다. 무지개를 보면 괜스레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지고는 한다. 비온 직후 찬란한 햇빛과 함께, 마치 대자연의 힘이 우리에게 희망의 선물을 던져준 듯 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대홍수 이후 신과 노아의 약속의 징표로 여겨졌으며, 서양 민담에서는 무지개의 ‘저쪽 끝’에는 행복과 보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말로 무지개의 희망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생식에 얽매인 사랑을 넘어선 사람들, 바로 동성애 인권운동의 현장이다. 동성애 커뮤니티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무지개깃발은 78년 처음 만들어진 이래로 대중적인 코드가 되었다. 아마도 그 무지개의 저편에는, 이들이 꿈꾸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인정받는 그런 세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스터 레인보우>(시공사, 1권 발매중)의 주인공은 동성애자다. 사실 ‘야오이’라는 장르가 만화팬들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지 오래인 지금, 그것이 무슨 특징이 되겠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여느 동성애 판타지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미스터 레인보우>의 하덕구는 생활인이다. 지금 이곳, 한국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청년인 것이다. 고스란히 있는 편견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커밍아웃을 피하고, 좁디 좁은 동성애자의 커뮤니티에서 위안을 받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활세계 속에서 사랑을 찾아나선다. 밤에는 자신의 동성애 정체성을 잔뜩 부풀려서 폭발시킬 수 있는 직업인 게이바 여(…)가수를 하면서, 낮에는 그런 사실을 숨기고는 사회에서 ‘정상인’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유치원 교사를 한다. 정체성과 사회적 삶을 동시에 유지하려면, 여러모로 바쁠 수 밖에 없는 사회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작가는 꽤나 착한 사람이다. 가끔 희화화되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코믹한 상황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미스터 레인보우>는 결코 자신의 주인공들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한 유치원생의 잘생긴 아버지에게 연모의 정을 불태우며 소란스러우면서도 진지하게 사랑을 고민하는 덕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따뜻하기 그지없다. 나아가 그의 주변 인물들 조차도 코믹하고 궁상맞으면서도 따뜻하게 감싸안고 싶은 사람들 투성이다. 대학생 시절부터 덕구를 좋아했던 한 후덕한 여학생, 덕구의 할머니, 허영끼 많은 유치원장, 덤덤한 동료 여교사… <취중진담>등 이전 작품들보다 더욱 편안해진 펜선과, 기교를 가다듬은 화면 연출이 안정감 있게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다. 동성애와 성전환증의 개념이 혼용되고 있다든지, ‘남성답지 않게 여성스러움’ 등 동성애에 대한 막연한 사회적 고정관념을 무비판적으로 재연하고 있다든지 하는 등은 지적의 대상이다. 나아가 아직 완전히 정돈되지 않은 이야기 전개의 호흡도 이후의 발전을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부족했던 부분들은 작가의 손을 떠나서 독자들의 상상력 속에서 완성을 시켜야 할 듯 하다. <미스터 레인보우>의 작가는 최근 급성 폐렴으로 인하여, 무지개의 저편으로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좋은 작품, 더 좋아질 것이 한없이 기대되던 작품을 중간에 남겨두고 가신 고 송채성씨의 명복을 빈다.

[으뜸과 버금 200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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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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