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적 일상은 아니지만… <생활의 참견>[기획회의050919]

!@#… 그간 밀린 포스팅 떨이.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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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적 일상은 아니지만, 모범적 일상만화 – <생활의 참견>

잘 알려져 있다시피 라디오 프로그램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코너들 가운데 상당수는, 청취자들이 보낸 사연을 소개해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경험담을 털어놓는다는 것의 재미는 과연 무엇일까. 충격적인 소재와 극적인 전개, 놀라운 특수효과가 들어가지 않더라도 이야기 자체의 힘만으로 사람들을 휘어잡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일상성의 매력, 공감의 힘이라고 불리우는 그 이상한 흡입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일상성의 재미 가운데 하나는 바로 ‘공감’이다. 원래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다지 상상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모든 것을 자신의 직접적인 생활 경험과 가까운 것으로 적극적으로 변환시켜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촉진하는 가장 강력한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디테일이다. 타인의 이야기 속에 담긴 소소한 디테일이 내가 경험적으로 기억하는 어떤 것과 일치하면 마음 놓고 전체 맥락에 공감해버린다. 거꾸로, 전체 맥락이 공감 갈 만한 내용이라도 디테일이 미묘하게 다르면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다른 하나는 실존하는 화자다. 이야기가 가상적인 캐릭터들의 모험담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가의 생활이다, 라고 현존하는 주체가 부여되면 공감의 수준은 더욱 올라간다. 이 두 가지가 갖추어질때, 남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우리네들 사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측면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아예 소재로서 일상적 살아가는 이야기나 생활을 다루는 것을 ‘일상물’이라고 한다.

상상력 풍부한 모험담, 자유분방한 표현법을 주로 발달시킨 만화에 있어서 이 분야는 사실 비교적 늦게 개척된 것 가운데 하나다. 논픽션(다소의 각색과 과장은 너그럽게 허용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에세이, 일기, 사연소개라는 컨셉이 한국에서 만화와 만나서 대중적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어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을 가지고도 만화를 발표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성장은 대단히 빠르게 이루어져서, 지금은 당당한 주류 장르 가운데 하나가 되어있다. 물론 항상 그렇듯이 함량미달의 물건들도 많지만, 정말 무릎을 치게 만드는 작품들의 맥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최근 단행본으로 출간된 <생활의 참견>(김양수 / 애니북스)을 이러한 장르적 유행에 편승한 작품이라고 평한다면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오히려 이 작품은 이 장르의 사실상 선구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작가가 월간 의 기자로 근무하면서, 지난 98년부터 꾸준히 연재해오던 것들의 묶음이다. 월 1회 한 페이지 남짓 연재되던 것이기에 7년만에야 단행본 분량이 축적되었고(사실 그나마 글이 절반이다), 웹사이트에서 연재한 것이 아니라 종이잡지에서 한 것이기에 여타 일상만화보다 전파가 덜 되었을 뿐이다. 

<생활의 참견>은 좋은 일상만화의 장점을 고루 지니고 있다. 자신과 자신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부여되는 현실감, 세부적 디테일을 맛깔스럽게 포장해내는 솜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마치 10년만의 동창회 술자리에서 입담 풀어놓듯이 재미있게 전개시키는 이야기꾼 기질. 또한 각 이야기를 짧게 끊어주면서 일상 속 ‘에피소드’를 각인시키는 솜씨 역시 출중하다. 독자들은 작가의 삶 자체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감하고 즐길만한 편린들을 원하니까 말이다. 특히 책의 전반부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것은 80년대 초의 청소년기인데, 그 때가 한국에서 대중문화의 격변기였기에 참 기억을 같이 나눌 일들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단히 유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아 그때는 이런 게 다 생겨났었지. 우리 동네에도 그게 있었는데, 그 때 그런 친구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말이야, 엉뚱하게도 **한 짓을 해버렸어!” 물론 좋은 마무리를 하려면, 결코 “그때가 그리워요” 식의 이상한 감상주의로 끝나면 안된다. 단편적인 재미있는 기억이 샘솟는 것과 정말로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예를 들어 군대 개그를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좋은 일상만화의 또 다른 조건은 바로 일상의 공감 이상의 대단한 무언가로 독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데, <생활의 참견>은 이 것 역시 잘 충족하고 있다. 억지로 감상주의를 강요하지 않고, 억지로 웃기려고 오버하지도 않고, 심지어 그림체마저도 부담없고 푸근하기 이를 데 없다. 세밀하거나 박진감 넘치는 데생과는 애초부터 방향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더그라운드 만화에서 종종 활용하는 위악적인 낙서체의 느낌도 아니다. 그림과 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만화라는 매체의 매력을 확실하게 활용하면서도 절제할 줄도 아는 균형감각 역시 좋은 이야기꾼의 증거다.

하지만 모든 일상물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인 소재의 고갈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 듯 하다. 사실 사람의 일생이란 워낙 재미있는 일들이 한정되어 있는데, 남의 이야기를 잘 포장하는 것은 자기 이야기를 포장하는 것과 전혀 들어가는 힘이 달라진다. 당장 이 책 한권 안에서도 직접 겪은 일과 ‘사연을 소개받았다’는 일들은 특히 디테일의 활용에 있어서 워낙 재미의 격차가 상당히 크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 컨셉을 이제부터 사연보다 잡상으로 바꾸기 시작한다면? 책 말미의 섹션을 차지하고 있는 잡상류 작품들의 면면을 볼 때, 작가의 특기분야가 어느 쪽인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아니 사실 책으로서 컨셉 통일성과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아예 말미 섹션 자체를 넣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결국, 방법은 끊임없이 폭넓은 재미있는 생활을 만들어나가서 자꾸 현재진행형으로 소재를 만들어 나갈 수 밖에 없다. 잘 해나가면 7년 뒤에 또다시 단행본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고, 아마 독자들 역시 기쁜 마음으로 그 순간을 기다리게 되지 않을까. 여하튼 지금은, 일상에 즐겁게 참견당해서, 또는 참견하는 일상의 즐거움을 같이 공감하며 느낄 수 있는 책이 나와줘서 즐거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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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신파의 미덕 – <바보> [기획회의050904]

신파의 미덕  – <바보>

통상적인 의미와 실제 대상의 괴리를 느끼도록 하는 호칭들이 가끔 있다. 예를 들어서 ‘미친년’은 어떨까. 통상적으로는 어떤 여자가 뭔가 황당한 짓을 했을 경우 그냥 피식 웃으며 내뱉는 호칭이다. 하지만 원래 이 단어가 진짜로 대상으로 하고 있던 것은, 무언가 엄청난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 그 충격으로 인하여 실성, 진짜로 정신병리학적으로 큰 문제가 생겨서 동네를 배회하던 그 사람들이다. ‘지랄한다’, ‘병신 삽질한다’ 등 일련의 비속어들이, 다들 훨씬 더 비극적이고 끔찍한 상태인 무언가를 일상의 친근한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바꾸어 놓는다.

<바보>(강풀(강도영) / 문학세계사)의 첫 머리는 바로 이 지점을 한번 긁어주면서 시작한다. “어린 시절 어느 동네에나 하나쯤 있었던 바보.” 어라, 생각해보니 필자가 어렸을 때도 동네에 바보가 하나 있었다. ‘이런 바보 같은 놈’이라고 할 때의 바보가 아니라, 진짜 바보 말이다. 아니 더 자세히 생각해보니 이사 다니던 어느 동네에나 하나씩은 있었던 것 같다. 놀림 받고, 애들이랑 어울리는 어른. 지저분하게 하고 다니면서, 어떤 애들보다도 더 애들 같았던 사람들.

<바보>는 ‘<순정만화 씨즌2>’라는 다소 안전한 선택의 부제를 달고 미디어 다음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이야기는 동네 바보 승룡이, 미국에 유학가서 피아노를 치다가 좌절해서 돌아온 지호, 승룡이의 친구이자 동네 양아치인 진수 등 여러 주인공들의 과거 사연과 현재의 응어리가 점차 풀려나가는 식이다. 그 방식은 무척이나 고전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엇나간 애정, 끈끈한 우정, 조건없는 희생 같은 구식의 감성은, 선천적 유전병, 어린 시절의 사고, 어린 시절의 약속 등 구식의 소재들과 만나면서 하나의 전형을 이룬다. 그런데 그것이 ‘지겹다’기 보다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재미로 녹아들어가는 자연스러움을 보이고 있다.

<바보>는 만화가 강풀(강도영)을 대중적 스타로 만들어준 <순정만화>,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연재했던 <미스테리 심리 썰렁물>(출간시에는 ‘아파트’로 제목 변경)과 마찬가지로 2권짜리로 묶여 나왔다. 항상 사전에 스토리를 완성하여 4개월 동안 집중 연재를 하고 수개월 휴식을 취하는 이 작가의 방식은, 무한 연재 속에서 스스로 망가지는 많은 연재만화들의 함정에서 의연하게 벗어나 잘 구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좋은 작품 발표 방식이기도 하다. 전작의 인기에 버금가는 호응을 불러일으켰다느니, 곧바로 영화화 판권이 팔려나갔다느니 하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들은 대충 넘어가더라도, 여하튼 이 작품의 특징과 미덕은 무척 분명하다. 형식적 특성인 칸 경계선을 흐리게 처리하고 그 대신 독백 대사로 연결하는 주관적 서술, 간혹 등장하는 스크롤 넘김 효과의 표현력을 활용하는 한 화면 이상 길이의 세로로 긴 칸(이것은 마치 책 만화의 경우 한 칸으로 두 페이지를 가득 채워서 시선을 제압하는 것과 비슷한, 아니 그 이상의 효과를 지닌다)은 이제는 굳이 다시 이야기하기도 뭣할 정도로 완전한 스타일로 완성되고 있다. 여러 주인공의 심리적 엇갈림에 의한 다중 시점 전개 역시 인간사의 감성적 면을 강조하는 이 작품에서 강한 효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어떤 형식적인 실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결국 그 형식을 통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전달하여 독자를 휘어잡는가 하는 측면인데, 능란한 이야기 페이스 조절과 무엇보다 여전한 – 아니 한층 더 강력해진 신파 정서가 <바보>의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작품에서는 누구하나 내심 순수함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 없고, 다양한 인간관계의 엇갈림 속에서 모든 문제는 정서적인 방식으로 해결된다. 항상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개연성 없이 몰려오는 여러 비극 속에서 주인공들은 사랑과 우정 말고는 기댈 곳이 없다.

이런 각박한 현실 세상에서 그런 것이 가능하겠냐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세계 속에 있으면서도 현실과 떨어져 있는 순수와 서정의 전도사가 필요하다. 바로, 바보 말이다. 바보 승룡이는 기본적으로 과거의 존재다. 정확히는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성장을 그만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잊어버린 여러 가치들, 어릴 적의 어떤 빛나는 순간을 계속 현재진행형으로 기억한다. 작은별 행진곡이든, 동생을 돌봐줘야 한다는 단 하나의 약속이든 뭐든 말이다. 승룡이라는 바보라는 존재는 현실에서 잊어버린 소중한 무엇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나 다름없고, 그를 낙오자로 보지 않고 자신들의 거울로 받아들이는 순간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그것은 과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끌어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우화처럼 포장된다. 누구나 순수한 삶에 대한 애정을 되찾는 이 따뜻한 작품에서 (나름대로 사연은 있지만) 유일한 악역이자 삶의 회복에 실패하는 ‘사’장이라는 자가 이 작품의 매개체인 바보 승룡이와 유일하게 교류하지 않은 캐릭터라는 점이 가정을 뒷받침해준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는 완성된다.

이 말은 반대로 하면 고스란히 작품의 약점이 된다. 기본적으로 과거와 순수를 매개로 해야 현실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한다는 것, 무조건적인 – 따라서 비현실적인 – 감상주의를 통해서 인간사가 진행된다는 것은 지나치게 달콤한 환상이다. 심지어 비극이라 할지라도, 달콤한 비극적 환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작 <순정만화>가 다양한 남녀 간 사랑을 통해서 나름대로 사람 사이 현재에 충실한 솔직한 소통의 중요함을 자연스럽게 강조한 것에 비해서, <바보>는 작품의 줄거리에서 진행되는 감동 이상의 지속적인 무언가가 부족한 측면이 있다. 애초에 사회파 만화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작가의 이력으로 볼 때 아쉬운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재미와 감동을 부인하거나, 심지어 약간이라도 덜 즐겨야할 필요는 없다. 능란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따뜻한 감성의 완성된 이야기의 매력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 부당하다. <바보>는 재미있는 작품이고, 따뜻한 이야기가 그리운 모든 이들을 위한 멋진 선물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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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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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지리멸렬한 파멸 – <십자군 이야기2> [기획회의050804]

!@#… 2년이 걸리고, 200페이지를 새로 그리고 나서야 나왔다는 2권. 3권에서는 그 콤비네이션을 따르지 말아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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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라는 지리멸렬한 파멸 – <십자군 이야기2>

성격 안좋고 힘센 나라가, 자신의 잇속을 위해서 마음대로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는 그것을 ‘전쟁’이라고 불렀다. 그 다른 나라의 지도자도 하필 상당히 문제많은 인간이었기에, 그 명분은 무려 민주화였다. 여하튼 침략은 전쟁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썼고, 잠시의 화려한 쑈를 거치더니 이내 전쟁은 끝났다. 아니 단지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끝났다고 선포를 당했다. 실제로는 전혀 끝나지 않아서, 그 뒤 2년여가 다 지나도록 아직도 세계 도처로 무대를 확장하고,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추악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민주화 해방’ 되었다는 이라크는 국가 분열과 내전의 위기에 몰렸고, 런던에서 많은 안타까운 죽음을 낸 지하철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모든 것은 이 지리한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 전쟁을 처음 시작하는 책동가들은 모든 것이 자신들의 승리로 마무리되어 깔끔하게 털고 일어설 것을 항상 계산하지만, 실제로는 길고 긴 늪으로 빠져들어 버린다. 미국의 또다른 현대사에 길이 남을 전쟁 책동 공작이었던 베트남전으로부터 인류가 얻은 교훈 따위는 전혀 없는 듯 하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전쟁이라는 충돌형태의 원인에 대하여 날카롭게 분석해서 독자들을 전율시켰던 한 만화가 있었다. <십자군 이야기>라는 제목의 이 만화는, 중세 십자군의 ‘성전’을 통해서 누군가에 의해서 전쟁이 책동되고,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동원되고, 그 와중에서 누군가가 희생당하고 누군가는 잇속을 챙기는 메커니즘을 해학적으로 풀어놓았다. 그리고 2년여가 흐른 후, 여전히 전쟁이 진짜로 종식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오랫동안 고대했던 속편이 나왔다. <십자군 이야기2>(김태권 / 길찾기)는 전작이 끝난 부분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 1권이 군중십자군의 우매하고도 비극적인 개전을 통해서 십자군 전쟁의 전체 패턴을 압축적으로 묘사해냈다면, 이제 2권에서는 본격적으로 정규군에 의한 전쟁이 시작된다. 귀족 제후들, 종교지도자들이 정식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동쪽으로 간다. 군중 십자군이라는 무지한 욕심꾼들을 슬기롭게(?) 극복한 동방 로마제국은 이번에는 아예 자신들을 통째로 먹어 삼키려는 진짜 침략자들을 맞이하게 된다. 이슬람은 오합지졸 군중십자군을 퇴치하고는 방심하다가, 예루살렘까지 일시적으로 빼앗기는 패배를 겪는다. 그리고 물론 그 와중에는 정복에 눈이 먼 십자군이 자행하는 비인간적인 학살과 (문자 그대로) 포식에 희생 당하는 불특정 다수의 주민들이 있다.

2권의 핵심 정서를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주인공은 바로 기사 보에몽이다. 그는 강력한 무력과 높은 지도력으로, 전형적인 전쟁 서사극 주인공의 됨됨이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것은, 멋진 영웅담과는 무척 거리가 멀다. 승리의 순간에 이야기를 끝내거나, 비장한 죽음으로 여운을 남기며 나머지 이야기를 바람속에 흐트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쟁에 쉬운 결말 따위는 없다. 당초 십자군의 명분이었던 예루살렘 탈환을 이루고 난 후에도, 십자군은 끝나지 않는다. 1차 십자군의 강력한 군사적 리더 보에몽이 완전히 몰락해버리고 나서도, 끝나지 않는다. 끝끝내 질리지도 않고 계속 지리멸렬하게 계속 꿈틀대는 전쟁의지 속에서, 당초의 책동가들도 이미 스스로 예상한 이득의 궤적에서 벗어난지 오래다. 앞으로 훨씬 더 많은 횟수의 “제*차 십자군 원정”이 이어질 것을 역사적 지식으로 알고 있는 현대 독자들은 정말이지 질려버릴 노릇이다. 전쟁은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예상치 못한 요소들이 점차 붙어나가면서 결국 헤어나오기 힘든 커다란 수렁이 되어버린다.

전작의 프롤로그가 서방세계의 중세 이전 전쟁사를 다루었다면, <십자군 이야기2>는 우리가 ‘이슬람 세계’라고 부르는 그 중동 공간에 존재했던 이슬람 종교 이전의 문명사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현재까지도 사람들은 종교가 어쩌니 하고 명분을 세워서 싸움을 찾고 있지만, 사도 마호멧 이전의 문명사도 사실 별다를 바가 없다! 원래부터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엔진으로 하는 전쟁들이 넘실댔으며, 그 속에서 균형과 부조화가 번갈아가며 세상을 지배했다. 1권에서만큼 프롤로그와 본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느낌은 적지만, 십자군에 맞서는 이슬람 진영의 처지를 좀 더 본격적으로 집중할 3,4권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연결다리를 시사하고 있다.

전작 이후로 흘러간 2년여의 시간은, 작가의 표현능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고전적 드라마와 현대적 풍자, 극중 이야기와 작가의 직접 개입을 넘나드는 서술 솜씨는 한층 능란해졌고, 그림 역시 더욱 통일성 있게 다듬어졌다. 각종 해학적 농담은, 더욱 농밀하면서도 전작에서 가끔 보였던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 양념의 역할로 좀 더 확실히 자기 자리를 찾고 있다. 200여 페이지를 다시 그려야 했다는 작가의 후기가 그간의 과정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지적인 성향 역시 여전해서, 작품 뒤 빼곡이 차있는 참조도서에까지 해설을 한마디씩 더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아직 좀 더 다듬어졌으면 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정사와 야사, 가설을 만화 자체의 서술 속에서 뚜렷이 구분되게 묘사해 내는 방법론이 더욱 연마되어야 한다.  분명히 극중 십자군이 벌이는 이야기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작가의 여러 현실풍자적 해설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군중십자군의 은자 피에르가 1차십자군에서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그 피에르와 동일인물이라는 가설을 실제 극 속에 풀어 넣음으로서, 픽션의 요소들이 녹아들어가버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직접 현재진행형의 사건이자 사실로서 보여주는 관행에 익숙한 만화라는 매채에서, 그것은 자칫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인상, 나아가 전체 내용의 신뢰성을 흐리는 폐단을 낳아서 작품의 큰 주제와 맥락에 누가 된다.

분명히 <십자군 이야기2>는 이 시리즈의 전작을 뛰어넘는 명작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또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십자군 이야기3>이 더욱 뛰어난 모습으로 돌아와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역시, 인류가 조금만 더 현명해져서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과 메시지들이 하나도 신선하고 충격적이지 않은 조화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이상주의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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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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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와 과일 사이의 토마토 – <한국 일본 이야기>[으뜸과 버금]

!@#… 여러가지 이유로, 업데이트가 뜸한 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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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채와 과일 사이의 토마토 같은 – <한국 일본 이야기>

<한국/일본 이야기>는 한 ‘2.5세대’ 재일교포 유학생의 한국 유학 생활과, 이전의 경험 및 유학 과정을 통해서 정리하게 된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삶의 공간에 대한 생각들을 담아낸 만화다. 원래는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 ‘구미의 유학만화’(http://www.koomi.net)에서 연재되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단행본이다. 물론 연재작의 단행본이라고는 하지만,, 캐릭터의 독창성에 대한 지적을 받은 후 거의 모든 원고를 다시 그려냈으며, 책을 위해서 완전히 새로 만든 에피소드도 다수 있기 때문에 단행본으로 보는 것이 충분히 의미있다. 또한 유학생활의 경험담을 중심으로 하여 작년 히트작 <요코짱의 한국일기>와 비슷한 느낌을 줄 수도 있는 원래 연재와는 달리, 단행본은 유학생활 이야기의 비중을 줄이고 중간자, 또는 경계인으로서 바라보는 한일 차이와 관계에 대한 생각에 크게 집중하고 있다.

2.5세대, 즉 2세대 교포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3세대도 아닌 2.5세대인 작가가 경험하면서 살아온 에피소드들인 셈이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방법은 결코 무겁거나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고, 그림일기를 연상시키는 가벼운 듯한 그림체와 무릎을 치게 만드는 일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전반부를 차지하는 유학 이야기와 생활경험에서는 주로 코믹한 에피소드, 오해와 호기심을 위주로 진행되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한국의 긍정적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고 이해와 화합을 강조하는 교훈적인 내용이 되어가는 흐름으로 가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 수년 전 이 땅의 대다수 편협한 국수주의자들에게 자위행위를 시켜줌으로써 히트를 치고 그 저자를 출세가도로 올려놓았던 출판쓰레기 <일본은 없다> 식의 ‘우리는 잘났다 그 놈들은 변태다’ 식 서술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 일본도 한국도 둘다 애정의 대상이고, 무조건적인 서로 모든 것을 용서해라가 아닌 서로를 이해하는 것의 즐거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설파하고 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뚜렷한 메시지를 위해서 진행되어 가는 단행본으로서의 완성도를 위하여 버리고 간 잔재미가 적기 않기 때문이다. 연재 당시 돋보였던 몇몇 에피소드들이 단행본의 일관성을 위해서 빠졌고, 대화형 글과 만화/에세이의 혼합, 각종 소식들이 자유롭게 섞여서 유희적 분위기를 잔뜩 자아냈던 홈페이지의 매력은 만화만 선별하여 빼곡이 담아놓은 단행본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책 말미의 교훈성이 왠지 닭살스럽게 느껴지는 독자들도 상당할 정도로 전반부 ‘유학생활’ 이야기와 그 이후의 교포 이야기 사이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출판 기획에 있어서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이다.

“교포는 토마토야. 과일 나라에서 자라온 토마토. 오늘날 나는 과일이 아니라고 느꼈다. 과일나라에서 토마토를 먹을때는 소금을 뿌리는데, 생긴 그대로를 인정받고 싶었던 토마토는 야채 나라에 갔어. 조국에 간거지. 하지만 야체 나라는 토마토를 과일 같이 취급할 때가 있었다. 게다가… 설탕을 뿌리는 습관이 있었다.”

작가의 아버지가 해주었다는 이 대사가 바로 작품 전체의 세계관을 명확하게 대변해준다. 이런 즐거운 작품을 통해서 토마토가 과일이자 야채로서, 과일과 야채를 이어주는 다리로서 좋은 역할을 해줄 수 있도록 격려를 보낸다.

[으뜸과 버금 2005.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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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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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이라도 여전히, 만화를.

!@#… 쿠루쿠루님의 무더위 만화로 식히자!! 에서 트랙백.

연휴에는 종종, 만화 리스트를 써달라고 요구받곤 한다. 역시 만화는 방에서 즐기는 여가의 강자라는 기본 컨셉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해야할지도. 게다가 요즘은 무진장 덥기까지 하다. 무더위가 만화로 식을 리는 전혀 없지만, 적어도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에어컨 강하게 틀어놓은 공간 (카페, 은행, 사무실 기타등등) 에 찾아가서 쉽게 향유할 수 있는 지극히 포터블한 즐거움이니까 말이다. 이건 지난 주, 부산일보 기자분 통해서 부탁받은 리스트 + 재미있게 읽는 팁. 어차피 기사화되면 꽤 모양새가 달라질 것 같기는 하지만. 매니악하거나 장르만화에 대한 집착이 적은, 일반 일간신문 독자를 위한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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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읽어볼만한 만화 20선

– 여름이라면, 역시 공포

 아파트(강도영 / 문학세계사) : 다양한 사람들의 엇갈리는 시점이 매력적.
 두 사람이다(강경옥 / 시공사) : 진짜 정체를 놓고 벌이는 심리 서스펜스.
 드래곤헤드(미네타로 모치즈키 / 서울문화사) : 재앙물의 정점.
 펫숍 오브 호러스(마츠리 아키노/ 서울문화사) : 욕심의 인과응보를 그려내는 옴니버스.
 기생수 (이와아키 사토시 / 학산문화사) : 인간에게 포식자 천적이 생겨난다는 것.

– 선 굵은 드라마의 세계

 타짜 1-4부 (허영만, 김세영 / 도서출판 채널) : 도박은 인생의 축소판.
 바람의 파이터 (방학기 / 길찾기) : 최배달의 강함을 추구하는 직선 돌파 인생.
 불의 검 (김혜린 / 대원CI) : 굴곡 넘치는 드라마틱한 대하서사시.
 용주골 (김성모 / 도서출판 청솔) : 비장한 성인정서.
 리얼 (타케히코 이노우에 / 대원 CI) : 장애인 농구를 다루는 감동 드라마.

– 즐기면서, 교양도 좀 쌓아보자

 십자군 이야기 (김태권 / 길찾기) : 현대 문명과 전쟁의 진짜 이유를 찾아나선다.
 만화 십팔사략 (고우영 / 애니북스) : 고전 속에서 배우는 현대적 교훈들.
 마법천자문 (시리얼 / 아울북) : 어른들도 한자 교육에 만점.
 조선왕조실록 (박시백 / 휴머니스트) : 충실함과 재미를 겸비한 조선사 읽기.
 식객 (허영만 / 김영사) : 식문화의 기본을 찾아서.

– 인터넷에서 찾은 보물들

 트라우마 (곽백수 / 애니북스) : 변박자 개그의 매력.
 한국일본 이야기 (정구미 / 안그라픽스) : 교포 2.5세대가 들려주는 두 나라 이야기.
 마린블루스 (정철연 / 학산문화사) : 20대의 또래 취향의 유쾌한 생활사.
 룸펜스타 (고리타 / 시공사) : 백수의 왕.
 순정만화 (강도영 / 문학세계사) : 신파는 아직도 감동적이다.

…덤으로, 여름 휴가철에 만화를 가장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 몇가지 소개한다.

 첫째 만화의 내용에 따라서 읽는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어떤 장르의 만화는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휘리릭 넘겨야 제 맛이고, 또 다른 만화들은 하루에 한권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야 진짜 감동이 오는 것도 있다. 만약 책을 몇 페이지 넘겼는데 빠르게 읽기에는 너무 복잡해 보인다고 한다면, 재미없다고 덮어버릴 것이 아니라 좀 더 천천히 즐기는 지혜가 필요하다(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는 이야기 정서에 몰입할 수 있을까 한번 따져보는 것이다. 다들 재미있다고 하는 어떤 작품이 잘 이해조차 안된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만화의 장르법칙이나 문법이 너무 낯설어서 그럴 것이다. 마치 고전 서부극에 익숙한 이 땅의 중년들이 <매트릭스>를 즐기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다. 해결방법은? 그냥 그런 작품은 과감하게 포기하거나, 아니면 그 장르를 더욱 더 의식적으로 열심히 즐겨서 익숙해지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함께 읽는 것이다. 책이란 기본적으로 혼자 읽도록 만들어진 매체이기는 하지만, 독서의 즐거움 자체는 모일수록 재밌다. 가족이 모여서, 각각 좋아하는 만화를 읽자. 연인이 같이 읽자. 그리고 재미있는 부분에서는 킥킥대며 웃고, 감동받을 부분에서는 확 감동하는 표정을 지어서 옆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자. 가만히 앉아서 보는 영화와는 달리, 따로 또 함께 같이 읽어나가는 사이에 만화의 즐거움은 더욱 커질 것이다.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수정 자유/영리불허 —
 

시대극, 장르 오락 상상력 – <풍장의 시대> [기획회의 050705]

!@#… 현업 완전 복귀는 아직 반나절쯤 남았지만, 여행가기 전에 써놓고 간 것들은 창고방출. 우선, 지난 호 기획회의 원고.

!@#… 개인적으로는 이 만화 읽어라/읽지마라고 품평을 해주는 것 보다는, 경향 <펀>의 <만화풍속사>에서 격주로 연재했던 것 같은 컨셉 – 즉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 통찰을 하기 위해서 다양한 만화작품을 자연스럽게 소재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그런 글을 쓰고 있는 지면은 현재 <인물과 사상> 정도 밖에 안 남았는데, 여기는 또 항상 너무 헤비하게 힘들어가서 탈이다. 뭔가 좀 더 가볍게 통통튀는 (고료 나오는) 연재코너가 필요하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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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극의 장르 오락적 상상력의 해답 – <풍장의 시대>

 

바람 이불처럼 덮고   
화장(化粧)도 해탈(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 황동규 詩 <풍장> 중

예술적 상상력의 특효약이자 대중오락문화의 보고는 바로, 오래된 가치와 새로 들어온 다른  가치들이 어지럽게 충돌하는 시대에 대한 기억이다. 오래된 가치를 지키려는 자와,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며 변혁을 부르짖는 자.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문화가 충돌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부딪히며, 오해와 화해의 다양한 드라마들이 저절로 탄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속에서 정반합 작용에 의하여 잉태되는 무언가 또다시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통하여 시대의 희망을 볼 수 있는 단서까지. 이야기 예술을 만들어냄에 있어서 이것보다 더 확실한 공식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이라는 곳의 역사, 특히 근현대사는 완전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민주화 시민세력과 독재세력, 인권을 부르짖는 노동자와 개발 자본가의 충돌, 이념을 빙자한 무의미한 동족상잔인 한국전쟁, 일제의 압제와 한국의 독립의지 등, 숱하게 사용되고 또 사용되어온 배경 소재들이다.

그런데 항상 의외로 별로 많이 활용되지 못한, 또는 그다지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시대가 바로 그 직전에 있었다. 그 시대가 바로 ‘개화기’인데, 전통문화와 서구적인 가치, 신분제도의 극복을 위시한 내부적 근대화를 꾀하는 내부와, 외부로부터의 근대화를 통해서 식민지배의 야욕을 품는 외세의 가치충돌이 부글거리던 역사의 단편이다. 본격적인 전쟁 또는 식민지화 등으로 파국을 맞이하기 이전, 복합적인 긴장관계가 팽팽하던 시절 말이다. 실제로 이웃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이러한 개화기 시절의 긴장이 가장 인기 있는 소재 가운데 하나다. 메이지 유신 직전을 무대로 하여 신센구미(신선조)니, 유신지사니, 사카모토 료마니 하는 키워드들이 무척이나 친숙하다. 그에 비해서 사실 한국에서는 이 시기가 아쉽게도 그렇게 활발하게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실제 역사상의 개화기가, 일제에 의한 식민 지배라는 최악의 비극으로 끝났기 때문에 생기는 엄숙한 조심성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재의 매력이 떨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결말을 알기에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들의 모험을 더욱 강렬하게 그려낼 수도 있지 않는가. 그것을 증명해주는 최근 작품이 바로 <풍장의 시대(가리 글/이성규 그림, 대원CI>다. 이 작품은 시골의 양반 소년 목이가 십이지 수호신의 보호를 받으며 상경,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로 이어지는 개화기의 여러 사건들을 겪게 되는 내용이다. 현재 격주간 <영챔프>에서 연재중이며 아직 단행본으로 2권까지 밖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녹록치 않은 구도들이 여럿 드러나고 있다. 동양과 서양, 기계와 자연, 그리고 일본의 영적 가치와 한국의 영적 가치를 주요 축으로 하여 이미 독자들을 완전히 끌어들이고 있다.

소재의 힘이라는 것은 강력하다. 시골 양반 자제인 주인공이, 시천의 하늘을 기억하는 선택받은 영혼이며 십이지신의 수호를 받는다는 설정은 그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쓸만한 소년 모험만화의 기본 구도를 품고 있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혼과 백의 균형이 깨져가는 개화기를 살아나가며 이상한 일들을 극복해내야 한다면, 흔한 모험물과는 다른 차원의 재미가 저절로 더해지는 것이다. 십이지신이라는 존재들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다양한 미소년 미소녀 캐릭터들이 초능력을 부리며 주인공을 수호해주는 것으로 설정하기만 해도 소년만화 장르의 기본공식을 충족시켜준다. 하지만 그들이 영적 격변기를 살아나가야 하는 입장이고, 돼지머리와 술과 담배에 욕심을 내는 지극히 한국 무속적인 속성을 지닌 정감어린 신들이라면 이야기는 새로운 독창성을 부여받는다. 품격과 재미를 겸비한 대중오락물을 위한 모범적인 접근인 셈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렇게 선택한 소재들을 제대로 작품으로서 요리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훌륭한 설정과 재앙스러운 전개로 독자들을 경악시킨 작품이 어디 한 두 가지겠는가. 다행히도, <풍장의 시대>의 작가 콤비는 무리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는 듯 하다. 수호신들은 정체불명의 무협기술을 외우며 하늘을 날라다니는 과장법보다는 투박한 돌격을 구사하고, 주인공은 실눈에다가 땅딸막한 꼬마다. 격투질에 집착하기보다는 시대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는 사건 전개, 어설픈 무게잡기 보다는 세심한 내면묘사와 캐릭터구축에 힘쓰는 접근이 바로 이 작품의 우수성을 지탱해주는 생명줄이다.

분명히 <풍장의 시대>는 비교적 신인급인 작가들의 경력에 비하자면 놀랄 정도로 원숙하다. 하지만 원숙함은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원수간 장르적 상상력이 쉽게 빠져들어갈 수 있는 길들, 즉 일본이 한국을 영적으로 지배하려고 한다는 식의 음모론, 대등한 능력의 영능력자간의 일대일 대결, 맥락 없는 로맨스 등으로 대표되는 인스턴트식 흥미유발 요소에 빠져드는 ‘해탈’이 바로 그 위험요소들이다. 그 유혹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덜 원숙한’ 자세를 꿋꿋이 유지해주기를 작가들에게 미리 당부하고 싶은 심정이다.

“서양 역사를 모태로 한 서양 판타지를 업어온 일본 서양 판타지를 다시금 주술 등 동양적 소재로 뒤범벅한 일식 퓨전 판타지를 다시 한국에서 적당히 긁어모아온 판타지 세계” 에 매달리는 수많은 만화작품들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이 작품에 박수를 보낸다. 그 길이 훨씬 더 재미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더. 걱정인 것은, 이 작품이 연재중인 <영챔프>가 <그의 나라>(박흥용), <맘보 파라다이스>(윤승기)의 연재중단이라는 과거 경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좋은 만화가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지면과는 거리가 꽤 있다는 점이다. 업계 최고 경사 중 하나인 2005년 상반기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탔음에도 불구하고, 시상식에 출판사 사람이 작가들 기념사진 찍을 때 꽃다발 하나 안겨주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이 불안은 언제 사실로 바뀔지 모른다. <풍장의 시대>가 출판사의 방만함으로 이나여 억지로 풍장을 당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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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