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남녀: 여름 만화도서 추천 [중앙일보]

!@#… 중앙일보 여름 특집 도서 추천 “떠나자 책캉스” 의 지난주 꼭지, 만화 특집. 기선민 담당기자님이 설정한 컨셉은 만화남녀. 즉 남자 필자에게 남성 취향, 여자 필자 여성 취향의 추천을 받아서 병렬하는 것. capcold는 당연히 남성 필자 부분을 담당(…). 나름대로 평범한 남성 취향에 맞추어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어떨지. 여튼 책으로 나왔으며 대중적 취향을 갖춘 작품 가운데에서만 선정. 시차를 깜박하고 있다가 원고마감을 오버해서 아주 여러 사람 식은땀을 흘리게 만들어 드린 대단히 송구스러운 에피소드를 남김. 여기 백업한 건 당연히 직접 쓴 남자파트 only. 뉴스 편집 거치기 전의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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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낭만녀 `꿈이면 어때, 백마 탄 왕자님 … 역시 순정물` [중앙일보]
[떠나자 `책캉스` 만화남녀 `네모칸` 속으로]

…(전략)

<일지매> (고우영 / 애니북스 / 전8권)

호쾌한 재미의 원형이란 역시 기구한 운명에 맞서며 대의를 위하여 움직이는 호걸의 일생만한 것이 없다. 다만 그것이 허황된 공상이 아닌 진짜배기 쾌감을 줄 수 있으려면 초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사는 향기가 진해야 한다. 바로 고우영의 사극만화들이 그러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 정수가 담겨 있는 것이 바로 <일지매>다. 양반계층의 사정으로 버려지게 된 서자 일지매가 기구한 운명을 겪으며, 청나라와 일본에서 수련한 무술을 바탕으로 의적이 되어 부패한 조선사회에서 활약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창작사극. 고우영식 해학과 풍자, 자유로운 서술 방식이 완전히 제 모습을 갖춘 명작. 특히 일지매라는 주인공 캐릭터의 복합적인 심경묘사와 변천과정은 섬세함의 극치를 이룬다. 무협물이자 정치 사극의 요소도 가지고 있으며, 일지매라는 한 인간의 성장드라마이기도 한 탁월한 모험물이다. 특히 고우영 선생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주인공의 성장과 고뇌가 잘 드러나며, 진정한 영웅의 풍모가 강조되고 있다. 사회 모순에 대한 분노가 개별 악당들을 넘어 제도 전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지는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마치 소리꾼이나 마당극의 광대처럼 호쾌하고 시원하게 세상을 풍자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의 솜씨 앞에서는 그냥 작은 옥의 티에 불과할 뿐이다.

<아파트> (강도영 / 문학세계사 / 전2권)

진정한 공포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뒷간에서 귀신 손이 나온다는 식의 설정이나, 호숫가 숲속의 처녀귀신은 유감이지만 유통기한이 지난 셈이다. 진정한 공포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적 공간, 바로 아파트에서 시작된다. 아파트의 사람들은 서로를 잘 모른다. 하지만 항상 공간으로서는 마주보고 좁게 붙어있도록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과 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을텐데, 서로 만나게 되지는 않는다. <아파트>는 바로 아파트라는 공간이 주인공인 공포만화다. 밤 특정시간에 반대편 아파트의 모든 불이 꺼지고, 누군가가 죽는다. 익명의 공간, 익명의 죽음. 그러나 그 속에는 각자의 사정과 깊은 원한이 서려있다. 수많은 주인공들 각자의 사연을 촘촘히 깔고 서로 미묘하게 교차시켜 나가는 작가 강풀의 솜씨는 이미 발군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 속에는 필연적인 비밀, 미묘한 오해들이 서로 엇갈린다. 공포와 해학이 수시로 교차하며, 사람 사는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는 여름철 최고 추천 작품.

<짧은 소개>
– 단구 (박중기 / 학산문화사 / 8권 발간중): 상고시대를 바탕으로 하는 동양식 무협 판타지. 운명과 맞서는 처절하고 호쾌한 싸움의 연속이 강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 식객 (허영만 / 김영사 / 12권 발매중): 한국 요리를 가장 먹음직스럽게 그려내는 만화. 음식 속에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 히스토리에 (이와아키 히토시 / 서울문화사 / 3권 발매중) : 알렉산더 대왕의 전투 서기관 에우메네스의 특이한 일대기. 인간 사회에 대한 물오른 통찰력으로 중무장했다.

– 츄리닝 (이상신, 국중록 / 애니북스 / 5권 발매중) : 허름하고 편한 차림새로 친한 복학생 선배 자취방에서 농담 따먹기를 하는 듯한 분위기의 개그만화. 인간의 치졸함에 대한 멋진 유머.

– 어~이! 료마 (코야마 유우, 타케다 테츠야 / 삼양출판사 / 17권 발매중): 검술의 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세를 평정하기 위해서 힘보다 화합과 실용주의를 펼친 특이한 영웅, 일본 근대화의 일등공신으로 꼽히는 사카모토 료마의 일대기.

– 야후 (윤태호 / 학산문화사 / 전 20권): 8-90년대를 관통하는 이 사회의 부조리함이 한 인간을 어떻게까지 분노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대안역사 SF물. 거침없는 호흡과 전개가 마지막권을 부른다.

– 바람의 파이터 (방학기 / 길찾기 / 전 10권): 강함의 진리를 찾아 나선 구도자, 최배달의 인생. 굵고 간결한 화풍 속에 진정함 강함을 추구하던 의지가 역동적으로 녹아들어가 있다.

– 비천무 (김혜린 / 대원씨아이 / 전 4권): 선 굵은 무협물의 틀에 드라마틱한 순정만화 특유의 섬세함이 결합한 수작. 여성팬들 만큼이나 남성 팬들도 많은 대하 무협사극.

– 아기공룡 둘리 (김수정 / 대원씨아이 / 전 5권): 둘리의 귀여운 모험도 모험이지만, 둘리가 식객으로 눌러 살고 있는 집의 주인인 고길동이라는 가장의 페이소스가 더욱 일품이다.

김낙호(만화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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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의 정도를 걷다 – 『카페타』[기획회의 060701]

열혈의 정도를 걷다 – 『카페타』
김낙호(만화연구가)

한국은 세계적인 자동차 강국을 자처하면서도 자동차 문화는 그다지 번성하고 있지 않은 특이한 나라다. 자동차 생산이나 판매량에서는 미국이나 일본, 유럽의 강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정작 자동차가 생활 문화의 독특한 단면이 되어있는 자연스러운 이미지가 부족하다. 아, 물론 한국 대도시 특유의 난폭운전이니 비슷비슷한 색상과 모델로 가득한 거리니 하는 정도의 것은 있지만 말이다. 특히 그런 단면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자동차를 대중 스포츠 오락으로서 활용하는 것, 바로 모터스포츠 분야다. 포뮬러 급의 레이스는 F1800 정도 밖에 없으며, 선수층도 좁고 대중적 기반마저 적다. 하기야 모터스포츠는 자동차 회사들이 자신들의 우수한 기술력을 자랑하기 위한 경연장이니 만큼, 기술력보다는 서비스나 가격경쟁력 등을 강점으로 마케팅하고자 하는 업체들이 주종을 이룬다면 그다지 효용이 없기는 하다. 하지만 기계와 인간이 하나가 되어 극단적으로 격렬한 상황 속에서 경쟁하는 스포츠가 지니는 현대적인 매력과 쾌감이란 결코 만만치 않기에, 은근히 아쉬울 따름이다.

카레이싱이 보편화되어있는 자동차 강국 가운데, 미국은 그것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일본은 만화를 만든다. 특히 장편 연재만화에 있어서 카레이싱은 지지기반과 전문지식만 갖출 수 있다면 썩 좋은 소재다. 머신의 세세한 튜닝에 의한 성능 향상, 정비사와 운전사와 매니저 사이의 팀워크, 기계의 부족함을 극복하는 정신력, 0.1초의 승부에 목숨을 거는 장인정신에 가까운 승부욕, 스포츠맨십과 상업성 사이의 갈등까지, 드라마틱한 요소가 넘쳐난다. 게다가 그 것이 한판승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쌓여가면서 성장을 하는 방식의 흐름이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상황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서 트랙과 머신들을 빌려오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자료 참조를 열심히해가면서 멋지게 그려서 연출해내면 된다. 다만 여느 전문 소재 만화와 마찬가지로, 잘못하면 지나치게 세세한 매니아의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대중적 호소력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으니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만 말이다.

『카페타』(소다 마사히토/학산/2권 발매중)는 카레이싱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공식을 엮어내는 장르 오락만화다. 이야기는 편부 슬하에서 살며 자동차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한 어른스러운 소년 캇페이타의 성장담으로 시작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직장에서 폐품과 중고부품들을 긁어모아서 카트를 만들어주고, 소년은 카트를 타면서 자신의 레이서로서의 재능을 발견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표지에서 볼 수 있듯 이야기는 소년이 성장해서 정식 레이서가 되어 활약할 때까지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작품이 주목할만한 점은 어떤 대단히 특이한 새로운 발상을 담고 있거나 독특한 스타일로 독자를 놀래키기 때문이 아니다. 정반대로, 너무나 우직할 정도로 고전적이기까지 한 열혈 성장물의 정도를 가고 있기 때문이다. ‘열혈’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강렬한 열망과 물러서지 않는 고집을 통해서 어떤 불가능한 난관이라도 결국 뛰어넘어버리는 방식의 전개를 지칭하곤 하는데, 원래는 일본 대중문화에서 완성한 공식이지만 오히려 한국인의 정서와 부합하는 부분이 많다 (마치 한국에서 국민스포츠가 되어버린 고스톱처럼 말이다). 이미 전작 『스바루』나 『출동 119』 같은 작품을 통해서 열혈 정서에 대한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 작가의 근작인 만큼, 『카페타』의 정서는 책장을 넘기다가 손이 데일까 걱정될 정도로 뜨겁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한곳으로만 몰두하는 주인공은 정도를 걸어가며 자신의 재능을 하나씩 발견하고 성장시킨다. 아버지와 친구들 등 각종 조력자들은 그의 열정 하나에 반하여 그가 더욱 자신을 불사르도록 도와준다. 소년은 레이서가 돼서 유명해지겠다거나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목표 따위 없다. 다만 자동차로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달리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쏟아 붇고 싶을 정도로 좋을 뿐이다. 폐품으로 만든 싸구려 카트라고 할지라도, 주인공의 그런 열혈이 투여되면 최고의 머신들과 어깨를 견주며 달릴 수 있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 이 작품은 ‘공식’에 충실하다. 공식을 깨버림으로서 즐거움을 주는 길과 좋은 공식의 정도를 우직하게 추구함으로써 즐거움을 주는 길 가운데 명백한 후자인 셈이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캐릭터 구도는 전형적인 완성된 천재와 대비되는 미완성 천연 천재의 성장기다. 완성된 천재는 좋은 환경과 스스로의 노력이 겸비되어 그 자리에 올랐으나 마땅한 라이벌이 없기에 오히려 고독한 존재다. 그에 비해서 미완성 천재는 천부적 재능을 이제야 하나씩 발견해 나아가는데, 그 성장의 속도가 대단히 빨라서 어느 틈에 완성된 천재의 관심을 끌게 되며 라이벌로 올라선다. 천재적 주인공과 천재적 경쟁자가 서로 더욱 큰 완성의 경지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기에『유리가면』같은 고전 만화든, 『대장금』같은 비교적 최근의 드라마든 즐겨 쓰는 구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장기연재를 위해서 각 성장의 과정은 피라미드형으로 단계가 나누어져 있어서, 하나를 해결하고 다음 목표를 향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F1에 나가기 위해서 어릴 적에 카트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라는 것이 이 지점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과정을 질주하게 만드는 추진력은 바로 앞서 이야기한 ‘열혈’이다. 완성된 천재 역시 미완성 천재 주인공의 추격에 감화되어 잊고 있었던 열혈의 불길을 지펴나가는 방식으로 결국 강력한 실력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열혈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역시 작가의 물오른 연출력이다. 둥글둥글한 모양이지만 거친 선으로 이루어진 인물들은 일견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거칠게 불타오를 준비가 되어있다. 풍부한 표정과 땀방울이 만화적 과장을 이루어내며, 리얼하게 묘사된 배경이나 머신과 대비를 이루며 더욱 독자들을 이입하게 만든다. 순간의 클로즈업과 강렬한 순간의 큰 장면묘사를 효과적인 리듬감으로 배치하는 칸 연출 역시 일품이다. 부드러운 독서의 흐름을 막을 정도로 스타일리쉬한 실험을 하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현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자동차의 세세한 부품이나 운전설명에 낯설다 할지라도, 감정적으로 격양된 뜨거운 연출에 공감하며 볼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것은 훌륭한 작가적 재능이다.

물론 아직 연재 초입에 있는 작품에 대해서 완성된 평가를 내리는 것은 힘든 일이다. 실제로 이 작가는 전작에서, 열혈과 천재성의 성장 속도가 폭주하여 이야기를 도저히 수습 못하고 중도에 하차해버린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이고, 지금 당장은 이 꼬마 카 레이서의 성장담이 궁금해서 계속 몰입하여 지켜 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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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PS. 그런데 열혈우주격투발레만화 스바루는 언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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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에 그치지 않는 사색 – 『사랑해』[기획회의 060615]

공감에 그치지 않는 사색 – 『사랑해』

김낙호(만화연구가)

2000년대 초, 짧은 감상주의적 에피소드로 구성되며, 둥글둥글한 그림체에 파스텔톤 색채를 입힌 만화 모음집이 크게 유행한 바 있다. 소위 ‘에세이툰’이라는 이름 하에 특히 인터넷을 중심으로 연재하고 출판물로 출간하여 선물용으로 판매되었는데, 그 중에는 큰 히트를 기록한 것도 더러 있다. 『파페포포 메모리즈』 같은 출판 시장의 밀리언셀러, 『광수생각』같이 일간지 지면이라는 매체력을 바탕으로 문화적 영향력을 떨친 것, 등등 여러 가지가 이에 포함된다. 하지만 유행을 타는 사조가 더러 그렇듯, 이 경우 역시 인기나 대중적 판매량과는 별개로 어설픈 함량 미달의 작품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차피 주관적인 감상주의를 기치로 내거는 에세이툰에 있어서 함량미달이라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바로, 그럴듯한 감상적 어휘로 적당히 조합한 멘트 한마디를 말미에 던져놓고는 정서적 공감을 구할 뿐이라는 점이다. 그런 경우는 예쁜 구경거리로서는 의미 있을지 몰라도, 정작 ‘나’라는 존재에게 어떤 실제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것은 대화와 생각을 전제하지 않는, 공감만으로 이루어진 폐쇄성의 단점이다.

그런데 그 무렵, 특이한 일이 한 가지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포츠조선에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전문 도박 사기꾼들의 인생역정을 선 굵은 드라마로 펼쳐내던 중견 작가 콤비가, 그것도 바로 그 연재 지면에서 젊은 인터넷 만화 신인들의 아성이 높은 분야인 에세이툰의 말랑말랑한 감수성에 도전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데, 막상 작품이 연재를 시작하자 녹록치 않은 것이다. 독자에게 성찰을 불러일으키며 품격 있게 돋보이는 만화 작품이 탄생해버린 것이다. 이거 대박이다, 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했으나… 어째서인지 단행본은 에세이툰 장르 특유의 예쁜 제책과 거리가 먼, 전형적인 대본소/대여점 공급 위주인 성인만화 단행본의 모습으로 출시되어서 그저 그런 정도의 반향 밖에 일으키지 못했다.

바로 그 작품, 『사랑해』(허영만 그림, 김세영 글 / 김영사 / 2권 출시중) 가 본격적으로 벼르고 재출간되었다. 재출간 버전은 이전 출시본이 지녔던 여러 약점들을 보완해가면서, 12권 세트 완결을 목표로 출시를 시작했다. 이 작품은 에세이툰의 거품 유행이 다소나마 진정된 지금 다시 볼 수록, 더욱 진가가 드러난다. 원래 김세영 글 허영만 그림의 만화 콤비는 『오!한강』, 『카멜레온의 시』,『타짜』등 워낙 굵직하고 진지한 이야기들을 탄생시킨 것으로 유명한데, 그 작품들의 바탕에 깔려있던 것은 단지 남성적 에너지로 가득한 출세 지향 활극 모험이 아닌 인간사에 대한 통찰이었다. 사람 산다는 것이란 뭐 다 그렇듯이, 적당히 비열하고 적당히 남 속이고, 또 속으면서 하나씩 자신의 길로 가는 것. 그 와중에서 어떤 주인공은 허탈하게 파멸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길을 발견하여 득도하다시피 하기도 한다. 만약 어깨에 힘을 빼고, 굵고 격정적인 드라마의 옷도 좀 벗고, 그냥 편안하게 사람 사는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어떨까. 뭐 너무 이것저것 이야기하기보다, 아예 사람들 간 관계 가운데 가장 강력한 연계고리인 ‘사랑’에 대해서 논해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렇기에 풋풋한 젊은이들의 호기심어린 감상주의로 절여지기 일쑤였던 여타 에세이툰과는 달리, 『사랑해』는 시작부터 결혼과 아이 낳는 것부터 들어간다. 내용으로 치자면, 이 작품은 글 읽기 좋아하는 30대중반 만화스토리 작가(김세영 작가가 자신을 모델로 삼았음직하다)와 20세 여자의 가족 꾸리기가 전부다. 그 중에서도 사랑이라는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다양한 감성적 느낌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계속 풀어나간다. 굉장히 리얼리즘적으로 생활의 찌든 때를 묘사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해』는 구체적인 주인공들의 구체적인 생활이 있다. 그렇기에 실제로 살아가는 상황 속에서, 잠시 사랑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 있도록 하는 묘미가 있다. 작가의 폭넓은 인문학적 소양에서 건져내는 다양한 격언들의 향연조차도, 결코 작품의 주역으로 기능하기 보다는 이들의 그러한 구체적인 삶의 장면을 해석해내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될 뿐이다. 즉 이 작품에서 감상적인 문구들은 감성에 대한 동조를 강요하기 보다는, 독자 역시 자신들의 구체적인 생활을 살아나가는 속에서 그러한 성찰을 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색의 과정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이 사색을 자극하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대화다. 사랑을 다룬다고 해서, 그냥 눈빛만 보고 감성을 공유하고는 세상을 찬양하는 공식을 밟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감상적인 독백보다도, 문답과 설명의 방식으로 자신들이 처한 지금 그 상황 속에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기를 즐긴다. 자신들의 현재 사랑의 모습에 자아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라는 소통을 통해서 서로의 사고과정에 개입하여 사랑을 만들어나가는 매력을 지니는 것이다. 두 주인공 및 가족의 관계가 보수적 가정 구도의 틀에 들어있기에 지니는 약점도, 대화라는 소통기제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덕분에 대체적으로 무해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시각 연출 역시 간략한 그림체를 바탕으로 여유로운 호흡을 부여한다. 능숙한 칸 흐름이 주는 편안한 독서경험은, 다른 만화들에 비해서 다소 글이 많은 편인 이 작품을 읽어나감에 있어서 큰 득이 된다. 주인공들이 이끌어나가는 일반적인 극만화의 형식을 기틀로 삼으면서도 종종 다큐멘터리적 느낌으로 명언의 주인공이나 사색적 도해를 자연스럽게 엮어넣는 점 역시 대단히 매력적이다. 다만 이번 재출간 버전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원래 흑백으로 연재된 작품 위에 파스텔톤의 컴퓨터 컬러를 입혔다는 것이다. 주류 셀애니메이션풍의 인터넷만화라면 모를까, 열린 선이 많은 허영만 특유의 그림체와는 그다지 조화를 이루지 않는 화사첨족이다. 더욱이 내용의 여유로움을 시각적 여백에서도 뒷받침해주는 그 조화의 효과가 파괴된다. 물론 “선물하고 싶은 책 1위” 등의 이야기가 보도 자료에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선물 아이템 시장을 노리고자 트렌드를 따라가려는 시도를 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만화 작품의 매력 자체를 감소시키는 처사는 좋은 선택이라고 보기 힘들다. 사실 그 것 말고도, 애인 선물용으로 하기에는 전 12권 완결 예정이라는 방대한 볼륨 자체가 지나치게 푸짐하다는 단점을 어떻게 극복할지도 추후 과제지만 말이다.

『사랑해』는 단절적이고 마취적인 편안함과 감상주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 실제 생활 속의 사색이 주는 즐거움을 대화로 같이 나누자고 제안하는 작품이다. 생각에 싹을 틔워주는 이 작품이 다시 독자들과 만나게 되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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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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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한겨레21 617호에 만화특집 별책부록 들어있습니다.

!@#… 한겨레21 (지금 가판대에서 판매중인) 이번 617호에 만화 특집 별책부록이 있습니다. ‘여름’이라는 테마로 실력있는 작가들이 진지하고 재미있고 여하튼 좋은 만화를 만들어 묶은 책이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예전 한겨레21의 추리소설 특집 별책부록을 기억하시는 분들이라면, 어느 정도의 품질일지 예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단 이번 별책부록에 한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면, capcold 라는 인간이 참여했다는 것… -_-; (먼산)

!@#… 이번주 지나고 절판되기 전에 너도나도 사봅시다. 나중에는 레어아이템입니다.

모에라는 취향문화를 바라보기 [문화저널 백도씨/창간호]

!@#… 청강문화산업대학에서 새로 창간한 월간 문화저널 백도씨에 기고한 글.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모에 취향은 아니지만 (구세대다 구세대…), 이쪽 계통의 현재 가장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인 것은 사실이니까. 이미 전에 해오던 이야기에 약간 더 살을 붙여서 모에라는 현상을 한국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화두 몇개를 던진 정도. 한겨레에 기고한 하루히 글과 연동시켜서 읽어봐도 좋을 듯. 아 그래도 창간호의 품위를 조금 지켜주는 의미에서, 모에의 성적 코드에 대한 이야기는 과감히 생략. 다른 지면에서 한번 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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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에라는 취향문화를 바라보기

김낙호(만화연구가)

모에라는 시대정신

모에는 좋든 싫든 현재 일본 대중문화 하드 유저들의 기이하다면 기이한 ‘시대정신’이다. 우선 다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모에라는 패턴은 이전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간단히 짚고 넘어가보자. 예를 들어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레이’라는 캐릭터를 좋아한다면, 그냥 팬일 뿐. 하지만 붕대를 맨 미소녀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이고, 하필이면 레이가 그 결정체이기 때문에 좋아한다면 그건 어엿한 ‘붕대소녀 모에’다. 모에하는 사람은 수많은 만화, 애니, 게임 등 장르 대중오락문화를 샅샅이 뒤져가면서, 그 중 붕대를 맨 소녀 캐릭터를 찾아내며 애착을 보인다. 그리고는 붕대소녀는 자고로 3분에 한번씩 아픔으로 얼굴을 찌푸려야 하며, 부상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서 활약을 벌이려다가 아픔으로 한번 넘어져 줘야 하며, 머리에 붕대를 맬 경우 머리카락 전체를 뒤덮어서는 안되고 이마와 한쪽 눈 정도까지만 덮어야 한다는 등 나름의 공식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한다. 당연히 붕대소녀를 묘사한 각종 피겨와 게임, 만화책들을 긁어모은다(문화평론가 아즈마 히로키의 용어를 빌자면, ‘데이타베이스적 소비’). 80년대의 애니광들은 『오렌지로드』 마도카의 이고 민메이라는 아이돌을 숭배했지만, 2000년대의 오타쿠들은 『오네가이 티쳐』 미즈호를 보며 누님 모에를 한다는 식의 차이다. 특정한 이야기 속에 놓여진 캐릭터 전체를 하나의 동경의 대상으로 놓기보다, 그 캐릭터가 지니는 특정한 구성요소에서 쾌감을 느끼는 구조 말이다.

모에에 대해서, 사람들은 범람하는 대중문화 콘텐츠를 즐기는 방편으로 파편화, 특성화된 선호 취향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파편화된 여러 기호의 세계 속에서 나름의 공통적 요소들을 찾아 나서서 캐릭터성의 근본적 부분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시도이기도 하다. 즉 원형적인 요소들의 파편을 긁어모아서,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이상향을 조합하여 맞추어내는 방법인 셈이다.

하지만 모에라는 것이 정말로 이전 세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향유방식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비록 궁극의 오타쿠 ‘오타킹’을 자처하는 오카다 도시오 같은 7-80년대 만화/애니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소위 1세대 오타쿠들에게 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행위로 규정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모에 특유의 미형 캐릭터에 대한 동경은 사실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만화편집자 출신 평론가 사사키바라 코우는 『미소녀의 현대사』라는 저서에서 아예 모에를 미소녀에 대한 애호와 동격으로 놓기까지 하는데, 무려 TV애니 『바다의 트리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마크로스』의 아이돌 스타 민메이의 ‘팬’을 자처했던 그 세대라 할지라도 민메이 성우의 앨범들을 긁어모으고, 일러스트들을 서로 교환하며, 기타 각종 상품들을 수집해오지 않았던가. 바로 이러한 점들은 사실 모에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일부 특정 매체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다는 중요한 현상과도 연결된다.

모에는 왜 만화/애니/게임 문화와 친한가

‘모에’ 행태는 실체를 획득할 수 없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실제로 획득할 수 있는 대상이면 가서 얻어내면 되는 것이지, 관련 굿즈를 사서 모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 캐릭터를 사랑하더라도 동경의 대상이 되는 실체로서의 배우가 있다. 즉, 겨울연가의 모 캐릭터에게 반한 나머지, 욘사마의 팬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만화/애니/게임류의 경우, 캐릭터들은 캐릭터 자체로서만 존재한다. 실체를 얻을 수 없기에 하나의 전체로서의 상대를 동경하고 역할모델로 삼는 방식의 향유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하기야, 인기 없는 방구석 폐인들에게 있어서는 이웃집에 사는 3차원 물질계의 여성들도 이미 실체를 획득할 수 없는 먼 세상 신비의 대상이기는 매한가지지만 말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때로는 집착적일 정도의 애정을 과시하는 방법은 바로 소비와 재창조다. 관련 상품들을 소비하며, 또한 이미 주어진 캐릭터로서의 요소들을 자신들의 상상 속에서 재결합하고 재창조해내는 방식으로 즐긴다. 이것이 곧 캐릭터 상품 시장과 동인문화로 치환되어 나타나는 셈이다.

시각적 표현방식으로서의 만화언어 역시 모에를 위한 유리한 조건이다. 실제로 카툰화법을 채용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이 가장 강하게 모에 취향과 연계되어 있다. 그에 비해서 소위 ‘실사판’으로는 도저히 같은 정도의 모에를 만들어내기가 힘들다. 앞서 이야기한 가상성 – 즉 캐릭터가 실체가 없는 캐릭터 자체로서만 존재한다는 요소와 함께, 만화언어는 모에 요소들을 가장 특징적으로 표현하고 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툰화법은 근본적으로 생략과 집중의 표현방식이기 때문에 압축적으로 핵심 모에요소를 나타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안테나 머리’라는 모에 요소를 실사판으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아무리 무스를 2-3통 뿌린다고 할지라도 과장되고 뚜렷하게 나타내기가 대단히 힘들며, 성공하더라도 오히려 우스꽝스러워 보일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카툰화법을 채용하면 안테나 머리는 쉽게 하나의 기호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각각의 분절적 모에 요소들을 표현하기에 대단히 용이하며, 나아가 이런 요소들을 자유롭게 서로 결합하는 것 역시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카툰화법이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이래로 모에적 향유가 급격하게 발달하게 된 점에는 컴퓨터 게임의 대두가 큰 역할을 했다. 사실 만화/애니 향유층을 지양분 삼아서 발달, 카툰화법으로 표현된 캐릭터들의 모험담이 일본에서는 컴퓨터 게임의 주류로 자리매김한 것은 이미 80년대부터 이루어진 일이다. 하지만 90년대의 급격한 PC보급과 각종 비디오게임 콘솔의 반복된 자기혁신은 게임을 오타쿠 문화의 보다 강고한 축으로 자리매김시켰다. 특히 RPG와 미연시 계열 등 손가락의 반응속도보다는 내러티브적 흐름을 중시하는 장르들에 있어서, 캐릭터성은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기에 이것은 자연스럽게 오타쿠 문화 전반으로 같이 융합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고정된 스토리를 따르는 게임이라고 할지라도, 게임 장르 자체가 가지는 특성이란 바로 내러티브 구조의 느슨함 및 루트의 복합성이다. 따라서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다양한 이야기 속에 처해지는 캐릭터성의 조합에 더 주목을 할 수 밖에 없는 방식의 향유를 자연스럽게 강제하는 셈이다. 모에는 이러한 양식을 흡수하며 더욱 공고한 주류 향유 패턴으로 발달했다. 이렇듯 모에는 만화언어의 취향 클러스터 – 즉 만화 자체, 카툰화법을 채용한 주류 애니메이션, 카툰화법으로 이루어진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게임, 그리고 그와 연관된 피겨 등 각종 상품을 포괄하는 대중문화 향유 취향의 집합 – 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국 현실과 모에

사실, 모에는 상업적 이유 때문에 선 굵은 대형 서사물보다 캐릭터 조합극으로 주류 방향을 잡고 있는 현대 일본의 서브컬쳐 산업이기에 여기까지 주류화될 수 있었던 방식이다. 모에적 향유는 단지 재미있는 특정 작품 한 가지에 대한 낮은 수준의 몰입이 아니라, 만화언어 취향 클러스터 전반에 대한 높은 수준의 몰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신문 시사 만화를 가끔 즐겨보거나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는 정도가 아닌, 만화 자체를 좋아하는 정도는 되어야 모에적 향유를 시작할 수 있다. 모에는 근본적으로, 각종 캐릭터 공식에 대한 광범위한 흡수와 적극적 집착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소수 매니아적 취향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소수 매니아적 취향의 소유자들이(넓은 의미의 ‘오타쿠들’) 충실하고 강력한 구매력을 발휘해 주어서 주류 시장으로 부상시켰다. 그리고 그 취향이 창작자/생산자들에게도 피드백되어, 모에 취향의 시장이 공고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한국에도 일본의 만화/애니/게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모에 취향을 가지고 있는 매니아 층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의 시장 구매력은 모에를 주류 시장으로 올려놓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취향으로서는 모에를 표방하지만, 소비를 통해서 그 취향시장을 발전 또는 최소한 유지시켜놓을 만한 힘이 없다는 것이다. 만화는 스캔본, 애니는 인터넷 불법공유 동영상, 게임은 복사CD를 쓰면서 취향만으로 모에를 추구하는 것은 시장의 형성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정식으로 모에적 소비를 하는 사람들이 극히 소수에 불과한 정도라면, 시장과 취향이 결합된 진짜 문화산업으로 발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특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일본의 문화콘텐츠 성공담을 벤치마킹하고자 할 때, 그것이 모에 취향의 사업 모델인 경우다. 게다가 이미 영화나 TV드라마의 성공사례에서 볼 수 있듯, 여전히 한국의 일반적인 대중문화 향유자들은 완성된 극적 구조 속에서 벌어지는 선 굵은 이야기에 대한 수요가 높으며, 실체로서의 스타 또는 현실의 직접적 반영으로서의 캐릭터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모에적 향유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는 점 역시 중요하게 고려해야할 사항이다.

물론 모에는 그 자체로서는 선도 악도 아니다. 이미 일본에서 나름대로 충분히 장단점을 드러낸 대중 문화패턴인 만큼, 받아들일 것은 본받고 경계할 것은 버리면 된다. 예를 들어 모에적 향유가 지니는 열정적인 요소들은 받아들이고, 지나치게 파편에 집착하여 전체 상을 경시하는 풍조는 막아내면 된다. 이 두가지 극단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지키면서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또 향유하는 문화로 나아가면 이 시대의 문화현상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고 또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혹은 그냥 평이하게, 좀 더 즐겁게 대중문화를 즐길 수 있는 촉매 작용이라도 충분할 것이다.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태왕사신기 vs 바람의 나라, 현재 스코어 1:0

!@#… 법원, “‘태왕사신기’는 ‘바람의 나라’ 표절작이 아니다” 판결. 도대체 만화판 쪽은 변호사를 어떻게 고르길래 뭐 하나 이겨보는 일이 없는지 모르겠다.

!@#… 물론 시놉시스 단계는 실질적 침해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야 이미 처음부터 알려진 법적 구멍 이었으니 사실 당장 바뀔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결국 ‘역사‘와 ‘역사를 바탕으로 한 창작‘ 사이를 구분 못하는 전형적인 “보통 이하의 문화적 식견을 가진” 판사가 내린 어찌보면 예상 가능했던 판단. 바람의 나라가 ‘역사’라면, 여러명의 눈동자도 ‘역사’고, ‘모레시계’도 ‘역사’겠지. 여하튼 항소심 들어가고, 대법원 가고 앞으로 더욱 갈 길이 멀 것이다. 김진 씨가 중도에 지쳐 포기하지 않으시길 빌 뿐.

(7.4. 약간 추가)

!@#… 게다가 이번 판결은 애시당초 중재 시도에서 나왔던 결론 그대로일 뿐. 법적 판단으로 보자면 심지어 그다지 잘못된 것도 아니다. 완성된 만화와 드라마 시놉시스를 법적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는 것 자체는 이미 그 당시에 판단이 내려진지 오래니까. 다만 이해가 안가는 것은, 어째서 원고측이 단순히 유사성에 의한 저작인격권 침해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었는지 하는 것. KBS와의 드라마화 진행 무산이라든지 하는 등의 “시놉시스 발표로 인하여 입은 물질적 피해”를 강조해서, 유사한 내용의(내용 유사성에 대해서는 법원도 인정하였고) 시놉시스 발표가 지니는 사건 정황의 의도성을 부각시키고, 바람의 나라 드라마화 무산 등 구체적인 피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서 손해배상의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텐데.

‘표절’은 법적 개념도, 판단기준도 아닌 그냥 도덕적 잣대일 뿐이다. 법적으로 정해지는 것은 저작권 침해를 “했느냐” 아니면 “했다고 판단할 수 없느냐”일 뿐. 물론 무죄추정의 원칙 때문에,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은 ‘저작권 침해를 하지 않았다’ 라고 민간 뉴스 보도에서 해석되어 뿌려진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고. 표절 여부를 증명하는 것과 법정에서 저작권 침해를 가리는 것은 서로 연동되어 있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별개의 사안이다.

!@#… 만화계와 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리니지 저작권 사태가 어떻게 극적 합의를 이끌어냈는지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당시 사안에서 신 작가가 법적으로 명백히 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분쟁이 지속되는 것이 엔씨소프트측에 있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상당한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합의를 본 것이다. 표절이라고 베꼈다고 백번 천번 사실을 증명해봐야 소용없다 (아니 사실 증명할 것은 이미 오래전에 다 증명하지 않았던가). 피해를 끼쳐줘야 상대는 협상 테이블에 앉을 것이다. 김종학 프로덕션이 도저히 협상에 응하지 않고는 버텨낼 수 없을 정도로 흔들어라. 태왕사신기가 상정하는 타겟층에 고추가루를 뿌려라. 퓨전사극에 재미 붙인 젊은 층 뿐만 아니라, 역사사극을 좋아하는 아저씨 세대들까지 포섭하라. 한류 붐(…)을 노리고 있는 것인 만큼, 일본어, 중국어로 번역해서 하염없이 뿌리는 것도 고려해봄직하다.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김종학 프로덕션의 (아니 송지나 작가의) 부도덕함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태왕표절기는 물론 김종학표절덕션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드라마들의 시청율이 안나와서 쫄딱 망할 전망이 명백해지도록 하라.

!@#… 여하튼, 현재 스코어는 태왕표절기 1:0 바람의 나라. 전통의 강호가 심판의 유리한 오심 속에 오프사이드를 무시하고 핸드링으로 한 골 넣었다. 하지만 아직 전반전도 채 안 끝난 상태인 만큼, 조속히 추스려서 역전의 물꼬를 열어내기를 희망한다.

PS. 그러고보니 capcold 네이버 분점에 올라왔던 고리짝 이 사안 관련글에, 왠 사람이 악플을 남기고 도망갔다(여기 백업한 글의 원본). 알바가 의심되나, 세상에는 대단히 강한 자의식으로 대단히 희박한 지능을 열정적으로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가히 적지 않다는 것을 내 모르는 바 아니니 관대하게 패스.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