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만에, 그냥 돌아다닌 사진 포스트. 추운 계절을 맞이하여, 여름 사진이나 좀 올려볼까 한다. 올해 여름에 한번 다녀왔던 밀워키의 독일 축제(German Fest 2006) 현장. 알사람은 알다시피 독일과 적지 않은 인연이 있는 capcold인지라, 오랜만에 고향에 놀러온듯한 분위기 속에서 해피하게 즐겼던 행사. 여튼 적지 않은 양의 사진인지라, 살포시 접고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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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돈과 나: 소비와 정체성
!@#… 돈이 개입되면 ‘나’만 보인다. 최근 ‘사이언스’ 저널 (황사기 사건, 특히 KBS 홍사훈 기자의 일급 황빠질 덕분에 한국에서 일반인들에게도 무척 유명해진 바로 그 지면)의 뉴스란에 소개된 심리학 실험 논문의 결과다.
!@#… 내용 요약하자면, 이렇다. 미네소타 대학의 Kathleen Vohs 교수와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들을 데려다놓고는 한 그룹에는 다른 과제를 주어주기 전에 돈과 관련된 사전 자극을 주었다 (돈에 관한 에세이를 읽게 하든지, 여러가지 돈이 그려진 포스터를 보게 하든지, 기타등등). 그 뒤 퍼즐 풀기 과제라든지, 설문지 등을 풀게 했다. 그 결과 사전에 돈을 떠올리게 했던 그룹의 사람들은 과제 풀이에 있어서 타인의 도움을 거부하는 경향이 더 강했으며, 타인과 대화하는 자리를 만들라고 하자 의자를 더 멀리 떨어트려 놓고, 설문지에도 혼자하는 활동들을 선호한다고 대답했다. 한마디로, 더 비사회적이 되었다는 것. 돈이 떠오르면 기를 쓰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초점이 가버린다는 결론 되겠다.
!@#… 그러고보니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유리에 은칠을 하면 거울이 된다고. 즉 돈이 개입되면 자신만 보이게 된다는 것. 동감이다. 돈이 단순히 물질적 축적의 의미에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옛날과는 다르다. 현대 사회라는 것에서 돈은 소비의 방식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부여해주는 역할까지 하니까 말이다. ‘I am what I eat’ 가 아니라, ‘I am what I spend‘다. 위의 연구는 아마도 돈과 사회성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 듯 하지만, 제멋대로 지엽적인 것에 관심가지는 capcold는 바로 이 소비에 의한 정체성이라는 측면을 떠올린다.
!@#… 원래 소위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라는 개념이 있다. 베블렌이라는 학자가 19세기 말 미국의 졸부들의 생활행태를 묘사하면서 이야기한 것으로, 그들이 소비하는 많은 것들이 생활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과시를 위한 소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생각, 하나의 다른 가설이 필요하다. 뭐랄까, 사람들은 흔히 과시의 대상을 남에게만 한정하곤 한다. 하지만 남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과시의 대상이라는 것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자기 주변의 남들과 페이스를 맞추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남들과 자신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정체성을 위해서 과시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에게도 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스스로 확인받으려는 행동이 같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현대사회에서, 부르디외의 문화취향 이론과 베블렌의 소비 개념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 활동은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다. 단지 물건이나 서비스 자체보다, 그것을 향유함으로써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라는 것이다. 커피의 맛 자체가 아니라, 비싼 아이스 후라푸치노를 먹는다고 남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벅스에 가는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언론학의 프레이밍 이론을 아주 멋드러지게 대중화시키고 있는 레이코프의 이론에서 사람들이 자기 이익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체성에 따라서 투표한다고 주장했듯, 사람들은 소비 역시 즉각적 효용보다는 정체성에 따라서 한다는 생각이다. 굳이 말하자면 스스로에 대한 과시인 셈이다.
!@#… 뭐 이런 이야기를 어디다 써먹을까. 예를 들어 마케팅. 제품의 우수성 어쩌고는 그냥 기본 전제로만 깔아야 할 따름이다. 이것을 소비하기에 바로 당신은 ‘어떤 사람’이다, 라는 접근, 바로 그런 컨셉이 명확해야 팔린다 (예: 애플의 아이팟). 단지 우수한 사람이다 잘난 사람이다라는 식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개성이 확립된다는 것. 이것을 하면 우수한 사람이라는 식의 성장지향 천민자본주의 마케팅도 물론 여러 분야에서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비슷한 레벨의 경쟁이 이루어질 경우, 또는 판이 전체적으로 망가진 경우, 또는 취향의 힘이 강력한 변수가 되는 문화산업 분야에서는 이런 정체성 소비가 한층 중요해진다.
!@#…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실 다른 곳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바로 성찰의 시스템. 남에 대한 과시라면 통제 불능이다. 사회의 성장 속도,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고 말라 죽으라고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순수학문(…-_-;)이나 성명서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과시의 경우, 성찰적 훈련을 통해서 일정 부분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발달시킬 수 있다. 즉 성찰의 인지적 훈련에 대한 단초가 되어주는 것이다. 내가 소비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소비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곧 나는 어떤 정체성을 지향하고 있으며 내가 취하고 있는 방법은 과연 합리적/효율적/심리적으로 만족스러운가라는 한층 근본적인 질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돈, 즉 소비가 지니는 역할을 부정적으로 폄하하지 않고 현대적 정체성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현대사회 속에서의 성찰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 돈은 자꾸 ‘나’를 보게 한다는 연구가 나왔다면, 돈을 ‘나’를 돌아보는 도구로 사용해보자는 발상을 파고 들어가보자는 작은 생각이다. 나중에 뭔가 자료만 잘 뽑아낼 수 있다면 논문이나 써볼까… 아마 무시당하겠지만.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A/S] 논술 근성을 키우기 위해 기억할 것들 5가지.
!@#… 공교육 이야기를 하다가 여차저차 논술의 기초 테크닉(?)을 이야기하게 된 포스팅, 약간의 애프터서비스. 덧글에 기린아님이 달아주셨다시피, 그 어떤 테크닉도 기본적인 의지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시험용 논술이든, 블로그의 자기주장 가득한 개인포스팅이든, 뉴스게시판의 개싸움이든, 혹은 진짜 프로로서의 설득적 글쓰기이든지간에 모두 마찬가지로 필요한 하나의 의지, 그것은 바로 내 주장을 납득시키고야 말겠다는 것. 즉, 아예 설득해서 감화시킬수도 있고, 혹은 완전한 입장변화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내 주장이 일리가 있으니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박아넣는 것이다. 그 뜨거운 의지가 없으면 단지 꾸역꾸역 원고 매수 채우는 것에 불과하고, 그 어떤 화려한 논법이라도 테크닉이 구심점을 잃고 은하계를 헤맨다. 그런데 그 의지 – 즉 어떻게든 납득을 시키겠다는 근성도 다른 모든 능력치와 마찬가지로 타고난 재능 + 수련의 결과다. 재능 부분은 뭐 어쩔 수 없고, 논술 근성을 쌓아올리는 방법을 이야기해보자면… 뭐, 근성의 중요성을 항상 인식하고 자신의 근성을 최대한 발휘해보는 방향으로 연습을 할 수 밖에. 하지만 구체적인 트레이닝 스케쥴 같은 것은 온라인 학원이라도 차리기 전까지는 생각없고, 여기서는 그냥 “논술 근성을 키우기 위해 기억할 것들 5가지“.
1. 근성은 읽는 이의 눈에는 잘만 보인다. 근성은 마음 속에 있고, 보이는 것은 테크닉이나 글이라는 식의 생각은 금물이다. 의지는 눈에 보인다. 여느 고등학교 수업을 떠올려보라. 누구나 선생이 별로 교재에서 많이 벗어나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데 이상하게 수업내용이 머리에 안들어오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그 때, “저 자식, 가르칠 마음이 없구나”라고 본능적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당신이 근성이 부족한 논설문을 쓰면, 글을 읽는 사람 역시 당신의 글을 보며 “이 자식, 나를 납득시킬 마음이 없구나”라고 판단내린다. 그게 딱 어떤 부분이다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의지’는 모든 문장, 모든 단어, 모든 논법, 모든 사고방식 속에 복합적으로 미묘하게 들어가기 때문이다. 쓰는 사람의 눈에는 그게 잘 안보인다. 하지만 읽는 사람은 글과 의지를 함께 읽어낸다. 그래서 근성을 배양하기 위한 첫번째 요소는 바로 근성은 눈에 보인다는 깨달음 그 자체다. 기의 존재를 믿지 않고 내공수련을 할 수 없듯이 말이다.
2. 무리한 도전은 기본이다. 비단 논술 근성 뿐만 아니라 모든 열혈의 핵심은 무리한 도전의 반복을 통한 지옥훈련이다. 논술 근성 수련을 위한 무리한 도전에 해당되는 것은 바로 자신이 별로 생각해본적 없는 복잡한 세상사의 이슈에 대한 자기 의견을 갖추어 보기. 정보를 모으고 끝이 아니라, 의견을 모아보고 끝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입장을 가져보는 것이다. 내 생활과 동떨어져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것, 너무나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져서 별 입장이고 자시고 없을 것 같은 것,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해서 아무도 어차피 해답이 없을 듯 한 것 등 어디로보나 “나에게는 무리”인 듯한 이슈에 대해서 자신의 확고한 입장을 만들어보라. 양비론 양시론 그런 것 말고, “바로 이렇게 해야한다”라는 진짜 입장. 그 과정에서 당연히 무수히 스스로 질문을 할 것이다. “왜?”. 최선을 다해서 스스로 대답하라. 스스로 납득한 바, 그것이 바로 ‘입장’이다. 그런 무리한 수련을 계속 하다보면, 어떤 이슈든지 간에 매사를 바라보는 자신의 입장의 일관된 틀이 생겨날 것이다. “내가 잘먹고 잘사는 게 장땡이다”라든지, “세계평화가 최우선이다”라든지 뭐든지 말이다. 자기 입장이 있어야, 그리고 그것이 확고할 수록 입장을 지키고자, 타인에게 납득시키고자 노력하게 된다.
3. 설득은 항상 실전이다. 이것은 연습 설득이고, 다른 기회에 제대로 된 설득을 해볼꺼야, 라고 건방떨지 말자. 머리 속에만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 설득에 연습 따위는 없다. 그냥 덜 정제된 설득과, 세련된 설득이 있을 뿐이다. 블로그에 끄적거린 것이나 논술시험 답안으로 쓴 것이나 책으로 출판하는 것이나, 모두 독자와의 승부다. 매 순간 각각의 지면, 각각의 독자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논술 근성을 수련하고 싶다면, 자신의 모든 설득적 글쓰기 행위 – 그것이 신화와 동방신기 간의 선호에 대한 잡문이라 할지라도 – 를 실전으로 받아들여라.
4.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아라. 입장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자료라도 동원하라. 무조건 많이 동원하라는 것은 물론 아니고 (그런 걸 누가 읽겠나), 도구에 제한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내 입장의 전파에 도움이 되는 구석이다면 나와 정반대 입장에 있는 자들의 논리든, 동네 유치원생의 순박한 주장이든 얼마든지 끌어들여라.
5. 합리적 근거에 따라 의견을 수정하는 것이 대인이다. 확고한 입장이라고 해서, 바꾸지 말아야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자신의 입장과 다른 충분히 합리적인 근거가 나온다면, 망설이지 말고 수용하라. 그리고 그렇게 수정된 내용으로 또다시 확고한 입장을 다져라. ‘확고한 입장’이라는 것은 매사에 뚜렷한 판단을 거부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로 쓰일 때에나 중요한 것이다. 근거가 뻔히 나와있는데도 똥고집을 부린다면 그것은 새로운 맥락에 따른 판단을 거부하고 가만히 앉아있겠다는 바보짓일 뿐이다.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소인배들이나 할 짓이다. 자신의 과거 입장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면 나는 끝장이라는 식의 두려움에 벌벌 떨며 아집의 방벽을 쌓아올리는 송사리들은 그 어느 누구도 납득시키지 못한다 (잡배들끼리 자신들만의 폐쇄적인 자위 네트워크를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수정하는 것이 줏대 없는 것이 아니라, 수정 못하는 것이 쫌스러운 것이다. 얼마든지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수정할 수 있는 강철같은 열린 사고를 연마하라.
!@#… 이런 식으로 해서 누구든 성공사례가 나오면 필히 알려주시길. 뭐, 이것도 나름대로 야매처방이니까.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논술 쌩쑈 단상 + 논술을 위한 5가지 팁
!@#… 논술쌩쑈의 뜨거운 불길이, 수능이 끝나자 한층 더 후끈하다. 누구나 말로는 떠들고 있듯, 필요한 것은 모범답안을 따라잡는 훈련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만드는 훈련인데… 판박이 답안을 쓰지 않도록 가이드해준다는 책조차 결국 모범답안을 열심히 정리해서 던져주고 있는 판.
여튼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기사, 서강대 논술에서 3700명 가운데 2000명이 학원의 모범답안을 쫒다가 피봤다는 소식. 사람들의 상상력이 어쩌네 하기 전에, 그렇게 실력없는 학원강사들에게 돈을 꼴아박아넣는다는 것 자체부터가 안습이라서 잠시 웃음. 세상에, 양시론을 모범답안이랍시고 내놓다니… 쌍팔년도인가. 근거에 기반한 자기 관점 주장과 타 관점 비판, 그리고 토론과 의견 수정을 위한 열린 자세가 논술은 물론, 대부분의 주장형 글질 행위의 핵심인데 말이다. 기사에 같이 소개된 성균관대 문제의 아도르노의 하위문화 관련 주제는 왠만한 명문대생들이나 대학원생들도 비틀거릴 문제이긴 하지만, 여튼 학원강사의 ‘모범’답안이 너무나 가관이다. 클래식 공연 많이가니까 고급문화의 힘이 어쩌고… 이 사람들, 정말이지 공부 안하고 그냥 날로 먹고 살았구나. 하위문화를 받아들임에 있어서의 주체성과 피동성을 논하라는 문제지, 클래식 가니까 나도 고급이야 라는 70년대틱한 대중/고급의 얄팍한 구분이 아니라고. 그 고연봉 강남 학원강사라는 사람들이 실력이 그따구로 개판일 줄이야. 덕분에 누구나 황금어장 논술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듯 하니(논술학원의 돈을 받아서 운영하면서도 입시논술을 거부하는 듯한 이미지를 취한다든지), 이번 기회에 capcold도 온라인 논술과외 학원이나 열어서 돈벌이나 좀 해볼까 심각하게 고민중.
!@#… 그런데 솔직히, 이미 입시과정을 뒤로 한지 오래 지난 capcold로서는 입시논술이 어쩌느니 하는 것은 심정적으로는 별반 관심없다. 오히려 관심 있는 것은 그 과정을 거쳐온 사람들이 그 따위 교육밖에 못받고는, 엘리트니 지식인이니 하면서 나중에 이 사회의 담론과 지식을 한껏 개판으로 만들어버릴 것에 대한 공포다. 이 세대 이전에도 그런 자의식 과잉의 바보들이 항상 넘쳐났기 때문에 어찌보면 별반 차이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황우석 사기 사건 당시 화려하게 망가진 수많은 ‘지식인’들과 일반인들을 기억해보자), 스스로를 ‘논리’로 포장하고 바보짓을 해서 그럴듯하게 보이기까지 한다면 더 큰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별반 입시에 직접 관여된 것도 아니지만 공교육을 걱정할 수 밖에.
!@#… 사실 모범답안 따라잡기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만들고 관철시키기 위해서 결국 필요한 것은 세상을 보는 안목인데, 그것은 결국 세상의 다른 아이디어들과 균형을 맞춰가며 자신의 의지를 끌고 나가는 능력이다. 그것을 ‘육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다양한 종류의 아이들을 한 공간에서 생활하게 만들며 여러 종류의 다양한 해결과제를 주고 서로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게 만드는 훈련뿐. 아하, 바로 공교육의 학교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영역인데도 불구하고 손을 놓아버린지 오래인 바로 그 부분이다. 학교가 개인의 학력발전을 해준답시고 꼴깝치면 당연히 될리도 없고, 사교육과 경쟁도 될리가 있나. 학교에서 전인적 인격교육을 해야겠다고? 바랄 것을 바래라. 아니면 학교와 보육원을 하나로 합쳐서 부모 역할까지 다 하든지. 즉, 공교육 학교에서 해야하는 것이자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다양한 사회장면의 의도적 연출이다. 그 사회 장면 속의 상황들에 대해서, 지식 공급이 뒷받침해주는 합리적 해결과 발전방식을 최대한 체험시켜주는 것. 그리고 그 체험이 바로 애초부터 논술의 가장 확실한 대비책이었을 터이다. 논리 교육이나 얄팍한 지식 몇줄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회가 돌아가는 패턴에 대한 경험치로 인한 식견이 바로 논술의 진짜 핵심 실력이다. 게다가 무슨 입시 시험 논술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 살아나가는 방식의 핵심이기도 하고.
다시 말해, 공교육이 정상적이고 고등한 ‘교육’으로 돌아갈 수 있는 황금의 기회인 ‘논술’의 진짜 열쇠는 애초부터 학교가 가지고 있었는데, 그냥 놓고 방치한 것 뿐이다. 94년 수능과 함께 첫 도입된 이후 12년이나 그냥 교육붕괴니 어쩌니 칭얼거리기만 한거다. 그동안 별 이상한 약장수들이 이거만 하면 만점이다 라고 야매 처방으로 사교육 시장을 부풀렸고.
!@#… 뭐 그런데 이제와서 싸그리 바꾸라고 한다고 해서 바뀔 교육계도 아니고, 여기가 뭐 대단한 영향력이 넘치는 지면도 아니지. 게다가 당장 시험은 봐야해서 발등이 불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학교교육의 본질이니 어쩌니 운운하는 것도 웃기고. 그저, 아직도 논술시험이 학교교육을 망친다느니, 학교는 전인교육을 행해야 한다느니, 사교육과의 경쟁력을 키우자느니 하는 식으로 엉뚱한 방향의 삽질을 거듭하는 교육공무원들이 그냥 이런 가장 근본적인 발상부터 좀 다시 점검하고 갔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 뿐.
!@#… 그래도 뭐 대충 패배주의적으로 이야기를 끝내기는 아쉬우니, 그냥 당장 논술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부록으로 간단한 조언 5가지만.
[부록] 논술: 논리고 뭐고 다 좋은데 이것 5가지는 기억하라
1) 양시론 양비론은 완벽한 뻘타다. 균형을 이루라느니 하면서 끝나면 모범답안 외웠어요 하는 티가 풀풀 난다. 부탁인데, “너의 의견은 확실히 알고 있지만 역시 나는 이런이런 이유로 인하여 이쪽을 밀겠다” 로 가라. 실생활에서도 그래야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고 수정하고 발전이 있다. 논술은 설명문이 아닌 논설문이다. 균형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장을 합리적으로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주장이 없으면 쓸 필요도 볼 필요도 없다. “그러니까 ** 하자”라고 마지막에 던져 줄 수 없다면 이미 실패한 답안이다. 채점자는 당신의 사상따위 관심 없다. 주장의 합리성만 관심있을 뿐.
2) 주장을 위해서 들어주는 사례는, 확실히 아는 것으로 들어라. 제발 잘 이해도 못한 명언 인용하지 말고, 관념적 개념 마구 끌어써서 부도수표내지 말고. 그냥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주변의 사례 또는 자기 전문 분야에서 의미를 끌어내라. 국가간 힘의 균형과 조화의 필요성에 대해서 논해야 할 때, 괜히 알지도 못하는 국제정세 요약본 외워서 쓰는 것 보다 차라리 스타크의 계열별 상극관계에서 적절한 비유를 찾아내는 것이 핵심을 찌를 수 있다. “이 게임이 큰 인기를 끈 것은 그만큼 현대 사회의 실제 권력관계를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이런 비유적 사례가 전체를 바라보기 위한 큰 통찰을 제공하곤 한다” 라는 식으로 잘 수습만 한다면.
3) 모범답안에 나온 사례는 처음부터 피하라. 아마 그 책을 사본 사람들, 그 선생에게 과외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대로 쓸 것이다. 물론 이 충고를 보고 다른 모두들 모범답안을 피해서, 하필 답안 그대로 쓴 당신만 남을 수도 있지만… 그 정도 운이라면 차라리 로또를 사라.
4) 키워드, 혹은 키 문장을 잘 뽑아라. 그것이 당신 생각의 핵심이다. 그 한 두 문장 한 두 단어로 전체 글의 이미지를 요약한 엑기스가 있기 때문에 비로소 상대방은 당신의 장문을 읽고 뭔가 이해했다는 만족감을 표할 수 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이후에 이어질 내용들을 읽을 동기를 부여해주기도 한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이 하나의 키 문장 덕분에 백여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당 선언문은 물론, 그 미칠듯이 길고 난해한 자본론까지도 읽었다.
5) 팩트와 추측과 주장은 구분하라. 합리적 판단의 기본이 실제 드러난 ‘팩트’, 팩트가 좀 군데군데 비어서 자기 머리 속에서 적당히 전체 상을 그려본 ‘추측’, 그리고 모든 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정말로 관철시키고 싶은 의지인 ‘주장’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추측을 팩트로 착각하지 말고, 추측을 주장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예를 들어보자. 박철수는 고병희랑 잤다 (팩트) -> 뱃속 아기의 아빠는 철수일 것이다 (추측) -> 철수는 병희를 책임져라 (주장). 여기서 추측과 팩트를 혼동하면서 벌어지는 오만 소동이 어떤 것들인지, 추측 자체가 애초부터 틀릴 경우 주장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지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드라마 ‘여** 뭐**’를 다시보기 누르시길. 앞서 말했듯 논술의 최종목적은 결국 ‘주장’을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한 합리적 기반이란 바로 충분한 ‘팩트’, 그리고 팩트관계를 지나치게 넘겨짚지 않으며 동시에 자기 한계를 명확하게 제시하는 ‘추측’이다. 어차피 완성본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지만, 주장에 눈이 어두워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혼동하면 뭉개진다. 조선일보다.
6) 처음에 다섯가지만 기억하라고 말했다. 그래놓고는 여섯번째를 이야기하면 꽝이다. 논술을 쓸 때, 처음에 다루겠다고 제시한 것 이외의 것들을 뒤에 자꾸자꾸 이어붙이지 말자. 전체논지가 사정없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 아무 생각없이 막 쓰고 있는 것이 곧바로 들통난다. 무슨 무한연속 TV드라마도 아니고.
!@#… 수험생분들, 여하튼 굳럭. 많이 필요할 테니까.
— Copyleft 2006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할로윈, 2006 위스콘신 매디슨.
!@#… 10월 말일은 할로윈. 원래 있던 토착 축제에 기독교적 의미를 뒤집어씌우고, 그러다가 서로 섞인 새 풍습이 되었다가는 결국 현대에 들어서 자본의 힘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또다른 명절 되시겠다 (이 패턴, 크리스마스와 완벽하게 붕어빵이다).
!@#… 좀 더 자세히 들어가자면 ‘여름의 마지막날’에 죽은 자들의 혼이 돌아와서 영계와 인간계가 연결된다는 켈트족 축제 사우인(Samhein)이 그 원류. 그래서 이날은 영적 존재들에게 해코지 당하지 않으려고 – 예를 들어, 죽은 자의 혼이 산 자의 몸을 빼앗아간다든지 – 사람들도 각종 영적 존재로 분장을 하며 뻑쩍지근하게 모닥불질 장난질 축제질을 했다. 이런 강력한 집결의식이 있는 날을 기독교 컨셉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가 만성절(All Saints Day = All Hollows’ Day)를 5월 13일에서 11월 1일로 과감하게 이전. 그렇게 해서 “너희들이 축제하고 있는 건 바로 만성절 이브를 기뻐하기 위하여 그러고 있는 거란다” 라고 의미부여를 하려고 한 것. 그래서 사우인이 Hollows’ Eve, 즉 Halloween이 되어버린 것. 아무거나 붙인 것은 물론 아니고, 만성절 자체가 문자 그대로 기독교의 모든 성인들을 한꺼번에 기리자는 날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우인과 섞일 수 있던 것이다. 즉 죽은 성자들을 기린다는 것이 죽은 자들의 축제일과 잘 맞아떨어진 셈.
!@#… 뭐 그러다가 할로윈 풍습은 1800년대 후반 아일랜드 이민들의 미국유입과 함께 대박을 쳤다. 게다가 애들이 동네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 얻어오는 전통 풍습이 1930년대경 부터 ‘Trick-or-Treat’ 로 완성되어 일대 히트 기록. 사악한 영적 존재로 분장한 아이들이 문을 두들기며 “해코지당할래, 아니면 뭔가 대접해줄래?” 라고 집주인에게 선택권을 주면, 집주인은 사탕을 대접해주는 패턴. 영적 존재로부터 자기 집안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액땜 의식이자, 모든 집안이 애들 대접용 사탕과 과자를 사들이기 때문에 제과업계에게도 대박 시즌. 또 집집마다 큰 호박을 파내서 얼굴을 새겨넣고 그 안에 불을 붙이는 잭오랜턴 풍습 역시 농가를 기쁘게 했고 말이다(이것도 원래 아일랜드에서는 ‘무’였는데, 미국에 와서 호박이 되었다). 게다가 건전무쌍한 가족사랑 어쩌고 하는 크리스마스와는 달리 친구들끼리 어울려서 마음껏 어둠의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컨셉인만큼, 공포 영화, 락공연행사, 길거리 축제, 술판과 심야 분장 이벤트 등이 발달했다. 즉, 유흥문화로서의 시장성도 출중.
!@#… 여하튼 이 모든 것의 박자가 잘 맞아떨어지니 할로윈은 가장 미국적인 명절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고, 또 미국의 상업문화를 열렬히 동경하며 벤치마킹하기로 유명한 어떤 나라에서도 열심히 이식해서 대목 한번 잡으려고 무척 노력하는 중. 명절마다 차례를 지내고 기일마다 제사를 지냄으로써 혼백과 인사를 나누는 곳이라서 할로윈의 원래 기능은 완벽하게 무용지물이고, 괴기물을 통한 반문화의 축제 전통이 없기에 할로윈의 이미지가 상업성이 떨어지며, 무개념초딩들이 아파트 단지에서 주루룩 문두들기며 트릭오어트릿 다니는 광경이 상상만 해도 공포스러운 곳에서 오로지 미국식 가면파티에 대한 동경만으로 할로윈 마케팅질을 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현명한 짓거리인지 심히 의심스럽지만… 뭐 나름대로 생각들이 있으니 그러겠지 하고 과감히 넘어가자. 스타벅스에 가면 된장녀 어쩌고 비난짓거리에는 마음껏 열올리면서, 멀끔하게 생긴 기업들이 대놓고 할로윈 설레발치는 것에 대해서는 그러려니 하는 모습이 심히 바보같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뭐 그냥 패스. 세상에는 그딴 것들보다 중요한 것들 투성이니까.
!@#… 어쩌다가 할로윈의 기원에 대해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했는데, 사실 원래 쓰려던 것은 그냥 올해 할로윈은 이렇게 보냈다는 시시껄렁한 개인 소식 포스트. -_-; 할로윈 축제 화끈하게 놀기 좋아하기로 유명한 매디슨이다 보니 뭔가 한마디 남겨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뭐 그냥 평범하게 미리 호박 좀 파고, 주말 저녁에 길거리 축제 구경 좀 가고, 화요일이었던 할로윈 당일에는 락콘서트 관람 정도. 뭐 별일 없었지만 그냥 궁금하면 클릭.
북핵, 햇볕정책, 외교의 조건.
!@#… c동호회에서, 최근 북핵문제와 관련해서 햇볕정책에 대한 회의감을 올리신 분의 포스트에 달아 놓은 댓글. 쓰다보니 길어져서 그냥 다시 쓰지 않고 여기에 그대로 퍼옴. 여하튼 내용상으로는 이전 글과 한 세트.
[re] 외교의 조건.
!@#… 외교에서 채찍과 당근이라는 것은 편의상의 비유일 뿐이고, 실제로는 ‘당근‘과 ‘당근 중단‘입니다. 물론 무력침공이라는 채찍이 존재하지만, 그것 이외의 모든 수단이라는 것은 애초에 주어왔던 혜택을 박탈하는 형식으로 밖에 할 수 없죠. 즉 당근으로 중독시키고 의존을 시킨 후 – 즉 국제 질서의 일원으로 타국과의 교역과 외교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후 – 문제를 일으키면 그것을 중단시키겠다고 위협하는 것. 그런데, 북한에 대해서는 아직 중독시키기에 충분한 당근이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북한과 중국은 외교가 아주 약간은 성립됩니다. 여하튼 의존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남한이 햇볕정책의 확실한 성과를 거두고 싶다면, 하다못해 중국보다는 더 많이 지원해주지 않으면 택도 없습니다… OTL 아니면 제2의, 제3의 금강산 특별 관광구역을 자꾸 늘려나가거나. 물론 남한이 지금 대북 물자를 끊으면 좀 더 나라살림이 궁해지기는 하겠고, 수십만명이 더 주린 배를 쥐고 쓰러지기는 할 겁니다. 하지만 남한과의 고리를 잃고 싶지 않아서 무언가 큰 대가를 내놓을 정도로 아쉽지는 않은거죠. 즉 도저히 ‘외교’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상황입니다.
!@#… 그런데, 북한정권도 외교 루트를 원하기는 합니다. 다만 상대들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그들 사이에서 체제를 보장받겠다는 정말 골때리는 순진무구한 발상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게 문제죠. 그렇기 때문에 결국 자기 골방에 틀어박히고 대인관계를 기피하는 주제에 ‘나 사실 큰일낼 수 있는 놈이야’라고 떠벌리는 것으로 자기 존재를 설파할 수 밖에 없는 악성 히키코모리 같은 짓거리에 심취하는 것. 관계는 싫지만 인정은 받고싶다는 그 모순된 목표가 국가 단위로 나타날 때, 이런 멍청한 짓이 일어나버린 것이죠. 그런 국가단위 히키코모리를 어떻게 갱생시킬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 “두들겨 패서 억지로 끌고 나온다” 라는 극단적 방법 말고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해야하는 것이 다시금 남한의 입장입니다. 방에 처박혀서 동네망신 다 시키는 그 히키코모리가 비록 50년 넘게 웬수처럼 지내왔어도 여하튼 형제니까요. 힘들어도 조금씩 사람들과 관계하게 함으로써 한걸음씩 방에서 끄집어 낸다, 가 제가 생각하기에는 여전히 모범답안입니다.
!@#… 햇볕정책은 그 자체로는 북한 정권을 뒤엎으려는 것도, 영속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좀 더 외교적 루트와 방법론으로 협상 가능한 상대로 만들어내는 기본 중의 기본 토대 만들기 과정이죠.
PS.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껏 통치의 미명하에 반인륜적 짓거리를 일삼아온 정권 범죄자들을 무사방면해주는 것은 제 정의 개념에는 크게 벗어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정상적인 외교의 틀 안에서 하나씩 압박을 넣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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