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이름…

!@#…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그림책 ‘벽속의 늑대들’ (Wolves in the Walls)의 한국어판이 ‘벽속에 늑대가 있어’라는 제목으로 출간. 특히 무엇보다 바로 그 명콤비 작가들의 작품이니. 그런데, 한국어판의 저자 이름으로 떡하니 올라와 있는 이름에서 잠시 멈춤. 그림작가인 데이브 맥킨 Dave McKean이 작가 이름란에 안들어가 있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도 당혹스럽지만, 글작가인 닐 게이먼 Neil Gaiman의 이름이 또 가이먼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다. -_-; 이미 작가가 이전에 인터뷰에서 ‘게이’ 할 때의 그 발음이지 ‘가이’가 아니라고 명백하게 이야기까지 했건만, 한국에서는 참 줄기차게 가이먼이라고 읽는 사람들이 있다. 1998년 뉴스플러스에 연재된 세계만화탐사에서 성완경 교수가 가이먼이라고 오독한 이래로 끊이지 않고 누군가는 가이먼으로 읽어준다 (이것보다 더 오래된 참조 사례가 있으면 알려주시길). 심지어 소금창고에서 금붕어, 김영사에서 코랄라인(코랄’린’이라고 출간되었지만), 백양에서 트리스트란, 황금가지에서 환상문학 단편선, 그리폰북스에서 멋진 징조들을 명백하게 ‘게이먼’으로 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이먼으로 회귀했다. 번역자가 작가 이름 하나 제대로 조사할 필요를 못느끼고 대충대충 해버렸거나, 아니면 뭔가 이름을 반드시 ‘가이’로 해야하는 다른 사정이 있었거나. 게이를 죽도록 싫어하는 호모포비아라든지.

!@#… 하기야 이런 비슷한 원죄를 capcold 역시 한 가지 가지고 있다. ‘만화의 이해’의 작가로 유명한 스콧 맥클라우드 Scott McCloud를, 시공사에서 2001년에 ‘만화의 미래’ 책 번역할 때 스콧 ‘맥클루드’라고 표기해서 나가도록 한 것. 그 때 갈등했던 것은 이전에 이미 수년동안 돌고 있던 아름드리판 ‘만화의 이해’ 책에 맥클루드라고 오독되어 표기된 덕분에 국내에서는 정설이 되어버린 명칭을 이어가느냐, 아니면 버리느냐의 문제였다. 버리면 표기는 정확해지지만, 대신 같은 작가의 차기작이라는 연계성이 죽어버린다. 동시검색이 안되는 것도 물론이고. 그래서, 버렸다. 맥클라우드가 맞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맥클루드로 갔다. 그런데… 그게, 한번 그래놓으니 이듬해 ‘만화의 이해’를 시공사에서 재번역 재출간 작업할 때 또 어쩔 수 없이 맥클루드라고 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책 두권이 그런 식으로 나가버리니 여기저기서 인용되는 것도 다 루 투성이가 되어버렸다. 마르크스에서 맑스라고 정정해서 부르기 시작한 90년대 좌파들의 고뇌가 이랬을까 (농담). 덕분에, 만약 번역개정판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1단계로 바로잡고 싶은 숙원이 되어있다.

!@#… 여튼 꺼내고 싶었던 말은 이거다. 번역은 말만 옮기는 것이 아니다. 그 작품은 물론,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의 전부를 다른 언어권의 수용자층에게 소개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언어능력은 기본이고, 최고급의 해당분야 전문성, 그리고 끝없는 쪼잔함까지 요구되는 것이다. 그게, 과연 사람 이름이라도 제대로 읽을 줄 아는지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게 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경 안쓰고 넘어갈만한 일이겠지만, 누군가 한명쯤은 (예를 들어 capcold라든지) 그게 얼마나 쪽팔리는 일인지를 자꾸 꼬집어줘야 마냥 둔감해지지 않을 수 있겠지.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크리스마스입니다.

!@#… capcold.net을 방문한 모든 분들께 메리 크리스마스. 하기야 정작 미국에서는 요새는 종교적 색채를 지우고 모든 종교에 소속된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로 모아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즉, 열심히 소비에 소비를 거듭할 수 있도록 장려하기 위해) ‘해피 홀리데이즈’라고 인사말을 바꾸고 있는 분위기지만. 아예 산타절은 12월 6일로 분리해버리고, 25일 26일 양일간의 크리스마스에는 경건한 분위기로 가족과 함께 노는 독일같은 분위기까지 갈 필요야 없다고 치더라도, 너무 노골적이잖아. 하기야 오죽했으면 산타와 예수가 크리스마스의 맹주 자리를 놓고 화끈하게 맞짱뜨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이 대히트를 쳤겠나 (그 애니, 결국 방송사 사장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South Park’가 되었다). 하기야 어떤 나라에서는 아예 가족이고 자시고 박차고 나간 커플들의 명절, 제2의 발렌타인데이로 자리잡은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초부터 대충 게르만 연말축제에 맞춰넣은 날짜에 굳이 신성한 느낌을 받아야할 마땅한 정당성이 없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땅위에 평화 천상에 축복 정도는 서로 바래줄 정도의 여유는 부리는 것이 나을 터. 교회를 다니든 말든 간에, 뭔가 좋은 세상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명절이라는 컨셉 정도는 누구나 한번쯤 공유해도 좋지 않을까 한다.

!@#… 여튼, 본론으로. 옛날(이라고 해봐야 한 4-5년전)에는 이런 데스크탑메이트들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아하 플래시로 웹페이지들이 떡칠이 되기 전의 사람들은 이렇게 귀여운 짓을 하면서 놀았구나, 하고 역사의 흔적을 느껴보시길. 방문객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카드. 다운로드 후 실행하시길. [클릭]

그럼 모두들, 뜻깊은 성탄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 뜻이 뭐든지 간에.

밀워키 독일축제

!@#… 간만에, 그냥 돌아다닌 사진 포스트. 추운 계절을 맞이하여, 여름 사진이나 좀 올려볼까 한다. 올해 여름에 한번 다녀왔던 밀워키의 독일 축제(German Fest 2006) 현장. 알사람은 알다시피 독일과 적지 않은 인연이 있는 capcold인지라, 오랜만에 고향에 놀러온듯한 분위기 속에서 해피하게 즐겼던 행사. 여튼 적지 않은 양의 사진인지라, 살포시 접고 시작하자.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

[단상] 돈과 나: 소비와 정체성

!@#… 돈이 개입되면 ‘나’만 보인다. 최근 ‘사이언스’ 저널 (황사기 사건, 특히 KBS 홍사훈 기자의 일급 황빠질 덕분에 한국에서 일반인들에게도 무척 유명해진 바로 그 지면)의 뉴스란에 소개된 심리학 실험 논문의 결과다.

사이언스지의 기사 클릭.

!@#… 내용 요약하자면, 이렇다. 미네소타 대학의 Kathleen Vohs 교수와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을 데려다놓고는 한 그룹에는 다른 과제를 주어주기 전에 돈과 관련된 사전 자극을 주었다 (돈에 관한 에세이를 읽게 하든지, 여러가지 돈이 그려진 포스터를 보게 하든지, 기타등등). 그 뒤 퍼즐 풀기 과제라든지, 설문지 등을 풀게 했다. 그 결과 사전에 돈을 떠올리게 했던 그룹의 사람들은 과제 풀이에 있어서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경향이 더 강했으며, 타인과 대화하는 자리를 만들라고 하자 의자를 더 멀리 떨어트려 놓고, 설문지에도 혼자하는 활동들을 선호한다고 대답했다. 한마디로, 더 비사회적이 되었다는 것. 돈이 떠오르면 기를 쓰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초점이 가버린다는 결론 되겠다.

!@#… 그러고보니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유리에 은칠을 하면 거울이 된다고. 즉 돈이 개입되면 자신만 보이게 된다는 것. 동감이다. 돈이 단순히 물질적 축적의 의미에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옛날과는 다르다. 현대 사회라는 것에서 돈은 소비의 방식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역할까지 하니까 말이다. ‘I am what I eat’ 가 아니라, ‘I am what I spend‘다. 위의 연구는 아마도 돈과 사회성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 듯 하지만, 제멋대로 지엽적인 것에 관심가지는 capcold는 바로 이 소비에 의한 정체성이라는 측면을 떠올린다.

!@#… 원래 소위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라는 개념이 있다. 베블렌이라는 학자가 19세기 말 미국의 졸부들의 생활행태를 묘사하면서 이야기한 것으로, 그들이 소비하는 많은 것들이 생활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과시를 위한 소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생각, 하나의 다른 가설이 필요하다. 뭐랄까, 사람들은 흔히 과시의 대상을 남에게만 한정하곤 한다. 하지만 남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과시의 대상이라는 것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자기 주변의 남들과 페이스를 맞추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남들과 자신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정체성을 위해서 과시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에게도 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받으려는 행동이 같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부르디외의 문화취향 이론과 베블렌의 소비 개념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 활동은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다. 단지 물건이나 서비스 자체보다, 그것을 향유함으로써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라는 것이다. 커피의 맛 자체가 아니라, 비싼 아이스 후라푸치노를 먹는다고 남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벅스에 가는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언론학의 프레이밍 이론을 아주 멋드러지게 대중화시키고 있는 레이코프의 이론에서 사람들이 자기 이익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체성에 따라서 투표한다고 주장했듯, 사람들은 소비 역시 즉각적 효용보다는 정체성에 따라서 한다는 생각이다. 굳이 말하자면 스스로에 대한 과시인 셈이다.

!@#… 뭐 이런 이야기를 어디다 써먹을까. 예를 들어 마케팅. 제품의 우수성 어쩌고는 그냥 기본 전제로만 깔아야 할 따름이다. 이것을 소비하기에 바로 당신은 ‘어떤 사람’이다, 라는 접근, 바로 그런 컨셉이 명확해야 팔린다 (예: 애플의 아이팟). 단지 우수한 사람이다 잘난 사람이다라는 식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개성이 확립된다는 것. 이것을 하면 우수한 사람이라는 식의 성장지향 천민자본주의 마케팅도 물론 여러 분야에서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비슷한 레벨의 경쟁이 이루어질 경우, 또는 판이 전체적으로 망가진 경우, 또는 취향의 힘이 강력한 변수가 되는 문화산업 분야에서는 이런 정체성 소비가 한층 중요해진다.

!@#…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실 다른 곳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바로 성찰의 시스템. 남에 대한 과시라면 통제 불능이다. 사회의 성장 속도,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고 말라 죽으라고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순수학문(…-_-;)이나 성명서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과시의 경우, 성찰적 훈련을 통해서 일정 부분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발달시킬 수 있다. 즉 성찰의 인지적 훈련에 대한 단초가 되어주는 것이다. 내가 소비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소비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곧 나는 어떤 정체성을 지향하고 있으며 내가 취하고 있는 방법은 과연 합리적/효율적/심리적으로 만족스러운가라는 한층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돈, 즉 소비가 지니는 역할을 부정적으로 폄하하지 않고 현대적 정체성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현대사회 속에서의 성찰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 돈은 자꾸 ‘나’를 보게 한다는 연구가 나왔다면, 돈을 ‘나’를 돌아보는 도구로 사용해보자는 발상을 파고 들어가보자는 작은 생각이다. 나중에 뭔가 자료만 잘 뽑아낼 수 있다면 논문이나 써볼까… 아마 무시당하겠지만.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