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탐 전문 만화 –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기획회의 051215]

!@#… 이번 소개하는 것은 남자들의 항문섹*를 그린 만화로 먹고 사는 Y나가 씨를 한국에 초청해서 미식기행 시켜보고 싶은 충동이 들게 만드는 만화. 만화가 자신의 사사로운 잡담(?)을 하는 만화 중 이래로 최강.

————————————-

식탐 전문 만화 –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김낙호(만화연구가)

속칭 요리만화라는 장르가 있다. 보통 요리에 대한 대단한 전문가가 나오고, 신기에 가까운 대단한 요리들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요리는 단순히 그냥 먹을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정신’의 표현이다. 궁극의 꽁치초밥이 사실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장인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라든지, 소고기가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자세의 형상화라든지, 라면의 따듯함이 사실은 두 연인의 서로에 대한 마음을 이어주는 고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든지 하는 식 말이다. 보통 요리는 요리로 끝나지 않고, 인간사를 매개하기 위한 상징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계가 그 요리를 둘러싸고 결국 모두의 감동으로 해결되는 패턴이다. 일본의 <맛의 달인> 류든, 한국의 <식객>류든 공유하는 지점, 즉 요리 자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주제의 구현화라는 점 말이다. 맛있는 음식으로 결국 화해를 하고 하나가 된다니,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가. 재미도 상당하다.

그런데, 가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이거 너무 오버하는 것 아냐? 요리가 맛있다고 사람들이 다 행복해지고, 요리가 모든 인간사의 상징이라니. 요리라는 소재의 특성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너무 과도하게 끼워 맞추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한다는 느낌 말이다. 그리고 돌아서서 생각해본다. 요리에 우리네 생활이 어떻게 맞춰지는가가 아니라, 과연 우리들이 요리를 맛있게 먹고 다닌다는 것이 어떤 의미고 느낌이었는지 말이다. 인생사에 대한 훌륭한 상징체로서의 요리라는 개념따위는 그냥 낭비해버리고, 그냥 맛있게 요리를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시원스러운 작품을 보고 싶을 때가 오는 것이다.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요시나가 후미, 서울문화사)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속칭 ‘야오이’ 계열 남성 동성애물에서 지명도를 키우던 이 작가가 메이저에서 큰 주목을 받도록 한 작품 <서양골동양과자점>에서부터 그런 조짐이 뚜렷하게 보였지만, 소품인 <사랑이 없어도...>에서 드디어 아주 본격적으로 진가를 드러낸다. 요리가 인생사의 상징이고 장인정신이고 그런 가치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완전히 ‘먹는 자’의 입장에서 철저하게 접근한다. 인생이고 상징이고, 맛있는 것을 찾아 먹기에도 바쁘지 않은가. 과중한 의미 부여 그런 것 필요 없다. 맛있는 음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하다. 물론 무척 맛있는 것을 따지기 때문에 그냥 맛있다는 표현으로는 안되고 “척 보면 시고 짤 것 같은데 은근히 달콤하다구! 그리고 거기에 해산물의 감칠맛까지 더해지면! 맛있지? 맛있지?” 정도는 기본이다. 하지만 요리인의 장인정신이니 사연이니 그런 것은 솔직히 관심 없다. 이 식당이 이 요리는 기차게 맛있다, 정도면 충분하다. 식도락, 혹은 좀 더 친근하게 말해서 식탐이야 말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끼고 사는 진짜 즐거운 요리의 모습이다.

자, 그렇다면 식탐이란 무엇인가. 누군가가 “어떻게 하면 맛있는 가게를 많이 찾을 수 있어?” 라고 물어본다. 그 질문에 대해서, 작가는 극구 ‘픽션’이라고 주장하지만 누가 봐도 작가 자신을 자서전적으로 형상화한 주인공 “Y나가 F미”가 설명해준다. “이 보셔, 나는 일할 때랑 잘 때 빼고는 거의 하루 종일 먹는 것만 생각하면서 살아왔거든. 그리고 종류에 따라선 일할 때조차 먹는 걸 생각하고 있다고. 그만큼 먹는 데 일생을 바쳐왔으면 먹을 것도 나에게 얼마쯤은 보상을 해줘도 된다고 생각한다만”. 도대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인생의 의미부여도, 장인정신도 아닌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순수한 욕심이다.

<사랑이 없어도...>는 식탐으로 가득한 만화다. 인생사를 말하기 위해서 요리를 동원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실상은 요리 소개가 주가 되는 여타 요리만화와는 다르다. 인생사는 인생사고, 그 인생사를 사는 사람들이 식탐을 부리면서 생활하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사에 대한 이야기가 부실한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주인공 Y나가를 비롯, 주변의 어딘가 모자라면서도 서로 아귀가 잘 맞는 인물들이 펼치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는 행위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요리 자체보다는 요리를 맛있게 즐길 줄 안다는 식탐의 존재 또는 취향이 바로 이들 인간들의 사연들을 묶어주는 진짜 고리다. 요리를 먹으며 엉뚱한 사랑을 꿈꾸고, 게이로 커밍아웃한 옛 친구와 감정을 나눈다. 이러한 인간관계에 대한 묘사는 이미 이 작가의 전매특허인 직접적이면서도 함축적인 대사와 섬세한 표정 연출로 만만치 않은 깊이를 자랑한다.

만화의 형식은, 8페이지짜리 에피소드들의 모음으로 되어있다. 8페이지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들어가고, 그것을 중심으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사연과 상호 관계가 살짝 드러나고 진전된다. 식당은 실제로 일본 도쿄에 있는 식당이라서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나고 나면 가게 소개가 한 페이지 붙는다. 덕분에 이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식당은 실재한다는 권두 안내문이 한층 재밌는 울림을 준다. 이외에도 그림체는 평소 동일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훨씬 설렁설렁 가벼운 선으로 그렸으나, 요리를 묘사할 때만큼은 대단한 집중력을 발휘해서 정말 침이 꿀꺽 넘어갈 정도로 독자들을 유혹하는 능란함을 보인다.

물론, <사랑이 없어도...>는 워낙 소품이다 보니 농밀한 기승전결 또는 확고한 엔딩 등의 드라마틱한 요소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극적 요소를 살짝 첨가한 생활일기에 가까운 셈이라서 다른 요리만화들에서 익숙해진 화려한 대결구도와 뜨거운 감동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하지만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는 것의 즐거움을 아는 독자, 또는 하다못해 단지 한밤 중 출출할 때 자신의 빈 속을 한번 학대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추천할 수 있는 멋진 작품이다. ***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사회를 통찰하는 유머 – <페르세폴리스> [기획회의 051129]

!@#… 이전에도 다른 글로 지적한 바 있고 이번 본문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한국어판의 번역 품질은 좀 개선의 여지가 많다. 이 작품 특유의 일상성과 유머러스함이 상당히 많이 뭉개지니까. “Russians are not like us” 라는 대사를 “러시아인은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단다”(불어판이 아닌, 영어판에서 중역을 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라고 쓴 것은 그나마 아예 명백한 오역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여튼 전문 번역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주는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

사회를 통찰하는 유머 – <페르세폴리스>

김낙호(만화연구가)

사회라는 생물은 복잡하고 거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번에 사회의 전모를 객관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특히 사회를 읽어내고자 하는 사람이 그 사회 속에 들어있다면 더욱 더 시야와 세계관이 한정되기 마련이다. 사회학자들이든 작가든 혹은 단순히 일상을 영위하는 일반인이든 누구나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거꾸로, 시각이 제한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을 애초부터 당당하게 내세우고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소설 등으로 대표되는 서사극에서 그것은 ‘1인칭 작가 시점’이라는 것으로 구현된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는 그 상황 속에 처해있는 어떤 사람의 주관적인 경험담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를 읽어냄에 있어서 전모는 커녕 일반인 수준의 파악도 되지 않는 사람의 주관적 시각이라면 어떨까. 우매한 자의 눈, 즉 일반적인 남성 성인 주도의 사회 속에서는 사회적 역할이나 지식이 한정되어 있는 주부, 아이, 바보 등의 시점 말이다. 비록 이야기 속 상황을 읽어냄에 있어서 대단히 답답한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우매한 자의 눈’은 매력적이다. 우매한 자의 눈으로 보면 사회 속 우리가 일상적으로 영위하면서 살아나가는 과정이란 참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것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일반인’인 독자들은 처음에는 그 괴리를 보면서 유머와 아이러니의 재미를 느낀다.  그런데 사실 약간만 생각해보면, 우매한 자의 눈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이 사회는 말도 안되는 것들 투성이인 것이다! 약자의 입장에서 사회적 통찰로 이르는 이 과정 속에 독자들은 거부감 없이 쉽게 녹아들어간다. <포레스트 검프>, <케빈은 열두살>, <양철북>,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등 많은 이야기 작품들이 우매한 자의 눈을 성공적으로 활용해왔다.

일상과 커다란 사회적 흐름이 맞닿아 있는 이야기에서, 이 기법은 더욱 빛을 발한다. <페르세폴리스>(마르잔 사트라피 / 새만화책 / 1권 발매중)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 놓여있는 수작이다. 현대 이란이라는 사회가 있다. 물론, 서울에서 가장 땅값 비싼 곳 가운데 하나가 무려 테헤란로라고 이름 붙인 것과는 달리, 이란에 대해서 한국에 알려진 바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작품을 보면서 파악할 수 있듯 독재정권과 민주화 운동, 짧은 해방감과 근본주의 진영의 반동에 의한 독재 재개, 이웃나라와의 전쟁, 미국의 개입… 순서와 패턴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유사한 현대사의 재료들을 가지고 만들어진 곳이다. <페르세폴리스> 1권은 이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꼬마 마르지, 즉 작가 자신의 자전적 체험담이다. 여자 아이의 우매한 눈을 통해서 바라보는 현대사의 격변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여러 모순과 함의, 그리고 희망들이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게, 그냥 일상적으로 펼쳐진다.

주인공 마르지는 비록 진보적 성향의 집안의 딸이지만 여하튼 꼬마인 덕분에 사회주의, 종교근본주의, 민주주의 같은 담론 덩어리들도 고뇌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일상 속의 피상적 표어들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삶은 직접적으로 영향 받는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가 그러했듯, 정작 감동적인 것은 실제로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인 것이다. 그 삶 속에는 사회운동가 아누쉬 삼촌의 이야기, 폭격으로 사라진 친구 이야기 같은 무거운 순간들이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의 인기 여성 락커 킴 와일드의 포스터를 밀수해 들여오고 이웃끼리 술파티를 벌이는 즐거움의 순간들도 있다. 조숙하고 활달한 꼬마 마르지의 행동들, 그리고 그 순간을 지금 자신의 눈보다는 어린 시절의 우매한 눈으로 회상하는 작가 사트라피의 유머감각이 함께 녹아들어가면서 작품은 유머와 진지함, 품격과 발랄함을 얻어낸다. 그 속에서 자유와 억압, 생활과 이념, 격변기 이슬람 세계 속 여성의 위치, 중동과 서방세계의 문화적 관계 등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틀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만화로서의 연출 효과 역시 큰 매력이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 그리고 프랑스 만화가 다비드 베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간결한 흑백 그림체는 아이의 눈과 사회의 복잡함이라는 추상적 느낌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가끔 칸 내에서 화려한 미장센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칸 간 연출의 기본은 쉬운 독서가 가능한 명료한 스타일을 따른다. 많은 부분에서 아이의 언어를 바탕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서구만화 특유의 장황한 대사와 나레이션의 압박 역시 상대적으로 덜하다. 사회적 텍스트로서, 재미있는 이야기로서, 효과적인 만화 표현으로서 모두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인 셈이다.

확실히 이런 우수한 만화가 소개되어 들어오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에는 번역 문제에서 다소 만족스럽지 못하다. 물론 1권의 부제인 ‘어떤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내 어린 시절 이야기’로 번역되어서 한 사회를 바라보는 이야기인 이 작품의 의미를 한 개인의 특이한 경험담으로 축소하는 등의 미묘한 차원의 실수는 그냥 아쉬움으로 남길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품의 핵심적인 매력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모스크바’ 에피소드의 첫 대목이 대표적이다. 원래는 마르지가 데모하다가 잡혀가서 고문을 당한 경험이 없는 아빠를 둔 자격지심 때문에, 학교 친구들에게 자기 아빠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허풍을 떨고 아이들은 그 허풍이 너무 심해서 기가 질리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진짜로 운동하다가 투옥되고 고문당한 삼촌 야누쉬를 알게 된 후 그것을 자랑해도 친구들이 여전히 허풍이라고 생각하는 부분과 댓구를 이루며 훌륭한 유머감각을 발휘한다. 하지만 번역판에서는 오역으로 인하여 이런 내용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에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매한 자의 눈으로 만들어지는 역설과 유머를 통해서 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이 작품의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사례다. 만화라는 장르가 꼭 유머라는 고정관념에 매몰될 필요는 없지만, 반대로 작품성 있는 만화라는 이유만으로 유머라는 큰 매력이 억지로 거부당해야 할 이유도 없을 터인데 말이다. 2판부터는 이러한 지점들이 잘 수정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또한 이란 사회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무지를 고려할 때, 역사 문화적 맥락을 설명해주는 해설이 첨부되었더라면 하는 바람 역시 간절하다.

<페르세폴리스> 1권의 결말에서 사춘기의 나이로 프랑스로 유학을 간 마르지는, 2권에서 서구 생활의 풍파를 겪은 후 다시 이란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사춘기에 들어선 그녀는 이미 더 이상 아이의 우매한 눈이 아니라 성숙한 성인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이번 출간된 1권의 매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세폴리스>는 ‘사회성과 작품성이 있는 서구만화’의 왕좌를 오랫동안 지켜온 <쥐>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멋진 작품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것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경이와 초월성에 관한 우화 – 충사(우루시바라 유키) [기획회의 051115]

!@#… 애니 시리즈 일본 현지 방영 및 실사영화화 계획 발표 기념으로.

=============================

경이와 초월성에 관한 우화 – 충사(우루시바라 유키)

김낙호(만화연구가)

오만하게도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생물인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과제, 즉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지극히 제한된 지능과 인식의 폭을 넘어서는 사건에 마주칠 때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붙여서 설명을 해내곤 했다. 밤에 숲에서 소리가 나면 누군가의 유령이 돌아다니는 것이고, 착하게 살아가고 있는데도 온갖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은 평가와 보상을 중요시하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시련이다. 모든 것은 어떤 인격화된 주체의 행위의 결과다. 그리고 그 주체가 어떻게 해서 그런 대단한 일들을 벌일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그들을 초월적인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적당히 넘어가지만, 최소한 그 누구 또는 무엇인가가 어떤 특정한 이유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하고, 그 결과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지극히 쉽게 이해 가능한 명제를 만들어낸다. 굳이 무신론을 설파하며 모든 초월적 존재들을 덮어놓고 부정해야할 필요는 조금도 없지만, 그 초월적 현상들을 인식하는 방식 그 자체는 분명히 인간의 발명품이다. ‘신’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신을 인격화시키는 것은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화권에서는 유일신을, 어떤 문화권에서는 다양한 층위와 관계망으로 엮여진 신적 존재들을, 어떤 문화권에서는 모든 사물에 깃든 영령을 초월적 현상 속에서 인식해 낸다.

<충사>(우루시바라 유키, 대원CI / 6권 발간중)는 초월적 현상들을 다루는 에피소드들로 엮여진, 환상 기담이다. 원래 국내에 4권까지 출간되었다가 출판사가 만화사업을 접는 바람에 후속편을 기다리던 독자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작품인데, 몇 달 전부터 출판사를 바꾸어 재출간되기 시작하여 최근 후속편들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키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 오토모 가츠히로가 연출을 맡아서 실사 영화판을 제작하겠다는 발표가 있었고, 또한 얼마전 일본에서 방영을 시작한 애니메이션 TV 시리즈 역시 작품의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연출해냄으로 시청자들에게 큰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작품의 성향 자체는 정작 지극히 평온하고 사색적인 기담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작품의 구성은 비교적 전형적이다. 기이한 현상이 있고, 그런 현상들을 다루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작품의 진짜 주역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기이한 일 그 자체,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삶의 한 단면이다. 따지고 보면 전설의 고향부터 엑스파일까지 수많은 기담들의 기본 형태인 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유령이나 혼백이나 신적 존재라든지 하는 등 지금껏 동서양 문화권에서 흔히 접해온 설명들과는 살짝 다른 해석을 내리며 세계관을 구축한다. 그것이 바로 ‘벌레’인데, 작품 속 설명을 인용하자면 이런 식이다:

“…이 손가락 네 개가 동물이고, 엄지가 식물을 표시한다고 하면? 사람은 여기, 심장에서 가장 먼 중지의 끝부분 쯤에 있겠죠. 손바닥의 안쪽으로 갈수록 하등한 동물이 되는 거죠. 점점 밑으로 내려가 손목부분에 이르면 혈관이 하나로 되어 있잖아요. 여기에 있는 것이 균이나 미생물이고, 이 근처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동물과 식물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지죠. 하지만 더 나아가, 손목을 거슬러 올라가 어깨를 지나서 심장에 가까운 부분에 있는 것을 바로 ‘벌레’라고 부릅니다.” (1권, ‘녹색의 좌’)

‘벌레’는 생명 그 자체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들, 형태와 존재 방식조차 지극히 모호하며 너무나 다양하게 뻗어있는 어떤 것이다. 소리나 빛을 먹고 사는 것도 있고, 인간 형태로 유령처럼 존재하는 것도 있고, 문자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형태로 보존되는 것도 있다. 벌레는 거대한 초월적인 의지 즉 신이기 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나가는 생명 그 자체다. 인간세상을 조종하고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들의 방식으로 살아갈 따름이다. 물론 각 에피소드의 이야기는 벌레의 생활로 인하여 인간 세상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그것을 해결해 나아가는 과정이지만, 그것은 혼령의 한을 풀어주는 무당의 푸닥거리도, 분노한 자연의 신령을 달래어주는 제의식도, 신에게 믿음을 회복하는 신성한 과업도 아니다. 약간은 경험의 축적으로 인하여 알고, 더 많은 부분들은 여전히 이해영역을 벗어난 존재들로부터 나름대로 인간의 생활방식을 지켜내는 것에 불과하다. 벌레는 오염된 인간문명에 대한 대자연의 복수가 아닌, 그냥 이 세상의 일부다. 즉 인격화되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초월적 존재인 것이다. 벌레라는 명칭은 이런 속성에 대한 지극히 역설적인 간판이 되어주는 셈이다.

주인공 긴코는 충사, 즉 ‘벌레’전문가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다른 충사들보다도 더욱 더 벌레를 퇴치하기보다는 그냥 살짝 사람 사는 집에서 쫓아 버리는 방식을 취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대한 경이를 잊지 않은 진정한 방랑자다. 강한 자의식으로 독자를 억지로 감정 이입시키지 않고, 한발짝 물러서서 초월성의 경이와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 인간세상의 모습들을 담담하게 구경시켜주는 역할이다. 그 덕분에 눈꺼풀을 감아도 오지 않는 진정한 어둠에 대해서 알게 되며, 무지개를 쫒듯 근원적 생명에 홀린 방랑자를 만나기도 하고, 몸 안에 들어온 벌레와 공존하기 위하여 벌레의 모든 것을 글로써 적어내야 하는 기이한 사연(명백히, ‘작가’라는 직종에 대한 알레고리다)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관찰자적 자세는 시각적 묘사에서부터 뚜렷해지는데, 아직 근대화가 오지 않은 듯한 전통적 일본 시골 산하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유일하게 긴코만이 기모노가 아닌 티셔츠와 바지 차림이다. 물론 등장인물 중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주인공 캐릭터 자체에 거리감을 부여하는 재미있는 장치로 작용한다. 인간과 자연을 묘하게 섞어 넣는 거친 그림체와 현실과 몽상의 경계가 수시로 무너지는 칸 연출 역시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물론 기담 장르가 원래 그렇듯 반복적 패턴이 계속되다보면 결국 서서히 경이로움이 감소하는 점이라든지, 반대급부로 긴코의 캐릭터성이 점차 부각된다는 점 같은 점은 대표적인 한계다. 출시된 한국어판의 경우 원작의 시적이고 고풍스러운 어감을 효과적으로 번역해내지 못한 점도 만화번역에 대한 빈약한 질적 투자를 증명하는 듯하여 아쉽다(그나마, 이전 출판사의 경우는 아예 말 자체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오역 투성이였다).

충사를 읽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고 그것과 함께 살아간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 바로 진정한 경이를 회복하는 여정이다. 한번쯤 홀려볼만한 멋진 독서 경험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낭만주의 – <위대한 캣츠비> [기획회의051030]

!@#… (이미 다 넘어간 후 반성문)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처럼, 캣츠비는 사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원작으로 하거나 특별히 구체적인 모티브를 빌려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리뷰 본문에서 언급했듯, 일정 부분 기본설정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굳이 개츠비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만큼 그 ‘낭만’의 공식이 지극히 원형적인 모티브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건데, 다시 읽어보니 그 이야기를 참 애매하게 풀어냈다는 점을 깨닫고는 후회중. -_-;

==========================

낭만주의 – <위대한 캣츠비>

김낙호(만화연구가)

‘위대한 개츠비’라는 미국 소설이 있다. 영미권 문학의 나름대로 걸작으로 칭송받는 작품이지만, 사실 필자에게는 ‘맨 온더 문’이라는 영화에서 짐 캐리가 분한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이, 자신의 코미디 쇼를 보러온 관객들 앞에서 뜬금없이 하루 종일 걸려서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을 함으로써 황당한 물의를 일으킨 그 소설로 더욱 기억에 남아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대충 이렇다: 가난한 농부집안 출신의 개츠비라는 청년이 있다. 그는 데이지라는 상류층 처자와 서로 좋아한다. 그런데 아뿔싸, 이 사람이 군대에 끌려가 있는 동안에 데이지는 부자집 남자와 결혼해버린다. 그래서 수단방법 안 가리고 자기도 부자가 된다. 돈으로 데이지에게 당당해진 개츠비. 하지만 데이지는 부자남편의 정부를 자동차로 치어죽이고 개츠비가 죄를 뒤집어 쓴다. 결말까지 폭로하자면(설마 이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에도 누설방지 유통기한이 적용되지는 않으리라 보고), 개츠비는 결국 죽은 여자의 남편 총에 맞아 죽어버린다.

한눈에 봐도 알아볼 수 있겠지만, 이 공식은 한국 환경으로 그대로 옮겨도 사실 전혀 위화감이 없다. 신분의 차이, 오기에 찬 물리적 조건 극복, 그 속에서의 인간성 상실, 하지만 단 하나의 가치를 위하여 결국 비극적 희생. <공포의 외인구단>을 위시한 수많은 비장미 넘치는 80년대 극화체 만화들이 흔히 써먹었던 기본구도다. 그래서 고전인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언제라도 한국으로 번안된 개츠비 이야기가 인기 연재 만화로 등장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은 당연하다. 아니나 다를까, 온라인에서 <위대한 캣츠비>라는 만화가 연재를 시작했다고 한다. 아하, 내용은 “안봐도 비디오”겠구나. 결과는? 부자와 결혼해버리는 여자, 별 볼일 없는 주인공, 시대 속에서 꼬이는 사랑이 이야기 전체의 원동력이라는 정도의 기본설정이 공통점. 하지만 화려한 활극의 느낌마저 있었던 개츠비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쪽의 주인공 캣츠비는 훨씬 더 구차하고, 소심하고, 끝까지 별 볼일 없는, 그냥 어떤 참 운명이 꼬인 현대 한국의 궁상 백수 청년의 사랑담이다.

최근 연재종료를 맞이했고, 종이 단행본 2권이 출간된 온라인 만화 <위대한 캣츠비>(강도하/애니북스)의 연재 당시 인기비결은 무엇일까. 에피소드 중심으로 끊어지기 쉬운 온라인 만화에서는 아직 비교적 희귀한 쪽에 속하는, 장편 연재물이라서? 확실히 그런 측면도 있다. <슬픈나라 비통도시>같은 모음집에서 볼 수 있는 강도하, 또는 강성수라는 작가의 거칠고 실험적인 – 즉 독자들과의 소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 기존 작품성향을 보면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이 작품은 정제되어 있는 드라마적 투르기와 독자의 관심을 고조시키는 연출과 끊어내는 타이밍 등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시각적 표현 역시, 모든 주인공을 의인화된 동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만화적 표현의 재미’를 부여하면서도(하지만 뚜렷한 상징체계를 느끼기는 힘들다), 대단히 세밀하게 감정선을 따라가는 배경 구도와 풍부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표정묘사로 눈길을 집중시킨다.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주인공들의 감정 상태를 배경 또는 소품의 묘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연출을 너무 남발해서 부담스러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몰입하는 독서를 완전히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심지어 온라인 연재 당시에는 스크롤의 기본문법을 따르는 칸 연출을 하면서도, 종이책으로 출간하면서 그것을 전통적 의미의 종이만화의 칸 배열로 완전히 재편집하는 노력을 투자하는 등 한마디로 세심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분명히 시각 연출이든 이야기 연출이든, 표현적인 측면에서 <위대한 캣츠비>는 우수한, 최소한 독자들에게 지극히 성실한 만화다.

하지만 역시 그런 기술적인 완성도만으로 만화가 공감대를 자아내는 것은 그다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생활 묘사가 리얼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아 그래, 내 생활도 그렇지” 하는 마음을 품게 할 정도로 주인공들의 일상 생활 모습 자체에 통찰력을 집중한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리얼한 환경묘사와 달리, 생활은 솔직히 그다지 리얼하지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백수생활의 리얼함이라면 고리타의 <룸펜스타>같은 개그만화가 한 수 위다. 아니 사실 그다지 일상적이지 않은, 꼬일대로 꼬인 치정극 이야기가 훨씬 더 작품 줄거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대와 인기를 끌어낸다면 무언가 다른 좀 더 근본적인 덩어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루어지는 사랑과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엇갈리는 우정? 글쎄. 발랄한 여자와 불행한 여자, 발랄한 남자와 궁상맞은 남자의 캐릭터성? 글쎄.

오히려 열쇠는 작가가 스스로 누차 강조하듯이 ‘청춘의 아픔’이라는 엄청나게 구식 느낌을 주는 창작의 변에서 찾아야 할 듯 싶다. 사랑이 존재방식이 되는, 그리고 사랑의 꼬임이 존재의 흔들림으로 이어지는 가히 근대 독일 문학을 연상시키는 이런 고전적인 접근이 다시 복고풍으로 트렌드를 맞추어 냈다는 것인가. 고전적이고 다소 남성 편향적인 청춘의 고뇌에 대한 과잉된 환상이 2000년대 독자들의 취향과도 일치한다고 생각하기는 좀 섣부를 것 같다.  글쎄. 그보다, 애초에 사람들은 그 취향에서 크게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합할 것이다. 지난 수년간을 강타했다가 최근 좀 거품이 가라앉은 감성파 에피소드 만화, 속칭 ‘에세이툰’의 히트를 기억해보면 더욱 그렇다. 한국에서 대중문화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더욱 세련되고 쿨한 것을 소비(!)하도록 종용하고 있지만, 진짜 ‘취향’이라는 것은 소비 트렌드만큼 빠르게 바뀌지 않는다. 아니 소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오히려 더욱 공고하게 원형적인 것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그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은? 소재와 표현은 세련되게, 알맹이는 오히려 더 고전적으로. 예를 들자면 결국 비극적 인간관계 사건들이 꼬리를 물지만 여하튼 사랑이 존재의 원동력이다, 뭐 그런 방식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캣츠비>는 80년대적 비장미 성인극화와 2000년대적 에세이툰 부류의 이종교배에 성공한 셈이다. 나머지는 그냥 연출 표현을 위한 양념일 뿐이다. 작품의 장점도 단점도, 개별 독자들의 취향에 맞고 안 맞는 것도, 이 틀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듯 싶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여하튼 먹고 사는 생활 – <습지생태보고서> [기획회의051016]

!@#… 앞으로는 여기에 글을 올릴때 기본적으로 본문중의 작품에 링크를 걸어서 구매 사이트와 연결되도록 할까 한다. 어디가 가장 좋을까? 리브로? 예스24? 이왕이면 나한테 적립금도 쌓이는 곳이면 더 좋고. (과연 몇백원쯤 쌓이기는 할것인가? -_-; )

!@#… 하지만 마지막회의 희망찬 메시지는 좀 닭살이다. -_-; 전체 분위기에서도 튀고. 하지만 책소개 비평글에서 엔딩에 대한 스포일러를 넣는 건 역시 범죄겠지(식스센스는 아니지만);;;

====================

여하튼 먹고 사는 생활 – <습지생태보고서>

김낙호(만화연구가)

판도라의 상자라는 그리스 신화가 있다. 신들이 인간 세상의 여러 근심걱정들을 상자에 봉인해놨는데, 어떤 호기심 많은 처자가 그것을 칠칠치 못하게 열어버린 덕분에 그것들이 인간세상으로 모두 뻗어져 나왔더라, 라는 이야기다. 그 후 수 천년 동안, 갖가지 인간들이 그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 교훈들을 나름대로 주장하곤 한다. 어떤 이들은 그래 역시 호기심이 문제의 근원이야, 라고 이야기하며 무지의 행복을 설파하곤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왜 자꾸 그리스 신화고 기독교 창세기고 간에 여자들이 호기심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하고 난리인가, 라고 XY염색체 소유자들의 역사 깊은 남존여비의 반증으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가장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교훈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과 관련되어 있다: 걱정이니 질투니 노환이니 하는 오만가지 인간사의 부정적 문제들이 우루루 다 쏟아져 나온 뒤, 상자 맨 아래에 몰래 있던 마지막 하나. 바로 ‘희망’이라는 녀석이 남아있었기에 결국 아무리 험난한 세상이라도 희망을 가지면 대략 살만하다는 나름대로 낙천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모 영화에서 열심히 설파한 “카르페 디엠!(오늘을 불잡아라)” 하는 교훈을 훨씬 더 좋아하는 필자로서는 좀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지만, 오랜 인류역사 속에서 여러 사람들을 감동시킨 듯 하니 나름대로 인정해 주기는 해야 하겠다. 

최근 출간된 <습지생태보고서>(최규석 / 거북이북스)에는 이런 희망에 대한 약간 다른 접근, 좀 더 현실적인 접근이 담겨있다. 따지고 보면 굳이 희망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낙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보람찬 것이다. 현실의 무게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공상으로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무게 그대로를 여하튼 짊어지고 가야할 대상이다. 익숙해지면 좌절 같은 것은 굳이 할 이유가 없다. 갑자기 해탈의 경지를 논하고 있는 것이냐고? 해탈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당장 우리들의 일상이고 생활이다. 그것을 만화적 재미라는 양념을 쳐서 살짝 직면시켜주는 작품인 것이다. 이미 전작인 단편집 <공룡둘리>를 통해서 남루한 현실의 무게와 만화적 표현력의 재미를 효과적으로 실험해온 작가다운 행보다.

<습지생태보고서>는 <경향신문>의 만화 전문 주간 섹션에서 연재되었으며, 디씨갤러리를 통해서 인기를 모으는 등 이미 연재 당시부터 팬층을 결집시켰던 작품이다. 내용은 한 방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네 명의 그다지 풍요롭게 생활하지 못하는 대학생들과, 이런 방 일수록 하나쯤 생겨나기 마련인 빈대 식구 한명(한 마리?)의 생활 속 에피소드들이다. 아하, 대학생들의 청춘의 고뇌와 우정이 다루어지겠구나, 어쩌면 연애 문제, 취직 걱정 등이 소재로 들어가겠구나, 라고 대충 머리 속에 그려질지도 모르겠다. 사실, 실제로 이 모든 것들이 이 작품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 모든 것들 위에 서있는 중요한 대 전제가 이 작품에서는 무척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먹고 사는 것”이다. 방세도, 학비도, 식비도 모두 먹고사는 문제로서 해결을 해야 할 대상이다. 자취생활의 여러 습관들은 여타 작품에서처럼 단순히 하나의 ‘취향문화’ 처럼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겨울 난방을 하면 등은 타고 코는 얼어 붙는 옥탑방을 무슨 ‘펜트하우스’ 처럼 묘사한 <옥탑방 고양이> 같은 드라마가 좋은 예다), 진짜로 먹고 살기 쓸 돈 빼면 따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만들어진, 생활의 때가 묻어있는 패턴들이다. 단순한 포장이 아니라 살아가는 필연적인 방식인 ‘생태’이며, 그 곳은 폼나는 양지도, 위악적인 어둠과 비참함의 음지도 아닌, 적당히 구질구질한 ‘습지’다.

시각적 묘사에 있어서도 이 작품은 탁월하다. 남루함이 과장되지 않게 묻어나는 ‘습지스러운’ 생활 공간과 사람들을 제대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대체로 극화체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지나친 기교나 딱딱함을 배제한 화풍, 그리고 원색의 화려함이나 파스텔톤의 감상주의를 모두 비껴난 탁한 질감의 컬러링 등에서 드러나는 필력 역시 이야기의 내용과 좋은 조화를 이루어주고 있다. 페이지 연출에 있어서 아직 4페이지 단위라는 짧은 호흡에 익숙하지 않은 듯 마무리 임팩트 타이밍이 슬쩍 어긋나는 에피소드도 초반에 더러 있지만, 작가의 첫 고정 연재작이라고 도저히 보기 힘들 정도로 이내 능숙한 페이스를 찾아나간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생활만화다. 하지만 생활 속 감상을 적당히 감상주의적으로 포장한 소위 ‘에세이툰’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이 작품은 4페이지짜리 짧은 호흡으로 에피소드를 구성하며 (나름대로) 개그 만화다. 그런데 <츄리닝>이나 <트라우마> 같은 다른 히트 ‘넌센스반전패러디개그만화’들과는 뭔가 방향이 많이 다르다. 남루한 현실이 들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얼리즘과 비극으로 점철된 작품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래도 생활 속 위트와 히트급 개그와 현실적 공감대로 가득하다. 그 이상한 원동력은 바로 솔직함이다. 풍족하지 못한 자취생활이지만, 솔직하게 그렇게 궁하게 그냥 산다. 하지만 폼나는 것들을 한번 걸쳐볼 기회가 생긴다면, 비굴해질 필요도, 마다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낙관적으로 실실거리는 따듯한 낭만이 살아 숨쉬어야할 대목이 올 듯 하다가도, 당장 이번달 생활비를 계산해봐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처음에는 주인공 최군의 복잡한 머리 속과 다른 3명의 괴짜 룸메이트들의 티격태격 거림 속에서 주로 표현되다가, 나중에는 숫제 현실의 비열함과 욕망을 응축시킨 전용 캐릭터의 등장으로 더욱 고조된다. 자취방의 제 5의 주민, 작품 자체의 흥망과는 별개라도 대형 히트를 기록함이 마땅한 걸작 의인화 사슴 캐릭터 ‘녹용’이 바로 그 존재다. 가장 비현실적이고 나름대로 희망찬(?) 외모를 지닌 녹용이, 나름대로 낭만과 감성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현실의 무게를 줄이며 희망을 이야기해보려는 주인공들에게 차가운 현실을 깨우쳐주곤 한다. 최소한의 비굴함도 미안함도 없이, 생활의 사사로운 욕망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또 룸메이트들에게 그 교리를 설파하는 명언 제조기인 셈이다. 단지 현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뜬금없을 만큼 솔직하게 던져준다는 것, 그것이 유머의 원천이고 공감대의 핵심이다.

판도라의 상자가 주는 진짜 교훈은, 불확실한 미래형인 ‘희망’이라는 것 정도만으로도 그 많은 삶의 고난들을 마음 속에서 억지로 상쇄시켜버릴 정도로 인간의 사고회로가 멍청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삶이 아름다운 것은 찬란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여하튼 살아갈 만 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습지’는 반지하 단칸 자취방이 아닌,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바로 이곳 이 공간이다.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성인들의 이야기 – <느티나무의 선물> [기획회의051003]

!@#… 사실을 고백하건데, 나는 지로 다니구치의 만화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한다는 건 아니고, 그의 만화들이 만화로서 우수하다는 것 역시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 가족관계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향수, 따듯한 인간애로 세상의 모순마저도 통째로 덮어버리는 박애정신은 capcold의 코드에 적잖이 거슬린다. 연출 측면에서도 만화적 공간구성의 장점들을 살리기보다는 ‘영화적’ 미장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너무 틀이 꽉 짜여져있다. 하지만… 중년 (남성) 독자들이 만화책 한권 추천해달라면, 그들의 취향에 맞을 만한 우수한 만화로서 별 망설임없이 추천해주곤 한다. 뭐 그런거다.

========================

성인들의 이야기 – <느티나무의 선물>

비단 만화뿐만 아니라, 영화든 게임이든 음악이든 대중문화 전반의 특징이 바로 대중적 성공을 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중 – 즉 나름의 주관에 따라서 대중문화를 향유하고 상품을 소비해줄 수 있는 일반인들의 폭은 갈수록 넓어진다. 특히 연령적인 측면에서, 점차 더욱 일찍 대중문화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대중문화의 코드들 역시 점차 저연령화 되는데, 대략 중학교 1학년의 교양 수준에 맞추는 것이 관례가 된지 오래인(물론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텔레비전 교양/오락 프로그램의 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들만이 즐길 수 있는 코드에 대한 욕구 역시 커지고 있다. 특히 오랜 역사동안 저연령에 대한 포섭능력이 최대장점인 것처럼 포장되어왔던 만화라는 대중문화 양식에 있어서, 성인들이 ‘자신들만의 코드’에 맞는 작품을 원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성인들을 위한 만화란 무엇일까? 섹스나 폭력 같은 것으로는 턱도 없다. 그것은 성인이기 때문에 비로소 즐길 수 있는 취향인 것이 아니라, 성인이 아닌 자들에게 사회적으로 그 쾌락을 금지시켰을 뿐이기 때문이다. 진짜로 성인을 위한 만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단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느티나무의 선물>(다니구치 지로 / 샘터)이다. 읽어보는 사람마다 “아, 이것이 바로 성인의 이야기다”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 작품의 무엇이 과연 그렇게 성인스럽다는 것인가. 느티나무가 모든 것을 주는 것이 꼭 부모님들의 무한한 사랑 같아서? 글쎄. 그런 식으로 보자면 아동이나 청소년들이 보고 감동을 받기를 요구하는 동화류들과 기본 메시지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감정이입할 주인공들이 다 중장년이라서? 그렇게 단순할 리가 없다. 어른들만 나오는 아동물도 얼마든지 많으니까. ‘성인스러움’은 좀 더 간단하고 쉬운 곳에 있다.

청소년/아동에게는 아직 없고, 성인에게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바로, “과거”다. 지금을 신경 쓰고, 앞으로의 성장을 힘쓰느라고 고군분투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의 고민과 갈등이라면, 성인에게는 뒤돌아볼 과거가 있다. <느티나무의 선물>은 바로 그 과거 돌아보기가 만들어주는 성인적 감수성을 잔뜩 적셔주는 단편들의 모음이다. 우쓰미 류이치로의 원작 단편 소설들을 바탕으로 재창조한 이 작품에서, 다니구치 지로의 중장년 주인공들은 모두 지금의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어른이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인하여, 그것이 새로 이사온 집의 느티나무든, 오랫동안 못본 동생의 전화든, 그림 전시회든 간에, 과거를 돌아본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현재를 다시 돌아보게 되고, 한층 인간적이고 따듯한 생활로 다시 방향을 잡아간다는 이야기 구도의 반복이다.

하지만 단순히 과거가 있는가 없는가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다. 청소년 취향 작품에도 나름대로 과거 사연을 지닌 멋진 주인공들은 수도 없이 많으니까 말이다. 즉 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거가 어떤 의미와 역할을 해주는 것인가, 라는 차원이다. 청소년은 과거의 반성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무언가를 더 이루고 싶어 아등바등 노력하는 성장을 하는 미래 지향이다. 과거는 극복의 대상이고, 다음 성장의 ‘이전 단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성인은 과거의 경험을 다시 떠올리고 자신의 현재 위치가 과연 무엇인가 반추해보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과거는 좋았든 나빴든 간에 지금의 나를 만든 재료다. 이것이 바로 성장 중인지 성장이 이미 끝났는지에 대한 차이다. 성인은 성장에 대한 욕심이 이미 한풀 꺾인 존재들이다. 아 물론 세속적인 출세를 여전히 꿈꾸기는 하지만, 그것조차 나름대로의 현실론 앞에서 스스로 한계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성인이다.

미래를 위한 과거가 아닌, 현재를 반추하는 과거의 정서는 때로는 복고 정서와 묶이기도 한다. 과거 “좋았던” 어떤 순간을 되돌아보며, 그다지 좋지 않은 현재와의 낯선 격차에 즐거워하는 감수성의 경향 말이다. 복고정서의 가장 큰 결점은 바로, 과거를 그리워 한다는 것이다. 현재를 위한 과거가 아닌, 현재를 잊고 과거에 잠시 칩거하기 위한 과거.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인정서가 아니라 그냥  현실도피일 뿐이다. <느티나무의 선물>은 현명하게도 복고 정서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우직하게 사람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사람이 아닌 느티나무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표제작 단편마저도, 정확히는 느티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과거다. 그리고 그 과거의 결과, 계속 느티나무와 함께 살아갈 것을 결심하는 새 집주인의 모습이 바로 성인이다.

이러한 정서를 묘사하기 위한 다니구치의 화풍은 그야말로 탁월하다. 특별히 역동적인 화면이나 재기발랄한 연출이 넘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세밀한 배경 덕분인 것도 아니다. 다니구치는 성인의 표정을 그린다. 말은 안해도 사연이 가득 담긴 표정, 의지보다는 관조가 넘치는 눈빛, 원만하게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성인들의 세계에서 연마된 듯한 적당히 경직된 딱딱한 표정. 특히 말없이 눈빛을 아래로 내리는 묘사에 있어서 성인의 정서를 연기력으로 보여주는 강력한 필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거꾸로 그런 화풍이 완전히 고착되어,  중간중간 드라마틱한 설정의 줄거리가 선보이는 부분에서도 그다지 강렬한 사건의 느낌으로 와닿지 않는 단점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과거 회상 속 아이들마저 어른의 눈빛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성인만화가 다 이래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느티나무의 선물>은 담백한 시골 나물반찬 같은 책이다. 물론 성인의 건강에 좋고 성인만이 즐길 수 있는 그립고 반가운 풍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심심한 것만 먹어서야 식사가 즐거워질 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가끔 이런 풍미를 즐기는 것, 성인의 특권 아니겠는가.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