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저널 사태가 벌써 레어동인지 3호 까지 해결의 기미 없이 폭주중. 굳이 사건 자체에 대해서 이미 나온 보도들 이상으로 덧붙일 필요는 없을 듯 하고 (미디어오늘 빼고는 사태가 완전파국으로 망가지기 전에는 거의 뭐 관심도 안보여주었다는 안습, 중앙일보는 여전히 쉬쉬하고 있다는 더블 안습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한번 이야기를…), 농성모드 들어간 기자분들에게 응원과 격려를 보내는 것도 그저 당연할 따름이고… 그 외에, 그냥 몇가지 생각, 그리고 약간의 목록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까 한다. 살포시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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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언론이 아파트 시세에 목숨걸 때
!@#… 연말이 다가오니 또 한국 언론 공간의 경제지면은 부동산이 어쩌느니 하고 난리다. 그래, 또 신도시 어쩌고 이야기가 나오고 집값이 마구 미쳐날뛴다. 무슨 수를 써도 안잡히는 부동산 경제와, 그럴 수록 다 팽개치고 부동산에 올인하고 싶어하는 듯한 황당한 정부 정책의 모습이 대비되곤 한다. 그리고 이럴때 마다, 조중동은 항상 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1) 시장기능에 맡기고 2) 공급을 확대해라 3) 이 모든 것은 실수요자의 목소리다 어쩌고. 하나씩 해석해보자. 1) 노무현 정부는 반시장세력이다, 2) 노무현 정부는 사람들에게 집도 안준다, 3) 집값 상승이 투기때문이라는 건 정부의 구라다. 뭐 저능하기는 하지만, 일관성 있어서 편하긴 하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1) 지금 시장기능에 맡기지 않고 있는 것이면, 가격을 정부가 정해주고 있나? 얼마나 시장기능이 활성화되었는지, 부녀회와 부동산중개업의 담합으로 호가를 몇억씩 퍽퍽 올리는데 말이다. 더 시장기능에 맡길 것이 뭐가 있는지 심히 궁금하다. 그냥 양도세도 없애버리라는 걸까? 2) 공급 확대라… 매번 ‘새로운 공급’인 수도권 신도시 이야기 나올때마다 그곳이 부동산 투기 거품으로 초토화되는 건 우연인가? 판교에 3만세대말고 30만 세대를 만들었으면 흔해빠져서 가격이 내려가기도 했겠다, 그치? 검단 지구에 2010년까지 20만 세대를 넣겠다는데 이번에 폭등 난리쌩쑈 벌어진 것도 공급이 부족해서 그런거겠구나. 3) 투기 목적이 아니라 실수요라면, 왜 아파트만 죽어라 오르는데? 아 물론 ‘땅값’이 올라서 덩달아 연립주택도 오르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다 아파트만 사려고 하고 연립주택이나 소규모 단지는 ‘마이너 상품’ 취급받는 건 왜일까. 대형 아파트에서 표준화된 삶을 살지 않으면 같은 동네에 사는 것이라도 삶이 무지막지하게 쾌적도가 떨어져서 그럴까? 에이, 대답은 여기까지 와서 읽고 있을 사람이라면 다들 알면서.
!@#… 시작부터 샛길로 빠졌지만, 굳이 부동산 세태 비판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돈 되는 곳에 돈 쏟아부어서 돈 벌고 싶은 발상은 인지상정. 내가 집 살때까지는 떨어지고, 내가 산 뒤에는 자산가치가 마구 올라가서 한 몫 잡고 싶은 심리는 뭐 자본주의 특유의 ‘천박하지만 인간본성에 가까운’ 속성이니 좋든싫든 (사실, 싫지만) 인정은 하고 넘어가야겠지. 이런 저런 변명을 붙이고 우리 잘못이 아니라 모두 정부가 잘못했다느니 하는 건 너무너무 구차하긴 하지만, 뭐 보잘것 없는 최소한의 자아존중감의 껍데기라도 보존하기 위한 애처로운 노력이겠거니 하자. 아, 물론 정부가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경기위축을 각오하고서라도 확실하게 분양원가공개와 호가/거래가 동시공개, 그리고 양도세 최소 3배 확대 등 부동산의 투자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마구 떨어트리는 강력한 투기 억제 대수술을 밀어붙였어야지. 그보다, 이 부동산 과잉 세태의 소용돌이에서 언론이라는 축이 담당하는 부분을 줄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규범론적으로는 분배정의를 생각하면서도,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평범한 ‘우리’들의 모순은 담론 장사꾼들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장사꺼리다. 한국의 종합일간지 치고 부동산 정보라는 황금 담론 시장에 목숨걸지 않는 곳이 과연 있을까. 개인들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고 확대재생산하면 독자가 생긴다. 매주 자세하게도 나오는 아파트 시세표(부동산? 얼어죽을. 그냥 아파트 시세표다), 매일매일 여러 면을 할애해서 펼쳐지는 아파트 시세 관련 뉴스를 통해서 말이다. 어디가 가격이 오를지 잘 찍어서 알려주는 기사들로 평소에 열심히 뽐뿌질을 하다가, 그쪽이 가격이 확 올라가버리면 투기가 어쩌느니 정책이 어쩌느니 말세라느니 특집기사들을 쏟아내면서 또 재미를 본다. 심지어 같은 날의 신문 하나에서도 “지면에서는 부동산 급등을 걱정하고 부동산 섹션에서는 돈벌자”고 하는 골때리는 짓도 전혀 새롭지 않다.
세상에 이리 날로 먹는 장사가 또 어디있을까. 사회는 정의를, 나는 정의를 넘어서는 잘난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의식. 모든 사람들이 난데없이 한꺼번에 의식개혁을 일으켜서 사회주의적 이상향의 개인으로 재탄생한다든지 하는 환타지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하기야 지난 세기초의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정말로 그딴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해서 결국 사회를 종종 말아먹곤 했지만) 해결될 리 없는 워낙 근본적인 모순이다. 모두의 관심은 높지만 해결은 안되는 것에 대해서, 더욱 더 해결이 안되도록 부추키며 불지르는 것 만큼 잘 팔리는 담론장사가 또 어디있을까. 그렇게 해서 오늘도 내일도 부동산… 아니 아파트 시세는 언론의 자랑스러운 황금알 거위다.
!@#… 그렇다고 해서 난데없이 신문들에게 아파트 타령 좀 그만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좀 제정신을 가진 신문 한개 정도만 찍어서 “너희들까지 그러고 있으면 안되잖아”라고 해봤자, 누구나 아파트 정보를 보고 싶어서 신문을 구독하는 마당에 그 신문사보고 망하라는 이야기다. 한국 언론, 이러면 안되지 하고 규범론적으로 타이르는 것은 언론학자들의 위신을 세워줄수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실제 효과는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 싸구려 뽐뿌질 기사가 더 잘팔리는데, 뭐하러 한국사회 주거환경의 미래를 신경써줘야 하겠나. 아니 그렇다면 이런 바보같은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인가.
!@#… 결국 언론, 적어도 종합일간지와 전국방송에서 뽐뿌질해대는 아파트 정보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수 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정보의 분업화부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쓸만한 아파트 정보는 아파트 전문지와 부동산 전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것이 전부가 되도록 이들 매체들을 성장시키는 것. 사실 지금도 주간 전문 타블로이드와 웹사이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용이 이미 일간지들에 나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도의 고만고만한 전문성 수준이니까 일간지의 독자들을 끌고오지 못한다. 하지만 신문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정보의 표시가 한계가 있다. 전국(을 빙자한 수도권) 시세표 빼곡하게 쳐넣는것과, 이미 시중에 공개될대로 공개된 내용의 투자정보를 기사화하는 것 이상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렇기에 실력있는 전문 정보지를 육성해서 호가와 거래가, 뒷소문과 앞소문을 망라해서 준다면 종합 언론의 아파트 시세 정보 가치는 그 만큼 떨어지게 된다. 아니면 아예 국가차원에서 세무 정보를 바탕으로 조사해서 공식 거래 정보를 총망라한 총괄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서 서비스를 하든지 말이다. 여하튼 최소한 종합일간지와 뉴스에서 아파트 이야기만 줄창해서 모든 사회적 의제의 최전선처럼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 투자의 본질이 “재산증식” 이라는 점을 빼도박도 못하게 뚜렷하게 해주는 효과 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 하지만 그 이전에 당장, 언론으로서의 룰을 지키고 있는지에 대한 더 확실한 감시와 처벌이 먼저다. 브레이크 없는 저널리즘의 자유에 법적 책임이라는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것이다. 부동산 정책에 대한 비판 기사를 누를 수 있는 방법이야 당연히 없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최소한 어디가 개발된다더라 하면서 근거없는 뜬소문을 기사화하면 곧바로 토지공사가 수십억 고소를 해서 본때를 보여줄 수 밖에. 즉 하다못해 ‘틀린 보도’만이라도 확실하게 잡아서 지멋대로 막 쓸 수 없도록 하는 것도 대단한 첫 걸음이다. 허위 과장 보도에 대한 확실한 제제를 해서 섣불리 야매스럽게 뽐뿌질해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만으로도 아마 일간지들의 부동산 관련 기사 가운데 절반은 지면에서 사라질 것이다 (어떤 섹션인들 안그러겠는가만은).
!@#… 물론 시민들 개개인이 신문지상의 온갖 부동산 소식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정말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고급 정보만을 고급 소스를 통해서 취득하고 나머지 헛소문들은 과감히 무시하는 지능을 갖추는 것이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 것은 대략 SF의 영역이니 현실적인 부분부터 파고 들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우선 한껏 끓어오른 담론의 거품을 좀 꺼트리고 그 다음에 하나씩 냉정하게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것이 정석이라면, 그 거품의 가장 뚜렷한 현상이자 인도자인 언론 뉴스의 막나감을 제정신 차리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그 목표를 위해서, 일간지들로 하여금 아파트 시세 설레발질의 뉴스 가치를 떨어트리게 하는 묘안들을 계속 생각해볼 때다.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애국적 열망과 숭고한 과학…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 황우석 과학 사기사건과 저널리즘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해온 만큼, 결국 논문 작업까지 이어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 최근 서울대학교 언론정보 연구소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서 국제 세미나 행사 “방송 탐사 저널리즘의 이론과 현실”(클릭)실시. 여기서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강명구 선생님 주도로 수행한 연구 Patriotic Passion and ‘Sublime’ Science: Un-searching for Journalistic Truth (한국어 제목: 애국적 열망과 숭고한 과학: 진실추구를 억압한 저널리즘)에 2저자로 참여. 아직 작업중인 논문이기는 하지만, 여튼 첫 공개.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사기사건 자체보다 그것을 다루는 저널리즘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기자들도 속았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보다 저널리즘적 진실 추구의 과정 자체를 적극적으로 억압했다는 문제를 지적. 뭐 결국 여기 블로그에서 계속 해오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_-; 주로 집중한 부분은 저널리즘적 실천의 담론전략과 맥락조건, 그리고 무엇보다 결국 그 절대적인 황우석 만세 분위기가 뒤집혀 나갔던 “담론 균열의 기제”. 특히 capcold로서는 담론 균열의 기제 부분에서 분석틀을 의욕적으로 고안해낸 만큼, 이후에 분리해서 개별 논문으로 총대 매고 직접 진행하고자 한다. 행사 자료집은 위의 링크에 있고, 여기에는 당시 발표자료로 사용한 요약판 파워포인트 자료를 링크한다.
— Copyleft 2005 by 강명구/김낙호/김학재/이성민. 이동자유/수정불가/영리불가 —
황우석 사태와 저널리즘의 야매성 [차원/2006봄]
!@#… 3월 발간 예정인 서울대 언론학부 학생회 학회지 <차원> 이번 호에 기고한 글(비록 해당 지면의 마감 스케쥴을 완전히 재구축하는 민폐를 끼쳤지만…;;). 이 주제에 대한 논문 프로젝트도 따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가볍지도 아주 학술적이지도 않은 이 정도의 ‘기름진 에세이’ 스타일이 가장 맘편하고 솔직하게 쓸 수 있어서 선호. 내용이야 뭐, 결국 계속 해오던 이야기인 황우석 논문사기 사건과 저널리즘. 일종의 방향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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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공정성에 대한 페티쉬
!@#…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언론학회에서 발표한 <대통령 탄핵 관련 TV방송 내용분석>. 내용은 보시면 알 듯. 귀찮으신 분들은 결론만 읽고. 첨부파일 참조.
!@#… 결국, 방송이 불공정한 보도를 했다는 거다. 그걸로 논쟁이 붙었는데… 나는 그게 왜 논쟁거리가 되는지를 솔직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방송이 한민자의 탄핵처리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것은 체감적으로 다들 느낀 바 아닌가. ‘편들지 않기’라는 기준에서 볼 때, 불공정한 보도를 했다는 건 완전 납득.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즉, 연구보고서 자체에는 그다지 이의도, 논란거리도 붙일 만한 필요가 없다고 생각.
…다만 문제는 그 이전에 조중동을 위시한 신문들이 그 반대방향으로 불공정한 짓거리들을 많이 했고 그것에 대한 대안적 담론이 필요한 상황에서, 방송의 그러한 불공정한 보도행태가 과연 잘못되었던 것인가…라는 것이다. 음. 이렇게 물어보고 나니까, 그래도 사실 잘못된 건 맞다. 다시 물어보자. 불공정한 보도를 하기로 한 것이 과연 잘못된 선택이었는가? 이것도 이렇게 말하고 나니까, 마치 ‘선의의 거짓말은 해도 되는가’ 라는 식의 도덕적 딜레마 같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뭐, 이 정도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해보자.
…(생각의 흐름… 중간 과정 생략…)…
…그러니까, 나는 저널리즘 규범론의 핵심 축은 ‘공정함’보다 ‘의도의 선명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도라는 것은 크거나 작거나 결국 불공정할 수 밖에 없다. 도덕적으로 공정함을 표방하거나 지향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하게 강조하고 요구해야 할 것은, 성향과 목표를 확실히 해달라는 것. 즉 나는 이러이러한 입장에서 저러저러한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보도를 하는 것이다, 라는 전제를 명확히 해주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그냥, 정정당당하게. 그러면 알아서 잘 감안해서 불공정한 뉴스라도 나름대로 공정하게 머리 속에서 저울질해서 받아들여줄테니까.
어차피 정보가 마구잡이 과잉으로 넘쳐나는 2000년대의 한국이라면 더더욱. 비유하자면, 가위 같은 것이다. 오른손잡이용 가위를 던져놓고 이건 그냥 가위입니다, 라고 해놓고 왼손잡이들을 괴롭히는 건 물론 곤란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기술적으로 현실성 없는 양손잡이용 가위를 만들어 줄것을 무리해서 부탁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이것은 오른손잡이용 가위입니다’라고 명확하게 꼬리표를 붙여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왼손잡이는 왼손잡이용 가위를 구하거나, 없으면 그것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을 해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필요하면 둘 다 구비할 수도 있고, 자신이 운영하는 옷가게 점원들의 특격상 왼손잡이용 가위가 더 많이 필요하다면 그쪽으로 비중을 높여도 된다. 즉, 기계적인 원칙에 따라서 소스 자체를 억지로 중간급으로 거세시키기보다는, 사람들이 선택에 따라서 자신의 정보를 정리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조선일보가 좆같은 이유는 자신의 의도를 숨기면서 공명정대함을 부르짖으며 나아가 정보 자체가 아예 날조된 것이 많기 때문이지, 논조가 편향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편향되어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편향되어 있지 않다고 우기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언젠간 이 논지로 연구논문을 쓰겠지… 좀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다보면 언젠간…)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노인폄하발언… 보도할까/말까?
!@#… 다이내믹 코리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총선 지지도도 다이내믹 그 자체였다. 농당조로 흘러나온 ‘이제 쉬세요’따위 발언이 한 당의 지지율을 십수프로 갉아먹을 수 있다니, 정말 엄청난 널뛰기다. 널뛰기 건너편에는 대략 코끼리. 지금 막 착지하면서 나를 저 하늘의 별이 되도록 날려버릴 것만 같은 현기증.
그래서… 여기 하나의 화두가 있다. “대학생 아마투어 기자 박하린은, 과연 속칭 정동영 노인폄하발언을 보도했어야 했을까, 말아야 했을까?” … 공당의 대표가 아무리 지나치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꼬투리 잡힐 수 밖에 없는 가벼운 비유를 코멘트로 던진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지 왜 없겠나. 그게 솔직한 모습인가보구나, 하고 나름대로 의욕도 불타올랐을꺼다, 안그래도 의욕만땅일 대학생 기자니까. 그런데, 아무리 아마투어든 뭐든, 기자라는 역할에 나름대로 자신을 위치시켜보고 싶다면 두 가지 중요한 전제를 생각했어야 했다.
1. 기자는 중립적이지 않다
– 언론의 중립성?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20년전, 지나가던 동네 꼬마들이나 신봉했을 법한 소리다. 언론은 중립적이지 않고, 중립적일 수도 없고, 중립적일 이유도 없다. 다만 얼마나 사실에 기반한 확실한 보도 근.거.를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조선일보고 뭐고가 지랄스러운 것은 논조가 개판이라기 보다는(물론 개판이기도 하지만), 비열하게 사실을 끼워맞추고 왜곡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마구마구.
당연히, 그 언론을 만드는 기자도 중립적일 수 없다. 중립적인 기자가 필요하다면, 저기 명동 옷가게의 마네킹군을 추천한다. 중립을 지향한다는 주장 자체도, 굉장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당연히 의식하든 말든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서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고, 그 주장이 얼마나 옳은 것인지를 자신이 조사한 근거를 가지고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보도조직 내에서 뭉쳐지고 또한번 의도에 따라서 걸려져서 짜잔! 완성품. 게이트키핑이고 어젠다세팅이고 하는 저널리즘 이론들이 왜 있을 것 같은가.
즉. 대학생 기자든 프로든, 의도한 방향이었든 아니었든, 결국 자신이 능동적으로 정치적 실천행위를 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단 말이다. “나는 그냥 썼는데 다른 언론들이 왜곡해서 확대시켰다”는 것은 변명 축에도 못든다.
2. 보도는 끝이 아닌 시작이다
– 이번 보도를 하면 된거다… 되긴 뭐가 되나. 죽도밥도 안되지. 보도는 시작이다. 담론형성이라는 큰 틀에서 볼 때, 보도라는 것은 논의와 토론의 시작점, 혹은 중간에 재점화의 근거자료를 주는 것이다. 만약 어떤 보도가 의도하지 않은 효과로 번진다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1) 의도하지 않은 방향이기는 하지만, 그냥 방치한다. (2) 내 의도가 잘못 전달되었음을 알리고 원래의 의도를 주장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서 노력한다. (1)번을 선택했다면, 혹은 매우 소극적인 정도로만 (1)번을 벗어나겠답시고 끄적거린다면, 원래부터 그 결과대로 의도했던 것이나 사실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보도를 하면서, 자신이 담론형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만약 아예 자각을 하지 못한다면? 그러니까, ‘나는 단지 사실을 보도할 뿐이야’ 같은 꿈같은 소리를 지껄인다면? 대략 낭패다. 희망없는 바보인거다.
정동영이 노인투표 어쩌고 발언한 것을 보도하는 그 순간에는, 이 보도를 보고 사람들이 정동영, 그리고 그가 대변하는 어떤 집단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더 부정적인 이미지, 나아가 실제로 표를 그쪽으로 행사하지 말아달라는 분명한 의도가 개입된다. 스스로 의식하든 말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말이다. 그것이 원래 의식하고 있던 의도 이상으로 엉뚱하게 부풀려지는 것은 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면, ‘후일담’이 아닌 ‘허위/과장 보도 및 명예훼손 고소’로 맞서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보도로 인하여 만들어진 그 소동 속에서, 자신이 계속 능동적으로 담론 형성에 개입하고 있어야 했다. 보도는 담론의 과.정. 일 뿐이니까.
!@#… 그래서, 아마투어든 뭐든 내가 생각할 때 기자로서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책임’이다. 자신의 주장,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 열린우리당 표가 떨어지는 것을 원했던 것이면, 그냥 적극적으로 ‘그래, 나는 원래 그런 생각이었다’라고 하든지, 정말로 아무 생각 없는 행보였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간 것이라면 언론사들을 고소라도 하든지. 애매하게 얼버무리고 수면 밑으로 사라지는 것은… 곤란하다. 나는 기자가 정동영 노인폄하발언을 보도한 것 자체는 하등 잘못된 것이 없다고 본다. 하지만 해당 기자 자신, 나아가 방송국과 신문들이 그 여파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려고 하지 않는 – ‘우리는 단지 보도했을 뿐이다’ 라는 자세는 참으로 씁쓸하다. 아니 구역질난다. 언론은 저기 머리 위에서 날아다니면서 훈수를 두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여기 땅위에 발을 딛고, 여기서 이 짐 저 짐을 옮겨주고 다녀야 한다.
—- Copyleft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