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만화와 창작환경의 변화 [계간만화 04봄]

!@#… 원 출처는 <계간만화 2004년 봄호 (통산3호)>. 이건 뭐랄까, 맨 처음에 쓴 오리지널 버젼. 잡지상에는 지면 한계로 축약. 물론 오리지널이라고 해서 꼭 더 좋은 건 아니지만.

!@#… http://manhwaiyagi.com/bb/zerotb.php?id=mhhh&no=3 에 가면 이 특집기획의 다른 꼭지 중 하나인 ‘만화판의 주체들’을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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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만화와 창작환경의 변화

김낙호 (만화연구자 / 웹진 ‘두고보자’ 편집장)

오래 지나지 않은 한 때, 온라인과 만화의 만남이 갖은 장밋빛 희망으로 포장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출판만화의 위기를 타개할 새로운 돌파구이니, 작가와 독자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새로운 통로니 하는 훌륭한 이야기들이 온 주변에 파다했다. 그리고 수년간 여러 가지 시도들이 이어져왔고 때로는 예상대로, 때로는 예상외로 현재의 판도에 이르렀다. 시장유통에서의 여러 실패담과 희망은 다른 지면에서 다루어보도록 하고, 본 지면에서는 창작이라는 측면에 집중해서 그 현황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보자: 온라인은 만화 창작환경의 새로운 돌파구가 되어주었는가? 대답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기존에 있던 몇가지 가능성들을 좀 더 표면화시켜 주었다”.

1) 표현의 확장 가능성

((도판: I can’t stop thinking 중 아무 장면이나))
((도판: e-merl 의 PoCom의 전체 회로도 또는 확대된 장면 하나))

우선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쉽게 끌 수 있는 것은 바로 표현적 측면인데, 기존의 종이 만화들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만화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세계적으로 전파하고 다니는 선구자는 <만화의 이해>의 저자인 스콧 맥클루드인데, 온라인을 통해서 만화의 표현적 가능성을 넓혀나간다는 것, 새로운 방식의 만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의 즐거움을 역설하고 있다. 온라인 만화의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온라인 만화의 형식으로 직접 제안하고 있는 <생각이 멈추지 않아요I can't stop thinking> (http://www.scottmccloud.com에 원문이, http://www.kcomics.net에 한국어판이 있다)에서 제안한 연결선 위주 칸 이동 방식, 하이퍼링크의 적극적인 활용, 그리고 무엇보다 속칭 ‘무한캔버스’의 도입 등이 그런 취지하에서 발명되었다. 단순히 동영상과 음악 등을 입히는 초보적인 멀티미디어가 아닌, 만화 특유의 공간적 매력을 살린 시각적 실험의 향연은 수많은 국내 및 해외의 작가들의 영감을 자극한다. 이러한 시도들은 대부분 페이지 넘기기의 전형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만화 독서방법을 제안하는데, 톰 스택폴은 <보이지 않는 힘Invisible Forces> (http://www.pvcomics.com/free/invisibleforces/)에서 사용자의 조작에 따라서 하나의 페이지내부에서 일부분만을 보여주며 조금씩 변형시켜나가는 방식이 좋은 예다. 온라인에서만 가능한 새로운 독법에 대한 실험정신은, 18명의 작가들이 함께한 프로젝트인 ‘PoCom UK 001’ (http://www.e-merl.com/pocom.htm)에 이르러서는 전통적 독법에 익숙한 독자들과의 한판승부를 벌이다시피 한다. 물론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모난돌 스튜디오의 ‘디지털 카툰’을 위시한 수많은 작가들이 모니터 속에서 놀랄만큼 효과적인 새로운 표현들을 시도하고 있다.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온라인은 다양한 새로운 실험과 놀이의 장을 마련해주었고, 기존 종이지면에서 할 수 있었던 것도 대부분 그대로 흡수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창작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표현적 측면이라는 것은 결국 창작자의 상상력과 기술소화 능력의 문제다. 이야기를 계속하기 앞서 ‘디지털’과 ‘온라인’ 사이의 혼동을 해명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은 만화작품을 전산정보로 만들어서 작업하고 보관한다는 지극히 도구적인 개념이지만, 온라인은 디지털화시킨 작품을 소통시키는 과정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작품의 발표공간이 종이에서 모니터 화면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이야기를 짜고 그것을 칸 속에 그림과 글의 형태로 치환하여 표현해낸다는 본질적인 작업성격에는 변하는 것이 없다. 온라인에서의 발표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디지털 도구(즉, 컴퓨터)의 사용이 더욱 보편적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차피 종이만화라 할지라도 도구의 발전에 따른 당연한 귀결일 뿐이다. 여전히 만화는 가내수공업에 더 가까운 창작활동이며, 그것이 계속 장점이자 한계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작가가 원고를 디지털로 스캔해서 전자우편으로 잡지 편집부에 보낸다든지 하는 도구적인 효용도 물론 있지만(물론 벽지 또는 해외에서 작가의 창작 활동이 수월해지는 등, 이 자체로서도 상당한 창작환경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온라인의 이러한 속성이 창작환경에 미친 영향은 좀 더 미묘하다.

2) 타이밍의 문제

((도판: 스노우캣 다이어리 중 아무거나))

창작물을 독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온라인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개재 타이밍을 들 수 있다. 종이지면의 경우 잡지의 발간시기라든지, 책의 제작기간 등 다양한 물리적 제한에 따라서 작품의 창작이 이루어졌지만, 온라인의 경우 상대적으로 그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 ‘수시 업데이트’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 홈페이지 방식의 공간은 물론, 종이잡지의 운영형식을 그대로 옮겨온 웹진 시스템에서도 마찬가지다. 잡지의 발간 스케쥴에 따른 것이 아닌, 작가 자신의 창작 페이스에 따른 창작 연재가 주는 창작여건 개선의 가능성은 그 자체로서는 분명히 희망적이다. 예를 들어 개인 홈페이지 방식으로 운영되는 <스노우캣>의 경우 작가 자신의 페이스에 따라서 매일 또는 띄엄띄엄 한 화씩 업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작품 전반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귀차니즘’과 ‘하고 싶을 때에나 한다’는 정서에 알맞은 소통방식이다. 수익모델의 다변화 가능성은 또 어떤가. 라이센싱이 아닌 만화 자체의 수익모델이 잡지고료 및 단행본 인세에 한정되었던 것이 전통적 모델이었다면, 기존의 모델에 더하여 사이트 유료 회원제라든지, 클릭 수 기반 수익 등 다양한 새로운 발상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코믹플러스>등 대형 온라인 만화포털은 물론, 개인 사이트에서도 소액결제를 통한 유료 서비스를 시도해왔다. 이외에도 독자와 창작자 간의 직접적이고 동시적인 의견교환, 커뮤니티 활성화 등의 기능들이 온라인 만화의 긍정적인 새로운 창작환경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 수년간의 경험은, 가능성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누구나 작가가 작품을 직접 쥐고 독자들과 직접 만나며 소통을 하고 풍부한 수익을 창출하는 새로운 창작환경의 혜택을 볼 수 있을 듯 하였지만, 생각보다 이상은 먼 곳에 있었다. 예를 들어, 전통적 연재만화 시스템의 기반인 정기적인 마감 압력의 감소가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하나의 줄거리로 긴 호흡을 구사하는 작품의 온라인 연재는 속속들이 중도 하차하고, 짧은 호흡으로 이야기를 끊는 단편들, 또는 에피소드 방식의 전개가 결국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언제 끝날지, 언제 고조될지 불분명한 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은 원래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긴 호흡의 이야기일수록 일정한 속도의 업데이트에 의한 안정된 전개가 더욱 필요하다. 작품 연재의 페이스 자체가 안정되어 있어야, 독자들의 몰입도를 해치지 않고 다양한 드라마 투르기를 통해서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말 드라마에 비유하자면, 다음 회가 다음 주말에 할 것을 알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작품에 대한 몰입이나 관심을 시청자가 스스로 조율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음 화가 언제 하는지 일정하지 않다면? 관심의 패턴은 불규칙해지고, 많은 경우 아예 흥미 자체를 잃어버릴 수 있다. 온라인 만화 연재의 경우, 정기적 마감의 압박이 줄어들었을 때 작가가 결국 스스로 그 페이스를 놓쳐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잡지지면에서의 활동에 익숙한 작가들이 온라인에서 자신의 작품연재를 의욕적으로 새로 시작한 경우,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경우가 다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전용 홈페이지를 통해서 서비스된 김준범의 의 경우를 상기해볼 수 있는데, 수익성 부족이라는 문제와 결합하여 결국 의욕적인 시작에 걸맞지 않은 이른 실질적 연재중단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덕분에, 많은 수의 온라인 만화들은 짧은 호흡의 에피소드 방식으로 승부하는 쪽으로 진화하였다. 한 화가 그 자체로서 완결적이기 때문에 비정기적인 수시 업데이트를 하더라도 이야기 전체의 페이스를 해치지 않을 수 있다는 장점 덕분이다. 물론 포털 사이트 등을 통해서 정기적으로 업데이트 일정을 고정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 역시 많은 경우 짧은 호흡의 완결성 있는 에피소드를 선호하고 있다. 한번에 많은 이야기를 구상하거나, 전체 작품의 커다란 형상을 계속 고민하지 않고 각 화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창작의 부담 자체가 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속칭 ‘감성 에세이툰’과 짦막한 ‘개그물’, 혹은 두 가지의 감수성을 엮어넣은 일기형식의 만화들이 온라인 만화의 절대적인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3) 수익성의 문제

((도판: WE6 메인화면))

‘수익성’이라는 현실적 과제 앞에서, 온라인 만화는 몇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 만화 연재 자체를 통한 직접적 수익은 염두에 두지 않는 개인 홈페이지형 모델과, 웹진 연재-고료지급형 모델이다. 개인 홈페이지형 모델은 만화 연재 자체에서 창작자에게 수익을 가져다주는 부분이 없는, 자발적 업로드를 특징으로 한다. 이 경우 수익은 단행본화나 관련 라이센싱 사업 등에서만 가능하다. 이 경우 연재는 작품의 인지도/지명도를 높이기 위한 수단이며, 출판사에 의하여 발탁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예 표현욕구 또는 소통욕구로 인하여 연재하는 아마추어 정신을 지향하는 경우가 많은 모델이다. 웹진 모델의 경우, 실제로 작품을 연재하면서 그에 대한 고료를 지급받는 방식으로, 기존의 종이잡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물론 고정 고료를 받는 경우와 클릭수에 기반한 인세를 제공받는 방식 등 다양한 세부 모델이 가능하지만, 연재 자체가 수익을 낸다는 본질은 변함이 없다. 물론 이 경우도 단행본 발간과 라이센싱이라는 선택은 가지고 있다.

혹은 두 가지의 장점을 결합시키고자 한 시도도 있다. 여러 중견 작가들이 온라인에서 자신들의 둥지를 튼 ‘WE6’의 경우, 작가들이 직접 나서서 웹진 형태로 운영하며 자유로운 창작 업데이트를 하도록 하며, 유료회원을 통한 수익을 배분하는 방식을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온라인 업데이트 특유의 ‘마감 압박 부족’으로 인하여, 개별 작품들의 연재 페이스가 불규칙한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여하튼, 유료회원을 통한 수익모델 창출은 일부 성인만화 사이트를 제외하고는 아직은 그다지 확실한 해결책이 아니며, 많은 경우 중도에 좌절을 맛보았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광고를 기반으로 하는 확실한 수익모델을 지니고 있는 포털 사이트(다음, 네이버 등)의 만화코너가 각광받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결과다. 분명히, 앞으로의 과제는 개인 홈페이지형의 창작 활동에서도 수익성을 낼 수 있는 다양한 소액결재 방법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창작 환경이라는 측면에 집중하자면, 작가가 자신의 수익모델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개입해야 한다는 의미다. 고료를 받고 연재를 하거나, 곧바로 단행본으로 내고 인세를 챙기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더욱 다양해진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3) 독자와의 정면승부

((도판: http://www.dcinside.com 카툰 연재 갤러리 중, 독자리플 쌓여있는 모습 아무거나))

독자와의 만남이라는 것도, 당초에 예상한 만큼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온라인 만화가 창작 환경에 소통과 피드백을 주는 방식은 이전의 팬레터들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지니고 있었다. 연재되는 한화 마다 곧바로 직접적으로 독자들이 반응을 할 수 있으며, 많은 의견을 실시간으로 내놓기가 더 쉬워진 온라인에서 그것은 종종 날 것 그대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전이라면 좋아하든 싫어하든 일정정도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소통을 시도했겠지만, 온라인에서는 누구나 지나가면서 한마디 던지기가 용이한 것이다. 덕분에 정리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표현들이 난무하여, 여린 마음의 작가라면 큰 상처를 받고 칩거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의견들도 많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팬레터의 시절과는 달리 그러한 의견들을 중간에서 필터링해주는 편집부가 없이 직접적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며, 심지어 전자게시판으로 공개되어 의견들이 계속 축적되는 경우도 많다. 작가가 자신의 독자들과 얼마나 동시대적으로 호흡을 하고 있는가가 작품의 생명력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이라는 것은 이전부터도 하나의 진리였지만, 온라인의 소통기능 덕분에 그 명제는 더욱 더 절실해진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독자들과 매순간 정면승부를 해야하는 창작환경이 도래한 것이다.

4) 무엇보다 중요한 것

((도판: 강풀 <순정만화> 중 아무 장면이나…))

길게 이야기했지만, 여하튼 결국 온라인이라는 공간은 이미 주어진 조건이며, 온라인 만화 특유의 창작환경에 적응하며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일 뿐이다. 유동적인 변화과정에 있는 이런 상태에서 모범답안이 있을 수야 없겠지만, 최근의 사례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원래 오프라인으로 데뷔했었던 ‘파페포포’ 시리즈는 논외로 하자면, 최근 온라인 만화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사례는 강도영의 <순정만화>다. <순정만화>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국내 최대 규모의 포털사이트인 ‘다음’에 연재중인 만화로, 이 가운데 전반부에 해당하는 20여 화가 문학세계사에서 최근 출간되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막강한 인터넷 포탈의 힘이 아니더라도, <순정만화>는 어차피 히트를 기록했을 법하도록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극장에서 커플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솔로들의 저주를 한몸에 받은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그 ‘어떻게’라는 과정은 다양하게 펼쳐놓는 것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재미를 준다.

하지만 누구나 알만한 이런 큰 원칙을 좋은 작품으로 소화해내는 것은, 역시 작가 자신의 능력이다. 자신의 사이트 강풀닷컴을 비롯해서 여러 온라인 만화지면을 통해서 수련된 연출호흡은 모니터 친화적이며, 동시에 인터넷 독자들의 독서 및 반응 패턴을 정확하게 맞추어주고 있다. 한 회의 연재분량은 하나의 이야기를 에피소드식으로 끊어나가며, 그 속에서 자기 완결적인 기승전결으로 사람이 만나고 사랑이 깊어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 이야기는 결코 지나치게 장황하게 나아가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방식 보다는 한 페이지 안에서 마우스를 움직여 ‘스크롤’해도 짜증나지 않을 정도의 길이를 취하고 있다. 나아가 작가는 단지 수평적인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늘어놓는 패턴에 함몰되지 않고 연속극 방식의 내용연결로 이야기의 전개를 축적하여 점점 몰입도를 높여나가는 방식을 도입했는데, 온라인 만화 특유의 짧은 호흡을 보완해나가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인 것이다. 말하다 보니 대단히 어려운 개념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힘을 잘 다루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온라인 연재시에 <순정만화>를 수작의 반열에 올려주었던 여러 장점들이 하나의 단행본으로 묶여져 나올 때 과연 살아있을 것인가. 다음 연재분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야기꾼의 힘이 다음 페이지면 다음 이야기가 있는 단행본에서도 통할 것인가. 또한 마치 가려진 부분들을 조금씩 펼쳐보는 듯한 재미를 주던 한 페이지 내에서의 스크롤 방식이, 여러 페이지로 분절된 책 속에서 과연 매력을 발할 것인가. 나아가, 모니터 화면의 저해상도 불빛에 맞추어 놓은 여유로운 컬러 그림과 경계없는 칸의 매력이 종이 위에 빽빽하게 박혀서도 그 투박한 멋을 발휘할까.

출간된 책을 펼쳐본 결과,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재미있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가’의 기술 그 이상으로,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 자체의 힘이 강력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좋은 만화의 진정한 힘,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온라인이라는 창작환경 이전에, ‘만화’를 만들어 나가는 힘 자체가 더 결정적이다.

  좋은 만화작가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환경은, 그 탁월한 이야기꾼이 자신의 작품이 창작되고 수익을 창출하고 독자들과 소통되는 각 단계에 좀 더 깊숙하게 직접 관여하도록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여러모로, 온라인을 통해서 창작자의 작품에 대한 책임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만화그리고 공안심문받은 미국고교생.

!@#… 나는 굳이, 특별히 미국을 싫어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자유니, 다양성이니, 기회니 (혹은 혈맹이니) 어쩌니 하는 이미지들과 연관시키는 순진무구발랄위험한 꼬락서니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사실 미국은 다양한 색들이 결합한 모자이크를 빙자해서 오히려 커다란 회색으로 만들어놓고는, 그 위에 지극히 보수/수구꼴통적인 색채들을 자유롭게 입혀놓고 있는 곳에 불과하다. 까놓고 이야기해서, 굳이 한국과 크게 다를바없는 황당한 일들도 자주 보도되고 있으니까. (클릭하기)

…내용인 즉슨: Prosser 고교의 한 15살난 학생이 미술시간에 낸 과제가 있었다. 반전을 주제로 한 한칸만화. 부쉬얼굴을 한 악마가 미사일을 발사하는 장면 + 그 밑에 “테러에 대한 전쟁의 종말”이라는 글귀. 그러자  미술교사가 학교 관계자들에게 그림을 제출했고, 그 인간들은 경찰에 연락했고, 경찰은 비밀공안조직(Secret Service 라고만 명시되어있습니다; 보통은 흔히 CIA를 지칭하기는 하지만)으로 신고. 그 결과, 15살짜리 새파란 고교생이, 만평 하나로 무려 공안 심문을 받아야 했다는…

!@#… 뭐 여하튼, 멋진 세상이다. 양키군바리 새끼들의 이라크 포로 성고문 학대 뉴스와 세트로 묶어서 읽으면 대략 효과는 3만배.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애니와 코미!

!@#… 차라리 진짜로 (질나쁜) 만담… 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사실, 꽤 많이 웃으면서 봤다. 특히 ‘국내 첫 개봉작! 스페이스 4D세이!’ 라든지, “욕심많고 응석만 부리는 코미… 떼를 쓰며 울다가 집을 나가 버리는데…” 같은 주옥같은 개그는 여러분의 복막에 사정없는 고통을 가할 것이다. ‘국내최대 만화축제’라는 난데없는 카피야 그렇다 치더라도, 애니와 코미라는 막강한 마스코트의 시대착오적 압박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입장권(무려 성인 1만원) 값을 잊어버리게 만들 것이다!

http://www.ani-comi.com/

!@#… 가끔, ‘최소한의 동시대적 문화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공직 사회에 입문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한국만화가협회…는 과연 이 행사가 어떤 꼬락서니인지 알아보고나 이름을 대줬는지 더더욱 궁금하고, 한국만화사랑연합회라는 이름부터 엄청나게 수상한 단체의 정체는 미친듯이 궁금하고, 무려 ‘주식회사 애니와 코미’는 도대체 무슨 주식을 가지고 뿌린다는건지 시공간을 초월해서 궁금해진다.

!@#… 그러니까, 무려 ‘문화도시 경주’ 란 말이지? -_-; 왜 찬란하고 유구한 역사에 X칠을… 여튼. ‘만화세설’란으로 분류할 필요도 없다. 이건 그냥, ‘만담난무’다.

캐릭터 예찬: 박쥐 옆에 개똥지빠귀

!@#… 2002년 가을 정도, 이라는 괴(?) 동인지가 나와서, 코믹 행사에 부스까지 내서 판매된 적이 있다. 아주 드물게도 – 아니 제가 기억하는 한에서는 최초의 – 미국만화 전용 동인지였던 것이다! 미국만화 정보 사이트 카투넷의 운영자 Majorglory님의 주도하에 여러 작가들과 필자들이 참여했다…심지어 형민우, 강찬호님 등 프로 작가들도 다수. 미국식 이슈 판형을 염두에 둔 편집이 빛나는, 지금은 레어 아이템. 여하튼, 그 지면에 기고했던 글. 2호가 나오면 <영웅이라면, 스판덱스다!>라는 글을 기고하겠다고 미리 아이디어까지 다 잡아놨지만… 2호는 나오지 않고 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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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예찬: 박쥐 옆에 개똥지빠귀

  2001년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 우승팀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1,2선발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을 두고, 한국의 각종 일간 찌라시들은 ‘원투펀치’라는 정체불명의 별명을 달아주었다(야구의 권투화?). 하지만 미국 현지에서 이들을 부르는 진짜 별명은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랑스러운 “Dynamic Duo”다! 뭐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Dynamic Duo라는 것은 바로 ‘배트맨과 로빈’을 칭하는 말이다. 슈퍼히어로계의 전설, 궁극의 2인조팀의 별명을 부여받은 두 투수들에게 영광이 깃들기를.

  배트맨과 로빈은 톰과 제리, 콩쥐와 팥쥐 만큼이나 ‘and’가 어울리는 대명사가 되어있다. 배트맨 하면 로빈이 저절로 떠올라야 하는 것이 순리라는 듯이 말이다. 원래 밥 케인이 배트맨을 처음 만들었을 때에는 배트맨은 펄프 문학이나 라디오 드라마(이 중에는 한참 나중에 영화로도 만들어진 ’쉐도우‘도 있다)의 인기장르였던 느와르 풍 범죄 수사물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배트맨은 트렌치코트 대신에 망토를 두르고, 중절모 대신 가면을 쓰고 있을 뿐 원래는 ‘탐정’이었다. 그리고 그 장르의 관습들을 적극 차용해 들여오다 보니, 자연스럽게도 배트맨은 다른 슈퍼히어로들보다 꽤 하드하고 어두운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 주류 만화에서 슈퍼 히어로 장르가 점점 강력한 위세를 떨쳐나가면서, 배트맨 시리즈도 느와르풍보다는 뭔가 ‘히어로물 다운’ 이미지들을 적극 도입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우선은 그 어둡고 하드한 범죄수사 이미지를 벗고, 화려한 액션과 색감의 향연을 펼칠 수 있도록 배트맨에게 또다른 반쪽을 붙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짜잔! 그리하여 로빈이 탄생했다. 때는 1940년, Detective Comics#38호였다.

  로빈은 배트맨의 파트너이자, 모든 면에서 배트맨에 대한 반대말이다. 배트맨을 표현하는 이미지가 중년, 까다로움, 진지함, 신중함, 좋은 체구, 흑청색 계열의 단색 등이라면, 로빈은 청년(혹은 ‘소년’), 경솔함, 대범함, 작은 체구다; 그리고 어둠의 피조물 배트맨과는 정 반대로 빨간 웃통과 초록색 바지, 노랑 망토를 휘날리는, 걸어 다니는 색칠공부 같은 녀석이다. 박쥐와 개똥지빠귀. 당연히 대단히 부조화를 이루며 작위적인 느낌을 줄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파트너쉽이 그렇게도 최강으로 꼽힐 수 밖에 없게 된 것은, 로빈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어두운 배트맨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저스티스 리그 아메리카같이 단지 다양한 캐릭터들을 골고루 크로스 오버 출연시켜서 마케팅하기 위한 조합이 아니라, 파트너쉽을 만들기 위해서 아예 상대 배역을 만들어낸 것이다. 마치 슈퍼맨의 애인역할이 되기 위해서 탄생한 로이스 레인처럼 말이다.

  배트맨 최상의 파트너이기 위해서 탄생한 로빈. 배트맨과 로빈은 단순한 업무상의 파트너 이상으로, 마치 중년 아버지와 청소년 아들에 가까운 가족급 관계를 보여주기도 하는, 서로 끈끈히 연결되어 있는 파트너다. 특히 배트맨의 지나치게 초인적이고 빈틈없는 능력에 대해서 일종의 핸디캡으로서 작용해준 덕분에, 로빈은 배트맨의 극적 긴장감을 높여주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로빈은 슈퍼 히어로의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보다 ‘인간적’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정겨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트맨 만화를 가장 열성적으로 보는 독자층인 ‘소년’들의 대변자 아니던가! 여하튼, 로빈이 배트맨의 파트너가 되어준 덕에 스토리들에는 더욱 다양한 인간적 긴장관계가 저절로 도입된 셈이 되었다.

  물론 파트너쉽이라는 것은 대단히 미묘한 관계다. 특히 범죄수사물을 기반으로 시작했던 만큼, 비중있는 ‘우리편’ 여성캐릭터가 없는 상태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게다가 로빈의 주요 역할(?) 가운데 하나가 악당들에게 납치 당해서 배트맨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점점 심각해진다. 여기에 더하자면, 로빈 – 혹은 딕 그레이슨 – 은 서커스 공중곡예단이었던 부모들이 살해당한 후, 브루스 웨인네 저택에 입주해서 눌러앉아 동거생활을 하게 된다. 이 모든 단서들을 다 더해보고도 배트맨과 로빈의 관계가 동성애 코드로 읽히지 않는다면 오히려 신기한 일일 것이다. 필자같은 건전무쌍한(-_-;;;) 사람도 그런 결론에 달하고 있는데, 눈에 불을 켜고 트집을 잡고자 하는 당시의 검열주의자들에게는 오죽했으랴… 짜잔~ 그리하여 ‘배트걸’이 탄생했다. 여하튼 우리편에 여자도 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배트걸의 도입은 로빈에게 있어서는 물론, 배트맨 시리즈 전체에 있어서도 사실은 백해무익했다(무슨 유치원 교사가 남녀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가는 것도 아니고…). 배트걸이라는 작위적인 캐릭터는 로빈이 맡고 있던 여러 역할들을 잠식해 들어갔고, 배트맨과 로빈의 파트너쉽이 뿜어내던 조화나 호흡은 사정없이 깨졌다. ‘Dynamic Duo’는 깨지고, ‘Dynamic Trio’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한 상태로 극적 긴장만 해친 꼴이 된 것이다. 배트맨은 배트맨대로 계속 나름의 입지를 지니고 돌아다녔지만, 배트걸은 로빈을 감싸안고 자폭한 꼴이 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배트맨의 인기와 작품적인 잠재성을 극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80년대 이후의 재해석에서 로빈의 역할은 점점 더 격하되어 왔다(뭐 배트걸은 거의 완전히 무시당해버렸지만 말이다). 어디, 배트맨 ‘공식 스토리라인’를 한번 살펴 보자. 딕 그레이슨은 배트맨 스토리 안의 시간으로 6년간 파트너를 하다가, 한번 거의 죽을뻔 한 후 브루스가 그의 안위를 걱정, 팀을 깨버렸다. 그레이슨 군은 현재는 ‘나이트윙’이 되어서, 여전히 영웅질을 하고 있다. 뭐, 일종의 다 큰 자식 자립시킨 꼴이지만, 여하튼 이제는 어엿한 DC 세계관의 일원이 되어있다. 이 다음에는 제이슨 토드라는 녀석이 배트맨 자동차(배트모빌)의 타이어를 훔치려다가 2대 로빈으로 등극한다. 그리고는, 2년 정도 활동하다가 조커에게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그리고 지금은 팀 드레이크라는 녀석이 21세기형 3대 로빈을 맡고 있는데… 이 녀석은 14세, 말 그대로 ‘애’다! 컴퓨터 능력도 출중하고… 더더욱 파트너라기 보다는 꼬마 조수, 마스코트처럼 격하되고 있다. 정사는 아니지만, 배트맨 세계관 재해석의 신호탄을 날린 프랭크 밀러의 명작 ‘The Dark Knight Returns’에서도 로빈이 죽어 없어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배트맨은 은퇴상태로 중노년에 돌입. 그리고 당돌한 고등학생 아가씨(!!!) 캐리 켈리가 로빈을 자청하고 나선다. 아, 그러고 보니 DKR의 후속편인 ‘The Dark Knight Strikes Back’이 최근에 시작되었는데, 캐리 켈리는 여기서 캣 우먼으로 전업을 했다고 전해들었다(이런…-_-;). DC 세계관의 종합선물세트 ’Kingdome Come‘에서도 배트맨은 독자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이래저래, 한때 배트맨의 위풍당당한 파트너였던 로빈은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툭하면 죽고, 무시당하고, 없어지고, 바뀌고…

  아, 물론 배트맨의 가장 강력한 매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어두움과 음험함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그 지점들을 상당히 좋아한다; Arkham Asylum에서처럼 누가 광인이고 누가 정상인인지 혼란스러워 하는 광기, 그것은 배트맨 시리즈에서만 가능한 재해석이다. 음험한 광기는, Joker니, Two-Face니, Mad Hatter니, Dr.D니, Scarecrow니 등등 워낙 잘 만들어진 수많은 미친 악역들을 통해서 전달할 수도 있다. 게다가, 배트맨 아저씨의 더러운 성깔머리도 만만치 않게 어둡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는 오히려 이쪽으로만 너무 흘러오다 보니, 배트맨에서 몸과 몸이 부딪히는 화끈한 액션, 곡예성 스턴트들이 너무나 매말라버렸다는 것이다. 더 이상 그다지 ‘Dynamic’하지 않다는 것이다. 화끈한 액션활극 + 수사극 + 슈퍼히어로 모험의 풍미가 담겨있던 한 시대의 향수는, 역시 로빈이라는 캐릭터를 다시금 그리워하게끔 만든다. 로빈과의 파트너쉽을 통한 뜨거운 남자들간의 로망을 왜 무시하냔 말이냐! ‘dynamic duo’라는 옛 모토를 다시금 강조하는, 진짜 ‘구식 그대로의’ 배트맨 어드벤처를 한번쯤 다시 보고 싶어진다.

  필자가 지금 진짜로 보고 싶은 배트맨 재해석은, 배트맨과 로빈이 우정과 연애감정의 가느다란 경계 위에서 위태로운 곡예타기를 하는, 므흐흐한 물건일지도 모른다(동인들이여! 달려들기를!). 아니면 ‘영웅본색’ 같은 오우삼 영화에서나 보는 끈끈한 남자간의 애증과 파트너쉽의 뜨거운 스토리를 보고 싶은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앞으로도 ‘배트맨의 숨은 균형추’ 로빈이 맡아야 할 임무는 크다.

 

— 2002. Copyleft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 개작불허/영리불허 —

보여주면서 말하기: 만화로부터 배우기 [계간 새야 04봄]

[계간 <디자인 교육 새야> 2004년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전에 인하대 온라인 강좌에서 써먹은 강좌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보여주면서 말하기의 장점을 설명하는 글인 주제에, 그림 올리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여기는 그냥 글만 올립니다. -_-; ]

 

보여주면서 말하기: 만화로부터 배우기

김낙호 (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학생들이 필자에게 “멀티미디어란 무엇인가요?”라고 문의해오면 항상 들어주는 사례가 있는데, 바로 <가족오락관>의 ‘스피드 퀴즈’다. 이런 장면을 기억해보자: 한 출연자가 어떤 단어를 열심히 말로 설명해서, 다른 팀원 한명이 해답을 맞출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다가 다른 색깔의 카드에 쓰여진 단어가 나오면, 말을 그만두고 몸짓만으로 여러 흉내를 내며 같은 목표를 향해서 매진한다. 두 가지 시도 모두 보통 상당히 어색하면서도 처절하기 마련인지라, 시청자와 관람객의 폭소를 유발하곤 한다. 왜 그럴까? 평소에는 우리가 그만큼 말하기와 보여주기를 동시에 자연스럽게 구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상의 방식을 동시에 결합해서 표현하는 행위, 즉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멀티미디어인 것이다.

보여주며 말하기를 지면이라는 공간으로 옮긴 것이 바로 그림과 글의 결합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림과 글의 결합은 글이나 그림 각각이 전달하는 바 이상으로 효과적이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가능하게 해준다. 하지만 얄궂게도 결합 자체에서 나오는 힘이 워낙 강한 덕분에, 단지 특정한 하나의 표현방식을 한없이 자세하게 파고들면서 표현의 정수를 찾아내고자 하는 일부 ‘고급예술’ 진영으로부터 저급한 것으로 핍박을 받기도 했다. 그 핍박받는 대상의 대표주자가 바로 만화인데, 그만큼 만화가 글과 그림의 결합을 통한 새롭고 효과적인 표현의 개발에 있어서 선두 역할을 해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보여주면서 말하기가 단지 보여주기와 말하기를 산술적으로 각각 합친 것 이상의 효과를 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선 ‘말하기’에 해당하는 문자언어를 살펴보자. 문자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인데, 지극히 표준화된 일련의 기호들의 조합으로 넓은 범위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문자를 ‘선들의 조합’이 아닌, 하나의 기호화된 문자로서 인식한다는 것 – 즉 독해력(literacy)이라고 부르는 기능은 정보전달의 효율성을 통해서 인류의 문화를 바람직하든 말든 간에 다음 단계로 올려놓았다. 지금 PC를 켜고 메모장을 열어서, 이 글 가운데 한 페이지 분량을 타이핑하고 저장해 보자. 대략 5-6KB 정도의 용량의 파일이 생긴다. 이제, 그 똑같은 내용을 출력해서 그것을 스캐너에 넣고 스캐닝을 하고, JPG 등의 그림 파일로 저장을 해보자. 읽을 수 있을 정도의 해상도로 저장하려면 아무리 못해도, 5-60KB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훨씬 큰) 파일이 생긴다. 즉 선들의 조합이 아닌, 하나의 기호로서 인식하게 될 때 정보의 전달은 훨씬 표준화되고 효율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1: 문자로 인식될때 소실된는 다양한 시각 정보] ⓒ맥클라우드

하지만 문자는 나름대로의 단점이 있다. 기호라는 형식으로 표준화시킨다는 것은, 그 만큼 미묘한 차이들이 사라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춘기 소녀의 연정이 담긴 예쁜 글씨의  러브레터도, 원고마감에 즈음하여 긴박하게 악필로 갈겨쓴 글도, 문자라는 차원에서는 내용 이상의 차이가 없다. 다시 말해서 미묘하고 풍부한 시각적 의미가 거세된, 내용만 남는다. 이러한 약점을 커버할 수 있는 것은 예전부터 그림의 영역이었고, 글은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글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는 부분, 즉 추상의 영역이나 수사학 등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림 역시 글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나 정서의 전달보다는, 시각적 실험에 집중했다. 즉 그림과 글은 자신들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일종의 분업관계로 발전해 나갔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분업은 주로 서양에서 일어났던 것이며, 동양의 경우는 시화라든지, 서예 등 글과 그림의 연결고리가 일정부분 돈독하게 유지되기도 했다). 글과 그림이 각자의 방향만 보고 달려나간 분업체제 하에서는, 두 가지가 점점 서로의 연결고리를 잃어갔다. 소위 고급예술은 각 매체의 가장 미묘한 가능성들이나 미학을 파고 들어가는 것 – 즉, ‘표현’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에 중독된 나머지, 모든 매체의 원래 목적인 효과적인 공유/교류라는 지점을 놓쳐버리는 경향이 생겨났다. 즉 가능성의 실험에 매진하다가 정작 실용성을 잃은 것이다.

이에 비해서 태생적으로 대중성을 기반으로 해왔던 만화라는 장르는, 정반대의 위치를 고수하면서 발달했다. 가장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 기존의 법칙이나 규율을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파괴해나간 것이다. 하나의 그림 안에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회화의 규율을 벗어던지고 여러 그림들을 연속시켜서 읽도록 만들었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림에 글을 삽입하여 활용했다. 미적인 아름다움으로서의 표상들이나 기법들보다는 효과적으로 형상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간략화된 카툰화법을 도입했고, 이러한 요소들을 때로는 한꺼번에, 때로는 하나씩 사용했다.

그림과 글의 접합 방식은, 현대만화에 이르러서 강력한 새로운 이정표들을 몇가지 맞이 했다. 단지 글과 그림이 병렬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문자 기호들이 그림 속으로 적극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양상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의성어/의태어 삽입이다. 의성어/ 의태어 삽입은 만화의 극중(diegetic) 공간의 한복판에 문자로 된 기호들을 넣는 방식으로, 현실공간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구상(具象)과 상징계의 공존을 만들어 낸다. 단적으로, 현실세계에서 자동차가 큰 소리를 내며 브레이크를 밟을 때 하얗고 큰 ‘끼이이익~’하는 글자들이 바퀴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자들이 만화 속에 나올 때 독자는 그것을 시각요소가 아닌, 청각 등 다른 감각에 호소하는 자극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은 우리에게 지금은 많이 익숙해져 있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너무나 놀라운 과정이다. 의성어로 쓰인 문자의 그래픽적인 배치에 따라서 화면상에서 그 소리의 음원과 방향 등을 나타내 줄 수도 있다. 나아가, 글자체, 크기, 크기변화, 필체 변화 등 수많은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서 그것이 표상하는 오감의 성질을 다양하게 규정지을 수 있다. 극중 공간 속으로 들어간 의성어/의태어는 문자이면서도, 필요에 따라서 그림으로서의 속성을 얼마든지 살려낼 수 있는 독특한 만화 표현 장치인 것이다.

[그림2: 말풍선의 유희적 활용] ⓒ끼노

두 번째는 바로 ‘말풍선’이다. 단순한 그림과 글의 병렬 – 예를 들어서 그림 밑에 글이 자막처럼 쓰여져 있는 방식 -을 넘어서서 말풍선이라는 기구가 발명된 이유는, 바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진행 묘사 때문이다. 말풍선은 극중 공간 속에, 그 공간과는 분리된 다른 차원의 별도 공간 – 즉, 언어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의성어/의태어의 경우 역시도 시각 세계와는 다른 것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연현상을 만들어 내는 기구다. 하지만 말풍선은 아예 현실의 감각영역이 아닌, 추상의 공간을 접합시킨다. 그리고 그 속에 극중 인물이 말하는 언어가 문자로서 표현이 된다. 하지만 말풍선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꼬리에 있는데, 그 것이 특정한 극중 인물을 가리킬 때 그 공간 속의 언어는 바로 그 인물의 것이 된다. 말풍선의 발명 덕분에, 만화에서 화자(話者)의 개념이 태어났고, 세부적이고 드라마틱한 서술이 가능해졌다. 말풍선은 극중 공간의 흐름을 크게 방해하지 않으면서 언어의 세계와 현실세계를 교묘하게 병존시킨다. 말풍선은 그림으로 묘사된 이야기 세계 속으로 언어를 끌고들어왔으며, 그 덕분에 소설 등의 다른 이야기 문학이 지금까지 이루어놓았던 업적들을 흡수할 수 있는 강력한 기반을 이룩했다. 또한 말풍선을 만들어냄으로서, 말풍선의 모양 그 자체를 이용하거나 말풍선의 안과 밖에 들어가는 언어를 차별화하여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아가, 말풍선은 ‘생각풍선’이라는 변형도 낳았다. 화자를 향한 꼬리를 일련의 동그라미로 처리함으로써, 만화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까지도 가볍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말풍선은 ‘언어’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만화라는 시각 매체 속에서는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라면 그 규정 역시 절대적이지 않다. 말풍선 속에서도 글자체, 글자크기, 크기의 변화에 따라서 말의 크기나 어감, 목소리, 속도 등이 대단히 다양하다. 심지어 그림의 요소들을 말풍선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언어의 공간과 그림의 공간의 경계선을 가볍게 허물어버리는 표현들도 등장한다. 그만큼 만화라는 양식에 있어서는 글과 그림의 혼합, 경계선의 월경 등이 필요에 따라서 자유롭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의성어/의태어, 말풍선 등 흔히 알려져있는 만화의 ‘보여주며 말하기’ 기법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들이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서 칸 경계선을 글자로 만들어서 그 칸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를 잡아주거나, 만화 칸의 배경을 자잘한 글씨의 글로 채워서 잡담같은 분위기를 만들거나, 아니면 칸 바깥의 공간에 글을 배치시킴으로서 그 페이지 분량에 해당되는 사건 전개 전반 위로 흐르는 거대한 나레이션으로 기능하게 하는 등, 작가의 의도에 따라서 다양한 표현을 주저없이 활용해볼 수 있다.

[그림3: 말풍선의 안과 밖] ⓒ카고 신타로

글과 그림이 이야기 전달을 위해서 결합하는 파트너쉽 관계에 관해서, 만화이론가 스콧 맥클라우드는 이 분야의 고전인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에서 몇가지 이분법적인 전제를 하고 있다. 우선, 이야기의 전달은 중심적인 상황묘사(줄거리)와 심화되거나 자유로운  표현방식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야기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역할을 그림이 맡아주면 글이 보다 넒은 영역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으며, 반대로 줄거리 묘사를 글이 맡아줄 경우 그림이 그만큼 실험적인 모험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만화에서 글과 그림이 결합되는 방식을 크게 7가지로 거칠게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

1) 글 중심: 글이 중요한 서술도구이며, 그림은 글에 대한 간단한 도해에 그친다.
2) 그림 중심: 그림이 중요한 서술도구이며, 글은 의태/음향효과에 그친다.
3) 이중 결합: 글과 그림이 같은 상황을 중복적으로 전달한다.
4) 첨가 결합: 글과 그림이 서로의 내용을 좀 더 강력하게 보좌해준다.
5) 병렬 결합: 글과 그림이 각각 일견 서로 무관한 내용을 보여준다.
6) 몽타쥬: 글이 그림의 일부로 녹아들어간다.
7) 상호의존적 결합: 글과 그림을 둘 다 독해해야 하나의 상황이 이루어진다. 

비록 애매한 범주이기는 하지만, 이 가운데 만화에서 가장 정교하게 발달시킨 것은 상호의존적 결합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글과 그림은 엄격한 분업관계가 아니라, 결합을 통해서 원래의 글과 그림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전개함에 있어서, 글은 그림과 역할분담이 자연스럽게 서로 섞여있다. 여기에 만화의 또다른 강력한 표현적 강점으로 꼽히고 있는, “상황 그림의 연속성”이 더해지면 그 효과는 더욱 무궁무진해진다.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 담긴 각 칸마다, 글과 그림이 만들어내는 균형이 조금씩 변형되고 흔들릴 때, 독자는 이야기속으로 하염없이 빨려들어가고 만다.

[그림4 : 명료함은 반드시 쉬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필링엄/수서

예술적 실험이 아닌 설명을 위주로 글과 그림이 결합할 때 나오는 가장 선명한 효과 가운데 하나는, 내용이 구체적이고 명료해진다는 것이다. 글과 그림은 서로의 의미를 확장시켜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제한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새가 날고 있습니다”라는 글과 결합되어 나오는 비둘기 그림은, 사람들이 글만 읽었을 때 상상할 수 있었던 새의 범주(독수리, 참새, 기러기 등)를 일거에 정리해버린다. 또한 글은, 그림 속에서 비둘기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 보도블럭 위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 아닌, 하늘을 날고 있다는 상황으로 규정한다. 속칭 ‘학습만화’로 불리우는 실용만화들의 높은 교육적 효과는 바로 이러한 특성에 기인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유의해야할 지점은, ‘명료함 = 쉬움’ 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설명대상에 대해서 핵심적인 개념 위주로 요점정리하는 것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그 핵심개념 자체가 저절로 커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리 깔끔하고 작게 압축해서 짐가방을 꾸린다고 할지라도, 짐의 무게 자체는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따라서 글과 그림의 결합을 통해서 내용을 명료화시키는 것은, 보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서술 방식을 통해서 내용을 풀어주는 것과 동행할 때 비로소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떤 학습만화는 머리만 아프고, 어떤 학습만화는 알찬 지식으로 다가오는 차이다.

***

여기까지 글과 그림의 창조적인 결합방식과 그 의미를 만화라는 양식을 중심으로 몇가지 살펴보았다. 애초에 만화학 개론을 강의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논의를 접고자 한다. 분명히, 다른 영역의 여러 표현양식들이 성공적으로 결합될때 일어나는 신비한 결과는 흥미롭다. 그것은 이야기와 정서, 생각들의 더욱 효과적인 전달을 가능하게 하며, 보다 깊은 의미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필자가 이 지면에서 하고 싶은 말은 단순히 만화라는 양식에서 만들어낸 개별적인 글-그림 결합 기술들을 참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만화라는 양식이 견지해온 자세, 즉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창조정신으로 매체간 벽을 허물고 넘나들 수 있다는 마인드 자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분과 학문이나 전통적인 형식구분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동원하고 결합시킬 수 있다는 자유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굳이 말하자면, “만화를 읽듯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것이 좋다”.

[그림5: 초보적인 글-그림 결합이 적용된 교과서] 

 

—- 2004. Copyleft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여성과 만화, 만화와 여성 [부산대 문화제 강연0310]

(원 출처: 2003년 10월, 부산대학교 만화문화제 길거리 강연)

여성과 만화, 만화와 여성

김낙호 (만화연구자, 두고보자 편집위원)
여성 지향의 만화

  만화와 여성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도 100명 중 99명 정도는(실제로 물어본 적은 없지만) 꽃발 흩날리면서 등장하는 캐릭터들, 하늘하늘한 몸매의 나름대로 미남미녀라고 그린 등장인물들이 닭살스러운 대사를 읊어가면서 로맨스를 펼치는 내용의 만화책들을 상상할 것이다. 그것도, 대답하는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말이다. 하지만 꽤 구체적으로 ‘여자 만화’라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이 박혀있는 것에 비해서, 실제로는 여성과 만화의 관련맺음을 이야기하기란 결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몇가지 추가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맨날 그런 만화만 볼까?” “그런 만화들이 정말로 여성의 감수성을 대변해 줄 수 있는거냐?” “남자가 순정만화를 보면 이상하냐?”…등등.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