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만난 만화-<워터보이> [기획회의041005]

  ‘물’이란 우리에게 무엇일까. 무슨 자연보호 캠페인 내지 수돗물 절약 구호 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원래 물은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기이한 매력으로 가득한 물질이다. 특히 아주 약간의 예술적 상상력만 동원해보면 더욱 그렇다. 자, 그럼 상상해보자. 물은 기존의 공간을 채우면서 동시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물로 인하여 생겨난 그 곳은 공기의 공간과는 다른, 아니 숫제 상반되는 듯한 장소가 된다. 물과 물이 아닌 공간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생명이라는 현상을 위해서는 서로 섞여들어가야하는 곳이다. 공간, 분리, 혼합, 흐름의 일체형,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매개체. 어떤가, 깊숙이 묻어두었던 예술혼이 마구 불타오르지 않는가? (…아니면 어쩔 수 없지만)

최근 출시된 <워터보이>(아이완 作 / 아트북스)는, 물의 공간적 속성이 지니는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는 만화다. 아닌게 아니라, 이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물로 가득하다. 우선 주인공인 ‘워터보이’를 살펴보자. 항상 발이 물에 잠겨있고 그 물이 몸의 절반쯤까지 올라와있는, 살아있는 물주머니 같은 존재다.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의 방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곳은 항상 물로 반쯤 차있다. 그리고 어느날 물고기 아저씨가 와서 어항을 주고 가는데, 그 속은 물로 차있으며 물고기가 살고 있다. 그리고 물고기들은 어항, 주인공의 방, 나아가 워터보이의 몸까지도 물을 통해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헤엄치며 논다. 그런 방식으로 물은 공간과 공간, 나아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이 작품 속에서 물은 더 이상 하나의 소재나 소품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다.

하지만 말로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은, 다소 난해한 작업이다. 그 점을 잘 인지하고 있는 듯, <워터보이>는 시각적 표현력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물이 만들어내는 열린 공간이 주는 매력을 잘 살려내는 커다란 가로판형, 일관되게 한 페이지에 한 칸씩만 담겨진 담담한 이미지의 흐름 등이 이러한 노력의 일부다. 또한 연필화 질감의 푸른 화면 속에 흑백 또는 단색톤의 캐릭터들이 펼치는 작가 특유의 연필화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환상적인 느낌을 한층 배가시켜준다. 특히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물은 험난한 파도라기보다는 공간을 채우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묘사 전략은 더욱 더 효과적이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물은 마치 작품의 주인공 그 자체라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워터보이>는 줄거리의 재미를 즐기는 만화가 아니다. 확실히 이 작품은 전통적인 기승전결, 주인공이 난관을 극복해나가면서 결국 성장하고 강해져서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와는 무척이나 멀리 떨어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단순한 그림 구경에 머무르지 않고 나름대로 독자들을 몰입시키며 다음 페이지를 넘기도록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묘사로서의 이야기’라는 힘 덕분이다. 워터보이의 세계는 하나의 그림 속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공간을 옮겨가며 헤엄치는 물고기, 의자 밑으로 기어들어갔다가 사막으로 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어 간다. 마치 수백년전에 단테의 <신곡>이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그러하였듯이, 나름대로 장구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묘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워터보이의 시각에서 보자면) 나름대로 평범하고 소소한 행동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스며나오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묘한 일상성을 공감하도록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만화라는 장르를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즉 묘사로서의 이야기의 매력과, 실제로 매력적인 시각적 묘사를 결합시켜서 워터보이가 사는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상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만화라… 여담이지만, <워터보이>는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라는 레이블로 출간되었다(아마도 마케팅 상의 이유에서 내려진 명칭 선택이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곁들인 그림의 연속을 통해서 이야기를 전하는 예술양식이라는 속성에서 조금도 위배될 것이 없기에, 좋은 ‘만화’ 작품으로 칭함에 거부감이 없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용감한 동시에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미지의 흐름이나 경계선 없는 환상세계를 즐기는 것은 좋지만, 동시에 독자들로 하여금 낯선 독법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 작품 감상인양 개별적인 그림의 묘사에 완전히 빠져서도,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오락만화인양 줄거리 진행에 집착한 나머지 답답해 해서도 안된다. 즉 <워터보이>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즐기기 위해서는 기존의 독법이나 줄거리의 재미를 버리고 새로운 균형점을 찾으라고 독자들을 종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둘 사이의 간극은 결코 좁지 않다. 보통은 작가가 그런 새로운 비젼을 고집스럽게 내세울 때, 독자와의 균형관계를 생각해서 접점을 마련해주고 타협책을 찾아 나서는 것이 편집자/기획자의 몫이다. 즉 첫 번째 독자로서 ‘좀 더 편한’ 독법이나 구성으로 다듬어달라고 조르는 – 혹은 직접 다듬는 역할이다. 가장 구차한 차원에서라면, “이 책을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즐길수 있다”는 식의 홍보 카피나 해설 칼럼 따위를 첨부하는 식으로라도 말이다. <워터보이>의 경우, 그러한 노력이 부족해보인다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불평은 이 정도다. 만약 충분히 오래 서가에서 밀려나지 않고, 넓은 층의 사람들에게 제대로 소개가 된다면 결국은 안정된 독자층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매력과 완성도를 갖춘 작품임에는 틀림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여전히, 이 작가의 홈페이지(http://www.iwanroom.com)에서 봤던 예전의 온라인 작품 <점핑4>를 더 선호한다. 이야기라는 표현법에서 줄거리의 재미는 쉽게 포기하거나 가볍게 여길만한 지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입장인데다가, 작가가 그 것에 결코 무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독자로서, 작가의 다음 책에 대해서 바라는 한가지 소망이다.
2004. 10. 5 ———————-

(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달빛 기숙사에 환영합니다 – 루나 하이츠 [으뜸과 버금 0409]

만화팬들 사이에서 속칭 하렘물이라고 불리우는 장르가 있다. 하렘물은 이름이 주는 ‘19세 미만 구독불가’스러운 느낌과는 달리, 러브 코미디물의 하위 장르 가운데 하나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여러 매력을 각각 형상화한 다수의 여주인공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한명의 다소 소박한 남자 주인공에게 동시에 매력을 느끼고 접근하면서 일대 혼란이 일어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써놓고 보니, 별로 간단하지 않은 듯도 하다). 물론 반대의 경우, 즉 한명의 일견 평범한 여자 주인공과 다수의 멋진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렘물은 주로 연애에 대한 현실론보다는 망상(?)으로 가득한 뭇 남녀 청소년들의 성장기 판타지로서 가장 큰 재미를 보았다. 일방적인 연예감정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인간관계는 지극히 단순화되고, 평범한 주인공은 더욱 감정이입이 잘 될 수 있도록 몰개성화되어가기 마련이다. 인간관계에 대한 성숙한 성찰이라는 주제가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목적이 ‘다른 곳’에 있는 장르로 치부받은 것도 사실 당연한 일이다.

<루나 하이츠>(호시사토 모치루 / 북박스)는 하렘물이 주는 대리연애 쾌감과, 현실적이고 성숙한 인간관계가 잘 결합되면 얼마나 멋진 러브코미디가 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오랜만의 수작이다. 원래 이 작가는 일관된 작품 흐름을 유지했다. 30대 회사원이며, 영업직을 맡고 있으며, 적당히 사람들 사이에서 맞추어 주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만 스스로 어떤 강력한 출세욕을 불태우지는 않는다. 무난하게 생활을 꾸리고 있지만 내심 뭔가 자극에 대한 욕망이 있는, 하지만 탈선은 그다지 꿈꾸지 않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일상으로 일련의 여성들이 들어오면서 그의 생활이 서서히 변해나가는 이야기 구조다. 그리고 <루나 하이츠>는 그 흐름 속의 최신작이자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결혼식을 목전에 두고 있는 남자주인공 난조가 작은 신혼주택 건물을 마련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아뿔싸, 신부가 약혼파기를 선언하고 모처럼 무리해서 마련한 집은 텅 비게 된다. 그러자 회사 과장의 아이디어… 인원부족으로 폐쇄직전에 있는 사내 여자기숙사를 이 집으로 옮기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결국 난조는 얼떨결에 기숙사관리인이 되어, 4명의 직장여성들과 한가족 생활을 하게 된다. 당연히 4명의 여성들은 모두 각각 뚜렷한 개성으로 각자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하렘물 구도이며, 2권까지 왔는데 벌써 그 중 두 명이 공개적으로 대시를, 두 명은 부분적인 호감을 드러내고 있는 정도의 경지다.

이들이 벌이는 일상적인 이야기와 마찰, 연애감정의 미묘한 밸런스는 회사생활이라는 대단히 현실적인 틀거리 안에서 결코 과장되지 않게, 하지만 심심하지도 않게 멋진 웃음을 선사한다. 여기에는 과장된 성적 매력이나 성적 연상작용을 시키는 상황과는 거리가 먼 담담한 연출과 그림체도 큰 몫을 하고 있다. 게다가 이 장르에서는 보통 몰개성/평면성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주인공 역시 여성들과의 열린 관계를 통해서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난조의 모습을 보는 것도 적지않은 즐거움이다.

물론 이 작품이라고 해서 하렘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원죄 – 즉 이성의 객체화라든지 하는 한계가 극복된 것은 아니다(생리대를 소재로 하는 몇몇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 생활에 대해서 다소 피상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약점이라든지). 하지만 뭐라고 할까, 하렘물은 하렘물인데 한층 성숙한 하렘물이다. 그래서, 재미있다.

 

[으뜸과 버금 2004. 9.]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한 만화세대의 부활 – 월간 <허브> [으뜸과 버금 0408]

웰빙의 폭풍이 이 땅에 상륙해서 파괴력을 발휘한지 이제 그래도 좀 시간이 지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웰빙이라는 게 자기 몸 자기 마음 좀 지키면서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아주 단순한 컨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구체적인 형태로 우리와 조우했다. 난데없이 요가, 유기농 채식, 아로마 테라피 같은 것들이 행복한 생활의 잣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 그리고 덧붙이자면, 꽤나 바가지성 가격표를 하나씩 달고 다닌다. 그리고 결국 최강의 코미디, 패스트푸드점의 ‘웰빙버거’ 붐까지 이어졌다. 진짜 웰빙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고 많은 얼굴을 하고 있을 터인데 말이다. 진짜 웰빙은 특정한 상품, 상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잃어버렸던 자신의 취향을 스스로 다시 깨닫고 추구해나가는 것에 있다.

뜬금없이 웰빙 이야기로 시작했다. 만화 읽는 것을 업의 일부로 삼고 있는 필자에게 웰빙은, 좋아하는 취향의 만화들을 지속적, 정기적으로 한 보따리씩 만나서 즐기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필자의 취향이 유별나서인지, 묶음으로 존재하는 것 없이 스스로 하나하나 찾아나서야 할 때가 대부분이다. 굳이 여기서 한국의 척박한 출판유통 환경 속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책을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하소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여튼 수많은 잠재적인 만화독자들을 질려서 만화로부터 떨어져나가도록 한다는 것 정도는 꽤 자명하다. 음… 이런 상황은 어떨까? 원래 만화를 좋아했던 한 세대의 폭넓은 독자층이,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화책을 펼쳐들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동안 먹은 나이에 따른 사회적 환경과 감성의 변화를 충족시켜줄만한 새로운 만화들을 이제와서 다시 찾아나서기에는 너무 품이 많이 든다. 게다가 당시에는 당시 취향을 충족시켜줄 잡지들이 넘쳐났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없다. 하지만 그 당시 감동을 주고 자신의 취향을 생성시켜 주었던 그 작가들, 그 감수성은 여전히 그립다. 만약, 그 때 그 작가들 또는 그러한 감수성이 고스란히 나와 함께 나이를 먹고 더 성숙해졌다면 어떨까. 피차 서로 성장한 그런 상태로 다시 만나보면 얼마나 멋진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

바로 그런 모습으로 <허브>라는 순정만화잡지가 최근 창간되었다. 80년대의 순정만화붐 속에서 만화에 심취했던 그 폭넓은 여성독자층이 이제는 2-30대가 되어 좀 더 성장한 무언가를 바라고 있을 때, 이들을 위한 만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김진, 우양숙, 박연 같은 그 세대에게 무엇보다 가장 반가운 이름들이 있고, 강경옥, 김혜린 등의 이름들이 대기자명단에 버젓이 올라와있다. 그리고 같은 시대를 호흡하는 새로운 세대의 작가군들도 어깨를 나란히하며 섞여있다. 하지만 작가군이야 어차피 이름정도일 뿐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작품 아니겠는가. <도깨비신부>의 이야기적 매력, <들꽃이야기>의 구수한 냄새, <미시 박>의 성인취향 생활담, <조우>의 현학적이지만 흡입력있는 모양새 등은 초반의 우려를 상당부분 제거해주고 있다.

물론 작품과 기사들의 전체적 방향성이 다소 산만한 구성을 보이고 있는 등, 신생 잡지인 만큼 아직 부족한 지점도 더러 있다. 하지만 그 동전의 뒷면은 바로 작가 수익배분 시스템이나 인터넷 중심의 정기구독모집(http://www.c-herb.net) 등 다양한 패기넘치는 실험들이다. 월간 <허브>의 향이 한 세대를 다시 만화에 눈뜨게 만드는 것에 일조하기를 기원한다.
[으뜸과 버금 2004. 8.]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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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이라는 오락거리: <궁> [으뜸과 버금 0407]

유럽의 한 섬나라에는, 한 왕자님이 살고 있다. 나름대로 동화같은 풍모가 있는 나라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명예롭게 생활하는 귀티나는 왕자님. …그런데, 그 사람의 어머니되는 여왕님이 워낙 오래 살며 왕직에 눌러앉아있는 바람에 중년이 넘어가도록 계속 왕세자다. 그 왕자의 부인인 세자비는 진정한 ‘공주’의 풍모를 풍기며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듯 했으나, 악성 파파라치들에게 쫒기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해버렸다. 예산낭비를 줄여야 한다고 왕실폐지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심심치않게 나타나지만, 각종 스캔들과 가십을 소비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자 하는 국민들을 위해서 제단에 올라가야 하는 운명이다. 뭐, 현실이라는 것은 대충 이런 것이다.

<궁>은 한국에 만약 왕실이 있다면, 하는 설정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 만화다. 조선 왕가의 혈통이 이어지면서 현대까지 경복궁에서 살고 있는 로얄 패밀리를 상정하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여고생이 할아버지들의 약속에 떠밀려서 왕실로 시집을 가면서 겪는 좌충우돌 소동과 로맨스가 이 만화의 줄거리다. <궁>은 너무 늘어지지도 가쁘지도 않은 깔끔한 연출 패턴, 궁중의례 등에 대한 성의있는 고증, 현대 한국에서 입헌 군주제가 이루어진다면 있을 법한 다양한 일화들의 세심한 편성 등 많은 미덕을 지닌 만화다.

하지만 <궁>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사실 <궁>에서 왕실이 담당하는 역할은 기존 여러 ‘들장미소녀 캔디류’ 순정만화 작품들에서 재벌 가문이나 유럽 귀족 가문이 해왔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낮은 신분의 저돌적인 여자 주인공이 높은 신분의 고고한 남자 주인공을 후려쳐서 결국 반하게 만들기 위한 통과의례 정도인 것이다 (솔직히 대체역사물이라고 보기에는 입헌군주제가 된 한국이라는 역사적 흐름과 그 의미에 대한 고민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여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재미있으니까’ 라고 편리한 해답을 제시하기에는 한국의 왕실이라는 소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과소평가하는 듯 하다. <궁>에서 왕실이라는 설정을 끌어들이는 방식은 현대 사회에서 입헌군주제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 그 자체다. 중학교 사회시간에 배우듯이, 실질적인 통치제도로서의 민주주의와 왕실이라는 개념을 양립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바로 입헌군주제다. 입헌군주제에서 왕실은 통치자가 아니라. 한 나라의 권위와 정통성을 구체화한 궁극의 마스코트다. 이 사회에서 왕실은 범접하기 어렵고, 권위있고 전통을 따지는 고고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내부에서 권력다툼과 스캔들이 벌어지는 대가족이다. 한마디로, 해당 국가의 전통문화 가운데 가장 고급스러운 부분들로 잘 포장된 최고의 오락거리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훌륭한 오락거리로서 만들어진 제도인 입헌군주제 왕실을, 트렌디 연애물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도입해 들여온 셈이다. 좋은 선택이다.

<궁>은 독자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최근에는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는 등 상복도 다분히 많다. 게다가 tv드라마로 제작 진행중이라는 소식도 들려오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작품이다. 오락으로서의 왕실이라는 본래의 본분을 넘어서서 갑자기 심각한 노선으로 돌변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 많은 재미를 줄 수 있는 멋진 작품으로 남게 될 것이다.

 

[으뜸과 버금 2004. 7.]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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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결국은 사람 사는 곳 – <남측 손님> [으뜸과 버금 0406]

  90년대 중반, ‘라구요’라는 대중가요가 잔잔한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다. 한번쯤 북녘땅을 밟아보고 싶다고 한숨 쉬시는 아버지 – 여기까지는 단순한 이산가족 상봉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 노래가 특별했던 것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을 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 덕분에 그 노래만은 잘 아는 그런 상황이라는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전쟁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무슨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겨레 살리는 통일이란 말인가. 북한이라는 존재에 대한 감정은 상당히 애매할 수 밖에 없다. (일상생활 속으로 완전히 뿌리내린) 뭔지 모를 소위 민족적인 사명이라는 것과, 현실적으로 전혀 다른 낯선 나라라는 두 가치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전후세대의 모습이다.

  오영진의 <남쪽손님>은 북한 생활상에 대한 관찰로 이루어진 만화지만, 사실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 자신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작가가 경수로 건설하러 출장갔던 북한. 작가의 자화상인 오대리에게 북한은 무슨 염원의 땅이 아니다. 그 곳에는 모든 것을 뛰어넘은 뜨거운 동포애가 넘쳐나기보다는, 엄격한 제한사항들에 대한 조심성과 서로에 대한 차이 확인이 자리잡고 있다.  마치 7-80년대의 중동처럼, 이곳 역시 단순한 출장지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3국인이 아닌 ‘남쪽 손님’에게 북한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평범할 수 없다. 북쪽과 남쪽의 사람 살아가는 모습들은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기념비부터 세워놓기 좋아하는 습성부터 시멘트 빼돌리기, 막무가내로 자존심 건드린다고 고집부리는 아저씨까지. 심지어 ‘수령님 살아계실 때가 좋았지’라는 북한 주민의 대사와, 당장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박통 때가 좋았지’라는 푸념의 그 섬뜩한 유사성이란! 특히 만화라는 장르의 장점을 듬뿍 살린 낙서체의 열린 선들과 짧은 호흡의 일화들이, 마치 틈틈이 적어놓은 메모장 같은 느낌으로 더욱 그곳에서 겪은 일들의 역설과 희극성을 돋보이게 해준다. 강박적인 민족주의라든지 제대로 소화해내지도 못하는 정치논리 또는 맹목적인 통일 타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이 보고 겪은 만큼의 북한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사이사이에 교차하며 등장하는, 전문필자가 집필한 북한 사회와 문화에 대한 설명문 역시 이 책을 더욱 맛깔스럽게 만들어주고 있다.

  오랜 시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동질감이니 형재애니 하는 것은 곤란하다.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를 가감없이 서로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 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 돼지 김일성이 지배하는 악의 제국이 등장하는 70년대 <똘이장군>의 시대는 지나간지 오래지만, 그 빈 자리에는 아직 새로 들어선 것이 많지 않다. <남쪽손님>의 오대리처럼 우리들도, 그 곳에 이쪽과 비슷비슷하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조금씩 배워나가는 세상 – 이천년대 한국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으뜸과 버금 2004. 6.]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 Copyleft 2004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세계정복의 목적-<몬스터즈>[경향신문 만화풍속사]

“자본주의는 정글이다” 라는 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 같은 용어들이 자연스럽게 삶의 지표로 교육되고 있을 지경이니 말이다. 특히 변화의 속도가 거의 매트릭스급인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그 급물살의 흐름에 같이 뛰어들지 않고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해본다는 것은 도태라는 험악한 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근래 나온 국산 SF(?) 개그만화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몬스터즈>라는 작품에서, 작가는 이 문제에 대한 꽤 날카로운 통찰을 해학적으로 던져주고 있다. 이 작품은 ‘세계정복 일상물’이라고 불리우는 범주의 작품인데, 세계정복을 꿈꾸는 거대한 악의 조직과 말도 안되게 강한 정의의 히어로들이 사실은 우리들의 아주 평범한 생활세계 속에서 적응하면서 살아가며 몰래 세계의 운명을 좌우할 엄청난 싸움들을 벌이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당연히 이런 설정에서는 엄청나게 하드한 스릴러물이나 대놓고 웃기는 개그물 중 하나로 흘러갈 수 밖에 없는데, 운 좋게도 <몬스터즈>는 후자에 속한다(진지한 SF를 표방하기에는 어딘지 헐렁한 그림체, 패러디와 반전이 몸에 베인 연출력은 개그물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를 증명해준다).

이 작품에서 세계정복을 노리는 오메가 박사는, 광화문을 점거하고는 시민들에게 생중계로 동화 한편을 들려준다. 한 노인이 원숭이들에게 팔찌를 주고 팔찌의 개수에 따라서 먹을 것을 퍼주었더니 원숭이들이 인간들처럼 아귀다툼을 하며 앞다투어 주인에게 복종하였다는 우화. 인간의 우매함, 사회의 무질서함에 대한 통찰력을 동원한 것이다. 자, 이제 악의 박사는 깨끗하고 통제된 신세계를 주장하며 세계정복을 선언하겠지? 아니다. 이 만화는 뼛속까지 개그만화니까. 오메가 박사의 목적은 원시사회로의 회귀다. 단순하고 행복한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유일한 갱생의 길이다!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발상의 전환이다. 이렇게까지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전무쌍한 악의 화신을 본 적이 있던가.

권력의 차별화, 그것에 따른 물질의 불균등한 분배, 다시금 소유물에 따른 권력획득으로 이어지는 나선 구조는 섬뜩하다. 어떻게 그 말도 안되는 폭주를 멈출 수 있을까. 주류 정치경제나 교육에서 여기에 대한 고민을 완전히 멈춰버린 지금 이 시대, 아직도 꿋꿋하게 딴지를 날리는 것은 오히려 가장 일상적이고 사소한 즐김의 영역들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뼈있는 농담이야말로 최고의 힘을 지닌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기이한 세상사 속에서, 만화라는 절대고수가 그 역할을 맡아서 강호를 평정해줘야 할 타이밍이다.

 

/김낙호·만화연구가·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경향신문 / 2004. 10. 8일자]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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