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언론 등대등 토론으로부터 1주년.

!@#… 6월 30일은 ‘만화 언론’ 논의가 시작한 날입니다 (만화언론 ‘만’) 에서 트랙백.

!@#… 아하, 등대등 토론으로부터 어느 틈에 한 돌. 한겨레21에 기사화도 시켰고, 그 동안 ‘만’이 만들어졌고, 계간만화 팀은 코믹뱅으로 새 얼굴을 선보였고, 부천 만화규장각도 개편하여 소식 부문을 좀 더 일목요연하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이렇게 말하니까 꼭 등대등 토론의 결과로 다들 이렇게 한 듯 하지만, 세상은 항상 우연과 필연의 미묘한 결합). 당초 사람들이 토론하며 예상했던 바는 ‘만’의 운영과정 속에서 실현된 것도, 어긋난 것도 있다. 만화언론이 돈은 별로 안될 것이라는 예상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그대로 실현 중이고, 돈 받는 고정직 없이는 한 줌의 열혈한들이 뒤집어 쓰며 고생할 것이라는 예언 역시 현실이 되었다. 좋은 방향으로 어긋난 예상이라면 ‘만’이 신기하게도 활기차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뉴스박스나 구글 뉴스에 신디케이트하기, 부천 만화규장각과 콘텐츠 제휴 등으로 지속적 확장을 이루어내고 있다는 것. 나쁜 방향으로 어긋난 예상이라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capcold를 포함해서 등대등 토론에 참가했던 사람들 가운데 참여의 폭이 당초 우려한 것 보다도 더 낮다는 것. 여하튼 또 한 해가 시작되며 만화언론 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면, 역시 가장 시급한 것은 관심있는 필자들의 자발적 참여. 정신 온전한 업계 담당자들의 보도협조. 독자들의 열띤 소문 내기. 그것이 되면 슬슬 굵직한 기획기사들을 시작할 수 있을테고. 여튼 지금껏 상당한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 엄청난 길을 걸어가야할 만화언론에 격려의 박수와 질책의 채찍질이 가열차게 떨어져 주기를 마냥 희망할 따름이다.

지금 세계는 ‘하루히’ 열풍 [한겨레21/615호]

지금 세계는 ‘하루히’ 열풍

괴짜 주인공의 엽기적 유머, 라이트 노블의 정점에서 탄생한 성공작… 만화·애니메이션의 감수성으로 향유자의 취향 클러스터에 눈높이 맞추다

– 김낙호 (만화연구가)

최근 인터넷을 돌면서 대중문화 관련 포스트들을 검색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발견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스즈미야 하루히’다. 알라딘이나 예스24 같은 인터넷 서점과 교보문고 전체 판매순위에서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 3권이 100위 안에 포진해 있고, 인기검색어 순위에서도 이 이름이 종종 출몰한다.

각종 동영상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속칭 ‘하루히즘’이라고 불리는 패러디 영상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팬들이 시리즈의 1권인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엔딩의 ‘하루히 댄스’를 따라하는 동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상에서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붐은 일본은 물론 한국, 나아가 북미나 유럽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각종 대중문화 관련 블로그와 포럼에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끝없이 오르내려서, 이른바 “하루히는 세계 대세”라는 장난 섞인 말이 돌아다니고 있을 정도다.

각국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폭발적 인기

그 이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스타일의 감성적 현대소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하루히는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원작소설은 다니가와 나가루 지음, 이토 노이지 일러스트, 대원씨아이 펴냄)의 주역인 미소녀 여고생 캐릭터를 칭한다. 하루히는 자기소개 시간에 “평범한 인간에겐 관심 없습니다. 이 중에 우주인, 미래에서 온 사람, 초능력자가 있으면 제게 오십시오. 이상”이라고 ‘뒤집어지는’ 인사를 하는 괴짜. 소설의 내용은 지루함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이 괴짜 미소녀 여고생이 SOS단이라는 온갖 특이한 활동을 추구하는 동아리를 만든 뒤 벌어지는 ‘황당한’ 이야기다. 이 황당함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내레이션을 하는 남학생 ‘’. 하루히의 앞자리에 배치돼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는 죄로 동아리의 창립에 관여하는 은, 하루히에게 ‘반강제로’ 끌려온 ‘평범한’(이상하긴 하나 현실 수준에서 수용 가능한 평범함을 가장하고 있음) 학우들과 함께 부조리한 코미디의 세계로 빠져든다. 알고 보니 실제로 주변에는 외계인과 초능력자 등 기이한 존재들이 우글거렸으며 또한 우주는 하루히가 지루하면 지루한 데 맞춰, 재밌어하면 재밌어하는 데 맞춰 재편되는 ‘하루히의 매트릭스’였다. 이렇게 일면 엄청난 스케일로 발전해나가지만 여전히 작품은 가벼운 학원 코미디물의 외향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기에, 묘한 불균형의 즐거움이 쏠쏠하다. 이런 지극히 장르 대중오락 성향, 그것도 이른바 ‘오타쿠’ 취향의 소설이 그 정도까지 붐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루히 시리즈’는 속칭 라이트 노블로 분류된다. 거칠게 정의내리자면, 라이트 노블은 만화·애니·게임 등 일본에서 흔히 ‘서브 컬처’라고 부르는 대중문화 장르들과 감수성이 연동돼 있는 장르소설을 칭한다. 하지만 장르라고는 해서 추리소설이나 공상과학(SF)처럼 특정 소재와 사건들을 다룬다는 개념으로 묶이는 것은 아니고, 만화·애니메이션·게임 매체의 주류 대중문화 영역을 장르문화라고 부를 때의 그런 의미다. 라이트 노블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한 대본을 소설화한 것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만큼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감수성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커서, 매체 이식이 쉽게 일어나기도 한다.

‘하루히 시리즈’는 라이트 노블 계열의 정점에서 탄생한 성공작이다. 이 작품은 당대의 여타 소설 문학의 성과에서 자양분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라이트 노블로서 감성을 공유하고 있는 만화·애니·게임 쪽의 장르적 규칙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괴짜 주인공이 정체불명의 클럽을 만들어 평범한 학우들을 엽기적 유머의 세계로 물들인다는 구성은 순수문학이나 영화보다는, 만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장르 규칙이다. 알고 보니 평범한 일상의 주변이 사실은 우주적 음모의 소용돌이였다는 식의 과장 역시 SF 애니메이션에서는 친숙하다. 또한 미소녀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특정한 구성 요소- 메이드복, 고양이귀, 유아 취향 얼굴과 큰 가슴의 결합, 무표정 등- 들을 분류, 각각의 항목 단위로 열광하는 현상인 속칭 ‘모에’ 취향에 대한 집착은 90년대 중반 이래로 그쪽 계열에서 폭발적으로 발달시켜온 것이다.

장르의 힘, 취향의 힘!

라이트 노블이기에 ‘하루히 시리즈’는 단순히 소설 애호가들을 불러모으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르적 즐거움에 대한 총합으로서 만화·애니·게임 분야의 지지자들을 효과적으로 규합할 수 있다. 이 시리즈가 인기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장르의 힘이다.

그리고 ‘하루히 시리즈’가 히트한 두 번째 이유는 취향의 힘이다. 이것이 진짜 핵심이다. 양적 과잉으로 규정되는 현대 대중문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무언가를 즐기는 것은, 매체나 작품에 대한 집착이 아닌 특정 취향의 묶음이다. 말하자면 ‘취향 클러스터’다. 예를 들어 만화를 즐긴다고 하는 사람은 대부분 만화의 모든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세부 취향을 즐긴다. 그리고 그 선호하는 취향의 정체성이 선명할수록, 취향과 연동되는 다른 매체, 작품, 상품으로 자연스럽게 향유의 범위를 넓히게 된다. 미소녀 연애물 만화에 심취하게 되면 다른 만화인 예술만화와 학습만화로 애정을 키워나가기보다는, 애니메이션·게임·모형 등 여러 인접 분야에서 미소녀 연애물의 취향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취향을 깊게 파고들수록, 여러 매체와 향유 방식을 포괄하는 취향 클러스터를 형성한다. ‘하루히 시리즈’의 히트는 이런 취향 클러스터의 대표적 성과다.

이런 취향 클러스터가 작동했기에 올 4월 일본에서 TV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방영되기 시작하면서 소설로 피드백되고 그 인기가 증폭되었다. 이것이 이 시리즈가 80, 90년대의 혁신적 작품들에 비하면 전복적 에너지를 연성화한 정도에 불과하고, <멋지다 마사루>만큼 마음먹고 막 나가지도 않으며, <신세기 에반게리온>만큼 그럴듯하게 우주적 음모론을 전개하지도 않지만 폭발적인 힘을 얻은 이유다. 국내에서도 여러 경로를 통해 뿌려진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다른 경쟁 작품들보다 높은 품질의 미소녀 영상을 제공했으며, 줄거리에서도 원작 이상으로 모에 취향에 대한 암묵적 지지를 던지면서 팬들을 감동시켰다.

또한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원작의 사건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섞어 내용상으로는 5화의 외전 정도에 해당할 에피소드를 아무 설명 없이 1화로 편성해 방영하는 등 파격적 연출을 사용했는데, 이 점이 오히려 소설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며 팬들의 참여의식에 더욱 불을 붙였다. 팬들은 패러디 동영상 공유는 물론, 소설의 설정에 대한 각종 정보 교류와 아마추어 동인지 창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발적인 붐을 조성하고 있다. 즉 ‘하루히 시리즈’는 새로운 혁신을 이뤄내기보다, 여러 향유 양식을 효과적으로 혼용해 성공한 셈이다.

당신의 ‘모에’는 무엇입니까

장르와 취향의 힘은 작품 자체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취향을 가진 자신의 향유자들과 얼마나 가깝게 동조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히 시리즈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자기 작품의 현재 향유자들과 눈높이와 입장을 맞춰주고 있음을 밝힌다. “모에 요소가 더 필요하니까”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특정 미소녀 캐릭터를 동아리에 강제 가입시키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작품의 향유자들이 지니는 취향과 동일시된다.

작품보다는 장르와 취향을 향유하고자 하는 시대에, 하나의 작품이 뚜렷한 족적을 남기려면 흐름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하루히’ 소설을 즐긴다는 것은 하나의 작품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대변하는 만화·애니메이션 중심 장르문화의 미소녀·학원 코미디·우주 음모론 취향을 즐긴다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적합한 대중문화론은 단순한 작품론이 아니라 장르와 취향을 수용하는 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한 라이트 노블의 히트로 한층 힘을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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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한겨레21에 실린 글 (정간지 발표원고의 경우 다음 호가 배포 또는 마감되어갈 즈음 – 즉 해당 지면이 충분한 유통을 마칠까지 기다린 후 블로그에서도 공개한다는 개인적 원칙). 원래는 생활면에 들어갈 가벼운 흥미성 기사였는데, 여차저차 쓰다보니 의도보다 하드해져서 결국 또 문화면으로 배치되었다. OTL 그런데 역시 한참 이쪽 계열 사람들의 대세라서 그런지, 무려 잡지 기사 페이지가 스캔되어 올라오는 상황까지 발생. 이번 건을 담당하신 구** 기자님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계실 듯. 개인적으로는 본문에 언급한 ‘취향 클러스터’라는 개념을 다른 기회에 좀 더 깊숙하게 개념화시켜볼 욕심이 있음. 나머지 사족은 수시아님 블로그에 남긴 것으로 대신한다.

“…주인장님 말씀대로, 한겨레21과 뉴타잎 독자들의 차이를 감안해야 하니까요. ‘팬들을 위한 글’이 아니라, ‘그 팬들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글’. 사실 개인적으로는 하루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뭐랄까, 마치 일년전쟁 팬이 시드를 바라볼 때 느끼는 부족함 같은 것이죠.”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가 —

일반 성인 대상의 보편적 오락성 – 『불친절한 헤교씨』[기획회의 060530]

!@#… 굿모닝서울에서 시작해서 엠파스를 거쳐서 결국 파란에서 완결짓고 만, 근성의 연재작. 매체의 독자층으로 볼 때는 사실 맨 처음의 지하철 무가지 쪽이 더 적합했을터인데, 여하튼 포털에서 둥지를 틀 수 밖에 없었던 경우. 좀 더 본격적으로 들어가줬으면 하는 부분들이 참 많았는데, 그래도 완결을 해줬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연재만화에서 작품의 최종분량에 대한 사전합의 등 쌍방 합의 연재 조건 도입의 필요성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더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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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성인 대상의 보편적 오락성 – 『불친절한 헤교씨』

김낙호(만화연구가)

오늘날 한국에서 일반 성인들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트렌디물이 가장 선호하는 장치들은 무엇일까. 즉 장르 영화나 드라마, 장르 소설, 만화의 인기작들에 응당 들어있기 마련인 어떤 소재들의 경향 말이다. 우선 간단히 떠오르는 것은 세 가지 정도다. 첫째는 ‘조직폭력’. 조폭 장르가 인기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연애가 핵심인 드라마에서마저도 조폭 또는 사실상 조폭을 연상시키는 구도가 꽤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조폭은 상처받은 거친 남성, 비합리적인 위계로 꽉 짜인 사회구도, 비열한 현실감이 넘치는 등장인물들을 등장시키기 좋은 소재로, 어두운 면모를 간직한 매력적인 남자캐릭터를 만들어내 주는 역할을 한다. 둘째는 전문성. 특정한 분야에 대한 전문적 내용이 들어 있어 줘야 이 복잡하고 전문적으로 분업화된 세상 속에서 일종의 극적 현실감을 확보한다. 카지노 딜러의 세계든, 과자 제빵 장인의 세계든, 조선시대 여형사든, 한쪽 세계의 전문성이 가져오는 낯설음이 오히려 몰입을 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쓰이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뭐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듯, 멜로 코드. 사람과 사람이 서로 끌려서, 사귀든지 헤어지든지 여하튼 인간적 애정으로 움직여주며 극의 뼈대를 생성해 주는 것이다. 조폭 코드도 전문성 코드도, 결국 이 멜로라는 핵심 뼈대 위에 발라지는 살과도 같다. 여하튼 이러한 장치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구사하는가에 따라서 대중 오락물로서의 호소력이 결정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코드들을 능란하게 균형 잡아가면서 구사함으로써 결국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주로 저녁시간대 TV 드라마였다. TV라는 형식 덕분에 넓은 향유층을 거느릴 수 있으며 연속극이라는 형식 덕분에 충분한 방영시간과 연재가 주는 지연효과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연재만화는 어떨까. 매니아 지향 만화잡지가 아니라, 신문이나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되고 있는 만화라면 성인 대중 일반이라는 향유층 확보가 수월하다. 그리고 연재를 통한 관심끌기라면 만화 또한 결코 빠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아주 조폭 장르물로 가거나, 아주 전문분야 정보전달에 쏠리거나, 아주 멜로물로만 가버린 경우들이 대부분이라서 강력한 성공사례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불친절한 헤교씨』(박기홍 글, 김선희 그림 / 작은책방/ 2권 발행중)는 연재만화에서도 그러한 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지면이 사라지면 작품도 중단되는 연재 만화의 일반적 사례와는 달리, 이 작품은 처음에는 지하철 무가지 <굿모닝서울>에서 연재를 시작했다가, 포털 사이트 <엠파스>로 자리를 옮겼다가, 그 곳 지면이 사라진 후에는 또 다른 포털 사이트인 <파란>으로 다시 둥지를 옮겨서 연재를 지속해온 특이한 경우다. 그 작품이 이번에는 종이 단행본으로 출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작품의 내용은 대단히 유능하지만 오히려 그 유능함 때문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30세 여자주인공 소헤교가 게임회사에 취직하여 커리어를 추구하는 이야기다. 이 와중에서 사채업자인 그녀의 아버지가 조폭과 금융사기 등으로 또 하나의 이야기축을 이루고, 회사를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가 여러 층으로 겹겹이 쌓여간다. 반은 조폭물, 반은 게임회사 커리어물로 이루어진 기묘한 균형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코믹한 티격태격과 진지한 가족사 문제를 오가는 여러 트렌디 멜로의 구도와 에피소드들을 섞어 넣으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이 세 가지 요소들을 섞으면서, 작품은 꽤 정면돌파를 시도한다. 조폭과 사기가 난무하는 이야기축에서는 비열한 정치적 관계들을 거침없이 묘사하여 극적 재미를 부여하고, 동시에 게임회사 이야기로 나타나는 전문 영역의 분야는 게임업계의 실제 모습들과 여러 현실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확실한 리얼리티를 확보한다. 그러면서도 콩가루 가족의 한 쌓인 관계, 남녀간 애정 구도가 들어있는 (비록 특이하게도 정작 여자주인공은 특별히 연애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멜로의 뼈대로 구심점을 부여한다. 이렇듯 열심히 섞이지만, 이야기는 복잡하지 않게 독자들을 뛰어난 오락성의 바다로 몰입시킨다. 여기에 남성 위주의 가족과 사회현실 속 유능한 여성의 수난이라는 주제 의식이 지니는 동시대성 역시 작품을 더욱 호소력있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특별히 교훈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진취적인 주제의식을 넣어줌으로써 향유자들로 하여금 죄책감 없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이다.

남성 글 작가와 여성 그림 작가라는 조합 역시 작품의 보편적 호소력에 상당 부분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둘이 부부지간이라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강력한 정치적 드라마 부분과, 여성들에게 호소력 강한 섬세한 인간관계와 심경변화라는 부분을 잘 녹여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순정만화 특유의 그림체와 연출방식이 일반 성인 남성 독자들에게 주곤 하는 거리감 또는 거부감을 최소화하는 남성극화에 가까운 직선적 사건 중심의 연출 역시 이러한 조합이 영향을 주었으리라 본다. 물론 거꾸로 보자면 각각 장르의 코어 팬들에게는 외면 받을 이유가 되지만, 적당한 정도의 취향을 지니는 일반 성인들에게는 그 정도가 좋은 균형이다.

어디로 보나,『불친절한 헤교씨』는 잘 만들어진 연재 오락물이며 일반 성인 독자층에게 보편적 호소력을 가지는 좋은 사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작품은 연재 지면이 여러 번 바뀌어 온 것이 독자의 꾸준한 확보에는 감점요소가 되었으며, 흑백 극화의 형식이기에 종이가 아닌 웹 연재로서는 그 호소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바 있다. 이번에 출시된 단행본이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까? 사실 이 작품은 단행본보다는 연재로 한편씩 보며 그 다음을 기다리는 형식에 더 어울린다. 게다가 소장하고 두고두고 곱씹어보는 장르라기보다는, 실시간으로 웃고 울며 즐겨야 재미있는 쪽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행본에는 연재에서 공개한 바 없던 내용들을 더 넣는다고 하니 한번 두고 보며 즐겨볼 일이다. 단행본으로 완결이 나면 연재 당시보다도 더욱 재미있는 작품으로 완성되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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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거대한 모험담의 학습만화 – 『지구대진화』 [기획회의 060515]

!@#… 오랜만에 만나는, ‘학습’에 정말로 신경을 쓰고 있는 어린이 대상 학습만화. 교육교육 말로는 떠들고 천문학적 돈을 쑤셔넣지만 정작 공부라는 것이 도대체 뭐고 뭘 어떻게 배우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놀랄만큼 무관심한 한국사회에서, 이런 책이 얼마나 부모들의 호응을 얻어낼지는 미지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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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모험담의 학습만화 – 『지구대진화』

김낙호(만화연구가)

개인적으로, 소위 “책을 읽자” 류의 캠페인을 싫어하는 편이다. 다양한 종류의 지식을 습득하고 간접경험을 쌓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자는 것이어야 하는데, 종종 단순히 월 평균 독서량이 어쩌니 하면서 단지 얇게 썰린 죽은 나무토막에 대한 페티시즘적 열정을 발휘하는 선에서 그치곤 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중 특히 지식의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잘 정리된 풍부한 지식이 들어있고 그것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편리한 방식으로 전달된다면 그것이 책이든 인터넷 홈페이지든 비디오든 동네 아저씨의 연설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책이라는 매체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만약 제대로 된 풍부한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면 그것이 교과서든 소설이든 만화책이든 모양새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실 교양/학습만화라는 장르는 이러한 발상에서 시작한다. 분명히 만화는 표현력과 전달력에 있어서 큰 장점을 지니고 있고, 그러한 능력을 그냥 썩혀둔다면 정말 아쉬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최근 몇 년 사이 여러 베스트셀러의 등장에 힘입어 큰 호황을 누리고 있는 교양학습만화의 경우 이러한 근본적 취지를 사정없이 배반하는 경우들이 다수였다. 말은 교양학습만화를 표방했지만, 실상은 연성화된 가벼운 지식들을 양념으로 살짝 뿌린 아동 취향 모험 오락만화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장르 오락 만화라는 사실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왕 교양과 학습을 위해서 교양학습만화를 선택했다면 완성도 높은 지식을 축적하도록 도움이 될 만한 작품을 골라잡는 것이 원래의 취지에 맞을 것이라는 의미다. 만약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교양지식 입문서를 읽는 것이 효과적이지, 그 분야를 소재로 삼았을 뿐인 오락 작품으로 만족하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은가. 아무리 시대의 대세가 속칭 ‘에듀테인먼트’라고 해도, 오락과 교육의 경계가 완전히 없어져버렸다거나 하는 과장은 금물이다.

『지구대진화』(NHK 기획, 고바야시 타츠요시 그림 / 삼성출판사, 전6권)은 정통파 ‘학습’만화다. 내용은 NHK의 유명한 동명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내용을 만화로 이식한 것으로, 문자 그대로 지구의 탄생부터 현재까지의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내용 전개방식은 실제 NHK 제작자들이, 방송국에 견학 나온 두 중학생에게 다큐의 내용을 순서대로 소개해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년소녀 주인공들을 모험길로 보내고 억지로 상황을 체험하게 만들어서 지식을 끼워 맞추는 식이 아닌, 순수하게 ‘강의식’ 학습만화인 셈이다. 등장인물들 사이의 막간 에피소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평온하게 연속적으로 흘러가며, 부차적으로 취급되고 있을 뿐이다. 한 개 에피소드에서 배운 지식을 써먹으며 소동을 벌이는 전형적인 학습만화 구도를 보기 좋게 배반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그냥 설명문 같은 딱딱한 내용이라서,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없다는 말인가? 놀랍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분명히 재미있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성장 스토리다. 단지 하필이면 그것이 등장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구’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결국 성장과 성장을 하여 오늘날의 이곳까지 도달한 지구라는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모험담 말이다. 실로 장쾌한 스케일의 영웅전설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지구와 그 지구에 달라붙어있는 생명이 펼치는 생명의 서사시는 몇몇 미미한 인간들의 성장담과는 전혀 다른 규모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중고등학교의 지구과학이나 생물학 시간에 배우는 파편적인 자연 이야기가 아니라, 46억년의 역사를 하나의 이야기로서 순차적으로, 상당히 드라마틱하게 서술해 나아간다. ‘지식’이 바로 모험담이 되며, 그 결과 방대한 양의 귀중한 자연과학 지식을 문자 그대로 재미있게 학습시켜준다.

이러한 스케일 큰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연출방식은 과연 이름난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답게, 다큐와 동일한 순서로 다큐의 핵심 내용들을 별다른 각색 없이 그대로 전달해준다. 지구의 46억년 역사를 전집도 아닌 6권짜리 시리즈에 압축한다는 것은 일견 빡빡하게 들릴 수 있지만, 핵심을 짚는 절묘한 비유로 표현한다(지구의 역사를 하루의 시간에 비유하는 등). 또한 시각적으로도 명쾌한 도해와 구체적인 CG를 사용하는데, 휘황찬란한 원색 컬러로 포장하기보다 오히려 만화로서 부담 없이 읽기 편한 흑백으로 표현하는 배려를 보여주고 있다. 분명히 『지구대진화』은 훌륭한 교양 지식을 잘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필독서까지는 아니라도, 추천 교양서로서 오르내릴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시도가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결정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바로, 독자층을 제대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주류 교양학습만화의 주요 소비층은 하필이면 초등학생인데, 초등학생 대상으로는 지식수준이 너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래의 독자층이 되어주어야 할 중학생 이상의 경우는 입시과정에서 벗어난 지식에 대해서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달려들기가 결코 쉽지 않다 (전적으로 입시 제도에 맞춰져 있는 정규 교육과정 속에서, 지구과학은 학생들에게 유감스럽게도 찬밥신세 아니던가). 깨달음을 위한 지식이 아닌 입시 성적을 위한 지식으로 움직이는 패러다임 속에서, 대자연이 움직여온 이치 같은 큼지막한 이야기는 관심의 대상에 들어오기 어렵다는 말이다. 나아가 성인들은 학습만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동용으로 치부하며 거리를 두기 십상이다.

설명 방식에 있어서 정공법 그 자체인 이 작품은, 유감스럽게도 독자 소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 간극을 채울 수 있는 것은 결국 작품을 포장하는 마케팅이다. 진지한 교양지식을 얻게 해주는 본격 학습만화라는 점을 강조하는 작업에 실패하면, 그냥 ‘미소녀도 안 나오고 화려한 원색의 모험 액션도 없는 심심한 아동만화’ 정도로 취급받으며 서가 한쪽에서 먼지만 쌓이는 운명에 처할 수도 있다. 부디 여러 노력들이 지속되어, 이런 고품격 지식이 가득 담긴 만화가 정당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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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정체성의 인위적 구축에 관하여 -『유리의 도시』[기획회의 060501]

!@#… 정작 출판을 하는 사람들이 만화의 표현양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들고 오더라도 상당부분 망가질 수 밖에. 그리고 한국에서 단지 멋있게 보이려고 그래픽노블이라는 명칭 쓰는 것, 무척 짜증난다. 뭐 그것을 무려 그래픽 소설이니, 그림소설이니 직역해서 쓰면서 정작 그게 만화를 지칭한다는 것 자체도 제대로 모르는 글쟁이들을 보면 더 짜증나지만 (만화의 지위니 뭐니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도대체 무엇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는지조차 모르면서 글을 뱉어낸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나). 하지만 여전히, 작품 자체는 강추하니까 리뷰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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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인위적 구축에 관하여 -『유리의 도시』

김낙호(만화연구가)

소설 원작 『유리의 도시』는 폴 오스터의 대표작 『뉴욕3부작』의 첫 작품이고, 잘 알려져 있듯 이 작가는 현대문학의 대표적 문인 가운데 하나다. 사실 줄거리는 간단하게 시작한다. 가명으로 탐정소설을 쓰는 퀸이라는 주인공이,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한 여성 고객에게 탐정일을 의뢰받아서 수상한 노인 박사를 미행하다가 점점 더 큰 음모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느와르풍 펄프 탐정소설의 외관 속에서 중첩된 정체성, 언어적 기표와 기의의 혼란, 그리고 결국 분열증적 도피에 대한 중층적인 이야기들이 장르적이면서도 동시에 해체적으로 펼쳐진다.

최근 한국에서 만화판 『유리의 도시』(오스터 글/ 마주첼리, 카라식 그림/ 황보석 역/ 열린책들)가 출시되었다. 한국에 폴 오스터의 책들을 소개해온 출판사가, 원래 오스터의 책들을 번역해온 번역가를 거쳐서 일종의 소품으로 들여온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이 94년에 만화로 만들어진 것은 작가의 친구이자,『쥐』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골수 뉴요커 아트 슈피겔만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슈피겔만은 부드러움과 비정한 도시가 공존하는 탁월한 느와르 그림체를 선보인바 있는 마주첼리를 끌어들였으며, 원작이 지니는 관념적 세계관과 기이한 연출방식을 만화 특유의 방식으로 소화해낼 인재로 자신이 창간한 대안만화잡지 <로>의 편집인 출신인 카라식을 한 팀으로 엮었다. 결과는? 마치 『유리의 도시』는 애초부터 당연히 만화로 그려졌어야 했을 작품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만화판 『유리의 도시』는 만화적 표현력의 극단에서 폴 오스터가 펼쳐낸 복합적 세계관을 완전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소화해내고 있다.

가장 돋보이는 것 가운데 하나는 도시적 경직성을 나타내는 연출의 형식미다. 세로 페이지를 세로의 9개 칸으로 균등하게 분할하는 칸 연출은 뉴욕의 바둑판식 도로의 이미지이자 고층빌딩의 창문, 그리고 나아가 감옥문을 연상시키는 경직성을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하지만 그 속에 사는 인간군상은 도시 자체와는 달리 둥그런 필체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생을 영위한다. 하지만 그 정상성 가운데 때로는 선이 거칠게 갈라지면서 속에 담아둔 광기와 혼란의 내면이 슬쩍 엿보이는 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또한 언어적 기호와 도상 기호의 자유로운 혼합 역시 만화적 연출의 힘을 과시한다. 이 작품에서 궁극의 인위적 구조이며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기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도시’, 다른 하나는 바로 문화적/사회적 코드로서의 ‘언어’다. 언어는 세계의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인위적 기호로 치환하며, 그 속에서 때로는 갑갑한 현기증을 일으키도록 하는 주범인 셈이다. 그런데 도상 기호의 자유로운 흐름, 언어(문자)와 그림의 혼합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매체가 만화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자연언어를 발견하려는 실험을 당한 후유증으로 보통의 언어구조와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 극중 인물 피터 스틸맨 (아들)이 주인공 퀸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로 자유롭게 치환되며, 그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스틸맨의 입에 완전히 붙어서 나오고 있는 말풍선 속의 메마르고 모호한 말들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기표와 기의의 분리관계를 이야기하듯, 말과 그림은 서로와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하는 명 시퀀스다. 혹은 존 밀턴의 실낙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읽어나가는 장면 역시 탁월한 사례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아담의 행위는 그대로 만화의 칸 속에서 문자가 되어 바닥에 그림자로 달라붙고, 세상 사물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문자라는 언어기호의 인위성이 그로테스크한 대비를 이룬다. 작품의 세계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러한 탁월한 연출효과를 그 어떤 다른 매체에서 흉내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러한 요소들은 반대로 생각하면 만화 특유의 자연스러운 독서를 방해하는 단점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줄거리 요약만 하는 명작문학 학습만화가 아니라 또 다른 버전의 ‘폴 오스터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독자들이기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게다가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형식적 미학을 추구하기 위해서 줄거리 진행의 재미를 놓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원래 원작 자체는 팜므파탈, 수상한 과거를 가진 용의자, 미궁으로 빠져드는 사건, 그 속에서 모호해지는 정체성 등 장르 탐정소설의 얼개는 줄거리적 재미를 충분히 보장한다. 혹은 줄거리가 해체적으로 변모하는 말미까지 전부 포괄하더라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도시 버전, 혹은 정신분열증 증상 전개의 비유적 표현이라는 틀에서도 새롭게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의 방식을 가로막지 않는 포괄적 그림체의 열린 연출은 이 작품에 작가팀이 들였을 세심한 고민을 엿보게 한다. 이렇듯 미학과 재미 두 요소들을 종합해서 판단을 내리자면, 만화판 『유리의 도시』는 명작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걸작의 경지를 기웃거리는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별 무리 없이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우수성과는 별개로, 이번에 출시된 한국어판은 편집 제작상의 몇가지 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만화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하여 작가들의 세심한 연출이 상당부분 뭉개지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표지의 일러스트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미국에서 원래 출시된 판본은 주인공 퀸의 정상적 외관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갈라진 선으로 그려진 내면의 혼란의 묘사까지의 중간과정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한국어판은 마지막 혼란의 그림을 생략하고 중간과정까지만 잘라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더욱 큰 문제는 바로 글꼴의 사용이다. 이 작품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원어 판본은 경직된 분위기의 곧은 글꼴, 제3자적 시선의 타자기 글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담아내는 부드러운 글꼴 등을 포함, 다양한 글꼴들이 효과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세심한 연출의도는 한국어판에서 일괄적으로 가벼운 글꼴 하나로 통일해버리는 통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보도 자료에서 만화라는 용어의 사용을 의도적으로 꺼리며 ‘그래픽 노블’이라는 어휘로 한껏 멋을 부려보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세심한 미학적 관심을 먼저 발휘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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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에피소드적 생활 – 『크래커』[기획회의 060415]

!@#… 전작 ‘남자친9’ 보다 표현은 세련되어지고, 신선함 측면에서는 좀 심심해졌다. 안정기에 들어선 작가가 되어버리는 건가? 그게 좋은 건지 나쁜건지는 뭐라 하기 힘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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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적 생활 – 『크래커』

김낙호(만화연구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공적인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커다란 난점 중 하나는 바로 독자들이 이야기를 기억하는 방식이 이중적 구조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니, 우리가 이야기를 ‘경험’하는 방식은 큼지막하고 연속된 서사의 흐름을 따르지만 ‘기억’은 분절적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가 서사적 흐름으로 경험된다는 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기억이 에피소드라는 말은 무엇일까? 전체적이고 커다란 줄거리의 흐름을 기억하기보다, 강렬한 순간들, 뚜렷한 인상이 남는 어떤 상황과 그 속에 처해진 인간들의 당장의 대처 패턴 위주로 기억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에피소드들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교량 역할로서 비로소 하나의 줄거리와 서사적 흐름이 떠오른다. 특히 우리들의 진짜 삶 자체부터가 특별한 세계 속 특별한 사건의 경험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 따라서 만약 일상적인 상황을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면, 당연히 굵은 서사적 흐름보다는 일관된 분위기 속에서 반복적 구도의 에피소드 위주로 제시해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굵은 서사적 사건을 만들만한 소재가 없어서라기보다, 그쪽이 훨씬 더 말 그대로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크래커』(토마 / 애니북스)는 문자 그대로 그냥 같이 살고 있을 뿐인 두 동거 남녀의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다. 서로 연인도 아니면서 단지 방세를 줄이고자 같이 사는 남녀라는 설정이 일상적이라기보다, 여하튼 그렇게 살고 있는 두 사람이 겪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공감시키기 위해서 극단적일 정도의 에피소드 중심 이야기를 구사하고 있다. 짧은 몇 페이지 속에 벌어지는 각자의 성격을 드러내는 사소한 다툼, 작은 오해, 또는 단순한 잡상이 파스텔톤의 간결한 낙서체 그림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위 에세이툰이라고 불리우는 감상에 그림을 삽입하는 것에 가까운 장르의 만화류들과는 다르게, 실제로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교훈이나 단상을 전달해주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짤막한 에피소드들의 연속 속에서 꾸준히 인간사가 진행된다. 남자는 연애를 하게 되고, 여자는 그것을 옆에서 바라보며 여러 상황들을 벌이고,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차이기도 한다. 밴드 매니저가 직업인 남자는 잘 못나가지만 자기가 지지하는 음악가들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프리랜서 디자이너인 여자는 조직 없이 스스로를 관리해야하는 압박과 자유를 동시에 느끼며 직업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 특별히 처절하다거나 극사실적으로 먹고 사는 이야기를 해서 현실을 환기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일상’으로 독자들에게 경험시켜준다는 것이다.

『크래커』에서 다루는 남녀간의 관계 역시 이런 맥락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이 둘은 알고 보니 서로를 갈망하지만 겉으로는 쿨하게 서로를 외면하는 주말 드라마 같은 방식과 상당한 거리가 있고, 문자 그대로 그냥 살다가 이런 저런 서로에 대한 모습을 관찰하고 또 관망하는 사이다. 대변을 보고 깜빡 잊고 물을 안내린 적이 있는 여자와 연애를 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하는 남자의 결심이 이런 사이를 잘 나타내준다. 작가는 이전 작품인 『남자친9이야기』에서도 이미 이런 적당한 거리감을 지닌 쿨한 인간관계 설정을 선보인 바 있지만, 헤어진 남자친구라는 나름대로 끈적한 설정이 깔려있던 바 있다. 하지만 『크래커』에서는 그 정도의 설정마저도 부여하지 않고, 정말 문자 그대로 서로를 관망하는 인간관계 자체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훨씬 더 높은 완성도의 트렌디함, 쿨함,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드라마틱함으로 다가온다. 확실하게 작가는 한층 더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한층 능숙하게 다가선 셈이다.

일상의 에피소드로 서사적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세밀함이다. 기이한 사건으로 시선을 휘어잡는 방식이 아닌 이상, 독자들의 관심을 붙들어 맨다는 것은 바로 하나의 주어진 상황을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서 복잡 미묘한 관계들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끄집어내어 공감으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하나의 에피소드가 ‘리얼함’을 획득하여 수많은 생각의 가지들이 뻗어져 나오고, 전체 이야기를 구성하는 틀이 완성된다. 『크래커』의 경우 연인은 아니지만 연인이 될 수도 있는 현실적 조건에 처해있는 두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에 있어서 그런 세밀함이 상당한 수준이다. 예를 들어 한 에피소드에서, 여자는 남자가 돈 안되는 밴드 매니저 일을 하고 있기에 그저 그렇게 수주를 받고 있는 프리랜서인 자신과 비슷하게 곤궁한 처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보고 있자니까 원하는 CD들을 대량으로 잘만 사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내리는 결론은 하나다: “있는 집 자식들이란…”. 이런 종류의 것들이 바로 실제로 우리들이 현실 속에서 종종 구사하는 우리 주위 세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 아니던가.

물론 에피소드 단위의 감수성에 기반한 접근 방식이 모든 면에서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약간만 독자들과의 공감대 형성에 실패해도 등장 인물간 관계에 대한 피상적 묘사에 머무르기 쉬우며, 쿨함을 추구하던 의도가 경박함으로 오도될 수 있다. 즉 독자들의 상황적 트렌드를 강하게 탄다는 것이다. 물론 그 트렌디함 마저도 넘어설 수 있는 강력한 근본적인 매력을 겸비할 수 있으면 가장 좋다. 하지만 『크래커』의 경우 에피소드들이 축적되어 만들어내는 전체 이야기의 짜임새가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서 긴밀하게 묶여지고 있기보다는, 한회씩 순간순간 펼쳐보게 만드는 연재물로서의 재미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크래커』는 재미있다. 공감을 보내는 독자층을 충분히 끌어들일 힘도 있다. 에피소드 묘사의 능숙함도 즐겁다. 온라인에서 한 회씩 연재로 보는 것의 즐거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책도 좋은 품질로 제작되어 출판되었다. 작품 분위기와 어울리는 팝 성향 독립밴드들의 노래들을 모아 놓은 음반도 같이 출시되어 분위기를 돋아준다 (다만, ‘최초’의 카툰 사운드트랙이니 하는 명백한 거짓말을 홍보자료에 늘어놓는 과유불급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 정도면 마음 편하게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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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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