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에라는 취향문화를 바라보기 [문화저널 백도씨/창간호]

!@#… 청강문화산업대학에서 새로 창간한 월간 문화저널 백도씨에 기고한 글.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모에 취향은 아니지만 (구세대다 구세대…), 이쪽 계통의 현재 가장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니까. 이미 전에 해오던 이야기에 약간 더 살을 붙여서 모에라는 현상을 한국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화두 몇개를 던진 정도. 한겨레에 기고한 하루히 글과 연동시켜서 읽어봐도 좋을 듯. 아 그래도 창간호의 품위를 조금 지켜주는 의미에서, 모에의 성적 코드에 대한 이야기는 과감히 생략. 다른 지면에서 한번 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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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에라는 취향문화를 바라보기

김낙호(만화연구가)

모에라는 시대정신

모에는 좋든 싫든 현재 일본 대중문화 하드 유저들의 기이하다면 기이한 ‘시대정신’이다. 우선 다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모에라는 패턴은 이전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간단히 짚고 넘어가보자. 예를 들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레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한다면, 그냥 팬일 뿐. 하지만 붕대를 맨 미소녀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이고, 하필이면 레이가 그 결정체이기 때문에 좋아한다면 그건 어엿한 ‘붕대소녀 모에’다. 모에하는 사람은 수많은 만화, 애니, 게임 등 장르 대중오락문화를 샅샅이 뒤져가면서, 그 중 붕대를 맨 소녀 캐릭터를 찾아내며 애착을 보인다. 그리고는 붕대소녀는 자고로 3분에 한번씩 아픔으로 얼굴을 찌푸려야 하며, 부상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서 활약을 벌이려다가 아픔으로 한번 넘어져 줘야 하며, 머리에 붕대를 맬 경우 머리카락 전체를 뒤덮어서는 안되고 이마와 한쪽 눈 정도까지만 덮어야 한다는 등 나름의 공식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한다. 당연히 붕대소녀를 묘사한 각종 피겨와 게임, 만화책들을 긁어모은다(문화평론가 아즈마 히로키의 용어를 빌자면, ‘데이타베이스적 소비’). 80년대의 애니광들은 『오렌지로드』 마도카의 이고 민메이라는 아이돌을 숭배했지만, 2000년대의 오타쿠들은 『오네가이 티쳐』 미즈호를 보며 누님 모에를 한다는 식의 차이다. 특정한 이야기 속에 놓여진 캐릭터 전체를 하나의 동경의 대상으로 놓기보다, 그 캐릭터가 지니는 특정한 구성요소에서 쾌감을 느끼는 구조 말이다.

모에에 대해서, 사람들은 범람하는 대중문화 콘텐츠를 즐기는 방편으로 파편화, 특성화된 선호 취향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파편화된 여러 기호의 세계 속에서 나름의 공통적 요소들을 찾아 나서서 캐릭터성의 근본적 부분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시도이기도 하다. 즉 원형적인 요소들의 파편을 긁어모아서,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이상향을 조합하여 맞추어내는 방법인 셈이다.

하지만 모에라는 것이 정말로 이전 세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향유방식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비록 궁극의 오타쿠 ‘오타킹’을 자처하는 오카다 도시오 같은 7-80년대 만화/애니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소위 1세대 오타쿠들에게 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행위로 규정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모에 특유의 미형 캐릭터에 대한 동경은 사실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만화편집자 출신 평론가 사사키바라 코우는 『미소녀의 현대사』라는 저서에서 아예 모에를 미소녀에 대한 애호와 동격으로 놓기까지 하는데, 무려 TV애니 『바다의 트리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마크로스』의 아이돌 스타 민메이의 ‘팬’을 자처했던 그 세대라 할지라도 민메이 성우의 앨범들을 긁어모으고, 일러스트들을 서로 교환하며, 기타 각종 상품들을 수집해오지 않았던가. 바로 이러한 점들은 사실 모에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일부 특정 매체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다는 중요한 현상과도 연결된다.

모에는 왜 만화/애니/게임 문화와 친한가

‘모에’ 행태는 실체를 획득할 수 없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실제로 획득할 수 있는 대상이면 가서 얻어내면 되는 것이지, 관련 굿즈를 사서 모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 캐릭터를 사랑하더라도 동경의 대상이 되는 실체로서의 배우가 있다. 즉, 겨울연가의 모 캐릭터에게 반한 나머지, 욘사마의 팬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만화/애니/게임류의 경우, 캐릭터들은 캐릭터 자체로서만 존재한다. 실체를 얻을 수 없기에 하나의 전체로서의 상대를 동경하고 역할모델로 삼는 방식의 향유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하기야, 인기 없는 방구석 폐인들에게 있어서는 이웃집에 사는 3차원 물질계의 여성들도 이미 실체를 획득할 수 없는 먼 세상 신비의 대상이기는 매한가지지만 말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때로는 집착적일 정도의 애정을 과시하는 방법은 바로 소비와 재창조다. 관련 상품들을 소비하며, 또한 이미 주어진 캐릭터로서의 요소들을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 재결합하고 재창조해내는 방식으로 즐긴다. 이것이 곧 캐릭터 상품 시장과 동인문화로 치환되어 나타나는 셈이다.

시각적 표현방식으로서의 만화언어 역시 모에를 위한 유리한 조건이다. 실제로 카툰화법을 채용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이 가장 강하게 모에 취향과 연계되어 있다. 그에 비해서 소위 ‘실사판’으로는 도저히 같은 정도의 모에를 만들어내기가 힘들다. 앞서 이야기한 가상성 – 즉 캐릭터가 실체가 없는 캐릭터 자체로서만 존재한다는 요소와 함께, 만화언어는 모에 요소들을 가장 특징적으로 표현하고 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툰화법은 근본적으로 생략과 집중의 표현방식이기 때문에 압축적으로 핵심 모에요소를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안테나 머리’라는 모에 요소를 실사판으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아무리 무스를 2-3통 뿌린다고 할지라도 과장되고 뚜렷하게 나타내기가 대단히 힘들며, 성공하더라도 오히려 우스꽝스러워 보일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카툰화법을 채용하면 안테나 머리는 쉽게 하나의 기호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각각의 분절적 모에 요소들을 표현하기에 대단히 용이하며, 나아가 이런 요소들을 자유롭게 서로 결합하는 것 역시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카툰화법이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이래로 모에적 향유가 급격하게 발달하게 된 점에는 컴퓨터 게임의 대두가 큰 역할을 했다. 사실 만화/애니 향유층을 지양분 삼아서 발달, 카툰화법으로 표현된 캐릭터들의 모험담이 일본에서는 컴퓨터 게임의 주류로 자리매김한 것은 이미 80년대부터 이루어진 일이다. 하지만 90년대의 급격한 PC보급과 각종 비디오게임 콘솔의 반복된 자기혁신은 게임을 오타쿠 문화의 보다 강고한 축으로 자리매김시켰다. 특히 RPG와 미연시 계열 등 손가락의 반응속도보다는 내러티브적 흐름을 중시하는 장르들에 있어서, 캐릭터성은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기에 이것은 자연스럽게 오타쿠 문화 전반으로 같이 융합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고정된 스토리를 따르는 게임이라고 할지라도, 게임 장르 자체가 가지는 특성이란 바로 내러티브 구조의 느슨함 및 루트의 복합성이다. 따라서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다양한 이야기 속에 처해지는 캐릭터성의 조합에 더 주목을 할 수 밖에 없는 방식의 향유를 자연스럽게 강제하는 셈이다. 모에는 이러한 양식을 흡수하며 더욱 공고한 주류 향유 패턴으로 발달했다. 이렇듯 모에는 만화언어의 취향 클러스터 – 즉 만화 자체, 카툰화법을 채용한 주류 애니메이션, 카툰화법으로 이루어진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게임, 그리고 그와 연관된 피겨 등 각종 상품을 포괄하는 대중문화 향유 취향의 집합 – 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국 현실과 모에

사실, 모에는 상업적 이유 때문에 선 굵은 대형 서사물보다 캐릭터 조합극으로 주류 방향을 잡고 있는 현대 일본의 서브컬쳐 산업이기에 여기까지 주류화될 수 있었던 방식이다. 모에적 향유는 단지 재미있는 특정 작품 한 가지에 대한 낮은 수준의 몰입이 아니라, 만화언어 취향 클러스터 전반에 대한 높은 수준의 몰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신문 시사 만화를 가끔 즐겨보거나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는 정도가 아닌, 만화 자체를 좋아하는 정도는 되어야 모에적 향유를 시작할 수 있다. 모에는 근본적으로, 각종 캐릭터 공식에 대한 광범위한 흡수와 적극적 집착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소수 매니아적 취향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소수 매니아적 취향의 소유자들이(넓은 의미의 ‘오타쿠들’) 충실하고 강력한 구매력을 발휘해 주어서 주류 시장으로 부상시켰다. 그리고 그 취향이 창작자/생산자들에게도 피드백되어, 모에 취향의 시장이 공고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한국에도 일본의 만화/애니/게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모에 취향을 가지고 있는 매니아 층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의 시장 구매력은 모에를 주류 시장으로 올려놓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취향으로서는 모에를 표방하지만, 소비를 통해서 그 취향시장을 발전 또는 최소한 유지시켜놓을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이다. 만화는 스캔본, 애니는 인터넷 불법공유 동영상, 게임은 복사CD를 쓰면서 취향만으로 모에를 추구하는 것은 시장의 형성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정식으로 모에적 소비를 하는 사람들이 극히 소수에 불과한 정도라면, 시장과 취향이 결합된 진짜 문화산업으로 발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특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일본의 문화콘텐츠 성공담을 벤치마킹하고자 할 때, 그것이 모에 취향의 사업 모델인 경우다. 게다가 이미 영화나 TV드라마의 성공사례에서 볼 수 있듯, 여전히 한국의 일반적인 대중문화 향유자들은 완성된 극적 구조 속에서 벌어지는 선 굵은 이야기에 대한 수요가 높으며, 실체로서의 스타 또는 현실의 직접적 반영으로서의 캐릭터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모에적 향유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는 점 역시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사항이다.

물론 모에는 그 자체로서는 선도 악도 아니다. 이미 일본에서 나름대로 충분히 장단점을 드러낸 대중 문화패턴인 만큼, 받아들일 것은 본받고 경계할 것은 버리면 된다. 예를 들어 모에적 향유가 지니는 열정적인 요소들은 받아들이고, 지나치게 파편에 집착하여 전체 상을 경시하는 풍조는 막아내면 된다. 이 두가지 극단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지키면서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또 향유하는 문화로 나아가면 이 시대의 문화현상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고 또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혹은 그냥 평이하게, 좀 더 즐겁게 대중문화를 즐길 수 있는 촉매 작용이라도 충분할 것이다.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지금 세계는 ‘하루히’ 열풍 [한겨레21/615호]

지금 세계는 ‘하루히’ 열풍

괴짜 주인공의 엽기적 유머, 라이트 노블의 정점에서 탄생한 성공작… 만화·애니메이션의 감수성으로 향유자의 취향 클러스터에 눈높이 맞추다

– 김낙호 (만화연구가)

최근 인터넷을 돌면서 대중문화 관련 포스트들을 검색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발견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스즈미야 하루히’다. 알라딘이나 예스24 같은 인터넷 서점과 교보문고 전체 판매순위에서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 3권이 100위 안에 포진해 있고, 인기검색어 순위에서도 이 이름이 종종 출몰한다.

각종 동영상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속칭 ‘하루히즘’이라고 불리는 패러디 영상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팬들이 시리즈의 1권인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엔딩의 ‘하루히 댄스’를 따라하는 동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상에서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붐은 일본은 물론 한국, 나아가 북미나 유럽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각종 대중문화 관련 블로그와 포럼에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끝없이 오르내려서, 이른바 “하루히는 세계 대세”라는 장난 섞인 말이 돌아다니고 있을 정도다.

각국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폭발적 인기

그 이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스타일의 감성적 현대소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하루히는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원작소설은 다니가와 나가루 지음, 이토 노이지 일러스트, 대원씨아이 펴냄)의 주역인 미소녀 여고생 캐릭터를 칭한다. 하루히는 자기소개 시간에 “평범한 인간에겐 관심 없습니다. 이 중에 우주인, 미래에서 온 사람, 초능력자가 있으면 제게 오십시오. 이상”이라고 ‘뒤집어지는’ 인사를 하는 괴짜. 소설의 내용은 지루함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이 괴짜 미소녀 여고생이 SOS단이라는 온갖 특이한 활동을 추구하는 동아리를 만든 뒤 벌어지는 ‘황당한’ 이야기다. 이 황당함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내레이션을 하는 남학생 ‘’. 하루히의 앞자리에 배치돼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는 죄로 동아리의 창립에 관여하는 은, 하루히에게 ‘반강제로’ 끌려온 ‘평범한’(이상하긴 하나 현실 수준에서 수용 가능한 평범함을 가장하고 있음) 학우들과 함께 부조리한 코미디의 세계로 빠져든다. 알고 보니 실제로 주변에는 외계인과 초능력자 등 기이한 존재들이 우글거렸으며 또한 우주는 하루히가 지루하면 지루한 데 맞춰, 재밌어하면 재밌어하는 데 맞춰 재편되는 ‘하루히의 매트릭스’였다. 이렇게 일면 엄청난 스케일로 발전해나가지만 여전히 작품은 가벼운 학원 코미디물의 외향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기에, 묘한 불균형의 즐거움이 쏠쏠하다. 이런 지극히 장르 대중오락 성향, 그것도 이른바 ‘오타쿠’ 취향의 소설이 그 정도까지 붐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루히 시리즈’는 속칭 라이트 노블로 분류된다. 거칠게 정의내리자면, 라이트 노블은 만화·애니·게임 등 일본에서 흔히 ‘서브 컬처’라고 부르는 대중문화 장르들과 감수성이 연동돼 있는 장르소설을 칭한다. 하지만 장르라고는 해서 추리소설이나 공상과학(SF)처럼 특정 소재와 사건들을 다룬다는 개념으로 묶이는 것은 아니고, 만화·애니메이션·게임 매체의 주류 대중문화 영역을 장르문화라고 부를 때의 그런 의미다. 라이트 노블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한 대본을 소설화한 것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만큼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감수성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커서, 매체 이식이 쉽게 일어나기도 한다.

‘하루히 시리즈’는 라이트 노블 계열의 정점에서 탄생한 성공작이다. 이 작품은 당대의 여타 소설 문학의 성과에서 자양분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라이트 노블로서 감성을 공유하고 있는 만화·애니·게임 쪽의 장르적 규칙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괴짜 주인공이 정체불명의 클럽을 만들어 평범한 학우들을 엽기적 유머의 세계로 물들인다는 구성은 순수문학이나 영화보다는, 만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장르 규칙이다. 알고 보니 평범한 일상의 주변이 사실은 우주적 음모의 소용돌이였다는 식의 과장 역시 SF 애니메이션에서는 친숙하다. 또한 미소녀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특정한 구성 요소- 메이드복, 고양이귀, 유아 취향 얼굴과 큰 가슴의 결합, 무표정 등- 들을 분류, 각각의 항목 단위로 열광하는 현상인 속칭 ‘모에’ 취향에 대한 집착은 90년대 중반 이래로 그쪽 계열에서 폭발적으로 발달시켜온 것이다.

장르의 힘, 취향의 힘!

라이트 노블이기에 ‘하루히 시리즈’는 단순히 소설 애호가들을 불러모으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르적 즐거움에 대한 총합으로서 만화·애니·게임 분야의 지지자들을 효과적으로 규합할 수 있다. 이 시리즈가 인기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장르의 힘이다.

그리고 ‘하루히 시리즈’가 히트한 두 번째 이유는 취향의 힘이다. 이것이 진짜 핵심이다. 양적 과잉으로 규정되는 현대 대중문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무언가를 즐기는 것은, 매체나 작품에 대한 집착이 아닌 특정 취향의 묶음이다. 말하자면 ‘취향 클러스터’다. 예를 들어 만화를 즐긴다고 하는 사람은 대부분 만화의 모든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세부 취향을 즐긴다. 그리고 그 선호하는 취향의 정체성이 선명할수록, 취향과 연동되는 다른 매체, 작품, 상품으로 자연스럽게 향유의 범위를 넓히게 된다. 미소녀 연애물 만화에 심취하게 되면 다른 만화인 예술만화와 학습만화로 애정을 키워나가기보다는, 애니메이션·게임·모형 등 여러 인접 분야에서 미소녀 연애물의 취향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취향을 깊게 파고들수록, 여러 매체와 향유 방식을 포괄하는 취향 클러스터를 형성한다. ‘하루히 시리즈’의 히트는 이런 취향 클러스터의 대표적 성과다.

이런 취향 클러스터가 작동했기에 올 4월 일본에서 TV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방영되기 시작하면서 소설로 피드백되고 그 인기가 증폭되었다. 이것이 이 시리즈가 80, 90년대의 혁신적 작품들에 비하면 전복적 에너지를 연성화한 정도에 불과하고, <멋지다 마사루>만큼 마음먹고 막 나가지도 않으며, <신세기 에반게리온>만큼 그럴듯하게 우주적 음모론을 전개하지도 않지만 폭발적인 힘을 얻은 이유다. 국내에서도 여러 경로를 통해 뿌려진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다른 경쟁 작품들보다 높은 품질의 미소녀 영상을 제공했으며, 줄거리에서도 원작 이상으로 모에 취향에 대한 암묵적 지지를 던지면서 팬들을 감동시켰다.

또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원작의 사건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섞어 내용상으로는 5화의 외전 정도에 해당할 에피소드를 아무 설명 없이 1화로 편성해 방영하는 등 파격적 연출을 사용했는데, 이 점이 오히려 소설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며 팬들의 참여의식에 더욱 불을 붙였다. 팬들은 패러디 동영상 공유는 물론, 소설의 설정에 대한 각종 정보 교류와 아마추어 동인지 창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발적인 붐을 조성하고 있다. 즉 ‘하루히 시리즈’는 새로운 혁신을 이뤄내기보다, 여러 향유 양식을 효과적으로 혼용해 성공한 셈이다.

당신의 ‘모에’는 무엇입니까

장르와 취향의 힘은 작품 자체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취향을 가진 자신의 향유자들과 얼마나 가깝게 동조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히 시리즈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자기 작품의 현재 향유자들과 눈높이와 입장을 맞춰주고 있음을 밝힌다. “모에 요소가 더 필요하니까”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특정 미소녀 캐릭터를 동아리에 강제 가입시키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작품의 향유자들이 지니는 취향과 동일시된다.

작품보다는 장르와 취향을 향유하고자 하는 시대에, 하나의 작품이 뚜렷한 족적을 남기려면 흐름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하루히’ 소설을 즐긴다는 것은 하나의 작품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대변하는 만화·애니메이션 중심 장르문화의 미소녀·학원 코미디·우주 음모론 취향을 즐긴다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적합한 대중문화론은 단순한 작품론이 아니라 장르와 취향을 수용하는 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한 라이트 노블의 히트로 한층 힘을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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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한겨레21에 실린 글 (정간지 발표원고의 경우 다음 호가 배포 또는 마감되어갈 즈음 – 즉 해당 지면이 충분한 유통을 마칠까지 기다린 후 블로그에서도 공개한다는 개인적 원칙). 원래는 생활면에 들어갈 가벼운 흥미성 기사였는데, 여차저차 쓰다보니 의도보다 하드해져서 결국 또 문화면으로 배치되었다. OTL 그런데 역시 한참 이쪽 계열 사람들의 대세라서 그런지, 무려 잡지 기사 페이지가 스캔되어 올라오는 상황까지 발생. 이번 건을 담당하신 구** 기자님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계실 듯. 개인적으로는 본문에 언급한 ‘취향 클러스터’라는 개념을 다른 기회에 좀 더 깊숙하게 개념화시켜볼 욕심이 있음. 나머지 사족은 수시아님 블로그에 남긴 것으로 대신한다.

“…주인장님 말씀대로, 한겨레21과 뉴타잎 독자들의 차이를 감안해야 하니까요. ‘팬들을 위한 글’이 아니라, ‘그 팬들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글’. 사실 개인적으로는 하루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뭐랄까, 마치 일년전쟁 팬이 시드를 바라볼 때 느끼는 부족함 같은 것이죠.”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가 —

‘모에’를 통해서 기자의 전문성을 생각하다

!@#… 뭐! ‘모에’가 이렇게 건전무쌍한 개념인 줄, 처음 알았다.

건전한 뉴스 읽기(클릭)

…이왕 모에를 소재로 기사를 쓴다면, 아무리 마감이 바쁘더라도 최소한 모에가 뭔지 한번 제대로 알아보는 정도는 했으면 좋겠는데. ( 단지 신문기사라는 이유만으로 이 설명이 ‘모에가 뭐에요?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표준 대답으로 스크랩되고 돌아다닐 것을 생각하면, 참 세상 별 볼일 없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 기자에게 있어서, 속보와 흥행이라는 공명심의 불길 속에서 가장 먼저 증발하는 것은 바로 전문성. 하기야 기자 뿐만이 아니겠지만.

—(3번째 리플까지 보고 보충설명 추가)—

!@#… 그럼 모에가 뭐냐고? 쉽게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히로스에 료코가 귀여워서 좋아하고 있다면, 그건 그냥 좋아하는 것일 뿐. 하지만 히로스에 료코라는 인물보다, 영화 <철도원>에서 커다란 오렌지색 조끼를 입고 있는 미소녀의 이미지가 눈앞에  집착한다면 뭔가 좀 다른 경지다. 아니 한발 나아가서 철도원이고 료코고 뭐고 간에, 아예 “단발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커다란 오렌지색 조끼를 입고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집착적으로 불타오른다면 어떨까? 그것이 바로 모에. 모에는 특정 요소들에 대한 , 그리고 그 요소들의 조합에 대한 애정적 집착. 그 과정에서 개개 인격체나 캐릭터 자체는 오히려 뒷전으로 밀려날수도 있고. 그리고 그건 세부 요소로 환원될수록 확실해진다. 예를 들어서 미소년모에라고 한다면, 그다지 모에라고 명함 내밀기도 뭣하다. 안경모에, 고양이귀모에, 방울모에… 이 정도는 되야 좀 체면(?)이 산다. 위에서 어설픈 기자양반이 대충 쓴 것 마냥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모에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귀여운 것이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어떤 특정한 요소(세라복이라든지, 안테나 머리라든지, 뾰족한 덧니라든지)에 집착을 하는 것이 모에다.  

에반게리온의 ‘레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한다면, 그냥 팬일 뿐. 하지만 붕대를 맨 미소녀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이고, 하필이면 레이가 그 결정체이기 때문에 좋아한다면 그건 어엿한 ‘붕대소녀모에’. 이 사람은 아마도 수많은 만화, 애니, 게임 등 장르 대중오락문화를 샅샅이 뒤져가면서, 그 중 붕대를 맨 소녀 캐릭터를 찾아내며 애착을 보낼 것이다. 아마 그리고 붕대소녀는 자고로 이래야해(3분에 한번씩 아픔으로 얼굴을 찌푸려야 하며, 부상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서 활약을 벌이려다가 아픔으로 한번 넘어져 줘야 하며, 머리에 붕대를 맬 경우 머리카락 전체를 뒤덮어서는 안되고 이마와 한쪽 눈 정도까지만 덮어야 한다는 등…), 하는 나름의 공식을 만들어내기 시작할 것이다. 당연히 붕대소녀를 묘사한 각종 피겨와 게임, 만화책들을 긁어모으고 (문화평론가 아즈마 히로키의 용어를 빌자면, ‘데이타베이스적 소비’). 만화/애니/게임이라는 서브컬쳐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양적으로 비대해진, 기호와 상징의 홍수인 일본이기에 나올 수 있었던 현상. 페티시즘적 쾌락과 집착적 대중문화 소비의 화려한 만남.

설명이 어렵다면, 이렇게 쉽게 요약할수도: 80년대의 애니광들은 <오렌지로드> 마도카의 ‘팬’이었지만, 2000년대의 오타쿠들은 <오네가이 티쳐> 미즈호를 보며 ‘누님 모에’를 한다

나중에 또 덤으로 추가:

1) ‘모에’라는 단어를 감탄사로 쓰면, “나는 지금 맹렬히 모에하고 있는 중이다”라는 뜻의 약칭이 된다. 왠 오타쿠 캐릭터가 아이돌 콘서트장에 가서, “모에~!!!”하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이다. 만약 모에의 대상이 되는 캐릭터가 “모에~?”라고 귀엽게 한마디 불러준다면? 그건 “나에게 모에해주시지 않을래요?” 라는 말의 약칭이 된다. -_-;

2) 리플에서 pseudorandom님이 지적하셨다시피, ‘모에’ 행태는 실체를 획득할 수 없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실제로 획득할 수 있는 대상이면 가서 얻어내면 되는 것이지, 관련 굿즈를 사모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냥 팬으로서 상대의 전체를 동경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특정 요소 단위로 집착할 필요도 없고. 만화, 애니의 2차원 캐릭터(의 특정 요소들)에 모에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 하지만 인기 없는 오타쿠들에게 있어서는, 3차원 물질계의 여성들도 이미 실체를 획득할 수 없는 먼 세상 신비의 대상이다.

3) 참고로, ‘모에’라는 단어는 “싹트다, 움트다” 라는 용어와 “불타오르다”라는 용어의 동음이의어 말장난이다. 오타에서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의미상으로는 불타오른다 쪽이 훨씬 적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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