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만화들의 마력 [인물과 사상 0412]

!@#… <인물과 사상> 12월호에 실린 원고. 제목, 소제목 등은 실제 게재된 버젼에 준함… 중앙, 조선을 다루었으니 아마 다음번에는 동아…도 다루어야 균형이 맞을 듯(사실 이미 ‘나대로 선생’으로 쓰려고 벼르고 있는 중이다). 그 뒤에는 그 반대쪽 선수들도 공략하고. 여기에 쓰는 글들은 언론과 만화의 접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은데, 지면의 성향이 ‘인물’ 중심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신문시사만화 이야기로 흐르고 있다;;;

!@#… 계속 그래왔듯이, 이 내용은 <미디어 오늘> 온라인판에도 공유. 그런데 글 중간에 숏트랙 만평 건에서, 첫번째와 두번째 만평이 바뀐 순서가 논란의 여지가(capcold가 본문에서 근거로 삼았던 오마이뉴스 고태진 시민기자의 증언으로는 지방판에서 먼저 온 것이 ‘부시 방한’ 내용으로 왔다고 하는데, 미디어오늘에서 서울에서 초판을 받았던 것에는 ‘신규칙’ 내용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순서를 실제 조선일보측에 문의해보니, 노코멘트로 일관) 있다고 하여 그 문단을 일부 수정. 별로 중심적이지도 않은 부분에서 논란을 남겨서 글 전체의 요지가 흐려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서…;; 뭐, 신문에서 판본 바뀌면서 내용 업데이트 되는 것 같은 이치라고 생각해주시면 고맙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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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편안하게 길들이기: 신경무와 조선일보 만화들의 마력

김낙호(만화연구가)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끝까지 읽기(클릭)

절대적인 힘에 관한 오락 – <데스노트>[기획회의041102]

여러분들에게, 다른 사람을 아무도 모르게 죽여 버릴 수 있는 힘이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가. 뭐랄까, 하늘을 날아다닌다든지 순간이동을 한다든지 괴력을 발휘한다든지 하는 소박한 초능력과는 비교가 안되는 막강한 권세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과연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최근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애니메이션의 원작인 <고스트 바둑왕>이라는 작품이 있다. 제목 그대로 바둑을 소재로 하는 만화인데, 이 작품이 연재된 일본에서는 청소년들 사이에 바둑 붐을 일으켰을 정도로 큰 인기와 영향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아무리 뭐든지 한번 히트하면 확실하게 붐이 일어나는 일본이라지만, 젊은이들의 전반적인 무관심 속에 확실하게 쇠퇴하고 있던 일본 바둑을 다시 일으킨다니… 범상치 않은 무엇인가가 있는 내용임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책장을 펼쳐본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경우, 바둑이라는 분야) 스스로도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소년이, 다듬어진 천재인 강력한 라이벌을 만나면서 각성, 뜨거운 우정과 경쟁의 관계 속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나간다. 그리고 그 와중에는 주인공 소년의 각성과 성장을 지도해주는 트레이너(이 경우는 과거 바둑의 명인이었던 유령)가 존재한다. …너무 뻔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이 작품을 돋보이게 만든 것은, 결국 두 주인공 사이의 팽팽한 긴장관계다. 서로 완전히 대조되면서도 사실은 비슷한 구석이 있는, 적대 관계이면서도 서로 우호적이며, 라이벌이자 서로의 성장의 원동력. 바둑이라는 상당히 정적인 활동인데도 불구하고, 두뇌싸움을 넘치는 박진감으로 그려내는 솜씨가 탁월했던 것이다.

바로 그 작가, 오바타 타케시(스토리: 오오바 츠쿠미)의 신작이 최근 발간되었다. <데스노트>라는 작품인데, 무려 고등학생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이다. 저승사자(사신)들은 공책을 하나씩 들고 다니는데, 그 ‘데스노트’에 이름을 적히는 사람은 죽는다. 염라대왕의 명부라는 오래된 테마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셈인데, 사신 중 하나가 인간계에 그 노트를 떨어트리고 주인공이 노트를 주우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름대로 끔찍한 도구를 손에 쥐고 고뇌하고 갈등해야할 주인공…을 기대하겠지만, 이 작품은 약간 다르다. 하필이면 그 주인공은 천재 고등학생이었고, 이 노트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세계의 범죄자들의 씨를 말려서 정의로운 세계를 만들고 그 곳의 지배자로 군림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그 연쇄살인마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세계 최고의 탐정, 가칭 ‘L’이 달려드는데…

전작과는 다른 스토리 작가 덕택에 소재는 완전히 하드하게 바뀌어버렸지만, 작가는 이번에도 자신의 장기인 두 천재 사이의 두뇌싸움을 들고 왔다. 다만 이전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관계, 즉 범인과 탐정의 구도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트레이너가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전히 긴박감 넘치는 드라마 속에서 대결이 이루어지고, 대부분이 대화와 표정연기로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재미를 주면서 히트작으로 등극하고 있다. 덕분에, 아무리 소재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불리우는 일본의 주류 만화판이라 할지라도 유수의 대중적인 소년만화 잡지에서 무려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인 만화를 연재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모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소재 선정의 특이성에 특화되어 있는 일본만화계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경우지만, 동시에 적지 않게 특이한 사례로 볼 수 있는 작품인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 작품의 진짜 주인공은 몇몇 천재소년들이 아니라, 바로 ‘데스노트’라는 도구 그 자체다. 절대적인 힘이 주어질 때, 그것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상황이 주는 재미가 바로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이다. 공책을 주운 주인공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면서 범죄자들을 일방적으로 살인한다는 설정이 주는 부도덕한 쾌감도 잠시에 불과하다. 곧 그가 살인 대상을 그의 정체를 추적하는 수사관들까지 확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섬뜩함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그를 추적하기 위해서 여러 명의 희생을 전혀 개의치 않는 추적자 탐정의 행동 역시 즐기기 힘든 자극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불쾌함이 극에 달하는 부분,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두 명이 서로 다른 곳에서 “내가 바로 정의다”를 외치는 장면까지 오면 이 기이한 소년만화의 사악한 재미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특별히 어떤 성찰적이거나 교훈적인 무언가를 표방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일본 주류 만화판의 소재 중심 제작방식의 첨단에서 나온, 기본적으로는 전형적인 주류 오락물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복합적인 심경을 느끼고야 마는 것은 어쩌면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독자로서의 입장에서 지어낸 감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에 전혀 갈등하지 않는 확신에 찬 – 마치 야구에서 우승을 따내고야 말겠다는 식으로 다짐을 하며 좀 더 효율적인 살인에 매진하는 주인공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무언가 모를 찝찝한 자극을 느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이유가 없다. 나도 그런 힘이 주어지면 저렇게 될지 모른다는 공감의 능력이 발동하고 있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공감’이야말로 대중 오락에서 생성되는 재미의 근원이 아니던가.

‘권선징악’이라는 명제는 항상 결과적으로는 참이 될 수 밖에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기는 자가 ‘선’이고, 진 자는 자연스럽게 ‘악’으로 사후 규정되는 세상이니까. 가끔은 그런 냉엄하고 부도덕한 현실을 대놓고 직면시켜주는 주류 오락물이 나와서 히트치더라도 나쁘지 않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 혹시 주변에 ‘데스노트’가 떨어져있지나 않은지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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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개그만화의 오늘 – <츄리닝> [기획회의041019]

빌딩과 ‘삘띵’의 차이는 뭘까? ‘빌딩’이라고 하면 63빌딩이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떠올리지만, ‘삘띵’이라고 발음하면 동네 골목길 어귀에 서있는 4층짜리 상가 건물을 떠올리게 된다. 미묘한 뉘앙스에서 오는 커다란 이미지의 차이. 그런 비슷한 경우가 바로 ‘츄리닝’이다. 우리가 트레이닝복이 아니라 ‘츄리닝’이라고 할 때, 그 어감이 주는 임팩트는 남다르다. 굳이 운동을 하기 위해서 입는다기보다는 단지 헐렁하게 대충 걸치고 무언가 시시껄렁한 짓거리를 하면서 돌아다니기 위한 복장. 잔뜩 폼 잡고 조깅이라도 할 듯 나왔다가,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나 한모금 빨고 다시 들어가서 TV나 보는 패턴이 어울리는 복장이다.

<츄리닝>(이상신, 국중록 저 / 애니북스)은 스포츠신문 연재만화 가운데 하나를 단행본화한 것이다. 애초에 주 2회 연재의 마이너한 코너에 불과했던 시리즈로 시작했다가, 금새 주 6회씩 연재되는 정규 꼭지로 격상되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최근 1년여 동안 가장 좋은 반응을 얻어내고 있는 연재물 중 하나다. 실제로 신문 판매량 증가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수많은 개인 블로그와 게시판으로 ‘펌질’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인기를 여실히 실감할 수 있다. 제목 그대로,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 속에서 결국 헐렁하게 사는 방식이나 시시한 (하지만 꽤 욕망에 충실한) 결말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짧막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흔히 연재물이라고 할 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를 주욱 연결해서 이야기해주거나, 에피소드 방식을 취할 경우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캐릭터가 겪어나가는 하나의 세계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트라우마>, <애욕전선 이상없다>등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연재물과는 다소 다른 특징을 지닌 작품들이 주류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연재물들은 하나의 통일된 이야기나 캐릭터를 담아내기 보다는,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에피소드들이 매일 새롭게 펼쳐질 뿐이다. 이 시리즈를 하나의 작품으로 묶어주는 것은 캐릭터나 커다란 이야기가 아니라, 작품의 브랜드다. 하지만 단편 모음집과도 다른 것이, 일간이나 최소한 주 1,2회 이상이라는 빠른 연재 페이스 속에서 분명히 이것이 연속된 연재물임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츄리닝>은 바로 이 분야에서 성공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방식이 개그라는 장르에 효과적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정해진 캐릭터와 상황으로 이야기를 끌고나가면서 개그를 발휘하는 것은 물론 장점도 많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우스운 이야기를 나눌 때, “…너네들, *** 알지? 아 그 사람이 말이야 지난번에…” 라고 하는 것과, “…참새 두 마리가 전신주 위에 앉았는데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이야기는 자유도의 폭이 다르다. 웃겨야 한다는 지상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자유롭고 황당한 설정이라도 새로 만들고, 또한 생명력이 다하면 그대로 버리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 중 많이 웃겼던 설정은 나중에 한번쯤 더 써먹으면 그만이다. 독자 입장에서도, 세계관이 이 에피소드 다음에도 계속 지속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 한 회를 보고 가볍게 웃고 나면 끝이다.

<츄리닝>은 이러한 전략에 무척 충실한 만화다. 모든 개그는 그 한 회 한 회로 자기 설정을 만들어내며, 네 페이지 안에 확실한 결말을 본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기보다는, 매번 새로운 코너에 도전하는 개그맨들과도 같다. 같은 얼굴, 같은 성격의 소유자들이지만 사실 전혀 다른 이야기, 다른 캐릭터를 소화하고 있다는 약속을 독자들과 이미 공유하고 있다. 물론 연재물 안에서도 연속성을 지니고 반복해서 등장하는 ‘탱구네 가족’ 등의 캐릭터들이 있지만, 그것은 마치 고전적인 우스개인 ‘참새 시리즈’에서 전신주의 참새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덕분에, 어느 한 화를 떼어놓고 따로 읽어도 아무런 부담이 되지 않는 자기완결적인 호흡이 만들어진다. 쉽게 입문하고, 크게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어, 장편연재의 호흡을 지니는 작품인 <식객>의 하루 연재분량(6페이지)을 자기 블로그에 올려놓고 사람들보고 즐기라고 해봤자 무슨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하지만 <츄리닝>은 된다.

그 결과, <츄리닝>의 핵심은 개별적인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의 능력이다. 비록 통일된 큰 이야기의 흐름이 없더라도 그림이나 개그 센스가(효과적인 분업의 힘이다) 시리즈로서의 구심력이 되어준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그만큼 위태로운 측면도 있다. 순간적인 임팩트의 강도를 위해서, 장기적인 이미지 구축을 상대적으로 게을리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분야의 선배격인 <누들누드>의 사례처럼, 나중에도 길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식 연재 만화는 단지 순간순간의 빛나는 아이디어만으로 차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일관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 만약 <츄리닝>이라는 작품을 순간의 즐거움 이상의 의미로 만들고 싶다면, 우수한 개그 이상으로 좀 더 명확한 자기 색깔을 만들 필요가 있다. 만약 작가들이 지금의 빛나는 개그 재능이 소진되고 나면, 사람들은 <츄리닝>을 무엇으로 기억하게 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츄리닝>의 개그보따리는 도저히 마를 줄을 모르고 있다. 더군다나 이번에 출시된 단행본은 순서대로 작품들을 모은 것이 아닌, 베스트 에피소드 선집이다. 큰 흐름보다는 각각의 화에서 보이는 순간의 기지가 핵심적인 이 작품에 어울리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누가 보더라도 충분히 유쾌할 것이다. 그 성과를 조금이라도 폄하할 이유는 없다. 현재 <트라우마>, <애욕전선 이상없다> 등 이 계열의 인기작들 역시 같은 출판사에서 계속 출간 진행중인데, 이들 역시 성공을 거두기를 기원한다. 누구나 자신의 서가에, 언제라도 한번씩 중간에 펼쳐들고 피식 웃을 수 있는 생활 속의 웃음창고를 보관해두는 습관이야말로 진정한 웰빙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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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빈센트, 그리고 반 고호를 만나다 <빈센트와 반 고호> [으뜸과 버금 0410]

이발소 그림계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것, 또는 회화계에서 가장 비싼 값을 받고 그림이 거래되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빈센트 반 고호. 하지만 반 고호가 살아 생전에는 전혀 해피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는 이제는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뻔한 에피소드다. 아무도 그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격렬한 감수성을 알아주지 않았고, 그 결과 가난에 찌들려 살다가 덤으로 조울증과 정신분열증까지 겹쳐서 고생했다. 그리고 유일한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도르와 함께 어느 공동묘지에 묻혀서, 사후에 자신의 그림이 천문학적 액수로 거래되는 상황들을 모두 놓쳐버리고 만 비극적 캐릭터다.

<빈센트와 반 고호>(애니북스 / 글라디미르 스무자 작)라는 만화가 최근 출간되었다. 반 고호의 생애를 다루는 이 만화는 반 고호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거센 붓터치를 구사하고 있는데, 그의 명화 속에서 등장한 – 즉 그가 생전에 보았을 그 다양한 풍경들이 자연스럽게 극의 일부로 녹아들어가 있는데(이러한 자연스럽고 묘한 패러디 / 오마쥬를 가능한 것은 그림의 흐름 속에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만화라는 서사장르의 매력이다), 초반에 이어지는 평온한 풍경화 위주의 패러디가 결말에 가서는 주로 강렬한 필치의 환상적인 그림들로 바뀌어 나가는 시각적 연출 역시 전개의 극적 효과를 높여주고 있다. <빈센트와 반 고호>는 만화의 매력을 통해서 예술이라는 것의 유희성을 효과적으로 다루어주는 작품이다. 그것은 전혀 경박하지도, 고인의 진지한 삶 앞에 누가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단순히 위인전을 이야기하는 정도로는 충분치 않았는지, 작가는 안 그래도 매력적인 한 사람의 삶을 더욱 재미있는 상상력으로 살짝 비틀어준다. 빈센트라는 고양이가 그림을 그려준 것이다! 소심한 무명화가 반 고호, 그리고 그에게 다가온 치명적인 유혹인 고양이 빈센트. 고양이 빈센트는 재능이 넘치는 화가이자, 거침없고 변덕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다. 그리고 그 만남과 우정은 반 고호의 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충만하게 만든다. 사실 이런 구도는 멀게는 시인 베를렌과 아르튀르, 가깝게는 영화 <베티블루>에서도 숱하게 보아온 익숙한 방식이다. 그리고 결말은 항상, 비극으로 끝난다. 처음에는 신선한 활력이었던 그 거친 에너지가, 인간의 사회와 규율 속에서 적응하면서 생활을 해나가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어 둘의 사이는 멀어지고, 거침없는 천재가 결국 먼저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필자가 불만이 한가지 있다면, 그것은 좋은 만화책들이 홍보부족 또는 전략미스로 인하여 묻혀지는 것이다. <빈센트와 반 고호> 역시 출간 이후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도 자료도 신문 기사도 뭣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어느 날 우연히 예술서적 서가에서 발견했을 뿐이었다. 당시 필자는 안 그래도 경향신문의 주간 만화섹션에서 소개할 좋은 신간을 매주 선정하는 역할을 맡아서 머리에 쥐가 나던 시기였는데, 이 책을 만남과 동시에 기쁨(좋은 작품이니까!)과 야속함(제발, 보도자료라도 좀 돌리지 그랬는가!)이 같이 밀려들어왔다. 좋은 작품이 제대로 알아줄 사람을 못 만나서 무관심 속에 묻혀버려서야, 반 고호의 불운한 일생보다 나아질 것이 없을 테니까.

PS. 여담(내용누설 주의): 유럽만화는 드라마틱한 재미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또는 의인화된 동물이 등장해서 난장판을 벌이는 것을 보면서 ‘역시 만화는 애들 수준에나 맞아’라고 푸념을 내뱉는 분들에게는, 마지막 공동묘지 장면에 심어져 있는 ‘식스센스’급 반전을 한번 제대로 즐겨보시기를 권한다. 
[으뜸과 버금 2004. 10.]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물을 만난 만화-<워터보이> [기획회의041005]

  ‘물’이란 우리에게 무엇일까. 무슨 자연보호 캠페인 내지 수돗물 절약 구호 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원래 물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기이한 매력으로 가득한 물질이다. 특히 아주 약간의 예술적 상상력만 동원해보면 더욱 그렇다. 자, 그럼 상상해보자. 물은 기존의 공간을 채우면서 동시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물로 인하여 생겨난 그 곳은 공기의 공간과는 다른, 아니 숫제 상반되는 듯한 장소가 된다. 물과 물이 아닌 공간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생명이라는 현상을 위해서는 서로 섞여들어가야하는 곳이다. 공간, 분리, 혼합, 흐름의 일체형,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매개체. 어떤가, 깊숙이 묻어두었던 예술혼이 마구 불타오르지 않는가? (…아니면 어쩔 수 없지만)

최근 출시된 <워터보이>(아이완 作 / 아트북스)는, 물의 공간적 속성이 지니는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는 만화다. 아닌게 아니라, 이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물로 가득하다. 우선 주인공인 ‘워터보이’를 살펴보자. 항상 발이 물에 잠겨있고 그 물이 몸의 절반쯤까지 올라와있는, 살아있는 물주머니 같은 존재다.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의 방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곳은 항상 물로 반쯤 차있다. 그리고 어느날 물고기 아저씨가 와서 어항을 주고 가는데, 그 속은 물로 차있으며 물고기가 살고 있다. 그리고 물고기들은 어항, 주인공의 방, 나아가 워터보이의 몸까지도 물을 통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헤엄치며 논다. 그런 방식으로 물은 공간과 공간, 나아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이 작품 속에서 물은 더 이상 하나의 소재나 소품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다.

하지만 말로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소 난해한 작업이다. 그 점을 잘 인지하고 있는 듯, <워터보이>는 시각적 표현력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물이 만들어내는 열린 공간이 주는 매력을 잘 살려내는 커다란 가로판형, 일관되게 한 페이지에 한 칸씩만 담겨진 담담한 이미지의 흐름 등이 이러한 노력의 일부다. 또한 연필화 질감의 푸른 화면 속에 흑백 또는 단색톤의 캐릭터들이 펼치는 작가 특유의 연필화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환상적인 느낌을 한층 배가시켜준다. 특히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물은 험난한 파도라기보다는 공간을 채우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묘사 전략은 더욱 더 효과적이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물은 마치 작품의 주인공 그 자체라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워터보이>는 줄거리의 재미를 즐기는 만화가 아니다. 확실히 이 작품은 전통적인 기승전결, 주인공이 난관을 극복해나가면서 결국 성장하고 강해져서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와는 무척이나 멀리 떨어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단순한 그림 구경에 머무르지 않고 나름대로 독자들을 몰입시키며 다음 페이지를 넘기도록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묘사로서의 이야기’라는 힘 덕분이다. 워터보이의 세계는 하나의 그림 속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간을 옮겨가며 헤엄치는 물고기, 의자 밑으로 기어들어갔다가 사막으로 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어 간다. 마치 수백년전에 단테의 <신곡>이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그러하였듯이, 나름대로 장구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묘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워터보이의 시각에서 보자면) 나름대로 평범하고 소소한 행동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스며나오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묘한 일상성을 공감하도록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만화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즉 묘사로서의 이야기의 매력과, 실제로 매력적인 시각적 묘사를 결합시켜서 워터보이가 사는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상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만화라… 여담이지만, <워터보이>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라는 레이블로 출간되었다(아마도 마케팅 상의 이유에서 내려진 명칭 선택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곁들인 그림의 연속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하는 예술양식이라는 속성에서 조금도 위배될 것이 없기에, 좋은 ‘만화’ 작품으로 칭함에 거부감이 없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용감한 동시에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미지의 흐름이나 경계선 없는 환상세계를 즐기는 것은 좋지만, 동시에 독자들로 하여금 낯선 독법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 작품 감상인양 개별적인 그림의 묘사에 완전히 빠져서도,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오락만화인양 줄거리 진행에 집착한 나머지 답답해 해서도 안된다. 즉 <워터보이>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즐기기 위해서는 기존의 독법이나 줄거리의 재미를 버리고 새로운 균형점을 찾으라고 독자들을 종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둘 사이의 간극은 결코 좁지 않다. 보통은 작가가 그런 새로운 비젼을 고집스럽게 내세울 때, 독자와의 균형관계를 생각해서 접점을 마련해주고 타협책을 찾아 나서는 것이 편집자/기획자의 몫이다. 즉 첫 번째 독자로서 ‘좀 더 편한’ 독법이나 구성으로 다듬어달라고 조르는 – 혹은 직접 다듬는 역할이다. 가장 구차한 차원에서라면, “이 책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즐길수 있다”는 식의 홍보 카피나 해설 칼럼 따위를 첨부하는 식으로라도 말이다. <워터보이>의 경우, 그러한 노력이 부족해보인다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불평은 이 정도다. 만약 충분히 오래 서가에서 밀려나지 않고, 넓은 층의 사람들에게 제대로 소개가 된다면 결국은 안정된 독자층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매력과 완성도를 갖춘 작품임에는 틀림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여전히, 이 작가의 홈페이지(http://www.iwanroom.com)에서 봤던 예전의 온라인 작품 <점핑4>를 더 선호한다. 이야기라는 표현법에서 줄거리의 재미는 쉽게 포기하거나 가볍게 여길만한 지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입장인데다가, 작가가 그 것에 결코 무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독자로서, 작가의 다음 책에 대해서 바라는 한가지 소망이다.
2004. 10. 5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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