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여주면서 말하기: 만화로부터 배우기 [계간 새야 04봄]

[계간 <디자인 교육 새야> 2004년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전에 인하대 온라인 강좌에서 써먹은 강좌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보여주면서 말하기의 장점을 설명하는 글인 주제에, 그림 올리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여기는 그냥 글만 올립니다. -_-; ]

 

보여주면서 말하기: 만화로부터 배우기

김낙호 (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학생들이 필자에게 “멀티미디어란 무엇인가요?”라고 문의해오면 항상 들어주는 사례가 있는데, 바로 <가족오락관>의 ‘스피드 퀴즈’다. 이런 장면을 기억해보자: 한 출연자가 어떤 단어를 열심히 말로 설명해서, 다른 팀원 한명이 해답을 맞출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다가 다른 색깔의 카드에 쓰여진 단어가 나오면, 말을 그만두고 몸짓만으로 여러 흉내를 내며 같은 목표를 향해서 매진한다. 두 가지 시도 모두 보통 상당히 어색하면서도 처절하기 마련인지라, 시청자와 관람객의 폭소를 유발하곤 한다. 왜 그럴까? 평소에는 우리가 그만큼 말하기와 보여주기를 동시에 자연스럽게 구사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상의 방식을 동시에 결합해서 표현하는 행위, 즉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멀티미디어인 것이다.

보여주며 말하기를 지면이라는 공간으로 옮긴 것이 바로 그림과 글의 결합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림과 글의 결합은 글이나 그림 각각이 전달하는 바 이상으로 효과적이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가능하게 해준다. 하지만 얄궂게도 결합 자체에서 나오는 힘이 워낙 강한 덕분에, 단지 특정한 하나의 표현방식을 한없이 자세하게 파고들면서 표현의 정수를 찾아내고자 하는 일부 ‘고급예술’ 진영으로부터 저급한 것으로 핍박을 받기도 했다. 그 핍박받는 대상의 대표주자가 바로 만화인데, 그만큼 만화가 글과 그림의 결합을 통한 새롭고 효과적인 표현의 개발에 있어서 선두 역할을 해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보여주면서 말하기가 단지 보여주기와 말하기를 산술적으로 각각 합친 것 이상의 효과를 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선 ‘말하기’에 해당하는 문자언어를 살펴보자. 문자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명품 가운데 하나인데, 지극히 표준화된 일련의 기호들의 조합으로 넓은 범위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문자를 ‘선들의 조합’이 아닌, 하나의 기호화된 문자로서 인식한다는 것 – 즉 독해력(literacy)이라고 부르는 기능은 정보전달의 효율성을 통해서 인류의 문화를 바람직하든 말든 간에 다음 단계로 올려놓았다. 지금 PC를 켜고 메모장을 열어서, 이 글 가운데 한 페이지 분량을 타이핑하고 저장해 보자. 대략 5-6KB 정도의 용량의 파일이 생긴다. 이제, 그 똑같은 내용을 출력해서 그것을 스캐너에 넣고 스캐닝을 하고, JPG 등의 그림 파일로 저장을 해보자. 읽을 수 있을 정도의 해상도로 저장하려면 아무리 못해도, 5-60KB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훨씬 큰) 파일이 생긴다. 즉 선들의 조합이 아닌, 하나의 기호로서 인식하게 될 때 정보의 전달은 훨씬 표준화되고 효율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1: 문자로 인식될때 소실된는 다양한 시각 정보] ⓒ맥클라우드

하지만 문자는 나름대로의 단점이 있다. 기호라는 형식으로 표준화시킨다는 것은, 그 만큼 미묘한 차이들이 사라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춘기 소녀의 연정이 담긴 예쁜 글씨의  러브레터도, 원고마감에 즈음하여 긴박하게 악필로 갈겨쓴 글도, 문자라는 차원에서는 내용 이상의 차이가 없다. 다시 말해서 미묘하고 풍부한 시각적 의미가 거세된, 내용만 남는다. 이러한 약점을 커버할 수 있는 것은 예전부터 그림의 영역이었고, 글은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글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는 부분, 즉 추상의 영역이나 수사학 등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림 역시 글을 통해서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나 정서의 전달보다는, 시각적 실험에 집중했다. 즉 그림과 글은 자신들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일종의 분업관계로 발전해 나갔다는 말이다 (사실 이런 분업은 주로 서양에서 일어났던 것이며, 동양의 경우는 시화라든지, 서예 등 글과 그림의 연결고리가 일정부분 돈독하게 유지되기도 했다). 글과 그림이 각자의 방향만 보고 달려나간 분업체제 하에서는, 두 가지가 점점 서로의 연결고리를 잃어갔다. 소위 고급예술은 각 매체의 가장 미묘한 가능성들이나 미학을 파고 들어가는 것 – 즉, ‘표현’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에 중독된 나머지, 모든 매체의 원래 목적인 효과적인 공유/교류라는 지점을 놓쳐버리는 경향이 생겨났다. 즉 가능성의 실험에 매진하다가 정작 실용성을 잃은 것이다.

이에 비해서 태생적으로 대중성을 기반으로 해왔던 만화라는 장르는, 정반대의 위치를 고수하면서 발달했다. 가장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 기존의 법칙이나 규율을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파괴해나간 것이다. 하나의 그림 안에서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회화의 규율을 벗어던지고 여러 그림들을 연속시켜서 읽도록 만들었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림에 글을 삽입하여 활용했다. 미적인 아름다움으로서의 표상들이나 기법들보다는 효과적으로 형상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간략화된 카툰화법을 도입했고, 이러한 요소들을 때로는 한꺼번에, 때로는 하나씩 사용했다.

그림과 글의 접합 방식은, 현대만화에 이르러서 강력한 새로운 이정표들을 몇가지 맞이 했다. 단지 글과 그림이 병렬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문자 기호들이 그림 속으로 적극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양상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의성어/의태어 삽입이다. 의성어/ 의태어 삽입은 만화의 극중(diegetic) 공간의 한복판에 문자로 된 기호들을 넣는 방식으로, 현실공간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구상(具象)과 상징계의 공존을 만들어 낸다. 단적으로, 현실세계에서 자동차가 큰 소리를 내며 브레이크를 밟을 때 하얗고 큰 ‘끼이이익~’하는 글자들이 바퀴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자들이 만화 속에 나올 때 독자는 그것을 시각요소가 아닌, 청각 등 다른 감각에 호소하는 자극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은 우리에게 지금은 많이 익숙해져 있지만,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너무나 놀라운 과정이다. 의성어로 쓰인 문자의 그래픽적인 배치에 따라서 화면상에서 그 소리의 음원과 방향 등을 나타내 줄 수도 있다. 나아가, 글자체, 크기, 크기변화, 필체 변화 등 수많은 시각적 요소들을 통해서 그것이 표상하는 오감의 성질을 다양하게 규정지을 수 있다. 극중 공간 속으로 들어간 의성어/의태어는 문자이면서도, 필요에 따라서 그림으로서의 속성을 얼마든지 살려낼 수 있는 독특한 만화 표현 장치인 것이다.

[그림2: 말풍선의 유희적 활용] ⓒ끼노

두 번째는 바로 ‘말풍선’이다. 단순한 그림과 글의 병렬 – 예를 들어서 그림 밑에 글이 자막처럼 쓰여져 있는 방식 -을 넘어서서 말풍선이라는 기구가 발명된 이유는, 바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진행 묘사 때문이다. 말풍선은 극중 공간 속에, 그 공간과는 분리된 다른 차원의 별도 공간 – 즉, 언어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의성어/의태어의 경우 역시도 시각 세계와는 다른 것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연현상을 만들어 내는 기구다. 하지만 말풍선은 아예 현실의 감각영역이 아닌, 추상의 공간을 접합시킨다. 그리고 그 속에 극중 인물이 말하는 언어가 문자로서 표현이 된다. 하지만 말풍선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꼬리에 있는데, 그 것이 특정한 극중 인물을 가리킬 때 그 공간 속의 언어는 바로 그 인물의 것이 된다. 말풍선의 발명 덕분에, 만화에서 화자(話者)의 개념이 태어났고, 세부적이고 드라마틱한 서술이 가능해졌다. 말풍선은 극중 공간의 흐름을 크게 방해하지 않으면서 언어의 세계와 현실세계를 교묘하게 병존시킨다. 말풍선은 그림으로 묘사된 이야기 세계 속으로 언어를 끌고들어왔으며, 그 덕분에 소설 등의 다른 이야기 문학이 지금까지 이루어놓았던 업적들을 흡수할 수 있는 강력한 기반을 이룩했다. 또한 말풍선을 만들어냄으로서, 말풍선의 모양 그 자체를 이용하거나 말풍선의 안과 밖에 들어가는 언어를 차별화하여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나아가, 말풍선은 ‘생각풍선’이라는 변형도 낳았다. 화자를 향한 꼬리를 일련의 동그라미로 처리함으로써, 만화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까지도 가볍게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말풍선은 ‘언어’의 공간이기는 하지만, 만화라는 시각 매체 속에서는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라면 그 규정 역시 절대적이지 않다. 말풍선 속에서도 글자체, 글자크기, 크기의 변화에 따라서 말의 크기나 어감, 목소리, 속도 등이 대단히 다양하다. 심지어 그림의 요소들을 말풍선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언어의 공간과 그림의 공간의 경계선을 가볍게 허물어버리는 표현들도 등장한다. 그만큼 만화라는 양식에 있어서는 글과 그림의 혼합, 경계선의 월경 등이 필요에 따라서 자유롭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의성어/의태어, 말풍선 등 흔히 알려져있는 만화의 ‘보여주며 말하기’ 기법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들이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서 칸 경계선을 글자로 만들어서 그 칸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를 잡아주거나, 만화 칸의 배경을 자잘한 글씨의 글로 채워서 잡담같은 분위기를 만들거나, 아니면 칸 바깥의 공간에 글을 배치시킴으로서 그 페이지 분량에 해당되는 사건 전개 전반 위로 흐르는 거대한 나레이션으로 기능하게 하는 등, 작가의 의도에 따라서 다양한 표현을 주저없이 활용해볼 수 있다.

[그림3: 말풍선의 안과 밖] ⓒ카고 신타로

글과 그림이 이야기 전달을 위해서 결합하는 파트너쉽 관계에 관해서, 만화이론가 스콧 맥클라우드는 이 분야의 고전인 <만화의 이해(Understanding Comics)>에서 몇가지 이분법적인 전제를 하고 있다. 우선, 이야기의 전달은 중심적인 상황묘사(줄거리)와 심화되거나 자유로운  표현방식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야기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역할을 그림이 맡아주면 글이 보다 넒은 영역을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으며, 반대로 줄거리 묘사를 글이 맡아줄 경우 그림이 그만큼 실험적인 모험을 감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만화에서 글과 그림이 결합되는 방식을 크게 7가지로 거칠게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

1) 글 중심: 글이 중요한 서술도구이며, 그림은 글에 대한 간단한 도해에 그친다.
2) 그림 중심: 그림이 중요한 서술도구이며, 글은 의태/음향효과에 그친다.
3) 이중 결합: 글과 그림이 같은 상황을 중복적으로 전달한다.
4) 첨가 결합: 글과 그림이 서로의 내용을 좀 더 강력하게 보좌해준다.
5) 병렬 결합: 글과 그림이 각각 일견 서로 무관한 내용을 보여준다.
6) 몽타쥬: 글이 그림의 일부로 녹아들어간다.
7) 상호의존적 결합: 글과 그림을 둘 다 독해해야 하나의 상황이 이루어진다. 

비록 애매한 범주이기는 하지만, 이 가운데 만화에서 가장 정교하게 발달시킨 것은 상호의존적 결합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글과 그림은 엄격한 분업관계가 아니라, 결합을 통해서 원래의 글과 그림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전개함에 있어서, 글은 그림과 역할분담이 자연스럽게 서로 섞여있다. 여기에 만화의 또다른 강력한 표현적 강점으로 꼽히고 있는, “상황 그림의 연속성”이 더해지면 그 효과는 더욱 무궁무진해진다.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상황을 나타내고 있는 그림이 담긴 각 칸마다, 글과 그림이 만들어내는 균형이 조금씩 변형되고 흔들릴 때, 독자는 이야기속으로 하염없이 빨려들어가고 만다.

[그림4 : 명료함은 반드시 쉬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필링엄/수서

예술적 실험이 아닌 설명을 위주로 글과 그림이 결합할 때 나오는 가장 선명한 효과 가운데 하나는, 내용이 구체적이고 명료해진다는 것이다. 글과 그림은 서로의 의미를 확장시켜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제한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새가 날고 있습니다”라는 글과 결합되어 나오는 비둘기 그림은, 사람들이 글만 읽었을 때 상상할 수 있었던 새의 범주(독수리, 참새, 기러기 등)를 일거에 정리해버린다. 또한 글은, 그림 속에서 비둘기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 보도블럭 위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 아닌, 하늘을 날고 있다는 상황으로 규정한다. 속칭 ‘학습만화’로 불리우는 실용만화들의 높은 교육적 효과는 바로 이러한 특성에 기인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유의해야할 지점은, ‘명료함 = 쉬움’ 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설명대상에 대해서 핵심적인 개념 위주로 요점정리하는 것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그 핵심개념 자체가 저절로 커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리 깔끔하고 작게 압축해서 짐가방을 꾸린다고 할지라도, 짐의 무게 자체는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따라서 글과 그림의 결합을 통해서 내용을 명료화시키는 것은, 보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서술 방식을 통해서 내용을 풀어주는 것과 동행할 때 비로소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떤 학습만화는 머리만 아프고, 어떤 학습만화는 알찬 지식으로 다가오는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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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글과 그림의 창조적인 결합방식과 그 의미를 만화라는 양식을 중심으로 몇가지 살펴보았다. 애초에 만화학 개론을 강의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논의를 접고자 한다. 분명히, 다른 영역의 여러 표현양식들이 성공적으로 결합될때 일어나는 신비한 결과는 흥미롭다. 그것은 이야기와 정서, 생각들의 더욱 효과적인 전달을 가능하게 하며, 보다 깊은 의미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필자가 이 지면에서 하고 싶은 말은 단순히 만화라는 양식에서 만들어낸 개별적인 글-그림 결합 기술들을 참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만화라는 양식이 견지해온 자세, 즉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창조정신으로 매체간 벽을 허물고 넘나들 수 있다는 마인드 자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분과 학문이나 전통적인 형식구분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동원하고 결합시킬 수 있다는 자유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굳이 말하자면, “만화를 읽듯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것이 좋다”.

[그림5: 초보적인 글-그림 결합이 적용된 교과서] 

 

—- 2004. Copyleft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잃어버릴 뻔한 삶의 조각들을 찾아서: 최규석 단편집 ‘공룡둘리’ [책속해설]

  …필자는 여러 지면에서 현실과의 고리를 잃어버리고 있는 젊은 만화가들의 경향성을 꽤 강도 높게 비판해온 바 있다. 삶과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고민들보다는, 장르적 규칙만을 소재로 조합형으로 만들어진 매끈한 엔터테인먼트 코드의 덩어리 – 한마디로 쭉정이만 남는다는 것이다. 

  최규석은 이런 시대적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는 몇 안되는 젊은 작가다. 시각적으로도, 미소년미소녀 같은 장르 코드나 화사한 기교에 의존하기 보다는, 거칠면서도 정확한 선과 뚜렷한 데생, 주제와 이야기 중심의 군더더기 없는 연출에 대부분의 재능을 할애하고 있다. 아직 ‘장편’작품을 남기지 못한 신인에게는 과분한 평가일수도 있지만,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야기의 힘은 마치 막일로 단련된 근육질 마냥 투박하고도 탄탄하다. 드라마틱하고 형이상학적 고민으로 과욕을 부리지 않고, 주변에서 약간만 자세히 보면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법한 소외와 모순 속에서 이야기를 꺼내온다. 하지만 최규석의 잠재력은 단순히 “어둡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잘 한다”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현실의 범주에서, 때로는 절묘한 상상력의 비유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때로는 심지어 대단히 유머러스하게.

산다는 것의 업보: <사랑은 단백질>

  <사랑은 단백질>은 본 단편집의 문을 여는,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살아가는 건 누군가를 밟고, 죄를 지어가며 쌓이는 업의 연속이다. 뭐 그렇지만 결국은 인간은 고기를 먹고 사는, 단백질을 섭취하는 동물들 아니겠는가. 죄의식을 가지든, 무감각하든, 그 사실 자체만은 여전히 변함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닭집을 하는 닭사장, 족발집의 돼지사장의 처절한 희극성이 독자의 후두부를 강타한다. 전체 주제를 압축해서 다시 재현해내는 돼지저금통의 캐릭터도 압권이다. 풍자와 유머의 칼날을 잔뜩 갈아서 한껏 펼쳐보이기로 작정한 작가의 굳은 의지가 돋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성공적이다.

약자 위의 삶: <콜라맨>

  원래 최규석은 <솔잎>이라는 작품으로 1998년 서울문화사 신인만화 공모전 성인지 부문에서 금상을 수상한 바 있다. 하지만 군입대로 인하여, 작가의 정기 지면 데뷔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제대후, 작가는 다시 ‘데뷔’를 했다. 2002년 동아/엘지 국제만화전의 극화부문 당선작으로, 만화판의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최규석이라는 이름을 주목하게 만들었던 첫 사건인 <콜라맨>의 등장이다. “…페스티벌용 작품의 경우 모호한 이야기에 복잡한 연출이나 화려한 작화실력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설익어 보이는 것들이 대부분이다…반면, <콜라맨>은…”는 당시의 심사평이 주목의 이유를 잘 요약해주고 있다. 공동작업을 한 서경순이 주로 작업했다는 골목길 배경의 표정들과, 투박한 삶을 사는 캐릭터들이 벌이는 이야기의 조화가 돋보인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밟고 그 기반 위에서 안정적 삶을 영위하는 전형적인 우리 삶을 묘사하는 접근법이 더욱 매력적이다. 이러한 주제와 시각은, 이후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중심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다만 ‘공모전을 노린 해피(?)엔딩’이 아직은 약간 어색한 수작.

인생사의 블랙코미디: <공룡 둘리>

  <콜라맨>이 만화판에 관심있는 자들에게 최규석이라는 이름을 알렸다면, 일반 독자층에게까지 그 차원을 확대한 것은 바로 이 작품 <공룡 둘리>다.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 탄생 20주년으로 ‘주민등록증 발급’이니, ‘둘리의 거리 제정’니 하고 호들갑을 떨때 난데없이 한켠에서 등장해서 큰 화제를 모았던, 본 단편집의 표제작. 공모전이나 졸업작품집이 아니라 본격 상업지면에서 데뷔를 한 첫 작품이다. 국가대표급 명랑만화의 캐릭터들을 처절하고 남루한 현실로 끌고들어옴으로서 만들어지는 극한의 블랙코미디. 다만 워낙 발상의 충격이 크다보니, 독자들로 하여금 웃어야할지 슬퍼해야할지를 헷갈리게 만들었을 따름이다. 최규석식 세계관과 주제의식을 한층 명쾌하게 정리하며, 곤궁한 현실과 역설적 유머의 결합을 본격적으로 펼쳐보인 수작.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때 왠지 둘리와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고 싶어지도록 하는 힘을 지닌 만화로, 단지 오마쥬나 패러디 정도로 의미를 한정시키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작품이다. 한창 젊고 실력있는 신인들을 ‘인디존’이라는 코너를 통해서 발굴하던 격주간 만화잡지 ‘영점프’의 2003년 5월 1일자에 개재.

인간이 만든 것: <리바이어던>

  2003년 상명대학교 졸업작품집에 실린 단편. 권력, 지배에 대한 짧은 우화이자, 유쾌한 소품. 스스로 왕이 되지 않겠다는 영웅이라는 지극히 합리적 발상에서 시작하는 모험이, 전체주의적 악몽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데뷔작이었던 <솔잎>에서 다루었던 개인과 사회의 충돌, 그것을 통해서 처음에는 개인이 파멸하지만 결국 사회가 점차 바뀐다는 주제는, 이제는 살짝 비틀어진다. 개인에게 파멸적인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그 개인들 스스로였다는 자괴감이 밝고 명랑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친 상징이 약간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리바이어던이 커다란 심해의 뱀으로 등장하는 얄팍한 장르모험물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계약에 의해서 형성시킨 절대적인 힘”이라는 토마스 홉스의 비유는, 그동안 더욱 치열한 고민들 통해서 주제의식과 여유를 성장시킨 작가의 작은 이야기로 재탄생한 것이다. 과장되었으나 간결한 컬러 그림체가 색다른 매력을 주는 작품.

택일의 기로에서: <선택>

  한가지만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선택이란 필요없다. 하지만 세상의 여러 모습들을 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해야 한다면 그때가 바로 선택의 순간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선택의 순간이 보통 너무나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학교졸업과 함께 ‘사실 세상은 이런 저런 것이 있단다, 하지만 지금 당장 선택하지 않으면 낙오될꺼야’라고 강요받고, 복잡한 갈등과 생각들이 ‘승자와 패자’로 단순화된다. 그 속에서, 과연 ‘패자’를 선택할 무모한 용기가 있는 사람은 어디있을까. <선택>에서 주인공이 몽둥이를 들고 결국 내린 것은 그러한 선택이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그 환성의 밑에 묻혀있던 삶의 모습들을 이야기로 꾸며내는 것은 작가로서의 선택인 셈이다. <리바이어던>과 함께, 졸업작품집에 실린 작품. 마지막의 응원장면은, 선택을 내린 개인이 다수로 확장되는 이미지라고 한다.  

…진정한 치열한 고민은 더욱 진행될 수록, 전체적 시각과 여유를 낳는다. 그리고 여유는 유머를 만들어준다. 최근의 단편작품들에서 보이는 현실적인 처절함과 블랙유머의 조화는 작가의 성장의 척도라고도 할 수 있다. 비록 아직 다소 고지식할 정도로 직선적인 연출 호흡이 성장의 여지를 남기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갖 첫 단편집을 묶어내는 ‘신인’에게 이 정도의 기대를 가져보기는 오랜만인 듯 하다. ‘리얼리즘’이라는 흔한 용어로는 묶어내지 못하는, 비굴한 현실과 만화의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엮어내는 이야기꾼의 매력이다. 

  <만화, 내 사랑>이라는 책에서, 박재동은 오세영을 “쇠똥을 그릴 줄 아는 작가”라고 칭찬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필자는 최규석을 “청테이프를 붙일 줄 아는 작가”로 칭송하고 싶다. 자연스럽게 처절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느낌, 투박하면서도 정직한 접착력으로 앞으로 수많은 독자들의 관심이 달라붙기 바란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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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출판된 책 속에 들어간 작품평입니다. 당연히 찬란한 주례사… 그러려니 감안하고 읽으시길;;)

<미정> – 변병준식 그림이야기의 성찬

단편집의 말미에 실리는 평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꽤나 난감한 일이다. 주례사 비평의 위험성은 기본이며, 더욱이 단편집은 그 속에 포함된 개별 작품들이 천차만별인 경우가 보통이라서 하나의 책으로서 평가를 내리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장황하게 작가론을 늘어놓아서 독자들의 즐거움을 반감시키기도 어색하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한 작가의 창작력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능성들과 그것의 진행방향을 엿보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보통의 단편집은 음반으로 치자면 B-SIDE 모음 같이, 작가가 보다 큰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는 와중의 틈새에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즉각적인 시도들을 자유롭게 담고 있다. 즉 보다 직접적으로 날것 그대로의 사색과 그 발전과정의 흔적에 접속할 수 있는 접속점인 셈이다.

많은 비평적 찬사를 얻어냈던 <프린세스 안나> 이후의 변병준은 주로 도시를 그려내는 작가다. 단순히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를 펼쳐낸다는 것도, 도시하면 떠오르는 세련되고 쿨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것도 아니다.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상황들과 정서가 대부분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만화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그림들’이라고 생각해볼 때, 변병준이 묘사하는 도시공간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듯 하다. 친숙한 모습의 도시는 그 현실적인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면서도, 동시에 정서를 듬뿍 담은 정서적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때로는 지극히 쓸쓸하고 차가운 정서가, 때로는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희망적인 무언가가 그 공간 속에서 암시되고 있다. 이미 공간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속에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거나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이 그냥 덤덤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물론 작가가 단편 위주의 작업을 주로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변병준의 만화의 주인공들은 현재진행형이 아닌, 과거의 반영이다. 공간배경과 하나가 된 그들의 생활 모습이 먼저 주어진 후, 이들의 과거 사연이 지나가듯 암시된다. 그 속에서는 극적인 사건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결과를 낳기 보다는,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무언가를 매듭짓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가득찬 밀도의 표현적 그림들로 인하여 독자들은 캐릭터로의 이입이라는 손쉬운 방법이 아니라, 작품 속 공간으로 던져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입보다는 관찰을 유도해내는 그러한 화법 속에서 때로는 지나가는 농담처럼, 때로는 누군가의 사연을 두 다리 건너서 전해듣는 것처럼 드라마가 펼쳐진다.

본 단편집 <미정>에 묶인 것은, 작가가 화풍의 다변화를 시도한 2000년대 초반의 일련의 단편들이다. 첫 단편집 <첫사랑>이 성인취향 개그물과 도시의 차가움, 농촌의 따스함라는 여러 관심사들의 모음이었다면, 이번 단편집은 도시공간이라는 하나의 큰 컨셉 아래에서 다양한 화법을 시도해보고자 한 것이다. 이야기들의 큰 줄기는 무언가를 찾지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남자의 이야기, 상처입은 소년소녀의 이야기 등 두 가지인데, 그 중 전자는 작가의 정서적, 또는 생활의 자화상을 녹여낸 흔적이 짙게 베어있어서 더욱 매력적이다.

본 단편집의 첫문을 여는 것은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미정>이다. 도시의 차가움과 그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나서려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다룬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모티브를, 만화에서 비슷한 방향을 추구하는 변병준 식으로 활용한 작품이다. 자화상적 서정과 상처입은 도시남녀라는 두 축 모두의 출발점인 셈이다. 2003년 봄 <계간만화>에 실린 작품으로서, 당해 1월에 프랑스 앙굴렘 만화축제의 전시작가로 현지를 방문하고 있었을때마저도 원고를 작성한 일화 역시 재미있다. 두 번째 작품은 <연두 17세>로, <프린세스 안나>에서 시작한 상처입은 소녀 모티브를 다루는 방식이 이제 완전히 하나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주장하고 있는, 일본에서의 출판을 위하여 2003년 여름에 작성된 작품이다. 보다 간결하고 능숙하게 도시군상의 비극적 감상을 정리하고, 새로운 희망으로 마무리된다. 그 뒤를 이어서 등장하는 것은 한국 소년만화계의 스토리 작가로서 스타급 위치를 누리고 있는 윤인완과 협업한 <유틸리티>다. 기대만큼의 흥미로운 스토리가 탄생하지는 못했지만, 위악적인 어린이들의 표정과 이들이 살아가는 살풍경한 도시공간의 이미지에서 생겨나는 블랙코미디는 또다른 발전 가능성을 엿보이게 하고 있다. 2002년 4월, 일본의 <빅코믹스피리츠> 증간호에 개제되었다. 흐릿한 모노톤의 컬러작업을 시도한 <너의 노래>는 2003년 가을,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한층 친절해진 캐릭터들과 더욱 진일보한 공간묘사가 장점이다. <신일맨션201호>는 오랜만에 다시 등장한 개그물인데, 그 쪽 분야의 실력 역시 녹슬지 않았음을 다시 증명해주고 있다. 2000년 봄, 작가의 일본 유학시절에 그려진 작품으로, 생활의 자화상이 작가적 망상과 겹치면서 발생하는 유쾌한 코미디다. <빅코믹스피리츠> 2001년 12월호에 개제되었으며, 소학관 코믹스피리츠상에 입선했다. 이 정서는 2001년 가을에 그린 차기작인 <할아버지 힘내세요>의 고양이 개그로 고스란히 이어졌는데, 여기서는 망상 대신에 미소녀 여선생이 등장해서 작품을 끌고나가는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활용했다.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은 <내 남자친구의 이야기>로, 양승천이 글을 맡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썰렁한 농담을 전달하는 짧은 이야기로, 의인화된 캐릭터들의 상황묘사를 통해서 독자를 농담 속으로 집어넣는 손쉬운 방법이 아닌, 전화통화로서의 전달을 같이 듣도록 하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스토리 자체보다는 그것을 주고받는 남녀의 관계, 그 감수성에 주목하도록 하고 있는데, 덕분에 여전히 이야기의 주인공은 골방의 만화가, 즉 작가의 페르소나인 것이다. 이로써 처음의 상상화된 자화상과 마지막의 현실적인 자화상이 수미쌍관을 이루며 본 단편집의 여러 이야기들을 감싸안는다.

본 단편집은 변병준이라는 작가의 성장 과정을 고스란히 보는 것인 만큼, 아직도 극복 과정 중에 있는 단점들 역시 드러나고 있다. 이야기의 극적 재미 부족이나, <프린세스 안나> 이래로 이어지고 있는 유사한 이미지의 칸간 연출 반복 등은 아직 풀어야할 숙제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변병준식 개성으로 끌어내고, 더욱 깊은 방향으로 전개시키는 모습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2000년대 초반, 변병준이라는 작가가 선보일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의 성찬인 것이다. 그리고 도시적인 섬세한 감성과 상처입은 소년소녀, 그리고 따뜻한 유머와 당혹스러운 상황의 블랙코미디 등 이 모든 트레이드마크격인 요소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녹아들어간 변병준식 걸작의 탄생이, 앞으로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몇 년전, 한 지인이 변병준을 ‘박흥용의 적자’라고 일컫은 적 있다. <첫사랑>과 <프린세스 안나>에서 그가 보여준 도시풍경과 그 속에 녹아들어간 인간군상들이, 80년대 박흥용이 발표했던 작가주의 성향 단편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연히도, 당시 박흥용 단편집의 제목은 <백지>였고, 이번 변병준 단편집의 제목은 <미정>이다.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하는 작가의 다짐으로서 공란을 만들어놓은 것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 되는 어떤 여성의 이름일 수도 있도록 고안된 제목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작품은 이 가운데 어떤 가능성을 발전시킬 것인지, 즉 다음 책의 제목은 무엇이 될 것인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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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호
만화연구가, ‘두고보자’ 편집위원
20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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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출판된 책 속에 들어간 작품평입니다. 당연히 찬란한 주례사… 그러려니 감안하고 읽으시길;;)

<코스모스> 속에서 부유하기

<코스모스> 속에서 부유하기

신인 만화작가가 데뷔하는 방식에는 다양한 경로가 있겠지만, 가장 놀라움을 안겨주는 경우는 어느 순간 짦막한 단편으로 세상에 선보인 후 오랫동안 숨겨져있다가 온전한 작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실력있는 신인을 새로 발굴한 듯한 만족과, 면식있는 작가의 성장한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들을 ‘중고신인’이라는 말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작가적 고민으로 인하여 스스로 만족할만한 역량을 쌓을 때까지 자진해서 다시 축적의 길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결심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성준의 <코스모스>는 이러한 과정의 결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특이한 사례가 될 것이다.

본 작가의 공식적인 데뷔는 97년 봄, <빅점프>에 단편이 입선했던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김성준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1997년, 제1회 동아/엘지 국제만화전에서 수상작에 올라와있던 <잠자리는 없다>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보통 공모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신인들이 기발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아이디어로 특징지어진다면, <잠자리는 없다>의 경우는 오히려 흔한 SF적 발상이지만 잘 정리된 안정적인 연출으로 필자의 시선을 끌었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화풍이었지만, 색채의 연출 활용 등에서 스타일리스트로의 성장가능성이 점쳐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미 충분히 상업지에서 정식데뷔를 할 수 있는 실력이나 감수성을 갖추었음에 분명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봐도 연재 소식이 들리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잊혀져갔다. 그런데 2001년, 다시 동아엘지 공모전에서 낮익은 이름, 하지만 그림의 질감은 사뭇 다른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본선진출작에 걸려있던 <난...>이라는 단편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잊을 만할 때인 2003년, <배바라기>라는 작품으로 다시한번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같은 해, 서울애니메이션 센터의 출판제작지원 대상작 명단에서 김성준이라는 이름을 발견했고, 결국 이렇게 정식 출판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앞의 두 단편을 포함한 본서 <코스모스>의 탄생배경이다.

<코스모스>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작가가 그린 7편의 단편들이 하나의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연결되어 있는 구성을 지니고 있다. 각각의 작품은 화풍이나 이야기형식, 그리고 분절성에 있어서 독립된 단편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발생한 여러 에피소드들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덕분에 독자는 시작하는 첫 에피소드에서 난데없이 4명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 속으로 던져지며, 그 주인공들만큼이나 어리둥절하고 난감해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에피소드 속에서 이들의 과거 관계를 조금씩 엿보며,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수렴된다. 이것은 분명히 매우 불친절한 방식이며, 창작자도 수용자도 편하게 뒤로 기대어 쉴 수 있는 여지를 두지 않는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하지만 동시에 쉽게 버릴 수도 없는 인연으로 서로 연결되는 두 쌍의 남녀, 그리고 그 남루한 현대남녀들의 사랑, 꿈, 환상의 담담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본작의 연출방식 역시, 친숙한 무언가를 제시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기대를 저버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견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필두로 90년대 후반 유행한, 독백조의 관념적 나레이션이라는 전통을 이어가는 듯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그러한 류의 핵심적인 특징인 ‘쿨’한 성격이라기보다는 단지 상호관계에 미숙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이 앞선다. 상황과 분위기, 인물들은 하나로 섞여들어가기보다는 마치 각각 다른 레이어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리얼한 묘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단지 환상 속의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만이 아닌 작품 전반에 걸쳐서 느껴지는 정서다. 나아가, 만화에서 무언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야기 자체의 드라마성과 화풍을 통한 정서전달이라는 측면을 볼 때, 작가가 추구한 것은 오히려 이야기 자체의 정서전달과 화풍의 드라마성으로 생각될 정도다. 다시 말하자면, 대사와 드라마 전개는 인과에 의하기 보다는 정서적 흐름에 따라서 여러 주인공들 사이를 누비고 있고, 오히려 시각적 요소들이 다양한 화풍과 상황들을 넘나들며 어떤 특정한 전개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각 에피소드별 주인공의 전환이나 소제목을 통해서 드러나는 전체 정서의 방향잡기, 만화화풍이나 이야기서술 방식의 변화에서 나타나는 흐름 역시 시간과 인과를 의도적으로  파괴해 나가며 진행된다. 속칭 실험 만화들이 시각적 파격에 대한 집착으로 흐르기 쉬운 것에 비해서, <코스모스>는 이야기 서술 자체를 파기하지 않고도 다양한 층위에서 파격을 실험하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성공적이고, 때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때로는 신선하고, 때로는 작위적이다. 하지만 그 도전정신 자체는 집요하리만큼 일관적이다. 

첫 이야기인 <올리브그린>에서 주인공인 시우, 연희, 은정, 지철은 서로 만난다. 네 명 모두의 시각에서 각각 그 만남은 묘사되며, 지난날의 이야기들이 이어질 것을 예고한다. 여기에 이어지는 <난...>에서 시우와 연희의 첫만남이 공상속의 지구파멸과 정체성의 이야기로 유머러스게(?) 묘사된다. 그리고 시간은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연희가 상징물처럼 착용하고 있는 돌고래 목걸이를 처음 줍는 것으로 시작하는 <바다가 오다>의 연희와 은정의 취중환상으로 이어진다. <꿈속의 여인>에서 지철의 성적 환타지가 앞의 이야기와 연결되며, <나의 거리>에서 은정을 향한 지철의 마음이 아예 만화의 형식을 벗어던지고 직접 묘사된다. 이 낯선 변화가 끝난 후 다시 만화로 돌아온 이야기인 <배바라기>는, 4명의 주인공을 벗어나서 한 할아버지와 손녀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건너뛰며, 연희의 돌고래가 가지는 ‘바다를 향한 탈출’이라는 자유로운 해방의 이미지와 현실에서의 비극적 결말을 내포한 상징을 완성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난교 그리고 바다>의 소설체를 통해서 결국 예정된 결말을 향해서 달려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지나간 후의 에필로그 <핑크하우스>로 이후를 열어놓으며 이렇게 작품은 완전히 끝을 맺는다.

작가의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실험정신이나 실체를 알기 쉽지 않은 –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전형적인 관념적 흐름은 앞으로 차차 풀어나아가야할 과제다. 화풍에서나 이야기에서나, 자신이 영향받아온 특정 만화나 소설, 영화 작품들의 흔적이 완전히 소화되지 않고 일부분에서 날것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도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극복해 나아가야할 부분이다. 나아가, 표현이라는 측면과 독자와의 소통이라는 측면 사이에서 가장 합리적인 균형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현실과의 타협이라기보다는 작가로서의 성장의 척도에 가깝다. 하지만 이제 막 스타트를 끊은 재능있는 신인으로서, 이번 작품이 부끄럽지 않은 데뷔작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권말의 서평에서 추구해야 할 목적은 본작을 조금이나마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도록 정보와 가이드를 제공하는 것이고, 앞에서 그 것을 충족시켜보고자 한두마디 늘어놓은 셈이 되었다. 하지만 필자의 진심은, <코스모스>의 경우 이런저런 설명들을 살펴보면서 논리적인 해답을 찾아내기 보다는 오히려 처음 볼 때의 그 거리감과 불편함을 더욱 즐겨볼 것을 바라고 있다는 쪽에 가깝다. 그것이 이야기성과 실험성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을 추구해보려고 하는, 오랜 제작기간을 들여서 만든 신인작가의 연작 작품의 매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즐기는 방식이다. 작품의 마지막 공간이 그림속에 있고, 그 공간의 그림이 다시 그림속에 있는 무한반복의 라스트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작품과 현실의 세계 사이에서 잠시 부유해보며 여운을 느껴볼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그 여운이, 작가의 다음 작품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두고보자’ 편집위원

20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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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출판된 책 속에 들어간 작품평입니다. 당연히 찬란한 주례사… 그러려니 감안하고 읽으시길;;)

여성과 만화, 만화와 여성 [부산대 문화제 강연0310]

(원 출처: 2003년 10월, 부산대학교 만화문화제 길거리 강연)

여성과 만화, 만화와 여성

김낙호 (만화연구자, 두고보자 편집위원)
여성 지향의 만화

  만화와 여성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도 100명 중 99명 정도는(실제로 물어본 적은 없지만) 꽃발 흩날리면서 등장하는 캐릭터들, 하늘하늘한 몸매의 나름대로 미남미녀라고 그린 등장인물들이 닭살스러운 대사를 읊어가면서 로맨스를 펼치는 내용의 만화책들을 상상할 것이다. 그것도, 대답하는 사람이 남자든 여자든 말이다. 하지만 꽤 구체적으로 ‘여자 만화’라는 것에 대한 고정관념이 박혀있는 것에 비해서, 실제로는 여성과 만화의 관련맺음을 이야기하기란 결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몇가지 추가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여자들은 맨날 그런 만화만 볼까?” “그런 만화들이 정말로 여성의 감수성을 대변해 줄 수 있는거냐?” “남자가 순정만화를 보면 이상하냐?”…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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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 – 강풀의 <순정만화> [으뜸과 버금 0403]

사람과 사람은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 – 강풀의 <순정만화>

김낙호 (만화연구가 / 웹진 <두고보자> 편집장)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모르겠다. 아마도 피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뜬구름 잡기만이 가능할만한, 엄청나고도 무의미한 질문이다. 하지만 질문을 살짝 바꾸어보면, 모두의 관심사로 탈바꿈한다: “사람과 사람은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 강풀이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있는 강도영의 <순정만화>는 바로 이것에 관한 따뜻한 이야기다. 

  <순정만화>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미디어 다음>에 연재중인 만화로, 이 가운데 전반부에 해당하는 20여 화가 문학세계사에서 최근 출간되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미디어다음이라는 막강한 인터넷 포탈의 힘이 아니더라도, <순정만화>는 어차피 히트를 기록했을 법하도록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들로 가득하다.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극장에서 커플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솔로들의 저주를 한몸에 받은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그 ‘어떻게’라는 과정은 다양하게 펼쳐놓는 것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재미를 준다. 그리고 그 다양한 우여곡절, 여러 인연과 사연들이 서로 연결되고 흩어지는 흐름이 결국 큰 맥락에서는 사랑이라는 큰 차원으로 공통점을 지닌다는 것을 독자들이 깨닳을 때, 더 이상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지 않고는 못배긴다. 

  하지만 누구나 알만한 이런 큰 원칙을 좋은 작품으로 소화해내는 것은, 역시 작가 자신의 능력이다. 자신의 사이트 강풀닷컴을 비롯해서 여러 온라인 만화지면을 통해서 수련된 연출호흡은 모니터 친화적이며, 동시에 인터넷 독자들의 독서 및 반응 패턴을 정확하게 맞추어주고 있다. 한 회의 연재분량은 하나의 이야기를 에피소드식으로 끊어나가며, 그 속에서 자기 완결적인 기승전결으로 사람이 만나고 사랑이 깊어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 이야기는 결코 지나치게 장황하게 나아가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방식 보다는 한 페이지 안에서 마우스를 움직여 ‘스크롤’해도 짜증나지 않을 정도의 길이를 취하고 있다. 나아가 작가는 단지 수평적인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늘어놓는 패턴에 함몰되지 않고 연속극 방식의 내용연결로 이야기의 전개를 축적하여 점점 몰입도를 높여나가는 방식을 도입했는데, 온라인 만화 특유의 짧은 호흡을 보완해나가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인 것이다. 말하다 보니 대단히 어려운 개념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힘을 잘 다루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능숙하고 잘 만든 만화라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과연 온라인 연재시에 <순정만화>를 수작의 반열에 올려주었던 여러 장점들이 하나의 단행본으로 묶여져 나올 때 과연 살아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우선, 다음 연재분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야기꾼의 힘이 다음 페이지면 다음 이야기가 있는 단행본에서도 통할 것인가. 또한 마치 가려진 부분들을 조금씩 펼쳐보는 듯한 재미를 주던 한 페이지 내에서의 스크롤 방식이, 여러 페이지로 분절된 책 속에서 과연 매력을 발할 것인가. 나아가, 모니터 화면의 저해상도 불빛에 맞추어 놓은 여유로운 컬러 그림과 경계없는 칸의 매력이 종이 위에 빽빽하게 박혀서도 그 투박한 멋을 발휘할까.
  책을 펼쳐본 결과,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 재미있었다. 이때, 필자는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가’의 기술 그 이상으로,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 자체의 힘이 강력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좋은 만화의 진정한 힘,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덕분에 필자도 이 소박한 사람들의 소박한 사랑 이야기의 다음이, 궁금해 미치겠다.
[으뜸과 버금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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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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