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생활 (제1회)[경향신문 05/01/14]

!@#… 경향신문 만화섹션 ‘펀’에 새로 연재들어간 작품. capcold 쓰고, 김만구 그리다(당초 생각보다 훨씬 호흡이 잘 맞는 완성도로 나와줘서 무척 해피). 나름대로는, 매회 영어 경구를 하나씩 학습해나가는 실용만화. -_-; 민병철  생활영어의 오랜 아성을 위협해볼까 일방적으로 생각해보고 있다(뭐, 어떤 의미로는). 무단 배포 대환영.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성장의 풍경 – <난 널 좋아한 적 없어> [기획회의041228]

!@#… 여담: 내가 참 짜증나는 건, 이런 책들이 나와도 제대로 보도자료 한번 나한테 도달하는 경우가 없다는 거다. 나도 나름대로 만화판에서는 ‘이리저리 떠들고 다니는 사람’ 축에 속할텐데 말이다. 덕분에 나온지 한참 뒤에야 우연히 발간 사실을 알게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거름 출판사에서 낸 <자살토끼>의 경우… 기획단계 당시 담당 편집자분이 나에게 찾아와서 자문까지 받아갔으면서, 정작 책이 나왔을 때 나왔다는 최소한의 연락 한번 안하더란 말이지. 공짜로 책달라고 조르지 않을테니까 (일정량의 보도용 증정본 돌리는 것 마저도 무척 아까워하는 출판사들이 가끔 있다; 거꾸로, 뭔가 써줄 것도 아니면서 온 시리즈를 전질로 한부씩 더 달라고 요구하는 도둑놈 심보의 기자들 역시 있고), 제발 이런 좋은 책을 냈으면 냈다고 좀 사방에 알리고라도 다녀 보란 말이다! 난 좋은 책이 나와주면 소개시켜주려고 안달인데, 어째서인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게 아닌가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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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풍경 – <난 널 좋아한 적 없어>

  사춘기라는 시기가 있다. 그것은 급격한 육체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고, 정신 역시 그것을 헐레벌떡 뒤따라 가기 위해 휘둘리는 인생단계다. 더욱이 사춘기는 같은 사춘기에 돌입한 친구들과 사춘기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어른들 등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더욱 더 복잡한 고민거리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누구에게나 사춘기는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그때는 격정과 혼돈, 절망과 희망으로 살았던 때”라고 열심히 기억속에서 미화(?)를 하기에 이른다. 마치 한국의 보통 예비군 남자가 누구나 다 술자리에서는 왕년의 특공대원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의도적인 허풍 또는 기억의 과장일 뿐이다. 실제로 그렇다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느꼈던 것 뿐이다. 딱 한 발짝만 뒤에 서서 가만히 살펴보면 그 전에는 안보였던 것, 즉 그 당시의 감정 가운데 격정과 불안함의 방패 밑으로 숨기고 싶어했던 것들 – 바로 외로움과 공허함이 드러난다. 

  캐나다 만화가 체스터 브라운의 <난 널 좋아한 적 없어>(열린책들)은 바로 그런 감수성에 관한 이야기다. 이런 류의 작품들 가운데 삶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시각이 담긴 것들이 의례껏 그렇듯이, 이 작품 역시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 특별히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보통 마을. 엄청나게 불행한 환경은 아니지만 뭔가 살짝 어긋나 있는 부분이 있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한 소년의 이야기다. 이 속에는 극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성숙해지는 초월적인 성장담도, 과거의 충격적인 사건을 제시해서 현재의 내 모습을 정당화시키는 고백 수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변화과정을 낮게 읊조릴 뿐이다. 섬세하고 세부적인 작은 사건과 묘사들이 주는 커다란 여운 속에서, 그 사소한 일상이 쌓여나가서 성장이라는 커다란 모자이크가 되는 것이다. 평범한 대화가 이어진다면 그것은 뭇 탐정물 마냥 나중에 엄청난 단서가 되어 사태를 반전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조금씩 쌓여나가며 하나의 감수성을 가진 성장과정의 모태가 될 뿐이다. 이것은 주인공이 나중에 무엇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열린 결말로 끝나는 성장물들이 지니는 핵심적인 정서다. 왜냐하면, 그 이후의 성장은 단지 주인공의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세가 있는 어머니, 어릴 때의 강박으로 욕지거리(보통은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내세우고는 하는 것이다)를 스스로 봉인한 과거. 그러나 특별히 왕따인 것도, 엄청난 괴짜 천재 인기인도 아닌 그렇고 그런 삶이다. 자기를 좋아하는 여자애,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애, 친구, 동생, 동생의 친구… 그냥 일상적인 인간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다. 유머로 과장하지도 않고, 신파로 치장하지도 않는 평범함이 이 만화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 무거운 평범함 속에서 점차 삶의 무게가 쌓여나간다. 별로 극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가슴 아파지는 어긋난 애정 관계, 패거리들의 우정과 결별, 그리고 어머니의 병세 악화… 이 속에서 주인공 소년은 미묘하게 조금씩 성장해 나아간다. “난 널 좋아한 적 없어”라는 대사 속에 담긴 자기 감정의 부정. 그 부정을 할 수 있다는 상황이 나타내주는 것은 바로 어느틈에 부쩍 다가 와버린 성장 그 자체다.  원래 우리들의 진짜 인생은 극적으로 확 변하기보다는 미묘하게 쌓여나간 부분이 대부분이니까.

  이런 감성을 잡아낼 수 있는 것은 꽉찬 사건의 연속보다는, 바로 관조와 여백의 정서다. 이런 여백 넘치는 감수성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화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이전에 <헤이 웨잇>(제이슨 작)에서 증명되었다시피, 단촐한 선화 위주이며 4등신화한 깡마른 사람들의 모습에서 풍겨나오는 쓸쓸함은 다른 어떤 이야기 장르에서도 이 정도까지 재현하기 힘들 정도로 일품이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처럼 강제로 움직임을 강제하지도 않고, 소설이나 시처럼 머리 만으로 모든 것을 그려내라는 이성적 호소를 하지도 않는다. 그저 비지 않았으나 읽으면 읽을 수록 뭔가 비어보이는 그림판의 연속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페이지 가득한 역동적인 연출을 완전히 배제하고, 각각 그린 칸을 마치 앨범에 사진을 붙이듯 한 장 한 장 부착한 시도는 더욱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페이지당 6칸씩 같은 크기로 여백을 가지고 나열된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참을 수 없이 지리한 삶의 여백이 외로움의 정서가 되어 독자를 괴롭힌다. 아무도 특별히 외로워하지 않는 그 이야기 속에서, 사춘기와 성장의 외로움이 가득히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절대적으로 미덕만 있는 건 아니다. 외로움과 궁상은 때로는 위태로운 외줄타기니까 말이다. 특히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이, 한국의 일반적인 독자들이 살아온 성장과정은 작가의 그것보다 다른 의미에서 훨씬 더 극단적이고 역동적이기 때문이다(군대식 교육제도와 입시전쟁이라는 것만 놓고 보더라도 말이다). 즉 어떻게 보자면 ‘싱거운 명품녹차’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화라면 자고로 명쾌한 극적 전개와 결론을 원하는 사람들과도 확실한 상극이다. 그 반대로 정적인 만화라면 따듯한 메시지가 넘쳐흘러야 한다고 생각하며 최근의 속칭 ‘에세이툰’ 만을 떠올리는 사람들과도 상극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한국의 대중적인 만화독자들 대다수의 취향에 어긋날 위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내준 출판사의 용기에 응원과 걱정을 동시에 보내고 싶다. 또한 이런 식의 독서에서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는 새로운 만화독자들이 발견되는 계기가 되어주길 바란다.

  성장물을 보고 즐기는 것은 그 성장기를 이미 다 건너버린 후, 안전한 곳에 서있는 ‘어른’들이다. 성장기 이전이라면 어차피 공감할 수 없고, 성장기 와중이라면 굳이 다른 작품 속에서 무언가를 찾을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난 널 좋아한 적 없어> 같은 작품을 보면서 다시금 자신의 성장기를 돌아보며 새로이 발견한다… “나도 그때 외로웠던 것이구나”.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5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하울의 움직이는 재앙>을 보고 오다

(애니품평이지만… 그냥 카테고리는 만화품평으로 넣었다. 서찬휘님 블로그에서 트랙백.)

!@#…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 오다. 이후는 당연히 스포일러 주의. 아니 사실 스포일러라도 많이 보고 가는게 사실 관람에 도움이 될지도. 여하튼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런 폭탄맞은 시나리오라도, 미야자키 브랜드가 붙으면 히트치는구나!” -_-; 뭐랄까, 미야자키 할아버지가 늙으막에 린타로나 제리 브룩하이머 같은 화끈하고 골빈 선남선녀 대파괴 폭죽쑈에 손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capcold식 표현으로, “재앙영화”. 영화 자체가 재앙이라는 말이다.

!@#… 노장에게 새로운 것을 바라기보다 그 원숙미를 즐기라면서 호평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원숙은 커녕 자기가 쌓아올렸던 좋은 실력을 몽창 날려먹은 희대의 괴작으로 보였다. 무슨 과시욕에 사로잡힌 얼치기 신인 초짜 감독 마냥, 세계관도 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스펙타클 이벤트에 끌려다니기 바쁘다. 이건 유치한게 아니라, 그냥 골빈 거다. 작품 속에서, 마법의 힘을 제거당하고 치매 할멈의 모습으로 폭삭 찌그러져버린 황야의 마녀 – 그것이야말로 이번 작품에서 미야자키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 재미있게 보았다는 분들을 비난할 생각은 아니다. 뭐 나름대로 다들 이유가 있겠지. 그 중에는 합리적인 이유도 있을테고, 그냥 미야자키니까 하면서 부화뇌동하는 자기사고 제로의 바보들도 여럿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왜 이걸 재앙이라고 생각하는지 정리를 좀 해놓고 싶다. 시나리오의 뭐가 그리 노골적으로 불만이라는 것인가? 딱 3가지만 정리해보자.

1) 주인공의 갈등과 성장은 밥말아 먹었는가: <마녀의 택급편>에서 보여준 소녀의 섬세한 성장과정. 그 마법은 이 영화에서는 완전소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에게 걸린 ‘늙는 저주’는 결국 마음의 활력을 반영한다. 마음이 소녀적인 활력과 사랑에 눈뜰 때, 그리고 무덤덤한 자기비하를 잊어버리고 잠을 잘 때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소녀로 돌아오는 소피. 이건 꽤 중요한 모티브이며, 작품을 끌어가는 갈등이자 원동력이 되어주었어야 할 물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선택과 희생을 치루며 결국 새로운 성장을 이루면서 끝나는 기승전결을 완전히 무시. 그냥 하울만 기다리고 쫒아다니다 보니 어느틈에 저주는 해결. 뜬금없음의 극치인 것이, 거의 원더풀데이즈 급이다. 동기 없이 돌아다니기는 하울 역시 대동소이하지만 말이다. 전쟁 중재? 양쪽의 정치인들을 만나가면서 설전을 벌이거나, 혹은 그걸 두려워서 피하거나. 그냥 흐린 하늘을 날라다니면서 곡예쑈한다고 뭘 해결한다는 건가. 주인공들의 성장은 설정상 주어진 것일 뿐, 시나리오 상에서의 설득 과정이 뭉텅 빠져있다.

2) 세계관도 설명 못하면서 뭘 그리 벌려놓는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전쟁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욕망, 그리고 박애 넘치는 해결과정을 방대한 세계관과 함께 자연스럽게 전달해낸다. <하울...>은 도저히 같은 감독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다. 하울에서 전쟁을 한다는 그 양쪽 나라의 논리는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일반인/정치가/마법사/정령/악마 등 여러 종족과 계층들의 관계 역시 얼렁뚱땅 설명 없이 넘어간다. 설명 없어도 이해할 만한 거라면 좋겠지만, 스토리상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건너뛰는 것이다. 그래서 칼시퍼가 하울에게 들어가게 된 과거 회상에서 애초에 왜 칼시퍼가 지상으로 소환당했는지, 어째서 그 합체의 과정 속에서 하울은 저주를 받게 되었는지, 하다못해 그 저주의 구체적인 내용이 뭔지(그냥 힘쓰다보면 괴물로 변한다는 거 말고, 제대로 된 ‘규칙’말이다) 모두 생략. 그렇기 때문에 후반에 들어가서는 모든 스토리 전개의 논리가 급격하게 붕괴된다. 전반에 세계관 구축을 하고 후반에 그 속에서 사건들이 벌어지고 수습되는 구조여야 할 것이, 세계관 구축도 안된 상태에서 사건만 뜬금없이 계속 연속되다보니 망가지는 것이다. 덕분에 소피는 ‘쓸데없이’ 성을 무너트렸다가 다시 세우고,  하울은 왜 싸우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고생하고 다닌다. <하울...>에서는 스토리 전개 자체에 매우 중요한 세계관 설명이 뭉텅이로 빠졌다. 불친절한 시나리오와 멍청한 시나리오는 한끝 차이다; 유감스럽게도 <하울...>은 후자다. 원작 소설을 찾아읽어보라고? 제대로 된 시나리오 각색에 실패했다는 시인이겠지. 여튼, <하울...>의 시나리오는 작품 속 세계의 구동 원리를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것에 처절하게 실패하고 있고, 그 덕분에 결국 남는 건 미야자키 하야오표 ‘코드’들 뿐이다. 날라다니다가 추락할 때 손을 잡아준다든지, 자연 평원과 기계 무기의 대립된 이미지라든지, 고풍스러운 환타지 비행선들의 공중전이라든지 말이다. 각각 그 자체로만 보면 매력적일 지라도, 통합된 추동력 없이는 키치처럼 보일 뿐이다. <온 유어 마크>에서 무려 6분 만에 모든 세계관을 다 표현하고도 여유가 남아서 복합 선택형 스토리구조까지 도입한 천재감독은 도대체 어디로 간건가?

3) 매력적인 캐릭터 구축은 디자인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이웃의 토토로>에서 보여준 환타지 캐릭터들의 활기찬 생명력도 모두 소멸. 그냥 처진 눈에 분주하게 제자리를 돌기만 할 뿐인 개는 아무 매력이 없다. 그냥 쫒아다니면서 가끔 도움을 주기만 하는 허수아비도 마찬가지다. 갈등도 뭣도 없는 꼬마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 뭐랄까, 마치 <포카혼타스> 이후로 점점 망가져 가던 디즈니 클래식의 동물조연들을 보고 있는 느낌. 그 난잡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조차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임무와 역할과 상징이 있는 캐릭터가 아니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거신병 같은 초절정 사연만땅 조연 캐릭터는 다시 만나기 힘든 것인가. 개연성 없는 주연 캐릭터들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으니 패스.

!@#… 지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전 세계의 관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세상에, 이래도 나를 추종할래?” 라는 도발이다. 출중한 이야기꾼으로 자기 입지를 확보해온 지브리, 그중에서도 미야자키 감독이 이렇게 망가질 줄이야. “너따위가 뭔데 대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씹는거냐?”라고 항의하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런 대 감독이, 나 따위한테도 씹힐만한 시나리오를 들고왔는데 어쩌란 말이냐!”

!@#… 만약 쓸데없는 전쟁 이야기가 빠지고 마법사들끼리의 세력/파벌 다툼이 중요한 축으로 다루어졌다면 어땠을까. 그럼 황야의 마녀도 선생님도 그렇게 낭비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울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소피가 자신의 저주를 푸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소피의 자기희생과 진정한 성장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주인공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 정도는 구경할 수 있었을테지. 하울과 캘시퍼의 운명공동체적 애증관계가 좀더 잘 묘사되었더라면? 서로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아니 어쩔 수 없이 정들어버렸으면서도 힘으로 균형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묘한 긴장감이 돋보였을 것이다. 만약, 만약, 만약… 좀 더 낳은 시나리오가 될 수 있던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프로젝트에서, 그 모든 것을 버리고는 이런 물건이 탄생했으니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다.

!@#… 뭐, 적어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래서는 “이번 것이 진짜 은퇴작이었습니다”라는 선언은 못할 것이다. 어서 설욕작을 새로 만들지 않으면, 막판에 치매성 졸작으로 자기 얼굴에 먹칠을 한 감독으로 대대로 기억당할테니까. 이것이 바로 나름대로 <하울...>의 의의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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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이야기 – <천일야화> [기획회의041214]

이야기의 이야기 – <천일야화>(전진석/한승희)

‘이야기’라는 것의 매력은 무엇일까?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이 행동하는 방식들을 간접적으로 바라보는 행위가 우리에게 왜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여러 가지 설명이 나올 수 있겠지만, 크게 바라보자면 한 가지는 공감의 재미, 즉 주인공들의 감정과 활동상에 이입을 해서 같이 난관을 극복해 나아가는 듯한 쾌감을 얻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외성의 재미, 즉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세상과 “나라면 결코 했을 리 없는 선택”을 내리는 주인공을 보면서 자신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얼마나 잘 배합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이야기의 재미가 좌우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모든 것을 다 풀어나가기는 쉽지 않고 욕심이 나기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많은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 복잡하고 큰 대하 서사극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확실한 것은 ‘이야기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로 묶여져 있으면서, 그것 자체가 하나의 큰 이야기가 되는 구조로 끌고 간다는 말이다. 작은 이야기들이 각자 자신만의 매력과 기승전결, 이입과 의외성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모든 이야기들이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하나의 커다란 묶음으로 뭉쳐진다. 이런 구조 덕분에 세월의 흐름 속에서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거나 삭제하는 것이 쉽고, 각각의 세부적인 디테일 역시 쉽게 수정할 수 있게 된다. 즉 ‘시대와 함께 진화하는 이야기’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장르의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베스트셀러라면 역시 기독교의 “구약성서”겠지만, 가장 ‘재미있는’ 것을 고르자면 큰 이견 없이 아마도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츠)”가 꼽힐 것이다. 연소된 그림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지만 결국은 이야기로 승부하는 장르인 만화에서, 이런 매력적인 이야기를 가만히 놔두었을 리가 없다. 때로는 통째로, 때로는 몇몇 작은 이야기들만 뽑아서 만화로 만들어져왔고, 성공도 실패도 있었지만 그 시도만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근 좋은 반응을 얻은 <아라비안 나이트>(신일숙), 인터넷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온라인 연재만화 <1001>(양영순), 그리고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천일야화>(전진석/한승희) 등이 좋은 사례다.

<천일야화>는 <라스트 환타지>, <멀린의 신비한 마술학교>등 소년향 만화의 기반 위에서 익숙한 장르적 규칙을 비틀어 내는 것을 특기로 삼고 있는 스토리 작가 전진석의 글과, <연상연하>, <웰컴 투 리오>등 사건 위주의 드라마성이 강한 순정만화 계열 작가인 한승희씨의 그림이 만난 작품이다. 이질적일 수 있는 두 창작자의 성향이지만, 원래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용광로로 녹여내는 이야기인 천일야화의 세계 속에서 이 만남은 의외로 썩 어울린다.

아라비안 나이츠에서 여러 이야기들을 묶어내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것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바로 왕과 세헤라자드의 이야기다. 사랑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가진 왕이 온 나라의 처녀들을 섭렵하며 다음날 아침 참수하는 횡포 속에서, 대신의 딸 세헤라자드가 들어가서 매일 밤 왕에게 진기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1000일(혹은 1001일)동안 공략, 결국 왕을 제정신으로 돌려놓고 해피엔딩. 첨삭의 자유를 누리는 이야기인 만큼, <천일야화>에서 작가는 아예 세헤라자드를 남자로 설정해버린다. 연인이자 가족인 여동생을 대신해서 끌려가는 것이다(여성향 만화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야오이 코드, 근친애 코드 등의 도입으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아직 좀 더 두고볼 일이다).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역시 침대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감옥 골방에서 유언처럼 읊조리는 이야기가 되어 비극적 처절함의 분위기가 좀 더 부각되고 있다.

첫 번째 날의 이야기로 푸치니의 오페라로도 유명한 투란도테 공주 이야기를 꺼낸 것 역시 꽤 파격적인 발상이다. 초반에는 짧고 교훈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점차 복잡한 인생사와 애정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될 것을 기대하는 일반적인 패턴에서 벗어나, 첫 주자부터 이미 장엄한 이미지의 비극으로 시작해버리는 것이다. 전체 이야기의 흐름은 푸치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 선택 자체로 인하여 이미 <천일야화>가 지니는 독특성을 선전포고한 셈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구체적인 형상의 선은 사건의 전달에 깔끔한 소화력을 주고 있으며, 남성향 장르와 여성향 장르에 익숙한 독자들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중성적인 칸 연출방식 역시 작품의 독서에 큰 도움이 되어준다.

물론 아직 1권만 발간된 상태이기 때문에 섣부른 칭찬도 비판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서 아라비안 나이츠를 모태로 하는 재해석 작품들이 빠지기 쉬운 “잡다한 이야기들의 일관성 없는 모음”이라는 함정을 어떻게 피해갈지, 아직 판단 내리기 힘들다. 원래 아라비안 나이츠의 다양한 이야기는 확실한 목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미덕, 지혜와 현명한 판단의 중요성 등의 교훈을 남겨주는 것이다. 이런 것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건과 진기한 세상 문물들이 소재로서 동원되고 있을 뿐이다. 설정 자체가 “왕에게 사랑과 지혜를 깨우쳐줘서 정상으로 돌려 놓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당연한 말이다. 그런 목표의식이 좀 더 희미했던 이야기인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이라든지 “알라딘과 마술램프” 등은 사실 나중에 서양인들이 끼워넣은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비록 <천일야화>에서 첫 이야기로 사용한 것은 아라비안 나이츠의 설화 ‘칼라프 왕자와 중국공주 이야기’ 보다는 그것을 서양식으로 각색한 오페라 ‘투란도트’의 모습에 가까웠지만, 상당히 모험활극스럽게 시작한 이 작품의 전체적 스타일이나 주제면에서 잘 어울리고 있다. 첫 단추는 잘 들어간 셈인데, 이런 페이스를 놓치지 않고 계속 천일어치 동안 지속시키는 것이 관건인 셈이다.

이런저런 수식어나 분석 이전에, <천일야화>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만화 독서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바로 만나기에는 약간 부담스러운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남성향과 여성향 독자들 모두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재미를 고루 갖추고 있다. 독자들의 많은 호응,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작품 자체도 계속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이후 이야기들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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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병기의 오락 – 강철의 대지 [기획회의 041130]

밀리터리(군사) 매니아라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젊은 남성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탱크, 전투기, 총기, 제복 등 군대 및 전쟁과 관련된 아이템에 지대한 관심과 지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살상용 병기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상황에 대한 애정이라니, 혹시 잔학하고 반사회적인 인간들의 집단이 아닐까? 다행히도,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뚜렷한 대결구도와 그 대결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발달한 각종 기술과 전략들을, 하나의 취향이자 오락으로서 관심 있게 즐기고 있는 것 뿐이다. 마치 평범한 사람들도 전쟁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전략 놀이인 장기나 바둑이 즐거운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들의 관심사를 잘 반영해주는 장르가 바로 ‘밀리터리물’, 즉 군사대결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교양필독서라고 항상 칭송받는 ‘삼국지’ 역시 큰 의미에서는 밀리터리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보통 밀리터리물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은 1차 대전 이후의 현대전을 다룬다. 인데, 이 장르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단지 전쟁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각종 전략 대결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병기 아이템의 먹이사슬 관계를 세밀한 디테일로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인기요소인 다양한 현대적인 병기가 일거에 발달해버린 시기는 바로 1차 대전 이후다. 전황을 일거에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비밀의 신형탱크 등장, 그것에 맞서기 위한 또다른 특급 돌격 장갑차, 장갑차 위주의 전략에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전투기의 도입… 이렇듯, 병기 아이템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종종 밀리터리물은 사람보다 병기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더욱 더 매니아 위주로 흘러가고, ‘바깥’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이해가 안가는 경지에 도달하기 쉽다.

최근 출간된 <강철의 대지 - 어나더 월드워2>(문효석/길찾기)는 이런 의미에서 밀리터리물의 기본 뼈대를 간직한 채, 아기자기한 대중적 요소들이 결합된 좋은 사례다. 작품의 제목이 시사해주듯 무대는 2차 세계대전인데(원래 밀리터리물의 최고 인기 배경이 바로 2차 대전이다; 인류의 전쟁 역사상 신병기와 그것을 운용하는 전략이 가장 급격하게 발달해 나아갔던 시기 아닌가), 페이지를 펼쳐보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우락부락하고 험악한 군인들 대신, 군복을 입은 북실북실한 동물들이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그림체 자체도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컬러로 되어있어서, 딱딱한 놋쇠의 질감보다는 프라모델로 만든 디오라마를 연상시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각종 탱크와 장갑차들이 난데없이 로봇으로 변신한다든지 하는 자유로운 시대착오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이들이 벌이는 소동 역시 처절한 살육과 파괴 보다는, 신형 탱크로 경주를 하는 등 어쩐지 ‘생각보다 건전한’ 경연장이 되어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철의 대지>가 밀리터리물로서 조금이라도 부실하다는 말은 아니다. 미국군, 독일군 등 기본 진영은 현실 그대로 남아있고, 전략 개념에 대한 접근이라든지 병기에 대한 세심한 설정 등은 결코 녹녹하지 않다. 하지만 반대로, 전쟁에 관한 작품이라면 흔히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중후장대한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 의인화된 동물 주인공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웰즈의 <동물농장> 같은 사회풍자극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또는 전쟁 이야기라고 해서 헤밍웨이의 소설들 같은 드라마틱한 인생역정과도 그다지 큰 관련이 없다. 단지 다양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병기 경연과 대결구도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이 장르의 가장 원초적인 목적 – 전략과 병기에 관한 상상력을 통한 오락 – 을 더욱 근본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것을 단점이라고 지적할 수도 없지는 않겠지만, 장점이라면 이것만큼 확실한 장점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듯 부담을 잔뜩 덜어내고 보다보면, 이 작품의 재미에 본격적으로 눈뜰 수 있다.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사람(그러니까, 동물)들이라기보다는, 변신 탱크 등 다양한 병기들이다. 이런 덩치 큰 주인공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책의 판형 역시 큼지막하게 나와 주었으며, 긴 서사 모험담이 아닌 짦막한 에피소드 여러 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치 각종 캐릭터 소개를 따로 하듯이, 맨 뒤에는 병기들에 대한 설정자료가 빼곡하게 들어가 있다. 어떻게 이 탱크가 로봇으로 변신하고, 목적은 무엇이며, 언제 개발되어 활용되었는지 등등, 무한한 애정으로 뒤덮여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수많은 소년들이 태권브이와 마징가의 대결을 꿈꾸었듯이, 그 과정에서 “사실은 팔꿈치 뒤에서 미사일이 나간단 말이야”라고 주장을 하고 그 억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팔 속에 미사일이 장착되어 발사되는 과정을 그림으로 친구에게 설명해주는 그런 즐거움과 같다.

<강철의 대지>는 밀리터리물이 뭐가 그리 재미있다는 것인지 호기심이 들었지만, 딱딱한 군대의 이미지가 주는 거부감이라든지 지나치게 매니악한 세부설정을 강요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접근이 힘들었던 사람들이 입문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작품이다. 상상력으로 점철된 병기 대결구도가 주는 신기함과 시각적 쾌감은 그 자체로서 이미 훌륭한 오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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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추신: 여담이지만, “진정한 병기 매니아는 전쟁을 반대한다!”라는 격언이 있다. 왜냐고? 전쟁이 일어나면 그 사랑스러운 병기들이 모두 부서지니까. -_-;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을 동경하다 [창비어린이/04겨울]

!@#… 창비 계간지 <창비어린이> 04년 겨울호. 10월 초에 썼으나 계간인 관계로 얼마전에 출간. 개인적인 착오에 의해서 원고마감보다 무려 한달(!)여를 일찍 넘겨주었던 희대의 사건의 주인공.

!@#… 도판은 생략. 편집하기 귀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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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미국을 동경하다

『먼나라 이웃나라-미국편』 이원복 김영사 2004
김낙호 capcold @ capcold.net

  한국이라는 곳에서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단일민족 같은 황당한 신화를 정말로 진지하게 숭배하고 있는 자기완결적인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천연자원이 없고 석유 한방울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설하면서 그래서 우리는 세계를 상대해야 한다는 논지를 굳건히 강조한다. 우리는 하나고 남들은 우리와 전혀 다르지만, 여하튼 우리는 그들을 잘 알아야한다는 논리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세계를 나와 내가 아닌 무엇으로 나눈 후, 후자에게 엉뚱하게도 일방적인 잣대를 들이댄다. 나보다 잘 산다(미국이나 서유럽이라든지), 그리고 나보다 못 산다(동남아, 아프리카 등)라는 잣대 말이다. 이렇듯 한국사회의 큰 약점으로 널리 지적받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는 천박한 시선’은 어떤 이웃나라라도 먼나라로 만들고야 만다.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히트 만화 씨리즈가 있다. 이 분야의 절대적인 베스트+스테디쎌러로 자리잡은 이 씨리즈는, 벌써 20여년 동안 한국인들에게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교육시켜왔다. 부담스럽지 않은 그림체와 편리한 화법, 적절한 유머와 풍부한 정보를 섞어가면서 이끌어나가는 작가의 만화 솜씨는 확실히 탁월하다. 게다가 한참 ‘세계를 알자’ 붐이 불고 본격화되었던 80, 90년대의 시대적 배경까지 겹치면서, 집집마다 당연히 갖추어놓은 교양도서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한국 만화에서 ‘이원복’이라는 이름과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브랜드가 가지는 파워의 한계는 끝이 없는 듯하다. 아무리 완성도도 정보성도 턱없이 떨어지는 『미국을 알면 영어가 보인다』(이원복, 주니어김영사 2002) 같은 급조된 자매품이라 할지라도 이원복 브랜드가 입혀지자 히트한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경우 원래의 6부작 외에 90년대에 ‘일본편’과 ‘한국편’이 추가되어서 새로운 패키지로 다시금 높은 판매고를 기록하더니만, 결국 올해 이 씨리즈의 진정한 완결점을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미국편’으로 말이다.

  사실 『먼나라 이웃나라』 씨리즈에서 미국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가장 중요한 외국은 미국이니까. 작가는 그 중요성을 높게 평가하는지, 심지어 영광스러운 대단원의 막을 미국에게 할애했다. 그리고 자세히 다루어주기 위해서 무려 세 권으로 나누기까지 했다. 1권 ‘미국, 미국인’, 2권 ‘미국의 역사’, 3권 ‘미국의 대통령들’(근간)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가 받은 인상은 딱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여전하다, 아니 좀더 본격적이다.’ 이 씨리즈의 장점도 단점도, 미국이라는 지극히 가깝고도 민감한 소재와 만나면서 더더욱 뚜렷해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좋은 말만 쓰기가 힘들어져버렸다.

  미국사회의 모습, 생활 속의 상식을 알기 쉽게 풀어주는 것에 있어서는 ‘미국편’은 충분히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복지에 대한 유럽인과 미국인의 차이를 ‘공공’과 ‘나’에 대한 인식 차이로 설명하는 대목은, 단지 두 칸만으로도 사회과학 논문 한 편 이상의 명료함을 발휘하고 있다. 나아가 미국 생활에서 신용 기록 누적 문제, 교포들의 세대간 갈등, 유대인들이 미국에서 차지하는 위치 등, 미국에 대해서 어렴풋이는 알고는 있었지만 자세한 내막은 몰랐던 여러 상식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단편적인 소재가 아닌 전체적 주제를 살펴보자면 ‘미국편’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는 스토리를 주욱 따라가는 극만화가 아니라, 소위 ‘학습만화’의 범주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따라서 결국 어떤 정보를 어떤 목적으로 제시하는지가 바로 이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경우 그것은 ‘우리가 이 외국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점이다. 만약 이 작품이 단순히 외국문물을 소개하는 선에서 그쳤다면 솔직히 흔한 관광 가이드 중 하나로 그쳤겠지만, 작가는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개입해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얻어야 할 함의를 끄집어내는 것에 결코 게으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새로 만들어보자. 이 작품이 주장하는,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가?

  실마리는 구성방식 속에 있다. 사실 ‘미국편’ 역시 이전의 씨리즈와 마찬가지의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미국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나 편견을 제시하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후, 미국이라는 나라가 구성되어 있는 원칙, 사회적 제도 등 굵직한 부분들을 다루어준다. 그리고는 미국 문화의 특징이나 미국 생활의 신기한 점들을 가볍게 일화 중심으로 소개하면서 긴장을 풀어준다. 그러고는 그 모든 문화와 사회가 만들어진 배경으로서 미국의 역사를 주욱 훑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사실상 전체 결론이며, 작품을 통틀어서 결국 말하고 싶은 바 – 즉 한국이 이 나라로부터 배워야 할 점 – 를 웅변해주는 서술방식인 것이다. ‘미국편’의 경우, 그 메씨지는 목차 페이지에서부터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군중에게 권력을 주지 마라!”

  이 작품 초반에서 인용되는 프랑스 역사학자의 발언, “미국은 무한한 자유를 가진 드센 주민, 국민들로부터 나라의 질서를 되찾았다”는 말은 작가의 희망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1권의 전반부에서 작가는 반복적으로 국민이 권력을 얻는 것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강조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부정적인 모습이라는 것은, 아주 노골적으로 현재의 한국 – 더 정확히는, 노무현 정부 이후 한국사회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과잉해석이라고? ‘일반대중이 숫자로 밀어붙이는’ 설명과 함께 들어간 그림 속의 폭도들이 몽둥이나 돌멩이를 들고 있지 않고 하필이면 촛불을 들고 있는 것이 과연 우연이란 말인가.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의 일화를 들면서 코드 인사니, 운동권이니, ‘잭사모’니 하는 용어를 동원하는 것이라든지, 애덤스(John Adams) 대통령이 친불 언론에 내린 탄압에 조중동이라는 말장난을 삽입한 것 등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그 결과, 미국은 포퓰리즘과 민중선동으로 흔들리지 않는, 혁명이 없는 간접선거의 나라라서 참으로 바람직하다는 주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물론 미국의 대통령 간접투표제를 이야기하면서 ‘더 많은 득표수를 얻고도 떨어진’ 후보의 일화를 넣으면서 약점 역시 대등하게 다루어주는 듯한 인상을 풍기려고 노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제도적·기술적인 차원에서의 허점으로 간주될 뿐이지 근본적인 씨스템의 우월성, 즉 국민이 직접 주인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예찬은 조금도 굽히지 않는다. 한국이라는 현실과 연결지어서 보자면, 가진 것 하나 없이 국민의 지지 하나만 가지고 결국 대통령이 되어버린 노무현 정부,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기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이다. 이 작품의 나머지 부분들은 단지 이 메씨지를 강조하거나, 아니면 너무 팍팍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양념이고 잡학 상식들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을 바라보는 전체적인 시선은 어떠한가. “200만이 넘는 한국동포가 살고 있는 미국은, 미워할 수도 없고 미워할 이유도 없는 우리의 일부분이다”라는 1권 마지막 멘트가 지닌 기이한 논지는 의도가 어떠했든지간에 충분히 사대주의적인 발상으로 읽힐 수 있다. 사실 애초에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씨리즈가 다루는 나라의 선정에서 볼 수 있듯이,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을 바로 알자는 것보다는 소위 잘 사는 선진국의 문물을 소개한다는 식의 취지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지점은 이 씨리즈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에서 지적당해온 바이기 때문에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즉 ‘미국편’을 요약하자면, 미국의 문물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노무현 정부로 상징되는) 직접민주주의적인 행태를 비판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원복이라는 작가의 우파적인 정치적 성향이나 어설픈 사해동포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비록 논지나 근거도 약하고, 실제의 민주적인 사회발전에 있어서는 득보다 실이 많은 발상이지만 적어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생각이기는 하니까. 마치 필자가 오랜 민주노동당원으로서, 노무현 정부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인정은 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과연 일부의 평가마냥 ‘극우’인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의 모든 것에 딴지를 걸며 반대하는 자칭 기득권 세력의 일부로 보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정도는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가 극우라면, 이 사회의 진짜 오른쪽에 있는 수많은 수구 꼴통들은 도대체 언어로 묘사조차 불가능할 터이니 말이다. 게다가 미국에 대한 여전히 막연한 동경 역시, 용미파를 자처하다가 미국 한번 순방 갔다 오고는 갑자기 미국 열성팬이 되어버린 모 정치인에 비하면 양반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주로 보는 책인데 책임감 없게 정치적 메시지를 넣다니”라는 순진무구한 비난을 할 생각도 없다. 상대가 어른이든 어린이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그 방법이 강압적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아가, 애초에 자신의 작품, 즉 자신의 발언을 하면서 과연 정치적 입장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굳이 꺼낼 필요도 없지 않은가. 즉 무슨 국정교과서도 아닌 일반 학습만화에서 엄청난 윤리적 결백성이나 불편부당성을 요구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아니, 국정교과서조차도 당대 정부의 입김으로 가득 찬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뭐 할말 다 한 셈이다.

  아니, 그러니까 책의 내용은 문제가 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자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책의 문제적인 부분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보로서 가치있는 부분은 유용하게 받아들이되, 그 기저에 깔린 논지나 메씨지에 대해서는 독자 자신, 그리고 그들에게 책을 권해준 사람들도 같이 제대로 생각하면서 읽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여하튼 ‘미국편’은 반민중적인 가치를 중시하며 미국식 자본주의를 이 세상의 현실적인 모델로서 추종할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것도 만화라는 아주 효과적인 화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해내고 있다.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면서 맞장구치든, 틀리다고 생각하면서 반발하든(개인적으로는 이쪽이 더 건전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독자 자신의 선택이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모르고 읽는 것, 또는 읽도록 권장해주는 것은 위험하다. 그만큼 민감, 혹은 잠재적으로 위험한 전제들이 작품 곳곳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예 작가에게 좀 더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선을 보여달라고 주장하는 것도 좋겠지만,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하더라도 지난 20여년간의 성향이 순식간에 근본적으로 바뀌기를 기대하기란 힘들다. 만약 다른 작가가 유사한 길을 걷겠다고 한다면 이원복 작가의 장점인 대중을 흡수하는 능력을 배우되, 정치적인 공정성이나 사회적 메시지의 합리성 등에 대해서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라고 조언을 해줄 것이다. 아니, 실제로 <십자군 이야기> 라든지, <만화로 보는 다시 읽는 한국현대사>, <전쟁중독> 등 재미와 유익함을 겸비한 대안적 학습정보만화의 물결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원복이라는 브랜드에만 집착하지 않고 찬찬히 찾아보면 그 물결은 어느 틈에 여러분의 발밑에 이미 도착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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