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있는 세상 이야기 – 『사이시옷』[기획회의 060315]

!@#… 인권위의 인권만화 2탄. 원래 이 프로젝트는 초창기에 기획 참여 기회가 주어진 적이 있었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냥 지나간 경우. 뭐 계속 10탄이고 20탄이고 진행되다보면 또 다시 연이 닿을 일이 생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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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있는 세상 이야기 – 『사이시옷』

김낙호(만화연구가)

인권 보호를 위한 공식 기구로서 설립된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광범위한 임무 범위 만큼이나, 정부 기관 가운데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대중 홍보 활동을 할 줄 아는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여기에는 정부기관지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세련된 기획 컨셉과 완성도를 자랑하는 <월간 인권>, 의식 있는 영화감독의 인권에 대한 단편영화를 묶어내는 인권 영화와 애니메이션 제작, 그리고 만화 단편과 에피소드들을 묶어서 책으로 발간하는 작업 등이 포함된다. 하지만 단지 허울만 좋은 것이라면 또다른 의례적인 공무원 행사에 불과하겠으나, 다행히도 작품 자체로서 어느 수준 이상의 재미를 담보하고 있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홍보와 소통의 기능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특기할만한 점이다. 특히 공공기관이 의례 빠지기 쉬운 단발성 이벤트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지속적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더욱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런 기조 속에서 최근 발간된 『사이시옷』(손문상 외 7인 / 창비)은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두 번째 만화 작품집이다. 첫 번째였던 『십시일반』이 불러온 기대 이상의 대중적 호응 덕분에 큰 문제없이 2집의 기획이 수월하게 착수될 수 있었고, 그 결과 새로운 작품집으로 다시 우리 앞에 나오게 된 것이다.

사실 『사이시옷』은 “만화가들이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이라는 부제와는 달리 사실 차별 있는 세상에 대한 고발이 주종을 이루어, 사실상 『십시일반』의 컨셉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장차현실의 『여배우 은혜』와 이애림의 『그는…』이 차별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이다. 한 권 만으로 차별의 모습을 다 보여준 후 다음 권에서 벌써 극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는 우리 사회 속 차별의 양상이 너무 다양하고 뿌리 깊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의 어두운 측면에 대한 비극적 정서가 지배적이다. 여덟 개의 작품들은 각각 비정규직 차별 문제부터 비혼모 출산에 대한 차별까지 넓은 차별의 스펙트럼 속에서 소재를 취하고 있다. 각 작품들이 해당 소재에 접근하는 방식은 진중하며, 주제에 대한 전달력 역시 그다지 오해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확보되어 있다. 각각 차별의 이슈들을 소개한다는 목표에는 충분히 합격점을 얻고도 남는다는 말이다. 이런 컨셉으로 이런 기획으로 계속 출간이 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생기는 만화책 시리즈이기에 이런 점들은 더욱 소중하다.

하지만 소위 소포모어 징크스의 조짐이 보이는 구석도 여럿 있다. 앞서 말했듯 이전 『십시일반』의 컨셉에서 크게 발전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여전히 특정한 이슈 소재를 소개하는 것에 전체적으로 머물러 있고, 그것은 홍보활동 그 이상의 것으로 나아가기 힘들게 만드는 장벽이 된다. 즉 인권 홍보물으로서의 의의가 아닌 “작품”집으로서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어떤 요소들이 제한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가시적이고 뚜렷한 차별이라는 외관 속에 담겨 있는 훨씬 복잡하고 상호 모순되는 단면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작품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핵심이고, 교과서적 설명이 아니라 현실적 감동과 깨달음의 힘을 부여해주는 요소다. 무엇보다, 우리네 사회와 인생 자체가 원래부터 복잡 미묘하고 모순된 순간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현실속의 차별의 가해자 또는 피해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항상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다. 또한 그 속에는 우리 자신들의 습관과 의지, 그리고 사회의 시스템적 문제가 동시에 작용하는데 때로는 서로 같은 방향으로, 때로는 모순된 방향으로 일어난다. 인권 매뉴얼로서 차별에 대해서 학습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감동을 통해서 차별에 대해서 스스로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런 점들에 더욱 집중해야한다고 본다. 나아가, 만화라는 미디어를 택한 이상 그것이 만화 특유의 표현력 및  대중 친화력과 어떻게 효과적으로 결합하여 독자들에게 “읽는 즐거움”을 줄 것인가에 대한 것 역시 더 고민해야할 숙제다. 반드시 과장과 희화화를 해야 한다는 식의 일차원적 이야기가 아니라, 만화 양식이기에 더욱 강렬한 느낌을 주도록 만드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작품’으로서의 기준에서 볼 때, 개별 단편들 사이에는 분명히 편차가 존재한다. 마치 십시일반에서 마지막에 실린 작품인 최호철의 『코리아 판타지』가 그랬듯, 이번에도 마지막에 실린 최규석/연상호의 『창』이 가장 발군의 수준을 자랑한다. 사실 젊은 남자 작가들이 가장 진중하고 섬세하게 삶과 사회의 단면들을 붙잡아내곤 하는 소재가 한국 성인 남성 공통의 트라우마인 군대 생활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다. 그도 그럴 것이, 군대의 씨줄 낱줄로 얽힌 엄격한 차별구조는 누구도 완전한 피해자도 완전한 가해자도 될 수 없게 만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흑백의 현실적 모습의 거친 연필화로 그려내는 한 ‘모범군인’과 한 ‘고문관’의 관계 속에서, 복합적인 피해 – 가해 관계가 솜씨 좋게 독자들의 성찰을 자극한다. 군대라는 소재 자체보다 이러한 미묘한 모순들이 바로 이 작품의 핵심이기에, 단연 이번 작품집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유승하의 『축복』도 누구에게는 축복이고 누구에게는 사회적 따돌림의 원천인 생명 잉태에 대한 모순된 시각들을 대치시키며, 이를 위해서 비혼모 임신을 강간이 아닌 합의 방식의 성에 의한 것으로 그렸다는 측면에서 분명히 눈여겨볼 작품이다. 그에 비해서 손문상의 단편들은 정규직/비정규직 문제라는 지극히 모순된 피해-가해 관계를 지닌 중요한 소재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비정규직은 차별받는다는 단일한 명제를 주장하는 선에서만 소화해내서 아쉬움을 주고 있다. 다른 작품들 역시 크고 작게 장점과 단점들을 지니지만, 전체적으로는 차별이 있다는 것을 교과서적으로 알려주겠다는 의지가 아무래도 앞서서 오히려 더 큰 이야기를 못하고 있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사이시옷』은 무사히 두 번째가 나온 것만으로도 이미 높은 평가가 불가피한 시리즈의 일원이다. 그리고 아쉬움은 토로했지만 여전히 재미있게 읽을 만한 만화책이다. 다만 앞으로 나올 3탄,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일정한 선택이 필요하다. 교과서적인 학습의 효과에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직접적 교육효과는 줄이더라도 차별 양상의 현실적으로 모순된 미묘함에 매진하여 자발적 성찰을 유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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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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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잡지를 읽게 만든다는 것 – <격월간 새만화책> [기획회의 060301]

 !@#… 참고로, 블랙잭님이  “사람들이 대안만화 잡지를 사는 것은 독창성을 즐기고 싶어하는 욕구때문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말아 주었으면 합니다” 라고 하셨는데 120%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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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를 읽게 만든다는 것 – <격월간 새만화책>

김낙호 (만화연구가)

사람들이 잡지를 읽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잡지라는 읽을거리는 최신 사항을 빠른 기간 안에 널리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문과, 진득하게 한 가지를 파고들게 만드는 단행본 서적의 중간에 있다. 즉 하나의 긴 것 보다는 다양한 짧은 내용물들을 조합하여 일정한 기간 안에 발간하며, 다소의 현재성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뉴스가 아닌 창작 문화예술을 다루는 잡지의 경우는 어떨까. 시의적으로 출간되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대략, 그 장르를 일상적으로, 항상 정기적으로 즐기는 생활을 하도록 함이라면 좋을 성 싶다. 10년 동안 작업한 방대한 작품을 10년 동안 기다리게 한 후 읽히는 방식도 있고 1년마다 단행본 1권씩 쪼개서 출시해서 1년 주기로 10번 즐기게 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아예 잡지에 ‘연재’를 해서 10년 내내 일상적으로 즐기게 하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즉 잡지는 작품을 생활의 일상성에 보다 가깝게 만들어준다. 또한 여러 작품들을 같이 묶어서 제시한다는 점 역시 대단히 중요한데, 하나의 작품에 심취하도록 하기보다는 일련의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취향으로 감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것은 거꾸로 말하자면 창작 문화예술 잡지가 그런 기능이 가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바로 잡지의 작품들이 일상적으로 즐기고 싶어할 만큼의 지속적 매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하나의 문화적 취향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색깔이 뚜렷해야 한다는 것이다. 1920년대의 문예동인지들 이래로 항상 그것이 좋은 창작 잡지와 쉽게 잊혀지는 잡지들의 가늠쇠가 되어왔다.

최근, 창작 만화지 <격월간 새만화책>(새만화책 발간)의 창간호가 출시되었다. 주류 장르공식을 따르는 만화보다는 작가의 개성적인 작품 성향을 중시하는 단행본을 위주로 작업했으며 지난 2003년 <계간만화> 1,2호를 제작한 바 있는 출판사답게, 이 잡지는 명시적으로 작가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실제로 창간호에 실린 작품들은 장르만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실상 표준화되어 있다시피 한 미형 그림체를 벗어나 있으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 역시 삶의 거친 측면들을 소설의 문예사조로 치자면 ‘리얼리즘’내지 ‘자연주의’에 해당될 방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총 12편의 작품과 하나의 글이 실려 있는데, 작품들은 대체로 한 호흡으로 끝난다. 절반 이상이 단편이며, 연재물 역시 다음호에는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방식보다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내적 완결성을 지닌 것이 보통이다. 한국 작가가 주가 되지만, 해외 작가 가운데 잡지의 성향과 비슷하다고 판단되는 작가의 작품들도 네 편 포함시켰다.

작품들은 자전적 느낌을 구체적으로 강조한 작품들 (열아홉, 내 어머니 이야기, 푸른 끝에 서다 외), 또는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를 캐릭터로서 직접 활용한 ‘정신적인 자전 에세이’ (미스터 워터멜론의 오류, 나 그리고 얌전한 고양이의 동거 외) 가 대부분이다. 극적 상상력으로 새로운 서사를 꾸며낸 작품(불행한 뱃사공, 도쿄 고려장 외)들이 오히려 전체적 분위기에서 뜨는 느낌이 강할 정도로, 그 분위기는 일관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통일된 컨셉을 통한 뚜렷한 취향 구축이라는 측면에서는 충분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자전적 느낌의 이야기는 작가의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보여 주는 것에 용이한 장르다. 새로운 극적 창작물의 경우 뚜렷하고 일관성 있는 ‘작중 현실성’을 구축하기가 훨씬 어렵지만, 자전적인 느낌의 이야기의 경우 자기 삶의 경험이라는 뚜렷한 참조모델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상적 향유를 하고 싶게 되는 지속적 매력, 즉 넓은 의미의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어떨까. 사실 잡지란 결국 여러 작품들의 모음집이기 때문에, 각 작품들의 격차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격월간 새만화책> 역시 보다 뚜렷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작품, 확실히 한 장르를 개척했다 싶을 정도로 이미 검증 받은 고전 명작 등이 한쪽에 분류될 수 있는가 하면, 재능은 보이지만 아직 덜 다듬어진 티가 나는 작품들이 다른 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 수준에서 볼때, 시각적 만족이라는 명제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계간만화> 1,2호의 경우와는 달리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상당히 준비되어 있다. 즉 잡지의 작품으로서 읽을 만한 매력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만 아직 몇몇 작가들이 자신이 받아온 다른 해외 유사 장르 – 즉 ‘작가주의’ – 작품들의 영향을 스스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점은 명백하게 지적받아야 옳다. 작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들의 영향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와 감수성을 전달하기 위해서 효과적으로 변용하고 수용해내는가 아니면 아직은 단지 모습을 쫒아가는 것에 불과한가, 라는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 『내 어머니 이야기』는 같은 출판사에서 작년에 출시한 바 있는 『페르세폴리스』(사트라피 저)의 시각 스타일과 연출방식을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 하지만 『페르세폴리스』는 아이의 맹랑한 천진함과 난해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역설적으로 충돌시키기 위해서 흑백 아이콘화된 그림체를 활용한 것인데, 이 작품의 경우는 차용해온 시각스타일과 자신의 이야기가 서로 녹아들어가지 않고 있다. 이외의 몇몇 작품들에서도 보두앵의 붓터치, 체스터 브라운의 방백 연출 등이 채 소화되지 못하고 거칠게 원용되고 있다. 이런 지점들은 반드시 편집자의 역량으로 적절한 조율을 해 나아감이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잡지의 진짜 매력과 위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발간의 지속성이다. 부디 <격월간 새만화책>이 창간호의 포부를 잘 이어가서, 뚜렷한 취향과 상당한 완성도를 지닌 만화지로서 확고하게 자리잡기를 기원한다.  ***

약간의 사족: 하지만 <격월간 새만화책>이 ‘대안만화를 다룬 최초의 잡지’라느니 ‘본격적으로 작가주의를 표방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느니 하는 식의 언론 보도들 앞에서 필자는 곤혹스러움을 거두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화끈>이나 <히스테리> 등 걸출한 사례들을 90년대 한국 인디만화의 성과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자는 것인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의미부여와 칭찬은 그 자체의 절대적인 우수함과 매력에 기반해야 하는 것이지, 결코 여기까지 오도록 기반을 닦아준 기존의 모든 성과들을 부정하는 방식을 통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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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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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퓨전 만담 활극 – 『은혼』[기획회의 060215]

!@#… 개인적으로, 은혼의 한국어판 번역자에게는 대략 200% 보너스를 지급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봉과 의욕부족과 실력부족의 3중고에 시달려서 엉망이 되기 십상인 (일본 주류 장르) 만화번역 관행에서, 참 보기드문 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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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 만담 활극 – 『은혼』

김낙호(만화연구가)

일본 주류 장르만화에서 가장 사랑받아온 역사적 소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오다 노부나가로 대표되는, 전국시대의 화끈한 대결과 치밀한 정치적 암투가 있는데, 중국 고전 삼국지에 비견될 정도로 대하 서사를 위한 좋은 소재거리다. 혹은 거대한 힘에 의한 다양한 문명파괴 및 그 이후의 묵시록적 세계관으로 변용되고는 하는 원자폭탄 피폭 역시 원형적인 테마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분명히 수위를 다툰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대형 서사보다는 개별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을 강조함으로써, 작품의 상품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이 90년대 이래로 완전히 주류가 되어버린 주류 장르만화라면, 약간 다른 방향의 소재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 전후, 개화기 일본이다.

개화기 일본은 여러모로 캐릭터적인 매력이 넘쳐난다. 우선 개화 결정 직전의 경우, 서양이라는 외부세력의 등장으로 인하여 일본이 개화파와 수구파라는 상이한 ‘우국충정’ 들이 충돌하는 시기. 그 속에서 용기 있는 개개인들은 각자 ‘지사’가 되었다. 신센구미 같은 사설 경비대(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정치깡패)가 나름의 우국충정을 이야기하고, 무명 시골 사무라이들이 검 한 자루와 대망을 품고 거리와 전장에서 결투를 벌였다. 즉 역사적으로 이미 증명된 풍운의 시절이기에, 가상 캐릭터들을 새로 발명하거나 역사적 인물을 캐릭터화 시키기 대단히 용이한 셈이다. 개화 직후도 매력적이기는 매한가지다. 역사적 결과 개화는 성공했다. 그 결과 새로운 역사적 시련을 맞이하지 않고 지난 혈투를 하나의 후일담으로서 되돌아보는 ‘지금은 평온하게 사는 왕년의 강자’ 라는 매력적인 캐릭터 부류를 도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게다가 배경 역시 일본의 전통적 가치와 서구적 신식 가치가 섞인 혼성적인 모습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다. 전자의 부류에서 신센구미 같은 소대 단위의 조직적 인간 군상 또는 사카모토 료마 같은 걸출한 풍운아들의 굵고 짧은 인생을 모델로 하는 매력적인 현재진행형 이야기들이 즐비하다면, 후자의 경우는 『바람의 검심』의 90년대 후반 히트에서 볼 수 있듯 ‘과거 사연’이라는 멋을 더할 수 있다.

하지만 『은혼』(소라치 히데아키, 학산문화사. 10권 발매중)이라는 작품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아에 위의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사용한다면 어떨까. 개화직전의 매력적 풍운아들을 전부 캐릭터화 시켜서 들고 와서, 개화기 직후 혼성 세계의 ‘사연 있는’ 마을로 들고 오는 것이다. 물론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의 각색은 필요하다. 하지만 뭐 만화 특유의 표현 자유도를 이럴 때 마음껏 활용해야하지 않겠나. 아니 그렇다면 아예 확 나아가보자. 서방세계가 침범해온 것이 아니라, 아예 외계인들이 들어왔다면 어떨까. 그리고 비극적인 최후는 대략 삭제하고 신선조가 개화 후 수도의 경찰대가 되어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정도로 막나가는 설정인데 꿀꿀한 대하드라마로 하기는 이미 글렀으니, 화끈한 개그로 노선을 정해보자. 물론 과거의 사연들과 캐릭터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이 부여해주는 사연의 무게가 무게중심으로 충분히 작용해주기 때문에 언제라도 폼을 잡고 싶을 때에는 잡을 수 있다. 이 정도면 거의 이상적인 구도 아닌가. 『은혼』은 바로 이런 발상을 가득 담고 있는 작품이다. 즐겁도록 황당한 배경, 역사적 모델들을 살짝 비틀어 놓은 매력적인 등장인물들, 과거의 사연이 주는 무게와 작가 특유의 강력한 개그센스가 멋진 조화를 이루며 일종의 퓨전 만담 활극을 펼쳐나간다.

사실 앞서 배경과 캐릭터의 매력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이 작품을 단지 특이한 소재로 접근하는 작품 정도가 아니라 최근 장르만화 가운데 손꼽을 만한 매력덩어리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 유머감각이다. 아무리 진지하고 급박한 상황이라도 금방 인물들은 말다툼 모드로 들어가며, 어느 누구 하나도 말재간이 만만한 사람이 없다. 재치 있는 발언이 하나 나오고 나서 황당한 상황 속에서 여운을 느끼도록 하는 방식의 표준적인 상황개그가 아닌, 재치 있고 공격적인 유머성 발언에 대한 마찬가지로 재치 있는 맞받아치기가 꼭 수반되는 엄격한(?) 스탠딩 만담 개그를 구사하는 것이다. 그런 만담적인 요소는 단어 의미를 통한 말장난 역시 훌륭하게 활용한다. 사실 작품의 제목부터가 말장난인데, 주인공 긴토키의 성인 ‘은(銀)’자와 ‘혼(魂)’자를 합친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어 발음으로 읽은 ‘긴타마’는 남자의 고환을 나타내는 속어다. 또한 만담 특유의 뻔뻔함을 위하여 이 작품은 자신의 연재지면인 일본 최대급 주류 만화 잡지인 <소년점프>마저도 한화가 멀다하고 냉장고 밑에 괴어놓는 물건이라든지 불타는 쓰레기에 분리수거할 대상이라든지 하는 등 개그의 도구로 등장한다. 이러한 만담 분위기가 계속 되다가, 과거 사연의 무게를 바탕으로 하는 ‘멋진 대사’가 한번 씩 구사될 때의 느낌 역시 그냥 허구한 날 폼 재는 대사를 남발하는 여타 소년만화들과 임팩트가 다르다 (작품 속 맥락 효과 특유의 매력이 사라질 수 있어서, 사례는 아쉽지만 생략하도록 한다).

언어적 매력에 의존하는 해외 작품의 맛을 제대로 살려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한국어판 『은혼』은 대형 출판사의 일본 수입만화에 흔히 만연해 있는 오역 투성이 저급 번역과 다행히도 궤를 달리한다. 90년대 이후 주류 소년지의 인기작으로서는 거의 이례적으로 보일 정도로 이야기가 늘어지지 않고 확실하게 달려 나가는 빠른 전개와 철저한 에피소드 방식이기에 더욱 대사 하나하나의 힘이 중요한데, 무리하지 않고 일관성있게 잘 소화하는 장점을 지닌다. 게다가 유머의 핵심적인 의도를 살리는 적절한 번역, 말장난의 어감을 번안하여 자연스러운 독서를 가능하게 해주는 성실함은 근래 일본 만화 번역 수준 가운데 최고를 달리고 있다.

물론 각 에피소드의 마무리 임팩트가 아무래도 매끄럽지 못하다거나, 대형 사건 없이 전개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다가올 소재고갈을 돌파할 방법이 아직 보이지 않아 향후 전개가 순탄치 못해 보이는 등 가시적인 단점들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장르 소년만화 가운데 이 정도로 ‘일관적인 막나감’의 유머와, 뜨거운 활극의 매력을 적절히 섞어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활극과 유머의 만남으로 널리 칭송받았던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이 지녔던 장점들의 상당 부분을, 만화에서는 『은혼』이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단, 만담 정신을 가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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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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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낙천주의자의 도시 잡상: 『올드독』[기획회의060201]

!@#… 이번 호 원고는 책내 서평용으로 쓴 글을 약간만 개조했음. 같은 원고의 부분적 재활용은 별로 좋아하는 방식은 아니라서 나름대로 양심선언. -_-; 올드독의 네이버 블로그는 http://blog.naver.com/hhoro 에 가면 있음.

 (나중에 추가) 에에에엣! 이런 실수를. 단행본에는 경향신문의 ‘고충상담실’ 부분 미포함. 이게, 책이 완성되기 전에 미리 읽고 쓰는 글이 빠질 수 있는 함정. 영화로 치자면 러프편집본으로 시사회보고 평했다가 최종본이 결론이 바뀌는 격이라고나…-_-; 여튼 참 송구스러운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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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낙천주의자의 도시 잡상: 『올드독』

김낙호(만화연구가)

눈에 확 들어오는 개성적이면서도 간명한 그림체, 작가의 자화상격인 동물 캐릭터, 일상에서 발굴하는 소재들, 대중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 순간의 잡상들로 가득한 에피소드. 아,  『스노우캣』. 이쪽 분야의 선구자 중 하나. 그럼 개인 블로그와 미니홈피를 휩쓰는 팬시적 인기까지 누린다면? 이런, 그러고 보니 『마린블루스』가 있다. 아예 작가가 이 만화를 그리다가 팬시 전문업체에 취직해서, 회사생활까지도 다시금 만화 소재로 사용하기까지 했다. 음, 하지만 여기에 지리멸렬한 인간사를 가로지르는 묘한 통찰력이 출동한다면 어떨까. 아마 자칭 ‘늙은 개’ 한 마리가 소심한 표정으로 살짝 걸어나올 듯 하다. 

사실 이름만 늙은 도시형 청년 견공(이라고 해도, 설정상 작가의 14살이나 먹은 실제 개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인 올드독은 시사만화계를 거친 정우열 작가의 페르소나로, 현대 도시 생활에서 겪는 일상적 경험들과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생각들을 풀어놓는 것이 특기다. 『올드독』(정우열/거북이북스)는 일상만화 컨셉으로 작가의 개인블로그에서 연재중인 『일일꼼지락』과 경향신문 만화섹션 <펀>에서 연재되었던 바 있는 『올드독의 고충상담실』을 위주로 묶인 첫 단행본이다. 올드독식 세상읽기의 극치를 보여주며 온라인 <씨네21>에 연재중인  『TV감상실』 시리즈가 빠진 것은 못내 아쉽지만, 그만큼 일상만화로서의 특징이 강조되어 있는 셈이다. 책으로서의 만듦새 역시, 페이지 귀퉁이에 플립북 애니메이션 효과를 부록처럼 삽입하는 등 소소한 숨겨진 재미를 강조한 점이 작품의 컨셉과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원래 일상만화, 또는 생활만화라는 장르는 극적인 드라마 구조보다는 생활 속의 일상적 에피소드와 단상을 독자들과 공감해 나아가면서 생명력을 얻는다. 그래서 일상생활 속 유머러스한 사건들을 꽁트로 꾸미거나, 친숙한 평범한 생활을 새로운 눈으로 재발견해주곤 한다. 올드독의 이야기들은 명백하게 후자의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각종 일러스트에서 보이는 화려한 필치에서 추론할 수 있을 법한 ‘감상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각종 잡생각으로 상황을 풀어나간다. 그런데 올드독식 잡생각의 주제는 흔히들 그렇듯 자기 취향에 대한 함몰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어디 커피가 맛있었다, 어떤 장난감이 멋있었다는 것보다, 이사 온 새 이웃에게 어떻게 자연스럽게 접근해서 엉뚱한 질문을 나눌 수 있을지가 더 중요한 잡상의 대상인 것이다. 편협한 감상주의와 자기감정 토로의 울타리에 갇혀버리기 쉬운 이 장르에서, 이러한 인간사에 대한 통찰은 올드독의 중요한 미덕이다.

그런데 잡생각이 많으면 기본적으로 소심하기 마련이다. 소심하기에 자꾸 상황을 다시 끄집어내고, 잡생각을 한다. 게다가 인간사에 대한 것들이기 때문에 다분히 성찰적이며 냉정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드독이 냉소주의자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특유의 삶에 대한 자세에 있다. 이 장르의 선배격인 스노우캣이 게으름의 외피와 신경질적 까다로움으로 도회적 감수성의 공감대를 자아냈다면, 올드독은 소심함의 외피를 쓰면서도 특유의 낙천성으로 정반대 지점에서 같은 목표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올드독은 좋아하는 가수인 노라 존스 콘서트장 맨 끝에 줄에 앉아 곤혹스러운 땀을 흘리며 목을 주욱 빼며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면서도, 그 와중에서도 같이 음악을 흥얼거리는 모습의 낙천성을 지니고 있다. 소심하기에 곤혹스럽지만, 낙천적이기에 비굴하지 않다. 위대한 광대로 치자면 우디앨런보다 찰리채플린에 가깝다고나 할까. 올드독의 또 다른 미덕은, 그 구김살 ‘있는’ 낙천성인 셈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올드독 최고의 매력은 바로 앞의 모든 미덕들을 효과적으로 감싸 안는 확실한 재미다. 이제는 부담스럽기까지 한 무리하게 둥글고 깔끔한 팬시 캐릭터들과는 궤도를 달리하는 독특한 화풍이 재미있고, 완전히 낙서체라고 하기도 힘들지만 마치 솜씨 좋은 친구의 연습장 마냥 자유롭게 흘러가는 배치와 연출도 재미있다. 극적이고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누군가의 머리 속 망상을 살짝 끄집어내서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강조하기에는 이쪽이 훨씬 적합하다. 다만 아무래도 생각의 분량이나 시각연출의 밀도가 은근히 높다 보니 한꺼번에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하기에는 아무래도 다소 부담이 있고, 하루에 한두편씩 들춰본다는 느낌으로 읽어나가는 것이 가장 적합한 독서 방식일 듯 싶다.

소소한 상황에 대처하는 소심함, 이내 이어지는 통찰력 있는 잡생각, 그리고 의기양양한 낙천성으로 이야기를 맺어내는 연쇄작용이 재미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수다이면서도, 정작 수다스럽지 않아야 할 때를 잘 아는 이야기 솜씨가 재미있다. 덕분에 무엇보다 올드독은 재미있는 만화로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되었고, 지금 여기 여러분의 손에 안착한 것이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미덕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일기체 만화들이 대개 그렇듯이 에피소드별 질적 편차도 있고, 개별 에피소드의 시기적 맥락이 중요한 경우도 있다. 때로는 확실한 통찰이 통렬한 웃음을 주기도 하지만, 피상적 개그에 안주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미 올드독의 매력에 빠져본 결과, 소심하게 일일이 단점을 지적할 때는 하더라도 작품의 총체적 재미와 통찰을 낙천적으로 즐기는 쪽을 택하고 싶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도시에는 인간사에 관심 있는 소심한 낙천주의자들이 더욱 더 많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만약 이 책을 즐겼다면, 독자 여러분들도 어느 틈에 그 대열에 합류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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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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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일상적 인간사의 수취 관계 -『왕비님 이야기』[기획회의 060115]

일상적 인간사의 수취 관계 -『왕비님 이야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여느 다른 매체보다도 특히 만화라는 분야에서, 독자들은 강하다. 독자라는 수용자와 작가라는 창작자 사이의 경계선은 영화나 대중음악 등의 분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으며, 오랜 저평가의 역사 속에서 만화 독자들은 강한 취향 결속력을 다져왔다. 하지만 단순히 만화광들이 결국 만화가가 된다든지 하는 정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독자로서의 정체성을 그대로 지니면서, 출판이나 제작 등에 직접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재작년 『먹통X』(고병규 / 코믹팝)라는 작품의 복간의 경우, 어떤 독자가 한 출판사와 일종의 조건을 걸고 진행했던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그 독자가 캠페인을 벌여서 복간되었을 때 책을 구매하고자 하는 특정 인원수의 사람들을 모아오면, 복간본을 출간하겠다는 조건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진짜로 독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퍼트리고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긁어모은 결과, 결국 조건을 충족시키고 책은 출간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어떤 ‘회사’도 정식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만큼 독자 자신들의 결속력과 파워가 실제적인 제작 프로세스에 작용할 힘이 크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왕비님 이야기』(권교정 / 절대교감)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탄생했다. 작품은 만화 전문지 <계간만화>에 게재되었던 24페이지짜리 단편인데, 잡지의 휴간과 다른 단편들이 축적되어 단행본을 만들기가 애매하다는 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해답은 엉뚱한 방향에서 도출되었다. 그냥 24페이지짜리로 책을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비상식적인 일을 할 출판사가 어디 있냐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해답은 또 금방 나와 버렸다. 독자들이 출판사를 하나 만들어서 내버리자, 라는 것이다. 기존의 독자 세력화가 독자들이 모여서 출판사에 압력을 가하는 형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아예 그냥 직접 출판을 했다. 그것도 ‘동인지’ 또는 ‘자가출판’의 형식이 아니라, 정식 유통망의 정식 출판물로서 말이다. 이러한 발상 속에서 탄생한 출판사 ‘절대교감’은, 어디까지나 여성향 만화에 대한 독자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곳이다. 잡지의 폐간으로 갈 곳을 잃어버린 연재 작품들이 다른 식으로라도 계속 지속되었으면 하는 시도였던 ‘드림서명운동’, 잡지 <오후> 휴간 당시 작가 팬클럽에서 제기되었던 만화출판 아이디어 등이 결국 현실화된 것이다. 회사라는 형식으로 보자면 다른 ‘정식 밥벌이’가 있는 소수 인력과 지원자들로 이루어진 가내수공업적 구성이지만, 제대로 된 책을 만드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물론『왕비님 이야기』라는 작품 자체의 매력이, 단지 출판의 과정이 특이하다고 해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24페이지 하드커버라는 형식도 만화책이라는 범주에서는 이질적이지만, 그림책 분야에서는 그리 낮선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실제로 이 작품을 좋아하고, 책을 사줄 것인가가 관건일 뿐. 사실 원래부터 권교정이라는 작가가 상당히 강한 결속력을 지닌 팬층을 지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짧은 단편 하나로 책을 만들어 독자를 설득시킨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비님 이야기』는 충분히 그런 조건을 충족시켜줄만한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은 동화적인 설정에, 인간관계의 깊은 질문에 대한 알레고리를 넣어주는 작가 특유의 접근법을 능숙하게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인 왕비는 원래 마을의 인기 처녀였는데, 말을 하면 주위에 소박한 꽃들과 보석이 생겨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의 눈에 들어와서 왕비가 되고, 왕비를 독점하고 싶은 왕의 독점욕 때문에 궁 안에만 머물게 된다. 그 결과 마을은 꽃과 보석이 없는 곳으로 변모하고, 사람들은 왕에게 항의한다. 그런데 왕을 사랑하는 왕비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주변에 도움을 주는 능력을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누군가를 위해서 독점시켜주는 것은 과연 잘못된 행동인가? 좋아하는 대상을 독점하고자 하고, 상대도 동의한다면 그것은 문제일까? 그런 능력의 혜택을 받아온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히 계속 요구할 권리가 보장되어야만 하는 걸까? 사실 꽤 복잡한 인간사의 문제다.

이 작품 속에서는 어떤 결론을 내리는지, 그것은 책을 읽어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서 여기서는 언급을 피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이런 구도가 지니는 다층적인 감성 자극은 그 자체만으로도 꽤 흥미롭다. 왕비의 능력을 작가라는 존재의 창작 능력으로 바꿔도 되고, 아니면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냥 우리가 주변에 행사하는 일상적인 사회관계 속 매력으로 대입해 봐도 좋다. 사회적 삶이라는 것은 어차피 그런 관계가 오고가는 것이고, 사실 우리는 이야기 속의 왕비, 왕, 마을 주민의 입장에 동시에 처해있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발산하고, 무언가를 독점하고 싶어 하고,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한다. 모순될 것 없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복합성이다. 물론 우리는 작가가 이야기 속에서 내리는 각 등장인물들의 선택, 즉 결론에 동의할 필요는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상사에 대한 통찰을 지적당하고는 스스로 자극받는 감상행위 그 자체다.

시각 연출은, 『매지션』등 당시 작가의 작품 경향을 반영하는 듯 다소 황폐한 느낌이 강하다. 화사한 풍경을 묘사한 장면에서도 건조한 분위기를 풍기며, 인물들의 표정은 무심하다 못해 공허한 느낌까지 주고 있다. 마치 왕비가 떠나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량한 마을의 들판이 이 작품의 핵심 정서라는 지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듯, 일관성 있게 그 분위기가 유지된다. 사고를 자극하기에는 좋은 조건이자, 평소 권교정을 풍부한 유머감각으로 기억하는 일부 독자들에게는 이질감을 줄 수도 있을 듯 하다. 하지만 24페이지짜리 짧은 작품이니, 독서는 짧게 감상의 여운은 길게 가져가고자 하는 본래 목적에는 충실한 선택이다.

작가라는 마을처녀는 마을 사람들이라는 대중 독자들에게 창작능력이라는 보석과 꽃을 뿌린다. 받는 것만 익숙하던 마을 사람들은 왕이 그녀를 독점하자 화를 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마을사람들은, 왕비가 재능을 다시 그들에게 베풀어 주도록 출판사까지 차리고 책을 만들어낸다. 작품 속 사람들의 구도와는 다소 다르지만, 인간사의 수취관계라면 나는 이러한 현실 쪽의 사례를 훨씬 더 선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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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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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외로움과 함께 사는 일상 – <그와의 짧은 동거> [기획회의051230]

!@#… 지난 호 <기획회의>에 들어간 원고. 장모씨 이야기 연작 가운데 가장 이야기로서 완성도가 뛰어났던 파트가 책으로 나오니, 대략 흡족. 하지만 성찰적이고 비유력 깊은 작품이 대형히트를 치기에는 출시 타이밍이 다소 애매. 미디어 노출도 그리 많이 되지 않은 듯 하고… 음. 아쉽다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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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과 함께 사는 일상 – <그와의 짧은 동거>

김낙호(만화연구가)

바퀴벌레라는 존재는, 인간들의 사회에 있어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들은 자신들만의 룰에 의해서 자연계를 멋대로 바꾸어버렸고, 대다수의 동물들은 내쫒기거나 또는 인간에게 식료품이나 노예로 이용당하는 입장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바퀴벌레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생태 규칙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지금 이곳에서 인간 세계와 공존한다. 물론 인간들로서는 그런 낯선 존재들을 반길 이유가 없기 때문에 갖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바퀴벌레가 병균을 옮긴다고는 하지만, 사실 인간들이 옮기고 다니는 병균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소탕’하려고 하지만, 지금껏 빈번히 실패해왔다. 굳이 말하자면 바퀴벌레라는 종은 인간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린지 오래인 셈이다. 인간세상의 일부지만 조금은 다른 존재.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은 내면에 귀중함을 감추고 있는, “언젠가는 백조가 되어 날아오를”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다. 벌레는 다르면서도 그냥 범속한 존재다.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냥 일상적인 무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벌레는 심지어 어떻게 되든 동정조차 가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문학에서는 바퀴벌레, 또는 실제로 바퀴벌레를 지칭하지만 그냥 ‘벌레’라고 표현되는 존재들은 아주 흥미로운 비유로 활용되고는 한다. 벌레로서의 인간은 범속하면서도 범속 이하인 처지, 또는 세상 속에서 가치가 없음에 대한 자기 환멸의 표현으로 활용하기 좋은 것이다. 세상 속의 부조화, 부조화의 결과인 외로움에 대한 자학적인 변명의 수단으로서 이보다 더 강력한 비유를 찾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관료주의 체코 사회 속에서 카프카가 “어느 날 일어나보니 커다란 벌레가 되어” 있지 않았던가.  

최근 출간된 <그와의 짧은 동거>(장경섭 / 길찾기)는 바퀴벌레와 동거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작가의 페르소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자아의 충돌, 일상화된 소외에 대한 성찰 등을 핵심주제로 삼으며 독립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장모씨 이야기> 연작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바퀴벌레와 동거하게 된다. 단칸방에서 자취하는 젊은 남자의 집에 바퀴벌레가 공존하는 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지만, 어느 날 진짜로 본격적인 룸메이트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같이 라면도 끓여먹고, 술도 먹으러 가고, 청소도 분담하는 사이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장모씨와 바퀴벌레의 짧은 동거생활을 따라가며, 사람이 만나고 우정을 발휘하다가 다른 인간관계 속에서 소원해지기도 하며 결국 갈라서고는 여운이 남게 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어떤 마법의 계기가 있거나 갑작스러운 놀라움이 있기 보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인간 사이즈의 바퀴벌레와 함께 해도, 주인공은 특별히 놀라지 않는다. 아니 사실 특별히 놀라는 것은 전 작품을 통틀어 주인공의 여자친구 한 명 밖에 없는데, 그녀마저 사람 사이즈의 바퀴벌레라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장모 씨가 진짜 바퀴벌레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놀랄 따름이다. 다르고 비속해도, 어차피 이 세상의 일부다.

바퀴벌레는 이 사회에서 비루한 처지에 있는 어떤 계층에 속해 있는 자다. 실제로 <장모씨 이야기> 연작 가운데 인권만화 모둠 <십시일반>에 실린, 동남아 노동자와 동성애 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작품에서 보여준 작가의 세계관을 고려할 때, 이 부분에 대한 섬세한 비유력과 묘사는 경탄할만 하다. 하지만 동시에, 바퀴벌레는 일상화된 외로움을 살아 나가고 있는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 이미 무덤덤해진 자기 자신의 좀 더 비속하지만 나름의 생활 패턴이 있는 또 다른 파트너, 가상의 생활 상대 말이다. 뜨거운 우정이나 불타는 애정이 아니라, 그냥 같이 사는 룸메이트. 적당히 배려해주고, 적당히 무관심해지는 그런 사이. 필요 이상으로 개입해서 내 생활을 바꾸어 놓지도 않지만, 영향을 미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남을 대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어떤 일면을 대할 때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것을 ‘일상’이라고 불러 왔다. 기묘하게 현실적인 판타지이자, 단절된 자아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매력 말이다. 스스로 무너질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화된 외로움이 있는 어떤 자아가, 이 사회 속에서 어떤 일상화된 비속함과 소외를 지니는 어떤 자아와 만나서 서로를 보충해준다. 하지만 그것은 외로움의 해소가 아니라, 외로움과 함께 사는 법을 좀 더 부드럽게 터득해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모씨와 바퀴벌레의 생활은 무언가 버디무비와도 같은 티격태격거림과 달리 은근슬쩍 시작하고 은근슬쩍 끝난다. 그 이별은 슬프기 보다, 자연스러운 성장의 일부분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상징의 무게에 짓눌린 무겁고 우울한 작품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부드럽고 열린 선의 흑백 그림이 전해주는 풍부한 감성은 이 작품의 균형감각을 대변해준다. 이러한 필체 속에서 공간의 묘사는 현실의 남루함이 과장되지도 은폐되지도 않는 정도의 수위로 조절된다. 장모씨와 바퀴벌레가 동거하는 자취방 공간에 베어 있는 생활의 냄새는 어떤 자세한 사진으로도 따라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가득하다. 이야기의 연출 역시 적당한 반전과 효과적인 시간 이동이 돋보이는 극적 구조를 활용하면서도 특유의 담담함을 잃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섞여 들어가며, 오랜 시간 공들여 구상해낸 작품이라는 흔적이 역력하다. 책에 같이 실려 있는 다른 짤막한 단편들과 비교할 때 이러한 요소들은 더욱 돋보인다.  

만약 <그와의 짧은 동거>가, 한국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히트를 기록하던 수년 전에 나왔더라면 아마 대형 히트를 쳤을지도 모르겠다. 유감스럽게도 연재지면이 없어지는 바람에 거의 5년여를 너무 늦게 출간한 템포 늦게 출간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환상적 비유를 생활의 남루함 속에서 활용하여 일상 속의 성찰을 이야기했던 감수성이 지니는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외로움에 대해서 청승을 떨기에는 너무 그 상태에 오랫동안 처해있던 이야기. 모든 이로부터 버림받았다느니 하는 과장이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어딘가가 비어있는 것 말이다. 바퀴벌레와의 동거 속에서, 약간은 그 생활에 더 능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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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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