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FIVE – 밴드 만화의 미덕 [으뜸과 버금 0402]

TAKE FIVE- 밴드 만화의 미덕

김낙호 (두고보자 편집위원)

이야기만화에는, <드래곤볼>, <슬램덩크>등의 대형 히트작으로 대표되는 소년만화라는 커다란 장르가 있다. 주인공의 성장이라는 중심줄거리를 전개시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련과, 그것을 함께 극복하도록 돕는 동료들을 얽어넣는 공식으로 진행되는 전형적인 주류장르다. 이 장르에서 강력한 적과의 대결은 필수적이며, 동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멋진 명분이 전제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지구의 평화를 위협하는 외계의 강자들, 그리고 그것에 맞서기 위해서 뭉친 주인공과 친구 용사들… 이 결합하면 <드래곤볼>이 되는 이치인 것이다. 이처럼 지구, 나아가 전 우주를 걸고 맞짱 싸움을 벌이는 환타지물도 있지만, 만약 나름대로 현실적인 환경설정 속에서 그런 재미를 만들어 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스포츠물이 있다. 그 다음은 좀 더 원초적인 학원폭력물도 생각난다. 하지만 이미 그쪽은 너무나 많은 작품에서 써먹었고… 좀 더 특이하면서도 일상적일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곰곰이 생각한 결과, 나온 아이디어중 하나는 분명히, ‘밴드’다.

우정이라는 측면에서 먼저 볼까? 밴드는 기본적으로 팀이다. 팀웍이 밴드의 ‘힘’의 핵심이다. 게다가 각 악기파트별로 뚜렷한 개성도 있어서, 기타도 보컬도 드럼도 각각 다른 성격의 인물을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인원 역시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3-5인조 정도로 편성할 수 있다. 대결은 어떨까. 밴드 음악은 서로 겨룰 수 있다. 누가 더 연주실력이 좋은가, 더 작곡을 잘하는가, 관객을 더 감동시킬 수 있나… 경쟁이다. 그리고 심지어 대화합의 발판도 확실하다. 뜨거운 경쟁을 펼치던 실력있는 밴드들이, 결국에는 ‘음악 속에서 하나가 된다’… 얼마나 감동적인 화해의 장인가.

TAKE FIVE(유상진 작 / 학산문화사 / 현재 2권 발매중)는 이러한 지점에서 탄생한, 영화판 용어로 하자면 ‘웰메이드’ 소년 밴드만화다. 베이스를 연주하고 싶어서 부모 몰래 예고로 전학을 가버리고, 그 결과 집에서 쫒겨난 주인공 이주인은 모범적일 정도로 소년만화적인 주인공이다. 넘치는 열정, 하지만 장래에 대한 고민이 있고 아직은 실력도 그리 썩 뛰어나지 않은 캐릭터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캐릭터를 성장기도로 올려줄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짠, 하고 수상한 여주인공의 등장이 이어진다. 그리고, 더 큰 성장과 목적을 위한 밴드 결성,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어지는 밴드간 대결. 그 과정은 너무나 능숙하고 매끄러워서, 보편적인 호소력으로 다가온다.

사실 가 표방하는 ‘재즈 만화’라는 것은 그다지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뭔가 전문적인 ‘개성’으로서 소년만화에서 흔한 락보다는 특이하게도 재즈를 택한 것이고, 그 선택은 어설프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너무 매니악하지 않은 정도의 전문지식 수준 안에서 나름대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리고 적절한 유머, 적절한 과장, 적절한 고뇌, 적절한 갈등, 적절한 애정관계. 이 모든 완급이 신인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안정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특이하고 전위적인 개성은 아니지만, 좋은 주제와 좋은 연출의 웰메이드 장르만화의 미덕을 갖춘 즐거운 만화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의 진행이 마음에 들고, 앞으로의 진행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으뜸과 버금 200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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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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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살기로 한자 익히기 – 마법천자문 [으뜸과 버금 0401]

필살기로 한자 익히기  – 마법천자문
(스튜디오 시리얼 / 2003, 아울북 / 현재 2권까지 출간중)

김낙호 (만화연구자/두고보자 편집위원)

  아이들의 기억력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방금 삼십분전에 시킨 심부름이나 구구단 같은 것은 어느틈에 깨끗하게 잊어버리지만,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니 벨로시랩터니 하는 그 길고 긴 공룡 이름들은 고고 생물학자들보다도 더 줄줄 외우고 다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들이 애들은 여하튼 잘 외우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생물학 도감을 들이밀면 역효과만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몰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엄청난 집중력과 학습능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많은 이들이 들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대답은, 그렇다면 어디에 몰입하는지에 대한 것인데, 이 부분은 약간 더 어렵다(만약 확실한 답을 알고있다면, 한국땅에서는 쉽게 떼부자가 될 수 있으리라). 필자는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접근을 좋아하는지라, 그 해답은 “자기들의 생활과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들이 무슨 생활? 모르시는 말씀. 아이들의 생활은, 부모들이 폄하하는 것 이상으로 심오하고 복잡미묘하다. 서로 다른 개성과 능력에 의한 경쟁관계, 성장, 강한 것에 대한 동경, 점차 복잡미묘해지는 인간관계 등이 여과되지 않고 날것 그대로 다가오는 시기인 것이다. 그런 생활경험에 기반한 욕구들을 반영하는 환타지를 하나의 줄거리로 담아내는 작품이라면,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된다. 쉽게 말해서, <포케몬>의 히트는 단지 피카츄가 귀엽게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그 지점을 확실하게 공략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에게 뭐든지 – 심지어 한자공부라도 – 시킬 수 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진짜로 그런 책이 나오고 말았다. <마법천자문>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서유기의 주인공들을 바탕으로 하는 소년만화 스타일의 작품으로, 필살기 중심의 대결구도가 펼쳐지고 있다. 소년취향 만화의 단골소재인 필살기라는 개념은, 사용자의 개성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며 그 상성이 다르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승패결과를 조합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필살기로 한자를 사용한다면? 허공에 소(小)를 쓰면 상대가 작아진다든지, 화(火)를 쓰면 불길이 치솟는다든지, 그것을 수(水)자를 써서 물벼락으로 꺼트린다든지 하는 대결의 묘미가 생겨난다. 더 어려운 한자를 상황에 맞게 구사할 줄 아는 자가 바로 강자이며, 그러한 고수가 되는 것이 바로 성장의 척도가 된다. 악의 마왕에게 맞서기 위한 방법은 주인공의 끊임없는 수련 – 즉 한자공부다.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능숙한 장르법칙에 따라서 깔끔하게 연출되는 우정과 대결, 배신과 믿음,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성장해나가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모험. 그 모험에 동참하는 어린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같이 그 한자를 되뇌이고, 종이에 끄적거리면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이런 방식이라면 천자문이 아니라 사서삼경이라도 어느틈에 다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학습만화의 미덕은, 단순히 얼마나 좋은 정보가 많이 들어있는지가 아니다. 얼마나 대상독자들의 눈높이와 관심사에 맞는 재미를 주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배우도록 유도할 수 있는가다. 능숙하고 매끄러운 이야기, 깔끔한 화면연출, 매력적인 캐릭터 구축이라는 전통적인 만화 기반 위에, 한자마법 필살기라는 새로운 요소를 섞어넣은 <마법천자문>은, 홍은영의 <그리스/로마 신화>의 아성을 이어나갈 차세대 기대주로서 손색이 없다.
[으뜸과 버금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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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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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이유를 유머로 캐묻다: 십자군 이야기 [으뜸과버금 0312]

전쟁의 이유를 유머로 캐묻다: 십자군 이야기

김낙호(만화연구가, 두고보자 편집위원)

“독으로 독을 치유한다” –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이자, 수많은 전쟁범죄을 자행한 자의 초라한 말로가 뉴스를 타고 있는 지금 생각나는 구절이다. 현역 석유재벌인 부시라는 자가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이라는 위치를 이용해서 마음대로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사람들을 학살해도 용납이 되는 이상한 시대지만, 적어도 자기들끼리의 심오한 이해관계 충돌 덕분에 이 세상에서 독재자가 한명 쯤 줄어들었다.

전쟁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최근 출간된 <십자군 이야기>(김태권 작, 길찾기 출판사 / 전6권 예정 / 현재 1권 발매중)는, 전쟁의 이유를 직시하고 있는 교양만화다. 이 만화의 시각은 처음 몇 페이지에서 이미 명확해진다: “문명의 충돌? 문명끼리 어떻게 충돌합니까… 문명인들이라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주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충돌해야 할 어떤 필요성에 의해서 상대방을 완전히 미개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 그것이 바로 로마시대 이래로 내려온 세계의 역사라는 말이다. 무지의 씨앗을 뿌려놓을 때 사람들은 충돌과 오해의 악순환 속으로 빠져들며, 그 와중에서 어떤 세력들은 살며시 미소지으며 자기 잇속을 챙겨나간다.

<십자군 이야기>의 주된 줄거리는, 중세 서양의 십자군 전쟁의 과정의 소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초점은 전쟁의 스펙터클이 아닌, 다양한 이해관계에 대한 풍자에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속에는 현재 21세기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동방과 서방, 이슬람의 정치권력 관계의 패턴이 재현되어 있으며, 지금 TV를 틀면 화면에 나올 법한 뻔한 정치인들과 그들의 행태가 그대로 이전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뭔가 팍팍하고 계몽적인 느낌 – 다시 말하자면, “재미없는” 만화일 것이라는 걱정은 처음부터 접어놓기를 바란다. 작가가 매 순간마다 언어유희와 상황 개그를 일삼으며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오는 실력은, 마치 지금까지도 이 분야의 고전으로 남아있는 <고우영 삼국지>과 <먼나라 이웃나라>의 장점을 섞어놓은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이전에, 아마도 부시의 선조인 듯한 호전적인 나귀와, 서방과의 우호관계와 자주적 실리 사이에서 희극적인 고민을 계속하는 동방의 어떤 황제, 각자의 잇속을 위해서 경주하는 여러 기사들이 벌이는 난리판 그 자체가 이미 일류 코미디인 것이다.

의도적으로 중세 서양화 풍으로 구사된, 단순하면서도 미려한 그림은 이 작품의 또다른 미덕이다. 묘하게 왜곡되어 있는 시대를 묘하게 왜곡되어 있는 그림들의 연속으로서 연출해나가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시각적 연출 덕분에 설명 부분과 드라마 부분의 경계선이 한층 희미해지면서,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유익한 교양정보의 전달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종시에 훌륭하게 충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서 작가서문의 마지막은 한 인용구절로 끝나고 있다: “기억은 약한 자들의 마지막 무기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것이 바로 <십자군 이야기>가 개인이든 대여점이든 도서관이든, 모든 서가에 꼽혀있여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다.

[으뜸과 버금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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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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